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



 카세씨는 일본이 기적의 발전을 완수한 원동력은, 에도시대에 기른 「덕의 정신이다」라고 단언해, 이 덕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저희들이 학교에서 배운 「에도시대」의 이미지와는 천지가 뒤집힐 정도의 평가의 차이로, 눈으로부터 비늘입니다.

 

  이하, 제1장 「덕이야말로 일본의 힘」으로부터, 「치안이 좋았던 에도」와「청결한 순환형 사회」에 대해 기술한 부분을 일부입니다만 소개합니다.이 책의 띠에는나가시마 시게오씨의 추천의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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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만명에게, 불과 12명의 동심과 300명여의 강인귀로하 당겨

 

 에도 만이 아니고, 전국에 도착해 있어 천민이, 치안이 놀라울 정도야 샀다.
 자주(잘) 에도는 100만 도시였다고 말해지지만, 인구는 100만명을 넘고 있었다.
 에도의 인구는 시대에 의해서 증감이 있었지만, 텐메이 6(1768) 년의 조사에 의하면, 무가와 읍인을 합해 136만 7870 다른 사람이었다.이 (안)중으로 읍민이 65%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에도말기의 연호 15(1844) 년에 읍민의 출생지에 도착하고 조사를 하고 있지만, 에도에서 태어난 사람이 40만 1521명에 대해서, 타처에서 출생 한 사람이, 15만 8321명이었다.양자를 가세하면, 대략 56만명이지만, 조사에 샌 사람이 꽤 있었다고 생각된다.

 

 에도는 무가가 사는 「무가지」라고, 읍민이 사는 「정지」, 신사 불각이 있는 「지샤지」로 나누어져 있었다.읍민은 무가지에 거주하는 것이, 할 수 없었다.

 

 잘 알려져 있도록(듯이), 남북 둘의 「에도시대 직급소」가 읍민을 수습하고 있었다.남북으로 봉행소가 있었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말하면 두 개의 시가 존재하고 있었다.「봉행」은 오늘의 시장에 상당한다.

 

 통칭을 「남 반도코로」 「북 반도코로」라고 불린 봉행소에는, 합해 322명의 상민들 공무원이라고 한 공무원이 일하고 있었다.이 수는 에도시대를 통해서, 변함없었다.시대에 의해서, 세 명의 봉행이 있었다.두 명의 봉행의 아래에서, 오늘이라면 관리직에 상당하는 「가세」가 합해 50명 있었다.그 아래에서, 「동심」이하, 372명이 일하고 있었다.

 

 게다가 양봉행소의 공무원은 월번제로 격월 교체해 일했다.두 개의 봉행소에는 언제나, 반수의 166명 밖에 채우지 않았었다.

 

 즉, 에도의 읍민 인구를 75만명으로서 166명의 공무원으로 충분했으니까, 상시, 읍인 4600명에게 한 명의 공무원으로 끝나고 있던 것이  된다.이 그 밖에, 지방으로부터 상가에 일하러 온 사람들이나, 객지벌이나, 소송등을 (위해)때문에에 체류 하고 있던 사람이 대부분 있었다.

 

 322명의 공무원 가운데, 64명이 사법과 경찰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경찰관에 해당되는 표행소 첨부 동심 「정회전」은, 에도시대를 통해서 양봉행소를 맞추고, 12명 밖에 없었다.

 

 정회전은 「상민들 동심」이라고도, 「마을 동심」들 불렸지만, 「핫초보리의 남편」으로서 알려진 각각이 자신의 수입 속으로부터, 5명 남짓의 「눈 밝혀」라고 하는 「언덕 끌어들이어」를 안고, 사적으로 사용했다.목명 하지는 「주문을 받으러 다니는 것」이라고도 불렸지만, 동심의 손끝으로서 뒤세계를 내정 하는 귀나 눈의 역할을 완수했다.

 

 무엇보다, 강인귀로 말하는 통칭은, 서민이 붙인 멸칭이었다.막허(주거지)의 화류계인 요시하라에 대해서, 사창지인 언덕 장소에서 정보를 모은 것으로부터 오고 있다.텔레비젼의 드라마로 「저는 강인 나무의 것」이라고 자칭하는 장면이 있지만, 잘못하고 있다.「여주인 주문받으러 다니는 것의 것」이라고 자칭했다.

