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2001년 12월 일본의 아키히토 왕(明仁王)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야마토(大和)의 칸무 왕(桓武王)의 어머니가 백제(百濟) 무령왕(武靈王)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나는 한국과 갚은 인연을 느낀다.” 그동안 일본인들은 만세일계라고 주장하며 그들이 천황이라 부르는 일본 왕실을 신성시하였다. 그렇다면 일본 국왕의 혈통은 백제 왕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다시에는 이름부터 한국인들의 이목을 끄는 사당이 있다. 일명 백제왕 신사다. 신사관리를 담당하는 후지스 유끼코 씨는 신사가 생긴 경위를 적은 15세기의 기록을 우리에게 공개하였다. 8세기 중엽, 일본의 통치자 쇼무 왕(聖武王)의 칙령으로 건립됐고 그후 칸무 왕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이다. 일본 국왕이 이렇게 큰 백제왕신사를 세운 이유는 백제왕자 경복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선 2001년 12월 아키히토 왕(明仁王)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희들은 평소부터 다가노노 니이가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봐왔기 때문에 그분이 칸무 왕의 어머니이고 백제인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국왕이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주신데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역사는 720년을 기준으로 그전은 일본서기에 그후는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키히토 일본 국왕이 언급한 기록은 “속일본기(續日本紀)”. 속일본기는 칸무 왕의 혈통을 밝히고 있는데 칸무 왕의 어머니 고야신립은 무령왕(武靈王)의 아들 순타세자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 국왕의 외척이 백제 왕실 사람인 것이다.

칸무왕(桓武王)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일본 교토의 평안경. 794년 수도를 교토로 천도하고 평안경시대를 연 인물이 바로 50대 군주 칸무 왕(桓武王)이다. 칸무 왕은 교토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지금도 교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수도천도 외에 칸무 왕(桓武王)의 행적 중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다. 칸무 왕(桓武王)이 자신의 외척을 백제인이라 밝히고 조정의 요직에 백제인을 앉힌 것이다. 칸무 왕은 수도천도후 궁궐북쪽에 직접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우는데 이것이 히라노신사다.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네명의 조상신들 중 세명은 백제 국왕이고 나머지 한명은 고야신립, 칸무 왕의 어머니이다. 칸무 왕은 그만큼 어머니의 혈통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백제(百濟) 제25대 국왕 무령왕(武靈王)이 존재했었던 같은 시기에 일본엔 칸무 왕[桓武王]이 있다. 무령왕의 아들이 순타세자인데 순타세자의 직계후손 중에 하을계라는 사람이 있다. 하을계는 일본 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다. 그의 딸이 고야신립인데, 그녀는 광인왕에게 시집을 갔고 광인왕과 고야신립 사이에 태어난 이가 칸무 왕으로 일본왕실의 외척이 백제인이 된것이다.

여기서 왜 무령왕의 직계후손과 일본 왕실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무령왕릉(武靈王陵)의 발굴이 있었다.

무덤 입구에 발굴된 묘지석에는 무덤의 주인이 무령호왕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가 사망한 해를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은 계묘년(523년) 5월7일에 62세의 나이로 붕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령왕이 462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수 있는 기록이다. 일본서기에는 무령호왕이 축자의 각라도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쿠오카 북쪽에 위치한 가까라시마 섬이다. 향토사학자 시카구치 다카노리 씨는 “이 섬 곳곳에는 사마(무령왕)와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먼 옛날 가까라시마 섬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가기위한 중간 기착지였다.

오사카의 국립역사박물관에는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박물관 앞에 터만 남아있는 나니와궁은 일본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백제니사의 명문토기는 이곳에 백제니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5세기에 일본의 오사카에 백제의 토목, 관개 기술자들이 건너와 오사카의 관개시설을 담당하였다.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딲은 것이 백제인이란 것을 알수 있다. 이때 일본에 이주한 백제인 가운데 무령상제의 숙부인 곤지일행도 난파진에 도착하였다. 곤지는 일본에서 15년간 머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곤지의 후손들은 아스카베 노미 야스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오사카 지역의 아스카베신사는 백제인 곤지를 모신 사당이다. 아스카 지역 일대는 백제식 토기가 발굴되는 백제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다.

