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제2 기일한역사 공동 연구의 보고서 요지는 다음과 같이.(위원 이외의 집필자를 포함한다)

 1, 고대사

 【안라 야마토신관】

 ▽한국측 임라 일본부는 「일본 서기」에 있지만, 야마토의 임라 지배설은 설득력을 상실.4~5 세기는 존재하고 있지 않다.6 세기에는 있었지만, 당시의 용어도 아니다.가야(모기장)(임라)의 일부였던 안라가 왜인 관료를 맞아들인 외무 관청이다.잘못된 선입관을 불러일으키므로 「안라 야마토신관」이라고 하는 용어가 적당하다.관료는 안라에 있던 왜인으로 신하였다.(김 야스시식·홍대 교수)

 ▽일본측 일본 서기는 「 재안라제야마토신」이라고도 표현.임라 일본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은 같다.단지, 안라에 있는 왜인이 자립한 활동을 하고 있던 장소에서, 안라에 예속하지 않았다.(삼공장·토요대 교수)

 2, 안근세사

 【문녹·게이쵸의 역】

 ▽한국측 일본이 명에 도전해, 북동 아시아의 패권 교대를 목표로 한 역사적 사건.오랫동안, 한국 전쟁등의 영향으로 「국난 극복 사관」이 반영되고 있었지만, 1990년대 이후의 냉전 종결이나 글로벌화에 의해, 보다 큰 테두리로 해석하려는 역사 인식이 나타났다.동아시아에서 발생한 국제 전쟁과의 관점에 선 연구가 본격화하고 있다.(노영9·한국 국방대대학원 부교수)

 【원구】

 ▽한국측원구는, 한국에서는 최초의 해외파병이라고 된다.일본은 대륙으로부터의 야만스러운 침략으로 간주해, 일본인이 일치단결해 격퇴했다고 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일한 양국 모두 자국 역사적 입장이라고 하는 비싼 벽을 극복하고 있지 않다.(이재범·경기 오소이 교수)

 3, 근현대사

 【영토 문제】

 ▽한국측 일한간에서 논쟁의 독도(일본의 타케시마) 뿐만 아니라, 일본은 러시아와 북방 영토, 중국 및 대만과는 센카쿠 제도를 둘러싸 영토 분쟁의 당사국이다.패전국 일본의 전후 처리는, 일본 고유의 영토와 제국주의 일본이 침탈 한 영토와의 구분이 도외시되었다.미국은 극도로 관대하고, 비징벌적인 태도를 취했다.일본인의 전쟁 책임에 대한 무지는, 미국 정책의 영향이 대나무 구, 일본의 「역사적 기억상실」의 도움이 되었다.포츠담 선언 수락을 강조한 것은, 전후 일본의 역사적 기억상실 치유에 목적이 있다.(이석우·인하대대학원 부교수)

 ▽일본 측근간을 이루는 용어나 논의의 배경 설명이 부족하다.역사적 기억상실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일본이 무조건 항복 한 포츠담 선언을 인용해, 무슨 목적으로 지루하게 논하는 것인가.전연 이해할 수 없다.외교 역사적 축적이 불충분하다.(오오니시 유타카·코베대학 대학원 교수)

 【동원】

 ▽한국측 1920년대 초부터 일본은 한국인의 대표적인 객지벌이지.30년대는 「도일 감소 방침」으로 도항 허가는 이득 어렵고, 한국인의 일부는 「할당 모집」을 허가 획득의 기회라고 생각했다.모집으로 모아진 한국인은 일본의 탄갱이나 남양 제도, 사할린에도 보내졌다.이것들은 국가 권력의 강제였다.(정혜경·「강제 동원 진상 구명 위원회」조사 2 과장)

