전통문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망국적인 동서 당쟁

당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은 오늘날의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었다.

전라좌수영은 순천, 보성, 낙안, 광양, 흥양 등 5관과 사도, 방답, 여도, 녹도, 발포 등 5포를 관할하고 있었다.

남해안 방어의 중책을 맡은 이순신(李舜臣)은 다가올 전쟁을 예견하고 방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장차 일본의 침략이 틀림없이 있을 것으로 미리 내다본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국왕 선조를 비롯하여 무능한 조정 대신과 장수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쓸모없는 당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내를 순시하고 군선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고 무기를 손질했다. 그리고 열심히 수군을 훈련시켰다.

그런데 조정은 아직도 어이없게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야기하며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 임진왜란(壬辰倭亂) 1년 전의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의 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선조(宣祖)는 조선왕조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라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왕권 안보와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다 싶으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또 선조는 도량이 좁은 임금이었다. 방계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이 작용한 탓인지 타고난 성격이 그런지 시기심과 의심이 많고 고집도 셌다.

선조의 의심 많고 시기심 많은 피곤한 성격 때문에 이순신도 나중에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두번째 백의종군을 했던 것이다.

선조는 집권 기간 내내 수많은 신하를 내치거나 죽였으며, 그것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요 최고 권력자인 자신의 책임이 가장 무거운 임진왜란, 유비무환(有備無患)이 불러온 전대미문의 참화인 임진왜란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이 그처럼 극단덕으로 감정에 좌우된 처사를 보이자 신하들이 국정에 임하는 자세는 서로 파당을 만들어 상대방을 시기하고 질시하고 대립하는 양상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전에 훈구파와 사람파로 나뉘어 싸우던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본격적인 당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1572년의 일이었다.

심의겸(沈義謙)은 명종(明宗)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오라비였다. 그는 외척이면서도 사림파를 구하기 위해 애썼고, 그 뒤에도 많은 사림 인사가 등용되는데 힘을 써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즉위한 이후 신진 사림에서는 심의겸의 그러한 공로를 별로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심의겸도 일개 척신이요 타도의 대상인 구세력에 불과했다.

이 심의겸과 김효원(金孝元)이 전랑(銓郞)의 자리를 둘러싼 대립에서 동서 당쟁이 비롯되었다.

전랑이란 문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이조정랑(吏曹正郎)과 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병조정랑(兵曹正郎)을 통칭한 것이다. 정랑은 정5품으로 오늘의 과장급에 불과하지만 관리를 천거하고 전형하는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기에 장관, 차관인 판서(判書), 참판(參判)은 물론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등 3정승도 간여할 수 없는 요직이었다.

그해 2월에 이조정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천거하자 이에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섬으로서 문제는 불거졌다.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선 이유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명종 때에 심의겸이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다가 김효원을 본 적이 있어서 그를 권신의 집이나 찾아다니던 소인배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로서 처가살이를 하던 이조민을 만나러 갔을 뿐이었다.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지 못해 심의겸에 대한 악감정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데 2년 뒤인 1574년에 김효원이 마침내 이조정랑이 되었고, 그는 사림파의 성원을 업고 심의겸을 공격했다. 설상가상으로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沈忠謙)이 거론되자 김효원은 “전랑이 외척 집 물건도 아닌데 어찌하여 심씨 문중에서 차지하려 드는가.”라고 비난하고 다녔다. 양측의 갈등은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때 이율곡(李栗谷)이 나서서 중재안을 내놓았다. 심의겸을 개성유수(開城留守), 김효원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삼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심의겸은 가까운 개성으로 가는데 김효원은 어찌하여 먼 함경도 경흥으로 쫓겨가야 하는가.”하는 반발에 부딫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심해져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이란 신진 사류를 대표하는 김효원이 종로구 건천동에 살았기에 동인이라 한 것이고, 서인이란 당시 구세력을 대표하는 심의겸이 서쪽인 정릉에 살았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동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생들이 많았고, 서인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제자가 많았다. 이 동인과 서인 양당은 뒷날 정권을 장악한 동인이 다시 온건파 남인과 강경파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바로 사색당쟁(四色黨爭)이라고 하는 것이다.

