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가 ‘동족’이고 일본은 ‘이민족’인 국사관에서는 의아하겠으나 660년대 백제인의 혈맹은 일본
한반도 역사 전체를 통째로 봐도 ‘대대적 이산(離散)의 시대’라고 할 만한 시기는 두 번 찾아온다. 전통국가가 멸망하고 각종 고통 속에서 근대국가가 탄생되는 19세기 말부터는 근대의 ‘이산의 계절’이었고, 전란의 화염 속에서 한반도의 대부분이 한 고대국가로 뭉쳐갔던 7세기는 고대의 ‘이산의 계절’이었다. 근대의 이산 경험에 대해 우리가 통상 ‘비극’이라고 보는 이유 중 하나는, 일제의 징병과 징용 등 비자발적 이산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7세기의 ‘대(大)이산’에 대해서도 같은 측면에서 “신라에 의한 한반도 대부분의 통일을 수반하는 비극”이라고 이야기할 만하다.
|
||||||
백제인의 절대악은 ‘국망의 원흉’ 신라
통일신라의 굴기(屈起)에 수많은 한반도 주민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신라의 동맹국인 당나라에 의한 강제 이향(離鄕)이었다. 예컨대 신라의 최대 라이벌인 고구려의 멸망(668) 이후에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인들을 2만8200호나 끌고 가 당나라의 여러 지역에 분산 정착시켰다는 기록이 있다(<구당서> 권5). 한 호(戶·대가족)가 적어도 5명 이상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적어도 15만 명 정도의 고구려인들이 당나라 내지로 끌려갔다고 봐야 한다. 그중 일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가를 받았다고 하지만(<신당서> 권220) 수만 명의 고구려인들이 고향을 평생 보지 못한 채 제국의 질서에 순응해야만 했다. 백제도 660년 멸망 직후에 1만2천 명 정도의 포로가 당나라에 끌려가고 말았다(<삼국사기> 권5).
물론 당나라로 강제 유입된 한반도 주민들을 불쌍하게만 여길 필요는 없다. 개방적 다종족 제국 질서 속에서 어쩌면 고국보다 생계유지나 신분상승이 더 쉬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 제국을 위해 파미르고원을 넘어 오늘날의 타슈켄트 지역을 정복한 고구려 계통의 장수 고선지(高仙芝·?~755)를 비롯해 중국에서 출세한 고구려 유민의 사례들은 꽤 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당나라에 의한 강제 사민(徙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아픔을 수많은 한반도 주민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7세기 한반도인들의 이산은 20세기의 이산과 마찬가지로 꼭 타의로만 이뤄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절대악이라고 여기던 일제 식민통치보다 차라리 중국이나 미국, 러시아 등 ‘덜 나쁜’ 외세의 권역 내에서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이는 길을 택하지 않았던가. 많은 백제 귀족들도 660년의 국망 이후 이와 같은 정치망명을 갔다. 이들에게 절대악은 백제 국망의 원흉인 신라였다. 그리고 조상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망명지는 일본, 즉 일본열도였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으랴. 다만 호례성에 가서 일본군 장수들과 논의해야 할 일을 상의하자.”
항구로 보이는 호례성에 가서 일본 구원군의 장수들과 상의할 일이란 처자를 데리고 도일하는 방법이었다. 백제의 여명마저 다 끊어졌다는 걸 확인한 백제 유신(遺臣)들에게 최후의 선택으로 도일 망명이 생각됐던 것은 절대 우연은 아니었다. 그만큼 백제와 일본이 역사·문화적으로 가까웠던 것이고, 또 그만큼 ‘혈맹 일본’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강했을 것이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이 기대만큼은 적중했다. 그들은 일본에 가서도 어느 정도 신분 유지가 되고 백제인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살 수 있었다.
신라보다 차라리 일본을 선택한 백제인들은 대체로 누구였던가?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여러 이름 가운데 좌평(佐平)이라는 최고 관등을 지닌 왕족 여자신(餘自信)이 눈에 띈다.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유명한 여자진(餘自進)과 이명동인으로 보이는 그는, 일본에서 다카노 미야쓰코(高野造)라는 유명 가문의 선조가 됐다. 이들이 오늘날 오카야마현 쓰야마시 다카노 지역에서 세거하게 됐는데, 그 지역의 유서 깊은 신사인 다카노 신사는 바로 이 가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거기에서 지금도 다카노 미야쓰코 가문의 조상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여자신과 함께 백제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또 한 명의 귀족은 귀실(鬼室)이라는 유명 가문의 대표자 격인, 귀실집사(鬼室集斯)라는 인물이었다. 그가 단순히 처자만 데리고 간 것도 아니고 400여 명의 ‘백제 남녀’를 대동하고 갔다는 기록은 <일본서기>(권27)에서 전해진다. 그들이 가문의 예속민(노비 등)이었는지, 아니면 전란을 피하려는 일반 양민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백제 귀족들의 도일 망명이 대규모 집단이주의 성격을 지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귀실집사는 백제 부흥운동의 영웅인 귀실복신 장군의 가까운 친척이어서 그랬는지 일본 정권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일본에서 받은 그의 관품은 12위인 소금하(小錦下)였다. 정치적 기반이 없다시피 한 망명객 출신으로서는 상당한 출세라고 봐야 한다. 거기에다 그는 학직도(學職頭)라는 관직을 얻어 유교적 교육기관의 책임자가 되는데, 그만큼 소양과 학식을 인정받았다
한국에는 백제 왕족의 자손은 없습니다. 신라 왕족에게 몰살 되거나 중국이나 일본으로 귀화 해버렸습니다.
여기 한국인중에서 백제 왕족의 후손이 있다면 증거를 첨부해 나는 백제 왕족의 후손이다! 라고 나오면 좋다
게다가 지금 한국인의 대부분 99% 신라의 자손뿐입니다. 백제는 반도의 역사이지만 반도에 백제 왕족의 후손은 1명도 없다.
百済と新羅が ‘同族’で倭国は ‘異民族’である国史官では怪しげだが 660年代百済人の血盟は日本
韓半島歴史全体を丸ごと見ても ‘大大的離散(離散)の時代’と言うに値する時期は二度尋ねて来る. 伝統国家が滅亡して各種苦痛の中で近代国家が誕生される 19世紀末からは近代の ‘離散の季節’だったし, 戦乱の火炎の中で韓半島の大部分が一古代国家でムングチョガッドン 7世紀は古代の ‘離散の季節’だった. 近代の離散経験に対して私たちが通常 ‘悲劇’と見る理由の中で一つは, 日製の徴兵と徴用などビザ発赤離散が多くのパーセントを占めるからだ. 事実, 7世紀の ‘台(大)離散’に対しても同じ側面で “新羅による韓半島大部分の統一を伴う悲劇”と話すに値す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