 전시기의 일본 본토 거주 한국인은, 자발적인 「이주」라고, 강제 동원의 2 형태가 있었다.제1차 대전 발생 이후, 이주자는 일본 경제의 발전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연고를 의지해 주로 쿄토, 오사카, 코베를 포함한 관서지방에 일자리를 얻었다.36년말에는 약 70만명이 되어, 저변의 하층 노동시장을 지탱했다.하지만, 높은 폐쇄성과 이동성, 독자적인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동원은 어렵고, 징용은 기대한 효과가 오르지 않았다.일본도 치안 유지에 중점을 두었다.기존의 연구는 자발적 이주와 강제 동원의 구분이 더 자갈로, 강제 동원의 구명에 집중하고 있었다.(하종문·한신대교수)

 【강제 연행】

 ▽한국측 한국인의 동원에 대해서는 전시 노무 동원, 강제 연행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된다.이것은 노동 뿐만이 아니라, 군이나 위안부등도 포함한다.조선 총독부가 대중의 저항을 완화하면서 고도의 방법으로 갔다.학문적 논의가 깊어져야 한다.(정씨)

 ▽일본측 전시기의 식민지 통치에 주도한 계획이나 일관한 정책 체계같은 건 없었다.(아리마 마나부·큐슈대 명예 교수)

 【일본어 교육】

 ▽일본측 한국인 아동과 일본인 교사도 열심히 배워 가르치고 있었다.근대적 지식, 기술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 인식되고 있었다.(야마다 히로시인·히로시마대비상근 강사)

 ▽한국측 강제적 구조가 존재했다.아전인수의 해석이다.(유승 츠요시·에하라대 교수)

 【청일 전쟁】

 ▽일본측 청일 전쟁으로 일본이 청에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이 연결되었다.이 결과, 조선은 명실 공히 청으로부터 독립했다.(하라다환·현립 히로시마 대교수)

 ▽한국측 시모노세키조약은 조선을 배제한 채로 체결되었다.일본이 청으로부터 조선을 구원해, 독립국으로서 출발시켰다는 논리는, 일본의 침략 의지를 잘못을 숨기고 있다.(주진5·상메이지대학 교수)

 【대중문화】

 ▽한국측 한국은 98년에 제한하고 있던 일본 문화 유입을 해금했지만,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등의 문제가 양국 관계를 악화시켜, 일본의 호감도는 개선되어 있지 않다.(리성환·계명대교수)

 4, 교과서

 【위원 인사】

 일한 관계의 기초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기도 했다.다만 뭐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도 직시 해야 한다.

 【교과서의 이념】

 ▽한국측 일본의 교과서에 근년, 위안부의 기술이 줄어 든 것은, 일본 정치와 사회의 보수화에 관계가 있다.「한국측은 공장 등에 동원된 「(여자) 정신대」와 혼동 하고 있다」라고 일본측은 지적하지만, 정신대 동원에 대한 공포의 규명은 했는가.「종군위안부」라고 하는 용어는, 어떠한 실증적 자료에 근거하는 것인가.자발성의 의미를 포함한 「종군」이라고 하는 말은 사용을 그만두어야 하다.(정진성·서울대교수)

 【연구 계속】

 ▽일본측 교과서 검정 제도 에 있어서의 일본내의 다양한 논의에 안배 하고 있지 않다.공동 연구는 성과가 없었다.역사 연구에의 자세가 일한에서는 너무 다르다.(야마무로 켄토쿠·테이쿄대준교수)

 한편의 역사관만을 한편에 억누르면 소용없는 분쟁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온다.(키무라간·코베대학 대학원 교수)

 ▽한국측 역사 인식을 접근시키지 않으면 양국의 미래를 평화적으로 만들어 갈 수 없다.문제를 근원으로부터 논의할 필요가 있다.(금도 형·연세대교수)

 【교과서 제도】

 ▽일본측 교과서는 아이에게 특정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수단은 아니다.공유하는 통념을 차세대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작성하는 것이 급무다.(야마무로씨)

 한국의 「반일 교육」은 본래, 일본의 한 때의 제국주의 사상에의 「방일」이 목적이었다.(이데 히로토·나가사키대준교수)

