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王武의 上表文이란 AD478년에 倭王武가 송나라 황제에게 쓴 편지인데, 古代 일본인이 직접 쓴 글을 원문 그대로 감상할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자료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지식을 그림과 함께 설명한 뒤, 원문 감상을 해 보겠습니다.
倭王武の 上表文と言う(のは) AD478年に 倭王武が宋の国皇帝に書いた手紙なのに, 古代 日本人が直接書いた文を原文そのまま鑑賞することができる非常に稀な資料です.
この内容を理解するための 事前 知識を絵とともに説明した後, 原文感想をして見ます.
선박이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1) 식량 2) 식수 3) 방향감각의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겠지요?
선원들이 먹을 식량이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며, 바다 가운데에서 방향을 찿을 수 있어야 합니다.
船舶が航海をするためには 1) 食糧 2) 食水 3) 方向感覚の三種類要素が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船員たちの食べる食糧がなければならないし, 水がなければならないし, 海の中で方向を捜すべきであります.
따라서, 선박이 클수록 식량과 식수저장 능력이 뛰어나고 풍랑에 잘 견디므로 원거리 항해가 가능해지는데, 인류가 이런 거대 선박제조능력을 갖춘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여기에 나침판의 발명이 첨가됨으로써 15세기에 비로소 유럽인들에 의해 원거리항해가 가능해집니다.
したがって, 船舶が大きいほど食糧と 食水保存能力がすぐれて風浪によく耐えるので遠距離航海が可能になるのに, 人類がこんな巨大船舶製造能力を取り揃えたことは 15世紀に至ったからです.
ここに羅針版の発明が添加されることで 15世紀に初めてヨーロピアンたちによって遠距離航海が可能になります.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한국과 일본 사이를 오고가던 선박은 이런 모습인데, 식량과 식수가 떨어지면 육지로 귀환해서 보급을 받아야 하며, 육지로부터 멀어지면 방향감각을 상실해서 항해가 불가능해집니다.
しかし, 今から 1600年前韓国と日本の間を行き来した船舶はこんな姿なのに, 食糧と飲み水が落ちれば陸地に帰還して普及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し, 陸地から遠くなれば方向感覚を喪失して航海が不可能になります.
따라서, 고대의 항해는 언제나 연안을 따라 가며 항구에 들러 보급을 받고 쉬었다 다시 출발하는 이런 모습인데, 결과적으로 항구를 차지하는 자가 항로를 차지하게 됩니다.(왜냐하면, 보급을 받지 못하면 항해가 불가능하므로)
したがって, 古代の航海はいつも沿岸に付いて行って港に立ち寄って普及を受けて休んだまた出発するこんな姿なのに, 結果的に港を占める者が航路を占めるようになります.(なぜなら, 普及を受け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航海が不可能なので)
그림처럼 교역로는 모두 백제와 고구려의 항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백제는 이 무역로를 독점하여 상당한 富를 축척하고, 이 富를 바탕으로 열도의 지배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독점은 고구려와의 관계가 원만했을 때까지입니다. (왜냐하면, 항로가 고구려도 거쳐야 하기 때문)
絵のように交易路は皆百済と高句麗の港を通さ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百済はこの貿易路を独占して相当な 富を縮尺して, この 富を土台で列島の支配権を占めるようになります.
しかし, そんな独占は高句麗との関係が円満だった時までです. (なぜなら, 航路が高句麗も通さ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
그럼 백제의 이런 무역독점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비슷한 사례로, 11~13세기에 동서양의 중계무역을 독점했던 ARABIA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아랍 상인들은 뛰어난 항해술로 동방의 교역품을 유럽에 팔아 막대한 차익을 남겼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이웃 국가들의 빈곤을 초래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동양의 실크나 비단 등 고가품 한 개는 그 희소가치 때문에 유럽의 밀, 옥수수 등 유럽인들의 필수품 수백개와 교환됨으로써, 이웃국가들의 국부가 유출되고 장기적으로 이웃 국가들은 점점 가난해지는 현상이 초래됩니다.
이런 유럽인들의 불만이 십자군 전쟁으로 나타났고(=십자군 전쟁은 명목상 종교전쟁이지만 실상은 중동의 富를 빼앗기 위한 약탈전쟁이었음) 십자군 전쟁이 실패하자 유럽인들은 직접 동양과 교역하기 위한 항로를 찾아나선 것이 Columbus의 신대륙 발견입니다.
それでは百済のこんな貿易独占がどんな結果を生んだだろうか?