동서 분당 직후 조정에는 서인이 다수를 차지했으나 중도파로서 서인 쪽에 더 가깝던 이율곡이 죽고 서인의 강경론자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낙마하자 정권은 동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다가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져 조정은 다시 서인 천하로 기울었다가 정철이 실각하자 또다시 동인에게 정권이 돌아가는 등 정국은 쉴 새 없이 엎치락뒤치락 했다.

그렇게 해서 임진왜란 직전은 물론 전란(戰亂) 중과 전후에도 조선 조정은 망국적인 당쟁으로 나날과 다달이 흐르는 줄도 모르는 지경이었고, 동인인 유성룡 등과 가깝던 이순신도 동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끊임없이 서인의 중상과 모략을 당했던 것이다.

◆ 히데요시의 망상과 전쟁준비

그러면 이번에는 일본의 사정을 보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죽은 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막을 내리고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큐슈 정벌에 나선 것은 1587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키기 5년 전이었다. 그해 3월에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일으켜 그때까지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는 큐슈[九州]를 침공했다. 그러자 큐슈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맥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큐슈 원정은 조선 침공을 앞둔 대규모 기동훈련이 된 셈이었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치고 나아가 명나라까지 정복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욕은 단순한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권력을 대대손손 물려주겠다는 속셈도 작용했다. 그리고 오랜 내전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군사력, 그것도 문제였다. 어딘가로 분출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어느 야심가가 군사를 일으켜 또다시 내전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야심가가 나오지 않더라고 저마다 칼을 찬 수십만 무사 집단이 하루아침에 백수건달이 되어 나라 안 곳곳을 휩쓸고 다니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 막강한 군사력을 그대로 두었다가 또 다시 내전이 벌어진다면, 그나마 허약한 치안이 무너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독재 권력이 언제까지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히데요시는 시선을 해외로 돌렸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과 명나라 정복이라는 터무니없는 야욕을 실천에 옮기려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해 9월에는 큐슈 정벌의 선봉장이었던 심복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자신의 친서를 조선에 전하도록 명령했다. 유키나가는 사돈인 쓰시마[對馬島]의 도주(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로 하여금 다치바나 야스시로[橘康廣]를 조선에 파견토록 했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사신이지만 조선의 실정을 정탐하는 밀정의 임무까지 띠고 조선에 들어온 야스시로는 일본이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보냈다는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여 장차 중국을 정복하려 한다는 사실 등을 알려주고, 조선은 빨리 일본과 수교하라고 했다.

야스시로가 이처럼 얼핏 보기에 양다리를 걸친 듯이 행동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만일 히데요시의 야욕대로 일본과 조선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사이에 낀 쓰시마가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볼 것이 분명했기 대문이었다.

히데요시의 1차 사절단 파견에 대해 조선 조정은 “일본으로 가는 물길이 어두워 사신을 보낼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어 통신사 파견을 거부했다. 야스시로는 객관으로 돌아가 탄식하면서 조선 통역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전한다.

”너희 나라는 장차 망할 것이다. 이미 기강이 허물어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미 침략전(侵略戰)의 구상을 구체화시키고 있던 히데요시가 그대로 물러설 턱이 없었다. 그는 1589년에 2차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번에는 조선 국왕을 일본에 입조시키라는 황당무계한 요구까지 들려서 보냈다. 이번의 사절단장은 죽은 아비 요시시게 대신 쓰시마 도주가 된 소 요시토모[宗義智]였다. 요시토모는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과 승려 겐소[玄蘇] 등을 데리고 부산포에 상륙했다.

하지만 요시토모는 도저히 히데요시의 요구를 그대로 조선 조정에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미친 소리를 꺼냈다가는 조선 조정의 분노만 살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산포에 머물며 조선통신사의 파견만 요구했다. 이마저 들어주지 않자 그들은 일단 쓰시마로 돌아갔다가 다시 부산포로 건너왔다. 그리고 재차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전에 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을 하다가 일본으로 도망친 한국인들을 잡아서 보내라고 했다. 이에 요시토모는 부하들을 쓰시마로 보내 한국인 10여명을 잡아다가 조선에 바쳤다.

