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일본은 침략 국가였는가
타모가미 토시오


 아메리카 합중국 군대는 일·미 안전 보장 조약에 의해 일본내에 주둔하고 있다.이것을 미국에 의한 일본 침략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2국간에 합의된 조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 나라는 전쟁 전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를 침략했다고 말해지지만, 실은 일본군의 이러한 나라에 대한 주둔도 조약에 근거한 것인 것은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은 19 세기의 후반 이후,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 군을 진행시키게 되지만 상대국의 승낙을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을 진행시켰던 적은 없다.현재의 중국 정부로부터 「일본의 침략」을 집요하게 추구되지만, 우리 나라는 청일 전쟁, 러일 전쟁등에 의해서 국제법 카미아이 법적으로 중국 대륙에 권익을 얻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조약등에 근거해 군을 배치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압력을 가해 조약을 무리하게 체결시켰으니까 조약 그 자체가 무효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옛날도 지금도 다소의 압력을 수반하지 않는 조약 등 존재했던 적이 없다.

 이 일본군에 대해 장개석 국민당은 빈번히 테러 행위를 반복한다.해외주재 일본인에 대한 대규모 폭행, 참살사건도 반복해 발생한다.이것은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미군의 요코타 기지나 요코스카 기지 등에 자위대가 공격을 걸어 미국 군인 및 그 가족등을 폭행, 참살하도록(듯이) 것이며, 도저히 허용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대해 일본 정부는 참을성이 많게 평화를 추구하지만, 그때마다 장개석에게 배신당하는 것이다.실은 장개석은 코민테른에 작동되고 있었다.1936 년의 제2 차 국공 합작에 의해 코민테른의 손끝인 모택동 공산당의 게릴라가 국민당내에 다수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다.코민테른의 목적은 일본군과 국민당을 싸우게 해 양자를 피폐시켜, 최종적으로 모택동 공산당에 중국 대륙을 지배시키는 것이었다.우리 나라는 국민당이 거듭되는 도발에 결국 다 참을 수 없어져 1937 년 8 월 15 일,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시나군의 폭려(팔 수 있는 있어)를 응징(나름 나비) 해 이는 남경 정부의 반성을 재촉하기 때문에(위해), 지금 단호인 조치를 취한다」라고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우리 나라는 장개석에 의해 중일 전쟁에 질질 끌어 들여진 피해자인 것이다.

 1928 년의 장작림 열차 폭파 사건도 관동군의 조업이라고 오랫동안 말해져 왔지만, 근래에는소련정보 기관의 자료가 발굴되어 적어도 일본군이 했다고는 단정할 수 없게 되었다.「마오(아무도 몰랐던 모택동)(윤·치안, 코단샤)」, 「노랑 후미오의 대동아전쟁 긍정론(노랑 후미오, 왁크 출판)」및 「일본이야, 「역사력」을 닦을 수 있다(사쿠라이좋아 개편, 문예춘추)」등에 의하면, 최근에는 코민테른의 조업이라고 하는 설이 지극히 유력하게 되고 있다.중일 전쟁의 개시 직전의 1937 년 7 월 7 일의 려구교사건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일본의 중국 침략의 증거같이 말해져 왔다.그러나 지금은, 도쿄 재판의 한중간에 중국 공산당의 유소기가 서쪽의 기자와의 기자 회견에서 「려구교의 장치인은 중국 공산당에서, 현지 지휘관은 이 나였다」라고 증언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고 있는 「대동아 해방전쟁(이와마 히로시, 이와마 서점)」.

 

만약 일본이 침략 국가였다는 것이라면,

당시의 열강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침략 국가가 아니었던 나라는 어딘가묻고 싶다.

 

다른  나라가 했기 때문에 일본도 해도 좋다고 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지만, 일본만이 침략 국가라고 하는 도리도 없다.

 우리 나라는 만주나 한반도나 대만도 일본 본토와 같이 개발하려고 했다.당시 열강이라고 하는 나라안에서 식민지의 내지화를 도모하려고 한 나라는 일본뿐이다.우리 나라는 타국이라는 비교로 말하면 지극히 온건한 식민지 통치를 했던 것이다.만주제국은, 성립 당초의 1932 년 1 월에는 3 천만인의 인구였지만, 매년 100 만명 이상이나 인구가 계속 증가해 1945 년의 종전시에는 5 천만인에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의 인구는 왜 폭발적으로 증가했는가.그것은 만주가 풍부하고 치안이 좋았으니까이다.

침략이라고 하는 행위를 하는데 사람이 모일 리가 없다.