似ている事例で, 11‾13世紀に東西洋の中継貿易を独占した ARABIAを例であげることができます. 当時アラブ商人たちはすぐれた航海術で東方の交易品をヨーロッパに売って莫大な差益を残したが, これは結果的に隣り国々の貧困をもたらします.
易しく説明すれば, 東洋のシルクや陶磁器など高価品一つはその希少価値のためヨーロッパの小麦, とうもろこしなどヨーロピアンたちの必需品数百個と交換されることで, 隣り国家たちの 国富が流出されて長期的に隣り国々はますます貧乏になる現象が招来されます.
こんなヨーロピアンたちの不満がクルーセード戦争で現われたし(=クルーセード戦争は名目上宗教戦争だが実際は中東の 富を争取するための掠奪戦争です.) クルーセード戦争が失敗するとヨーロピアンたちは直接東洋と交易するための航路を探して出たのが Columbusの新大陸発見です.
백제가 무역을 독점할수록 백제는 점점 부유해지고, 이웃국가들은 점점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데, 신라가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방법은 그림의 파란색 지역을 빼앗는 방법 뿐입니다.
이 파란색 지역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고대 한반도에서 삼국간의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후에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원인입니다.
百済が貿易を独占するほど百済はますます富裕になって, 隣り国家たちはますます貧乏になるしかないのに, 新羅が中国と直接交易する方法は絵の青色地域を奪う方法だけです.
この青色地域を争取するための戦争が古代韓半島で三国間のお互いに死んで殺す戦争の原因になったし, 後に新羅が百済を滅亡させた原因です.
앞에서 언급한 청색 지역에서의 전쟁은 최초에 고구려가 시작합니다.
AD 5세기 중반부터 고구려는 그 지역을 공격하는데, 위협을 느낀 백제의 왕은 임신한 자신의 처를 남동생과 함께 열도로 피신시킵니다.
前で言及した青色地域での戦争は最初に高句麗が始めます.
AD 5世紀中盤から高句麗はその地域を攻撃するのに, 脅威を感じた百済の王は姙娠した自分の妻を弟と一緒に列島で身を避けらせます.
임신중인 왕의 젊은 처는 열도로 가던 도중에 가카리시마라는 섬에서 아이를 낳는데, 후에 그가 백제의 무녕왕이 됩니다.
사진속의 현재 가카리시마의 주민이 “한국에서 건너왔는데 지나가다가 산기가 있어서 여기에 배를 세우고 동굴속에서 출산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姙娠中の王の若い妻は列島に行った途中にがカリシマという島で子供を生むのに, 後に彼が百済の武寧王になります.
写真の中の現在がカリシマの住民が “韓国から渡って来たが過ぎ去っている途中産気があってここにお腹を止めて洞窟の中で出産したと聞きました”と言っています.
그 섬에는 아직도 이런 표시가 남아 있습니다.
その島にはまだこんな表示が残っています.
그로부터 14년 뒤인 Ad475년, 백제의 수도는 고구려군에게 함락되고, 왕과 왕비, 모든 왕자들이 고구려군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군대는 고개를 숙여 禮를 한번 갖춘 뒤, 뒷산으로 끌고가 모두 처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それから 14年後の Ad475年, 百済の首都は高句麗軍に陷落されて, 王と王妃, すべての王子たちが高句麗軍隊に殺されます. 日本書紀によれば, 高句麗軍隊は首を下げて 礼を一度取り揃えた後, 後方の山で連れて行って皆悽惨に殺したと言います.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인 AD478 年에 중국의 宋나라 王에게 倭國으로부터 書信이 하나 도착합니다.
發信者는 <倭王武>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세히 감상하고자 하는 <倭王武>의 상표문입니다.
ところが, それから 3年後の AD478 年に中国の 宋国 王に 倭国から 書信が一つ到着します.
発信者は <倭王武>になっています.
これが私たちが詳らかに鑑賞しようとする <倭王武>のサングピョムンです.
=============================================================================================
여기까지가 <倭武王>의 上表文을 자세히 번역하고 감상하기 위한 역사적 事前 지식입니다.
본격적인 上表文 해석은 2편에서 시작하겠습니다.
ここまでが <倭武王>の 上表文を詳らかに翻訳して鑑賞するための歴史的 事前 知識です.
本格的な 上表文 翻訳及び解釈は 2編で始めます.
倭王武の 上表文と言う(のは) AD478年に 倭王武が宋の国皇帝に書いた手紙なのに, 古代 日本人が直接書いた文を原文そのまま鑑賞することができる 非常に稀な 資料です.
が内容を 理解するための辞書知識を絵とともに説明した後, 原文感想をして見ます.
倭王武の 上表文と言う(のは) AD478年に 倭王武が宋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