◆ 당파에 따라 다른 귀국보고

조정에서 논란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 것은 1590년 3월이었다. 조선통신사의 정사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윤길(黃允吉), 부사는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은 전적(典籍) 허성(許筬), 수행 무관은 황진(黃進)이었다.

이들은 그해 7월에 교토[京都]에 도착했으나 11월에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 국서를 전달하고 다시 일본의 국서를 받아 1년 만인 이듬해 3월에야 귀국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임명된 다음 달이었다.

그런데 나라의 운명이 달린 중대한 사행(使行)길이었지만 여기에도 당쟁의 폐해가 뒤따랐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서인인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보고서를 올려 일본의 정세를 보고하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선조가 일본의 사정을 묻지 황윤길은 “수길(秀吉)의 눈빛이 빛나고, 일본이 군선을 준비하고 있으니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수길의 눈이 쥐눈과 같고, 신(臣)은 그러한 징조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하고 상반된 보고를 했다. 김성일은 나아가 “황윤길이 백성을 동요시키는 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같은 동인인 좌의정 유성룡이 그래도 미심쩍어 나중에 김성일에게 물었다.

”그대가 황윤길과 다르게 말하는데 그러다가 만일 왜(倭)가 쳐들어오면 어쩌려는가?”

그러자 김성일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어지 왜(倭)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이들과 같은 동인인 허성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했고, 황진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결국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주변 정세에 눈멀고 무사안일에 빠진 조정은 이 문제를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더욱 통탄스러운 노릇은 이들이 가지고 온 히데요시의 서신 중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는 구절에 들어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했으니 참으로 나라가 망하기로 작정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눈앞에 닥 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그토록 무지하고 무능했던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나 이순신(李舜臣), 한석봉(韓石峰)과 같이 장차 전쟁이 있을 것을 내다본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전에 이율곡(李栗谷)이 살아 있을 때에 이른바 “십만양병설(十萬良兵說)”을 주장한 것도 휴정이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을 시켜 이율곡에게 전하도록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 조정도 마냥 나 몰라라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벌어졌다. 통신사가 돌아온 지 한 달 뒤에 3차 일본 사절단이 파견되었는데, 서울로 들어온 그들은 “명나라를 치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고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었다. 상국(上國)으로 받드는 명나라를 걸고 나오니 이제는 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조정은 그해 7월에 김응남(金應男)을 명나라에 보내 이런 사실과 더불어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일본의 침략을 방비한다면서 김수(金粹)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정비토록 했다. 또 당대의 명장이라고 알려진 신립(申砬)을 경기도, 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도, 전라도에 각각 급파하여 방어시설을 점검토록 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 임진왜란 초전의 정황이 여실히 증명했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당시 좌의정(左議政)으로 있던 유성룡(柳成龍)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지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은 방어전술에 관한 것인데 육전과 수전의 요령 각종 화포의 사용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엇다.

이 책의 사본을 받은 이순신은 밤을 새워 읽어본 뒤 감탄했다고 전한다.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년(壬辰年) 3월 5일자에 이렇게 나온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군관들은 활쏘기를 했다. 저물어서 상경했던 진무가 돌아왔는데,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이 책을 보니 수전, 육전, 화공전 등에 관한 일을 하나하나 논의한 것인데, 만고에 신기한 저술이었다.”

그러나 망조는 또 있었다. 전에 사신으로 왔던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이 부산으로 번너와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일본의 수십만 대군이 지금 나고야성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초 공격일이 3월 1일이었는데 4월로 연기되었습니다. 이제 조선이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통상을 중재하든지, 길을 빌려주든지 선택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송상현은 이를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지만 ”무늬만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가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아무도 이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고, 야나가와 초신은 그대로 쓰시마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예정대로 임진왜란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不敗の名将李舜臣(李舜臣)」3.秀吉の野慾 (1)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망국적인 동서 당쟁

당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은 오늘날의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었다.