이하라 미노루 교수는 “아스카베신사에 최초로 모셔진 신은 백제의 곤지왕(昆支王)인데 이 일대의 아스카천총을 만든 사람들은 그 곤지왕의 후손, 즉 백제인들의 무덤일 것으로 생각합니다.”고 말한다. 수많은 고분으로 이루어진 아스카베 천총은 전형적인 백제무덤 양식인 황혈식 석실형태를 띠고 있다.

이도학 교수는 “곤지가 461년에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적어도 15년 정도는 열도안에 가나치 아스카 일대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에 비추어 볼때 무령상제가 일본열도 안에서 아스카 일대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고 할수 있지요.”라고 설명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사마(무령왕)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인 475년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이 3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왔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백제는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하게 된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왜왕 무가 갑자기 상을 당했다고 하면서 3년상을 마치고 고구려에 보복하겠다는 적개심을 드러낸 내용의 서신을 중국 양나라에 보낸 것이다. 모든 정황이 개로상제의 죽음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서신을 보낸 왜왕 무는 사마(무령왕)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이 있다. 오사카부 하시모토시에 있는 쓰다하지방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청동거울에 9명의 왕족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가운데, 사마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보이는데 백제의 국왕인 무령호왕(武靈浩王)을 뜻한다. 이 거울은 503년 무령호왕이 일본에 있는 남제왕에게 보낸 것이다. 사마는 개중비직이라는 관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중비직은 일본 기내지방에서 왕 다음의 권력을 가진 직책이다. 왜왕을 지맸던 무령호왕이 귀국후 일본의 남제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이 거룽을 보낸 것이다. 고대의 거울은 주국(主國)의 군주가 신국(臣國)의 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주는 선물이었다.

무령왕이 왜왕이었을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이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오사카 일대에는 지금도 백제양식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그만큼 고대 백제인들이 많이 거주했었던 곳이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여러 분국(分國)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에 존재한 나라가 바로 야마토 일본(大和倭國)인 것이다.고대 대화지역에 인구는 8~90%가 백제인이었다. 따라서 왜왕이 백제인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한때 고대 야마토를 지배한 인물은 백제인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칸무왕(桓武王)의 왕자가 저술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고대 일본의 왕족과 귀족의 계보가 적혀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근거가 하나 발견된다. 민달왕의 손자인 백제인이란 글귀이다. 즉, 비다츠 왕(敏達王)이 백제왕족이란 뜻이다.

이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또 있다. 비다츠 왕(敏達王)이 즉위한 해인 572년 일본서기의 기록인데, 세자가 일본 국왕에 즉위하였고 이 달에 백제의 대정궁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만약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 내용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왜 일본 국왕이 백제궁을 지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게된 것이다. 비다츠 왕(敏達王)이 백제인이므로 백제인 국왕이 백제궁을 짓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다츠 왕(敏達王)의 손자인 조메이 왕(舒明王)이 백제천 옆에 백제사와 백제궁을 지었다고 한다. 이름이 백제강인 이곳에서 지난 1997년 2월에 백제사터가 발굴된 바 있다고 한다. 641년에 조메이 왕이 백제궁에서 사망하고 왕궁 북쪽에 안치한 뒤 이것을 백제대빈이라고 불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백제대빈은 백제의 3년상을 의미한다. 백제인 비다츠 왕(敏達王)의 손자 조메이 왕(舒明王). 그는 백제인들이 모여사는 지역에 백제사와 백제궁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례절차도 철저히 백제의식을 따른 것이다.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알수있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663년 8월 백강구 전투. 당(唐)과 신라, 백제와 일본이 참전한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었다.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백제왕족 복신(福信)은 일본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복신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이메이 왕(齊明王)이 하카다에서 직접 군사훈련을 주도한다.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의 왜군의 성격을 알수 있는 내용이 구당서에 있는데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내용이다. 즉, 백제왕자가 일본의 군사들을 인솔했다는 말인데 백제왕족이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古代日本大和王国[大和王国]の支配層は百済人たちだった.