 ▽한국측 「방일」부터 「반일」에 변천했다고 하는 논지는, 한국을 이해하려고 하는 진지인 노력의 일환이다.그러나, 한국에서 반일 교육을 해 왔다고 하는 부당한 전제가 있다.(신주백·연세대교수)

 교과서 검정은, 한국에서는 기준이 세세하게 정해져 있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집필자의 자율성이 인정되어 편씨방법의 개선을 중시한다.날 책에서는 기준은 간략화되고 있지만, 학습 지도 요령등의 형태를 통해 사실상 국가가 내용의 통제를 도모하고 있다.(리찬희·한국 교육 개발원석좌 연구 위원)

 【교과서의 기술 내용】

 ▽일본측문녹·게이쵸의 역에 대해서, 최근의 일본의 교과서는 단조로운 톤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국도, 이전에는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은 비교적 냉정한 기술이 되고 있다.각각의 입장으로부터 탈각한 시점이나,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다.(오오타수춘·카고시마 국제대준교수)

 한국은 일본의 헌법 9조, 천황이나 수상이 사죄와 반성에 노력한 사실을 기술해 주었으면 한다.쌍방은 「이웃나라의 현대사」의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시게무라 사토시계·와세다대학 교수)

 한국의 교과서가 조선 민족의 시조로 여겨지는 단군의 신화를 그대로 인정하는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은, 자료 고증에 근거하는 결론인가 의문이다.(이노우에 나오키·쿄토부립대준교수)

 ▽한국측 일본의 학계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평가하는 만큼, 한국이 침략에의 경계심을 안는 것은 자연스럽다.전란의 기억은 생생하게 선명한 상처 자국으로서 남아 있다.정당화 할 구실을 학문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일본의 교과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전쟁 책임의 중량감을 인식할 수 없다.(현명☆(길을 옆에 두 개 늘어놓는다)·경기 고교 교사)

 일본에서는 근대사를 강국으로 성장하는 화려한 역사로서 적는 한편, 한반도나 중국 대륙을 침략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의 기술은 소극적이다.(금도 토루씨)

 일본의 교과서의 한국에 대한 기술의 개선은 97년판이 정점에서, 그 후 악화.중심으로는 우익의 정치 세력과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있다.(신주백씨)

 일본의 교과서로  도래인은, 고대 왕권에 포섭된 존재로서 기능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일본 민족의 주요 구성원이며, 고대국가를 건설한 개척자와의 관점이 필요하다.(연민수·토호쿠아역사 재단 연구 위원)

 

http://www.shikoku-np.co.jp/national/detailed_report/article.aspx?id=20100323000314&ref=rss

 

거의 새로운 진전은 없지만, 한국인이, 떠드는 이유를 모른다

 

 

 

 

 

 

 

 

 

 

 

 

 

 

 


日韓歴史研究報告書の要旨

 

 第2期日韓歴史共同研究の報告書要旨は次の通り。(委員以外の執筆者を含む)

 一、古代史

 【安羅倭臣館】

 ▽韓国側 任那日本府は「日本書紀」にあるが、倭の任那支配説は説得力を喪失。4~5世紀は存在していない。6世紀にはあったが、当時の用語でもない。伽耶(かや)(任那)の一部だった安羅が倭人官僚を迎え入れた外務官署だ。間違った先入観を呼び起こすので「安羅倭臣館」という用語が適当だ。官僚は安羅にいた倭人で臣下だった。(金泰植・弘益大教授)

 ▽日本側 日本書紀は「在安羅諸倭臣」とも表現。任那日本府を使わない方が良いというのは同じだ。ただ、安羅にいる倭人が自立した活動をしていた場所で、安羅に隷属していなかった。(森公章・東洋大教授)

 二、中近世史

 【文禄・慶長の役】

 ▽韓国側 日本が明に挑戦し、北東アジアの覇権交代を目指した歴史的事件。長い間、朝鮮戦争などの影響で「国難克服史観」が反映されていたが、1990年代以降の冷戦終結やグローバル化により、より大きな枠で解釈しようという歴史認識が現れた。東アジアで発生した国際戦争との観点に立った研究が本格化している。(盧永九・韓国国防大大学院副教授)