한층 더 강인 나무가 각각 자기 부담으로, 5명 남짓의 조수에 해당되는 「아래 당겨」를 고용하고 있었다.강인간하인간, 정규의 포리는 아니다.

 

 동심도 격월에 근무했기 때문에, 강인과 하인 나무를 더해도, 150명에게 충선반 있어 경관에 의해서, 70만명 이상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읍민이 높은 자치 능력을 갖고, 공덕심이 극히 강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지만, 도쿄도의 인구가 1276만명(헤세이 19년)인데 대하고, 경시청에게는 4만 6천명이 근무하고 있다.도민 277 사람마다(남의 일)에 경찰관 한 명이라고 하는 계산이다.

 

 그런데 , 에도에서는 읍민 약 4천 사람마다(남의 일)에, 혼자서 충분했다.에도시대의 일본인은, 도덕성이 높았던 것이다.




 의례가 률 하는 청결한 순환형 사회

 

 의례가, 에도마치민의 생활을 률 하고 있었다.예절을 존중하고 있었던 것이, 사회에 질서를 주고 있었다.거래로조차, 신성한 행위에 승화했다.이러한 일은, 세계 속에서 일본에만 볼 수 있던 현상이다.

 

 「커튼」은 그 상징이었다.커튼은 노포를 가리켜 「오래된 상점이다」라고, 새로운 가게를 「커튼이 새롭다」라고 하도록(듯이), 상점 그 자체를 의미했다.커튼은 가게의 신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커튼은, 썬탠을 막는다든가, 단순한 눈 가림이나, 장식은 아니었다.신사의 신사앞 기둥문과 같이 「결계」를 나타내는 것이어, 그 안쪽이 거래를 수행하는 신성한 장소가 되고 있었다.결계는 종교 용어로, 신사의 신사앞 기둥문과 같이, 수행을 위해서 일정한 구역을 단락짓는 것이다.

 

 커튼은 짙은 감색인가, 람감이었다.한가운데에 가게의 표를 물들이고, 좌하에 옥호가 들어가 있었다.겉(표) 커튼은 신년을 맞이할 때마다 신조 되어 설날에 제물상에 올리고, 대원성취를 빈 데다가, 불을 하고 매장에 걸었다.

그처럼, 커튼은 신성한 것이었다.화재를 일으켰을 때에는, 우선 커튼을 꺼냈다.

 

 에도시대를 무대로 한 텔레비젼·드라마에, 황색이나, 복숭아색의 커튼이 나오지만, 너무 공부에 힘쓰지 않다.텔레비젼의 디렉터도, 오늘의 경솔인 인테리어·디자이너의 발상에 물들고 있고, 에도시대의 상인의 정신을 이해하고 있지 않다.

 

 상인은 「커튼을 더러움 않다」라고, 「커튼의 앞, 야쿠자인 물건은 팔리지 않는다」라고 하도록(듯이), 「진심」을 담아 장사했다.

 

 「열매」라고 써 「마코토」라고 읽게 했지만, 거짓말 거짓이 없다든가, 성실하고 속이는 벗기지 않는 진심을 의미했다.에도시대에는, 진심이 사람들의 생활을 률 하고 있었다.사람들의 생활은 언제나 「태양」이 지켜봐 해, 「 선조님」이 지켜 주시는 것이니까, 속일 수 없다.

 

 그렇지만, 물질 만능 주의에 빠진 오늘의 일본에서는, 진심라는 말 자체가 사어가 되어 있다.직공의 신분을 적시는 「출입 일본식 겉옷」이나 「일자리 일본식 겉옷」은, 추석과 저물 때(연말)에 상이나집으로부터 주어졌지만, 커튼과 같이 신성한 것이었다.

 

 텔레비젼·드라마에, 직공이 위세 좋게 일본식 겉옷을 입어 싸움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었다.일본식 겉옷을 벗는지, 옥호를 물들인 「표일본식 겉옷」을 반대입은 데다가, 싸움을 했다.