 

2001년 12월 일본의 아키히토 왕(明仁王)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야마토(大和)의 칸무 왕(桓武王)의 어머니가 백제(百濟) 무령왕(武靈王)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나는 한국과 갚은 인연을 느낀다.” 그동안 일본인들은 만세일계라고 주장하며 그들이 천황이라 부르는 일본 왕실을 신성시하였다. 그렇다면 일본 국왕의 혈통은 백제 왕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다시에는 이름부터 한국인들의 이목을 끄는 사당이 있다. 일명 백제왕 신사다. 신사관리를 담당하는 후지스 유끼코 씨는 신사가 생긴 경위를 적은 15세기의 기록을 우리에게 공개하였다. 8세기 중엽, 일본의 통치자 쇼무 왕(聖武王)의 칙령으로 건립됐고 그후 칸무 왕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이다. 일본 국왕이 이렇게 큰 백제왕신사를 세운 이유는 백제왕자 경복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선 2001년 12월 아키히토 왕(明仁王)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희들은 평소부터 다가노노 니이가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봐왔기 때문에 그분이 칸무 왕의 어머니이고 백제인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국왕이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주신데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역사는 720년을 기준으로 그전은 일본서기에 그후는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키히토 일본 국왕이 언급한 기록은 "속일본기(續日本紀)". 속일본기는 칸무 왕의 혈통을 밝히고 있는데 칸무 왕의 어머니 고야신립은 무령왕(武靈王)의 아들 순타세자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 국왕의 외척이 백제 왕실 사람인 것이다.

칸무왕(桓武王)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일본 교토의 평안경. 794년 수도를 교토로 천도하고 평안경시대를 연 인물이 바로 50대 군주 칸무 왕(桓武王)이다. 칸무 왕은 교토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지금도 교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수도천도 외에 칸무 왕(桓武王)의 행적 중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다. 칸무 왕(桓武王)이 자신의 외척을 백제인이라 밝히고 조정의 요직에 백제인을 앉힌 것이다. 칸무 왕은 수도천도후 궁궐북쪽에 직접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우는데 이것이 히라노신사다.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네명의 조상신들 중 세명은 백제 국왕이고 나머지 한명은 고야신립, 칸무 왕의 어머니이다. 칸무 왕은 그만큼 어머니의 혈통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백제(百濟) 제25대 국왕 무령왕(武靈王)이 존재했었던 같은 시기에 일본엔 칸무 왕[桓武王]이 있다. 무령왕의 아들이 순타세자인데 순타세자의 직계후손 중에 하을계라는 사람이 있다. 하을계는 일본 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다. 그의 딸이 고야신립인데, 그녀는 광인왕에게 시집을 갔고 광인왕과 고야신립 사이에 태어난 이가 칸무 왕으로 일본왕실의 외척이 백제인이 된것이다.

여기서 왜 무령왕의 직계후손과 일본 왕실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무령왕릉(武靈王陵)의 발굴이 있었다.

무덤 입구에 발굴된 묘지석에는 무덤의 주인이 무령호왕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가 사망한 해를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은 계묘년(523년) 5월7일에 62세의 나이로 붕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령왕이 462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수 있는 기록이다. 일본서기에는 무령호왕이 축자의 각라도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쿠오카 북쪽에 위치한 가까라시마 섬이다. 향토사학자 시카구치 다카노리 씨는 "이 섬 곳곳에는 사마(무령왕)와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먼 옛날 가까라시마 섬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가기위한 중간 기착지였다.

오사카의 국립역사박물관에는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박물관 앞에 터만 남아있는 나니와궁은 일본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백제니사의 명문토기는 이곳에 백제니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5세기에 일본의 오사카에 백제의 토목, 관개 기술자들이 건너와 오사카의 관개시설을 담당하였다.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딲은 것이 백제인이란 것을 알수 있다. 이때 일본에 이주한 백제인 가운데 무령상제의 숙부인 곤지일행도 난파진에 도착하였다. 곤지는 일본에서 15년간 머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곤지의 후손들은 아스카베 노미 야스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오사카 지역의 아스카베신사는 백제인 곤지를 모신 사당이다. 아스카 지역 일대는 백제식 토기가 발굴되는 백제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다.