 【元寇】

 ▽韓国側 元寇は、韓国では最初の海外派兵だとされる。日本は大陸からの野蛮な侵略とみなし、日本人が一致団結して撃退したという教育をしている。日韓両国とも自国史的立場という高い壁を克服していない。(李在範・京畿大副教授)

 三、近現代史

 【領土問題】

 ▽韓国側 日韓間で論争の独島(日本の竹島)のみならず、日本はロシアと北方領土、中国および台湾とは尖閣諸島をめぐり領土紛争の当事国だ。敗戦国日本の戦後処理は、日本固有の領土と帝国主義日本が侵奪した領土との区分が度外視された。米国は極度に寛大で、非懲罰的な態度を取った。日本人の戦争責任に対する無知は、米国政策の影響が大きく、日本の「歴史的記憶喪失」の一助となった。ポツダム宣言受諾を強調したのは、戦後日本の歴史的記憶喪失治癒に目的がある。(李碩祐・仁荷大大学院副教授)

 ▽日本側 根幹をなす用語や議論の背景説明が不足している。歴史的記憶喪失とは何を指すのか。日本が無条件降伏したポツダム宣言を引用し、何の目的でくどくど論じるのか。およそ理解できない。外交史的蓄積が不十分だ。(大西裕・神戸大大学院教授)

 【動員】

 ▽韓国側 1920年代初めから日本は朝鮮人の代表的な出稼ぎ地。30年代は「渡日減少方針」で渡航許可は得にくく、朝鮮人の一部は「割り当て募集」を許可獲得の機会と考えた。募集で集められた朝鮮人は日本の炭坑や南洋諸島、サハリンにも送られた。これらは国家権力の強制だった。(鄭恵瓊・「強制動員真相究明委員会」調査2課長)

 戦時期の日本本土居住朝鮮人は、自発的な「移住」と、強制動員の2形態があった。第1次大戦発生以降、移住者は日本経済の発展で際立ち始めた。縁故を頼って主に京都、大阪、神戸を含む関西地方に職を得た。36年末には約70万人となり、底辺の下層労働市場を支えた。だが、高い閉鎖性と移動性、独自のネットワークのため、本格的な動員は難しく、徴用は期待した効果が上がらなかった。日本も治安維持に重点を置いた。既存の研究は自発的移住と強制動員の区分がなおざりで、強制動員の究明に集中していた。(河棕文・韓神大教授)

 【強制連行】

 ▽韓国側 朝鮮人の動員については戦時労務動員、強制連行などさまざまな用語が使われる。これは労働だけでなく、軍や慰安婦なども含む。朝鮮総督府が大衆の抵抗を緩和しながら高度な方法で行った。学問的議論を深めるべきだ。(鄭氏)

 ▽日本側 戦時期の植民地統治に周到な計画や一貫した政策体系などなかった。(有馬学・九州大名誉教授)

 【日本語教育】

 ▽日本側 朝鮮人児童と日本人教師も一生懸命学び教えていた。近代的知識、技術を得るための道具として認識されていた。(山田寛人・広島大非常勤講師)

 ▽韓国側 強制的構造が存在した。我田引水の解釈だ。(柳承烈・江原大教授)

 【日清戦争】

 ▽日本側 日清戦争で日本が清に勝利して下関条約が結ばれた。この結果、朝鮮は名実ともに清から独立した。(原田環・県立広島大教授)

 ▽韓国側 下関条約は朝鮮を排除したまま締結された。日本が清から朝鮮を救援し、独立国として出発させたとの論理は、日本の侵略意志を塗り隠している。(朱鎮五・祥明大教授)

 【大衆文化】

 ▽韓国側 韓国は98年に制限していた日本文化流入を解禁したが、教科書、慰安婦、靖国などの問題が両国関係を悪化させ、日本の好感度は改善されていない。(李盛煥・啓明大教授)