 

 무사에 있어서의 칼, 직공에게 있어서의 도구, 학문을 위한 책 등, 에도시대의 일본은, 일상생활 그 자체가, 신성한 것에 의해서 채워져 있었다.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생활 모습은 겸허한 것이 되었다.

 

 에도는, 생활 환경으로부터 봐도, 청결한 도시였다.돈·로드리고·데·비베로는, 에도의 「도로가 청결한 (일)것은, 몇 사람이나 이것을 밟아 바구니라면 라고 생각되는 만큼이다」라고, 그리고 있다.

 

 에도기의 일본인은, 물건을 허술하게 하지 않았다.그러니까, 버리는 것이 적었다.쓰레기를 각자가 자택까지 가지고 돌아갔다.

 

 무려, 에도기의 일본은, 벌써 에콜로지의 분야에 있어 헛됨이 없는, 순환형 사회를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현대의 일본인에 있어서, 에도의 사회는 많은 발상의 힌트를 주는 것이 틀림없다. (후략, P26-P31)

 

 


徳の国富論 加瀬英明

 

(*゚∀゚)っ



 加瀬氏は日本が奇跡の発展を成し遂げた原動力は、江戸時代に養った「徳の精神である」と言い切り、この徳の精神を失ってはならないと説きます。私達が学校で学んだ「江戸時代」のイメージとは天地がひっくり返るほどの評価の差で、目から鱗です。

 

  以下、第一章「徳こそ日本の力」から、「治安の良かった江戸」と「清潔な循環型社会」について記述した部分を一部ですが紹介します。この本の帯には長嶋茂雄氏の推薦の言葉が書か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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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万人に、わずか12人の同心と300人余の岡引きと下引き

 

 江戸だけではなく、全国についていえたが、治安が驚くほどよかった。
 よく江戸は100万都市だったといわれるが、人口は100万人を超えていた。
 江戸の人口は時代によって増減があったが、天明6(1768)年の調査によると、武家と町人を合わせて136万7870余人だった。このなかで町民が65%以上を、占めていた。

 

 天保15(1844)年に町民の出生地について調査が行われているが、江戸で生まれた者が40万1521人に対して、他所で出生した者が、15万8321人だった。両者を加えると、およそ56万人であるが、調査に漏れた者がかなりいたと思われる。

 

 江戸は武家が住む「武家地」と、町民が住む「町地」、神社仏閣がある「寺社地」に分かれていた。町民は武家地に居住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よく知られているように、南北二つの「町奉行所」が町民を治めていた。南北に奉行所があったから、行政的にいえば二つの市が存在していた。「奉行」は今日の市長に相当する。

 

 通称を「南番所」「北番所」と呼ばれた奉行所には、合わせて322人の町方役人といわれた役人が働いていた。この数は江戸時代を通じて、変わらなかった。時代によって、三人の奉行がいた。二人の奉行のもとに、今日だったら管理職に相当する「与力」が合わせて50人いた。その下で、「同心」以下、372人が働いていた。

 

 そのうえ両奉行所の役人は月番制で隔月交替して働いた。二つの奉行所にはいつも、半数の166人しか詰めていなかった。

 

 つまり、江戸の町民人口を75万人として、166人の役人で足りたのだから、常時、町人4600人に一人の役人で済んでいたことになる。この他に、地方から商家に働きにきた人々や、出稼ぎや、訴訟などのために滞留していた者が多くいた。

 

 322人の役人のうち、64人が司法と警察業務を担当していた。警察官に当たる表行所付同心「定廻り」は、江戸時代を通じて両奉行所を合わせて、12人しかいなかった。

 

 定廻りは「町方同心」とも、「町同心」ども呼ばれたが、「八丁堀の旦那」として知られたそれぞれが自分の収入のなかから、5人あまりの「目明かし」という「岡引き」を抱えて、私的に使用した。目明しは「御用聞」とも呼ばれたが、同心の手先として、裏世界を内偵する耳や目の役割を果たした。

 