이하라 미노루 교수는 "아스카베신사에 최초로 모셔진 신은 백제의 곤지왕(昆支王)인데 이 일대의 아스카천총을 만든 사람들은 그 곤지왕의 후손, 즉 백제인들의 무덤일 것으로 생각합니다."고 말한다. 수많은 고분으로 이루어진 아스카베 천총은 전형적인 백제무덤 양식인 황혈식 석실형태를 띠고 있다.

이도학 교수는 "곤지가 461년에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적어도 15년 정도는 열도안에 가나치 아스카 일대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에 비추어 볼때 무령상제가 일본열도 안에서 아스카 일대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고 할수 있지요."라고 설명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사마(무령왕)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인 475년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이 3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왔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백제는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하게 된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왜왕 무가 갑자기 상을 당했다고 하면서 3년상을 마치고 고구려에 보복하겠다는 적개심을 드러낸 내용의 서신을 중국 양나라에 보낸 것이다. 모든 정황이 개로상제의 죽음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서신을 보낸 왜왕 무는 사마(무령왕)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이 있다. 오사카부 하시모토시에 있는 쓰다하지방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청동거울에 9명의 왕족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가운데, 사마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보이는데 백제의 국왕인 무령호왕(武靈浩王)을 뜻한다. 이 거울은 503년 무령호왕이 일본에 있는 남제왕에게 보낸 것이다. 사마는 개중비직이라는 관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중비직은 일본 기내지방에서 왕 다음의 권력을 가진 직책이다. 왜왕을 지맸던 무령호왕이 귀국후 일본의 남제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이 거룽을 보낸 것이다. 고대의 거울은 주국(主國)의 군주가 신국(臣國)의 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주는 선물이었다.

무령왕이 왜왕이었을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이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오사카 일대에는 지금도 백제양식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그만큼 고대 백제인들이 많이 거주했었던 곳이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여러 분국(分國)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에 존재한 나라가 바로 야마토 왜국(大和倭國)인 것이다.고대 대화지역에 인구는 8~90%가 백제인이었다. 따라서 왜왕이 백제인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한때 고대 야마토를 지배한 인물은 백제인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칸무왕(桓武王)의 왕자가 저술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고대 일본의 왕족과 귀족의 계보가 적혀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근거가 하나 발견된다. 민달왕의 손자인 백제인이란 글귀이다. 즉, 비다츠 왕(敏達王)이 백제왕족이란 뜻이다.

이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또 있다. 비다츠 왕(敏達王)이 즉위한 해인 572년 일본서기의 기록인데, 세자가 일본 국왕에 즉위하였고 이 달에 백제의 대정궁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만약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 내용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왜 일본 국왕이 백제궁을 지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신찬성씨록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게된 것이다. 비다츠 왕(敏達王)이 백제인이므로 백제인 국왕이 백제궁을 짓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다츠 왕(敏達王)의 손자인 조메이 왕(舒明王)이 백제천 옆에 백제사와 백제궁을 지었다고 한다. 이름이 백제강인 이곳에서 지난 1997년 2월에 백제사터가 발굴된 바 있다고 한다. 641년에 조메이 왕이 백제궁에서 사망하고 왕궁 북쪽에 안치한 뒤 이것을 백제대빈이라고 불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백제대빈은 백제의 3년상을 의미한다. 백제인 비다츠 왕(敏達王)의 손자 조메이 왕(舒明王). 그는 백제인들이 모여사는 지역에 백제사와 백제궁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례절차도 철저히 백제의식을 따른 것이다.

당시 백제와 왜국의 관계를 알수있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663년 8월 백강구 전투. 당(唐)과 신라, 백제와 왜국이 참전한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었다.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백제왕족 복신(福信)은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복신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이메이 왕(齊明王)이 하카다에서 직접 군사훈련을 주도한다.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의 왜군의 성격을 알수 있는 내용이 구당서에 있는데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내용이다. 즉, 백제왕자가 왜국의 군사들을 인솔했다는 말인데 백제왕족이 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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