전라좌수영은 순천, 보성, 낙안, 광양, 흥양 등 5관과 사도, 방답, 여도, 녹도, 발포 등 5포를 관할하고 있었다.

남해안 방어의 중책을 맡은 이순신(李舜臣)은 다가올 전쟁을 예견하고 방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장차 일본의 침략이 틀림없이 있을 것으로 미리 내다본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국왕 선조를 비롯하여 무능한 조정 대신과 장수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쓸모없는 당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내를 순시하고 군선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고 무기를 손질했다. 그리고 열심히 수군을 훈련시켰다.

그런데 조정은 아직도 어이없게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야기하며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 임진왜란(壬辰倭亂) 1년 전의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의 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선조(宣祖)는 조선왕조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라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왕권 안보와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다 싶으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또 선조는 도량이 좁은 임금이었다. 방계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이 작용한 탓인지 타고난 성격이 그런지 시기심과 의심이 많고 고집도 셌다.

선조의 의심 많고 시기심 많은 피곤한 성격 때문에 이순신도 나중에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두번째 백의종군을 했던 것이다.

선조는 집권 기간 내내 수많은 신하를 내치거나 죽였으며, 그것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요 최고 권력자인 자신의 책임이 가장 무거운 임진왜란, 유비무환(有備無患)이 불러온 전대미문의 참화인 임진왜란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이 그처럼 극단덕으로 감정에 좌우된 처사를 보이자 신하들이 국정에 임하는 자세는 서로 파당을 만들어 상대방을 시기하고 질시하고 대립하는 양상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전에 훈구파와 사람파로 나뉘어 싸우던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본격적인 당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1572년의 일이었다.

심의겸(沈義謙)은 명종(明宗)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오라비였다. 그는 외척이면서도 사림파를 구하기 위해 애썼고, 그 뒤에도 많은 사림 인사가 등용되는데 힘을 써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즉위한 이후 신진 사림에서는 심의겸의 그러한 공로를 별로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심의겸도 일개 척신이요 타도의 대상인 구세력에 불과했다.

이 심의겸과 김효원(金孝元)이 전랑(銓郞)의 자리를 둘러싼 대립에서 동서 당쟁이 비롯되었다.

전랑이란 문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이조정랑(吏曹正郎)과 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병조정랑(兵曹正郎)을 통칭한 것이다. 정랑은 정5품으로 오늘의 과장급에 불과하지만 관리를 천거하고 전형하는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기에 장관, 차관인 판서(判書), 참판(參判)은 물론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등 3정승도 간여할 수 없는 요직이었다.

그해 2월에 이조정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천거하자 이에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섬으로서 문제는 불거졌다.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선 이유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명종 때에 심의겸이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다가 김효원을 본 적이 있어서 그를 권신의 집이나 찾아다니던 소인배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로서 처가살이를 하던 이조민을 만나러 갔을 뿐이었다.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지 못해 심의겸에 대한 악감정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데 2년 뒤인 1574년에 김효원이 마침내 이조정랑이 되었고, 그는 사림파의 성원을 업고 심의겸을 공격했다. 설상가상으로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沈忠謙)이 거론되자 김효원은 "전랑이 외척 집 물건도 아닌데 어찌하여 심씨 문중에서 차지하려 드는가."라고 비난하고 다녔다. 양측의 갈등은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때 이율곡(李栗谷)이 나서서 중재안을 내놓았다. 심의겸을 개성유수(開城留守), 김효원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삼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심의겸은 가까운 개성으로 가는데 김효원은 어찌하여 먼 함경도 경흥으로 쫓겨가야 하는가."하는 반발에 부딫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심해져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이란 신진 사류를 대표하는 김효원이 종로구 건천동에 살았기에 동인이라 한 것이고, 서인이란 당시 구세력을 대표하는 심의겸이 서쪽인 정릉에 살았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동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생들이 많았고, 서인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제자가 많았다. 이 동인과 서인 양당은 뒷날 정권을 장악한 동인이 다시 온건파 남인과 강경파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바로 사색당쟁(四色黨爭)이라고 하는 것이다.