 もっとも、岡引きという呼び名は、庶民が付けた蔑称だった。幕許(ぼっきょ)の花街であった吉原に対して、私娼地である岡場所で情報を集めたことからきている。テレビのドラマで「おいらは岡引きの」と名乗る場面があるが、誤っている。「お上御用聞きの」と名乗った。

さらに岡引きがそれぞれ自前で、5人あまりの助手に当たる「下引き」を雇っていた。岡引きも下引きも、正規の捕吏ではない。

 

 同心も隔月で勤務したから、岡引と下引きを加えても、150人に充たない警官によって、70万人以上の治安を維持していたのである。

これは、町民が高い自治能力をもち、公徳心がきわめて強かったことを物語っている。

 

 もちろん、単純に比較することはできないが、東京都の人口が1276万人(平成19年)であるのに対して、警視庁には4万6千人が勤めている。都民277人ごとに警察官一人という計算だ。

 

 ところが、江戸では町民約4千人ごとに、一人で足りていた。江戸時代の日本人は、道徳性が高かったのである。




 儀礼が律する清潔な循環型社会

 

 儀礼が、江戸町民の生活を律していた。礼節を重んじていたことが、社会に秩序を与えていた。商いですら、神聖な行為に昇華した。このようなことは、世界のなかで日本にだけ見られた現象である。

 

 「暖簾」はその象徴だった。暖簾は老舗を指して「暖簾が古い」とか、新しい店を「暖簾が新しい」というように、商店そのものを意味した。暖簾は店の信用を表すものだった。

 

 暖簾は、日焼けを防ぐとか、単なる目隠しや、飾りではなかった。神社の鳥居と同じように「結界」を示すものであり、その内側が商いを修行する神聖な場となっていた。結界は宗教用語で、神社の鳥居のように、修行のために一定の区域を区切ることである。

 

 暖簾は濃紺か、藍紺だった。真ん中に店の印を染め抜いて、左下に屋号が入っていた。表暖簾は新年を迎えるたびに新調され、元日に神棚に供えて、大願成就を祈ったうえで、切り火をして店頭に掛けた。

そのように、暖簾は神聖なものだった。火事を起こした時には、まず暖簾を持ち出した。

 

 江戸時代を舞台にしたテレビ・ドラマに、黄色や、桃色の暖簾がでてくるが、不勉強すぎる。テレビのディレクターも、今日の軽佻なインテリア・デザイナーの発想に染まっていて、江戸時代の商人の精神を理解していない。

 

 商人は「暖簾を汚さない」とか、「暖簾の手前、ヤクザな品は売れない」というように、「実意」をこめて商った。

 

 「実」と書いて「まこと」と読ませたが、うそ偽りがないとか、誠実で欺くむかないまごころを意味した。江戸時代には、実意が人々の生活を律していた。人々の暮らしはいつも「お天道様」が見守っていたし、「ご先祖様」が守ってくださるものだから、誤魔化すことはできない。

 

 しかしながら、物質万能主義に陥った今日の日本では、実意という言葉自体が死語になっている。職人の身分をしめす「出入り半纏」や「職半纏」は、盆と暮れに商や家から贈られたが、暖簾と同じように神聖なものだった。

 

 テレビ・ドラマに、職人が威勢よく半纏をまとって喧嘩する場面がでてくるが、そのようなことはありえなかった。半纏を脱ぐか、屋号を染めた「印半纏」を裏返しにして着たうえで、喧嘩をした。

 

 武士にとっての刀、職人にとっての道具、学問のための本など、江戸時代の日本は、日常生活そのものが、神聖なものによって満たされていた。だから自然に、暮らしぶりは謙虚なものとなった。

 

 江戸は、生活環境から見ても、清潔な都市だった。ドン・ロドリゴ・デ・ビベロは、江戸の「道路が清潔なことは、何人もこれを踏まざるならんと思われるほどである」と、描いている。

 

 江戸期の日本人は、物を粗末にしなかった。だから、捨てる物が少なかった。ゴミを各自が自宅まで持って帰った。

 

 なんと、江戸期の日本は、すでにエコロジーの分野において無駄がない、循環型社会を実現していたのだった。現代の日本人にとって、江戸の社会は多くの発想のヒントを与えてくれるにちがいない。 (後略、P26-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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