 

농업 이외에 거의 산업이 없었던 만주의 황야는, 불과 15년간에 일본 정부에 의해서 활력 있는 공업국가로 다시 태어났다.한반도도 일본 통치하의 35 년간에 1천 3 백만명의 인구가 2천 5 백만명과 약 2 배로 증가하고 있는 「조선 총독부 통계연감」.일본 통치하의 조선도 풍부하고 치안이 좋았던 증거이다.전후의 일본에 있어서는, 만주나 한반도의 평화로운 생활이, 일본군에 의해서 파괴되었는지와 같이 말해지고 있다.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노력에 의해서, 현지의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압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또 생활수준도 현격히 향상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만주나 한반도나 대만에 학교를 많이 구조 현지인의 교육에 힘을 썼다.도로, 발전소, 수도 등 생활의 인프라도 많이 남기고 있다.또 1924 년에는 조선에 경성 제국대학, 1928 년에는 대만에 타이뻬이 제국대학을 설립했다.일본 정부는 메이지 유신 이후 9개의 제국대학을 설립했지만, 경성 제국대학은 6번째 , 타이뻬이 제국대학은 7번째에 만들어졌다.그 후 8번째가 1931 년의 오사카 제국대학, 9번째가 1939 년의 나고야 제국대학이라고 하는 순서이다.

 

무려 일본 정부는 오사카나 나고야보다 먼저 조선이나 대만에 제국대학을 만들고 있다.

 

또 일본 정부는 한국인이나 중국인도 육군 사관 학교에의 입교를 인정했다.전후 마닐라의 군사재판으로 사형이 된 조선 출신의 홍사익(혼사이크)이라고 하는 육군 중장이 있다.이 사람은 육군 사관 학교 2 6 기생으로, 이오지마에서 용명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과 동기생이다.조선명인 채로 제국 육군의 중장에게 영진 한 사람이다.또 그 1기 후배에게는 금(킨) 주석원(소그) 대령이 있다.중일 전쟁때, 중국에서 대대장이었다.일본병 약 1천명을 인솔해 몇백년도 계속 학대받은 모토무네주국의 중국군을 축 가라앉혔다.그 군공 현저한 것에보다 일본왕 금 결실 훈장을 받고 있다.물론 창씨개명 등 하고 있지 않다.중국에서는 장개석도 일본의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해 니가타의 타카다의 연대에서 대  교육을 받고 있다.1 기 후배로 장개석의 참모로 무슨응흠(카오우킨)도 있다.

 이 왕조의 마지막 전하인 리은(이운) 전하도 육군 사관 학교의 2 9 기의 졸업생이다.리은(이운) 전하는 일본에 대한 인질과 같은 형태로 1 0세 때에 일본에 올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일본 정부는 전하를 왕족으로서 정중하게 대우해, 전하는 학습원에서 배운 뒤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셨다.육군에서는 육군 중장에게 영진 되어 활약하셨다.이 리은(이운) 전하의 왕비가 되어진 것이 일본의 나시모토 미야카타자(마사코) 비전하이다.이 분은 쇼와 천황의 왕비 후보인 고귀한 분이다.

 

만약 일본 정부가 이 왕조를 보낼 생각이라면 이러한 고귀한 분을 리은(이운) 전하의 아래에서 시집가게 할 것은 없었다일 것이다.

 

덧붙여서 궁내성은 두 명을 위해서 1930 년에 새 주택을 건설했다.현재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별관이다.또 청조 마지막 황제 또 만주 제국 황제에서 만난 부의(후기) 전하의 제군인 부(후) 걸(구멍) 전하의 아래에서 시집가진 것은, 일본의 화족 사가가의 사가 히로시 비전하이다.

 이것을 당시의 열강이라고 하는 나라들이라는 비교로 생각해 보면 일본의 만주나 조선이나 대만에 대한 깊은 생각은, 열강의 식민지 통치와는 완전히 차이가 나는 것에 깨달을 것이다.영국이 인도를 점령했지만 인도인을 위해서 교육을 줄 것은 없었다.인도인을 영국의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도 않았다.물론 영국의 왕실에서 인도로 시집가게 하는 것 등 생각할 수 없다.이것은 네델란드, 프랑스, 미국등의 나라들에서도 같은 것이다.

 

한편 일본은 제2차 대전 전부터 5족쿄와를 주창해

다이와, 조선, 한, 만주, 몽고의 각 민족이 뒤섞여 사이 좋게 사는 것을 꿈에 그리고 있었다.