동서 분당 직후 조정에는 서인이 다수를 차지했으나 중도파로서 서인 쪽에 더 가깝던 이율곡이 죽고 서인의 강경론자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낙마하자 정권은 동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다가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져 조정은 다시 서인 천하로 기울었다가 정철이 실각하자 또다시 동인에게 정권이 돌아가는 등 정국은 쉴 새 없이 엎치락뒤치락 했다.

그렇게 해서 임진왜란 직전은 물론 전란(戰亂) 중과 전후에도 조선 조정은 망국적인 당쟁으로 나날과 다달이 흐르는 줄도 모르는 지경이었고, 동인인 유성룡 등과 가깝던 이순신도 동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끊임없이 서인의 중상과 모략을 당했던 것이다.

◆ 히데요시의 망상과 전쟁준비

그러면 이번에는 일본의 사정을 보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죽은 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막을 내리고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큐슈 정벌에 나선 것은 1587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키기 5년 전이었다. 그해 3월에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일으켜 그때까지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는 큐슈[九州]를 침공했다. 그러자 큐슈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맥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큐슈 원정은 조선 침공을 앞둔 대규모 기동훈련이 된 셈이었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치고 나아가 명나라까지 정복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욕은 단순한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권력을 대대손손 물려주겠다는 속셈도 작용했다. 그리고 오랜 내전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군사력, 그것도 문제였다. 어딘가로 분출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어느 야심가가 군사를 일으켜 또다시 내전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야심가가 나오지 않더라고 저마다 칼을 찬 수십만 무사 집단이 하루아침에 백수건달이 되어 나라 안 곳곳을 휩쓸고 다니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 막강한 군사력을 그대로 두었다가 또 다시 내전이 벌어진다면, 그나마 허약한 치안이 무너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독재 권력이 언제까지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히데요시는 시선을 해외로 돌렸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과 명나라 정복이라는 터무니없는 야욕을 실천에 옮기려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해 9월에는 큐슈 정벌의 선봉장이었던 심복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자신의 친서를 조선에 전하도록 명령했다. 유키나가는 사돈인 쓰시마[對馬島]의 도주(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로 하여금 다치바나 야스시로[橘康廣]를 조선에 파견토록 했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사신이지만 조선의 실정을 정탐하는 밀정의 임무까지 띠고 조선에 들어온 야스시로는 일본이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보냈다는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여 장차 중국을 정복하려 한다는 사실 등을 알려주고, 조선은 빨리 일본과 수교하라고 했다.

야스시로가 이처럼 얼핏 보기에 양다리를 걸친 듯이 행동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만일 히데요시의 야욕대로 일본과 조선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사이에 낀 쓰시마가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볼 것이 분명했기 대문이었다.

히데요시의 1차 사절단 파견에 대해 조선 조정은 "일본으로 가는 물길이 어두워 사신을 보낼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어 통신사 파견을 거부했다. 야스시로는 객관으로 돌아가 탄식하면서 조선 통역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전한다.

"너희 나라는 장차 망할 것이다. 이미 기강이 허물어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미 침략전(侵略戰)의 구상을 구체화시키고 있던 히데요시가 그대로 물러설 턱이 없었다. 그는 1589년에 2차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번에는 조선 국왕을 일본에 입조시키라는 황당무계한 요구까지 들려서 보냈다. 이번의 사절단장은 죽은 아비 요시시게 대신 쓰시마 도주가 된 소 요시토모[宗義智]였다. 요시토모는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과 승려 겐소[玄蘇] 등을 데리고 부산포에 상륙했다.

하지만 요시토모는 도저히 히데요시의 요구를 그대로 조선 조정에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미친 소리를 꺼냈다가는 조선 조정의 분노만 살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산포에 머물며 조선통신사의 파견만 요구했다. 이마저 들어주지 않자 그들은 일단 쓰시마로 돌아갔다가 다시 부산포로 건너왔다. 그리고 재차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전에 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을 하다가 일본으로 도망친 조선인들을 잡아서 보내라고 했다. 이에 요시토모는 부하들을 쓰시마로 보내 조선인 10여명을 잡아다가 조선에 바쳤다.