 四、教科書

 【委員あいさつ】

 日韓関係の基礎をつくるのは、われわれの使命でもあった。ただし何でも解決できるわけでもないことも直視すべきだ。

 【教科書の理念】

 ▽韓国側 日本の教科書に近年、慰安婦の記述が減ったのは、日本政治と社会の保守化に関係がある。「韓国側は工場などに動員された『(女子)挺身隊』と混同している」と日本側は指摘するが、挺身隊動員に対する恐怖の糾明はしたのか。「従軍慰安婦」という用語は、どのような実証的資料に基づくのか。自発性の意味を含む「従軍」という言葉は使用をやめるべきだ。(鄭鎮星・ソウル大教授)

 【研究継続】

 ▽日本側 教科書検定制度における日本国内の多様な議論に目配りしていない。共同研究は不毛だった。歴史研究への姿勢が日韓では違いすぎる。(山室建徳・帝京大准教授)

 一方の歴史観のみを他方に押しつければ無用な紛争を引き起こす結果をもたらす。(木村幹・神戸大大学院教授)

 ▽韓国側 歴史認識を接近させなければ両国の未来を平和的につくっていけない。問題を根源から議論する必要がある。(金度亨・延世大教授)

 【教科書制度】

 ▽日本側 教科書は子どもに特定のイデオロギーをたたき込む手段ではない。共有する通念を次世代に伝達する手段として作成することが急務だ。(山室氏)

 韓国の「反日教育」は本来、日本のかつての帝国主義思想への「防日」が目的だった。(井手弘人・長崎大准教授)

 ▽韓国側 「防日」から「反日」へ移り変わったという論旨は、韓国を理解しようとする真摯な努力の一環だ。しかし、韓国で反日教育が行われてきたという不当な前提がある。(辛珠柏・延世大教授)

 教科書検定は、韓国では基準が細かく定められているが、内容については執筆者の自律性が認められ、編さん方法の改善を重視する。日本では基準は簡略化されているが、学習指導要領などの形を通して事実上国家が内容の統制を図っている。(李讃煕・韓国教育開発院碩座研究委員)

 【教科書の記述内容】

 ▽日本側 文禄・慶長の役について、最近の日本の教科書は平板なトーンで歴史的事実を記述。韓国も、以前は民族の優越性を強調する傾向があったが、今は比較的冷静な記述となっている。それぞれの立場から脱却した視点や、新たな呼称が必要だ。(太田秀春・鹿児島国際大准教授)

 韓国は日本の憲法9条、天皇や首相が謝罪と反省に努力した事実を記述してほしい。双方は「隣国の現代史」の教科書を作るべきだ。(重村智計・早大教授)

 韓国の教科書が朝鮮民族の始祖とされる檀君の神話をそのまま認めるような記述をしているのは、資料考証に基づく結論なのか疑問だ。(井上直樹・京都府立大准教授)

 ▽韓国側 日本の学界が豊臣秀吉を評価するほど、韓国が侵略への警戒心を抱くのは自然だ。戦乱の記憶は生々しく鮮明な傷跡として残っている。正当化する口実を学問的に批判できず、日本の教科書に記しているのは問題だ。戦争責任の重みを認識できない。(玄明☆(吉を横に二つ並べる)・京畿高校教諭)

 日本では近代史を強国に成長する華やかな歴史として記す一方、朝鮮半島や中国大陸を侵略し、多くの人々に被害を与えたことの記述は消極的だ。(金度亨氏)

 日本の教科書の韓国についての記述の改善は97年版が頂点で、その後悪化。中心には右翼の政治勢力と「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がある。(辛珠柏氏)

 日本の教科書で渡来人は、古代王権に包摂された存在として機能的な側面が強調された。日本民族の主要構成員であり、古代国家を建設した開拓者との観点が必要だ。(延敏洙・東北亜歴史財団研究委員)

 

http://www.shikoku-np.co.jp/national/detailed_report/article.aspx?id=20100323000314&ref=rss

 

ほとんど新しい進展はないが、韓国人が、騒ぐ理由がわから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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