◆ 당파에 따라 다른 귀국보고

조정에서 논란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 것은 1590년 3월이었다. 조선통신사의 정사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윤길(黃允吉), 부사는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은 전적(典籍) 허성(許筬), 수행 무관은 황진(黃進)이었다.

이들은 그해 7월에 교토[京都]에 도착했으나 11월에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 국서를 전달하고 다시 일본의 국서를 받아 1년 만인 이듬해 3월에야 귀국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임명된 다음 달이었다.

그런데 나라의 운명이 달린 중대한 사행(使行)길이었지만 여기에도 당쟁의 폐해가 뒤따랐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서인인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보고서를 올려 일본의 정세를 보고하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선조가 일본의 사정을 묻지 황윤길은 "수길(秀吉)의 눈빛이 빛나고, 일본이 군선을 준비하고 있으니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수길의 눈이 쥐눈과 같고, 신(臣)은 그러한 징조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하고 상반된 보고를 했다. 김성일은 나아가 "황윤길이 백성을 동요시키는 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같은 동인인 좌의정 유성룡이 그래도 미심쩍어 나중에 김성일에게 물었다.

"그대가 황윤길과 다르게 말하는데 그러다가 만일 왜(倭)가 쳐들어오면 어쩌려는가?"

그러자 김성일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어지 왜(倭)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이들과 같은 동인인 허성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했고, 황진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결국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주변 정세에 눈멀고 무사안일에 빠진 조정은 이 문제를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더욱 통탄스러운 노릇은 이들이 가지고 온 히데요시의 서신 중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는 구절에 들어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했으니 참으로 나라가 망하기로 작정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눈앞에 닥 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그토록 무지하고 무능했던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나 이순신(李舜臣), 한석봉(韓石峰)과 같이 장차 전쟁이 있을 것을 내다본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전에 이율곡(李栗谷)이 살아 있을 때에 이른바 "십만양병설(十萬良兵說)"을 주장한 것도 휴정이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을 시켜 이율곡에게 전하도록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 조정도 마냥 나 몰라라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벌어졌다. 통신사가 돌아온 지 한 달 뒤에 3차 일본 사절단이 파견되었는데, 서울로 들어온 그들은 "명나라를 치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고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었다. 상국(上國)으로 받드는 명나라를 걸고 나오니 이제는 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조정은 그해 7월에 김응남(金應男)을 명나라에 보내 이런 사실과 더불어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일본의 침략을 방비한다면서 김수(金粹)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정비토록 했다. 또 당대의 명장이라고 알려진 신립(申砬)을 경기도, 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도, 전라도에 각각 급파하여 방어시설을 점검토록 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 임진왜란 초전의 정황이 여실히 증명했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당시 좌의정(左議政)으로 있던 유성룡(柳成龍)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지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은 방어전술에 관한 것인데 육전과 수전의 요령 각종 화포의 사용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엇다.

이 책의 사본을 받은 이순신은 밤을 새워 읽어본 뒤 감탄했다고 전한다.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년(壬辰年) 3월 5일자에 이렇게 나온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군관들은 활쏘기를 했다. 저물어서 상경했던 진무가 돌아왔는데,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이 책을 보니 수전, 육전, 화공전 등에 관한 일을 하나하나 논의한 것인데, 만고에 신기한 저술이었다."

그러나 망조는 또 있었다. 전에 사신으로 왔던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이 부산으로 번너와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일본의 수십만 대군이 지금 나고야성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초 공격일이 3월 1일이었는데 4월로 연기되었습니다. 이제 조선이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통상을 중재하든지, 길을 빌려주든지 선택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송상현은 이를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지만 "무늬만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가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아무도 이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고, 야나가와 초신은 그대로 쓰시마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예정대로 임진왜란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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