 

인종차별을 당연이라고 생각되고 있던 당시에 있어 획기적인 것이다.제1차 대전 후의 파리 강화 회의에 대하고, 일본이 인종차별철폐를 조약에 쓰는 것을 주장했을 때, 영국이나 미국에서 일소에 붙여졌던 것이다.현재의 세계를 보면 당시 일본이 주장해 있었던 대로의 세계가 되어 있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청나라는 1900 년의 요시카즈단 사건의 사후 처리를 재촉당해 1901 년에 우리 나라를 포함한 11 개국과의 사이에 요시카즈단 최종 의정서를 체결했다.그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는 청나라에 군대 주둔권을 획득해 당초 2 600 명의 군사를 둔 「려구교사건의 연구(진쿠니히코, 도쿄대학 출판회) 」.또 1915 년에는 원세개정부와의 4 개월에 걸치는 교섭의 스에, 중국의 말도 넣고, 이른바 대 화 21 조목의 요구에 대해 합의했다.이것을 일본의 중국 침략의 시작이라든가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요구가, 열강의 식민지 지배가 일반적인 당시의 국제 상식에 비추고, 그만큼 이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중국도 한 번은 완전하게 승낙해 비준했다.그러나 4 년 후의 1919해, 파리 강화 회의에 열석이 용서된 중국이, 미국의 지지로 대화 21 조목의 요구에 대한 불만을 말하게 된다.그런데도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일본의 말을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일본사에서 본 일본인·쇼와편(와타나베 쇼우이치, 상사)」.

 

또 우리 나라는 장개석 국민당과의 사이라도 합의를 얻지 않고 하고 군을 진행시켰던 적은 없다.

항상 중국측의 승인아래에 군을 진행시키고 있다.

 

1901 년부터 놓여지게 된 북경의 일본군은, 36 년 후의 려구교사건때조차 5600 명 밖에 되지 않은 「려구교사건의 연구(진쿠니히코, 도쿄대학 출판회) 」.이 때 북경 주변에는 수십만의 국민당군이 전개하고 있어, 형태 위에서도 침략에는 거리가 멀다.폐 하라 키쥬우로우 외무 대신에게 상징되는 대 중국 융화 외교가 우리 나라의 기본방침이며, 그것은 지금도 옛날도 변하지 않다.

 그런데 일본이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를 침략했기 때문에, 결국 일·미 전쟁에 돌입해 3 백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전을 맞이하게 된, 일본은 만회가 붙지 않는 잘못을 범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그러나 이것도 지금은, 일본을 전쟁에 질질 끌어 들이기 위해서, 미국에 의해서 신중하게 설치된 함정이었던 것이 판명되어 있다.실은 미국도 코민테른에 작동되고 있었다.베노나파일이라고 하는 미국의 공식 문서가 있다.미국 국가 안전 보장국( N S A )의 홈 페이지에 실려 있다.방대한 문서이지만, 월간 정론 헤세이 18 년 5월호에 아오야마 학원대학의 후쿠이 조교수(당시 )가 내용을 요약해 소개해 주고 있다.베노나파일이란, 코민테른과 미국에 있던 에이전트와의 교신 기록을 집계한 것이다.미국은 1940 년부터 1948 년까지의 8년간 이것을 모니터 하고 있었다.당시 소련은 1 회 한정의 암호서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해독할 수 없었다.거기서 미국은, 일·미 전쟁의 한중간인 1943 년부터 해독 작업을 개시했다.그리고 무려 37 년이나 걸리고, 레이건 정권을 할 수 있기 직전의 1980 년에 이르러 해독 작업을 끝냈다고 하기 때문에 놀라움이다.그러나 당시는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만났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기밀 문서로 했다.그 후 냉전이 종료해 1995 년에 기밀이 해제되어 일반적으로 공개되게 되었다.

 

이것에 의하면 1933 년에 태어난 미국의 프랭클린·루즈벨트 정권안에는 3 백명의 코민테른의 스파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 올라 채운 것은 재무성 넘버 2의 재무 차관 하리·화이트였다.하리·화이트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 헐·노트를 쓴 장본인이다고 말해지고 있다.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모겐소-재무 장관을 통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움직여, 우리 나라를 일·미 전쟁에 몰아넣어 간다.당시 루즈벨트는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인식하지 않았다.그는 하리·화이트등을 통해서 코민테른의 공작을 받아 전투기 100 기로부터 되는 후라이잉타이가스를 파견하는 등, 일본과 싸우는 장개석을, 그늘에서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었다.진주만 공격에 앞서는 1개월반도 전부터 중국 대륙에 있어 미국은 일본에 대해, 은밀하게 항공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공약으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일·미 전쟁을 개시하려면  아무래도 외관상 일본에 제1격을 끌게 할 수 있을 필요가 있었다.일본은 루즈벨트가 건 함정에 빠져 진주만 공격을 결행하게 된다.그런데 일·미 전쟁은 피할 수 있 것일까.일본이 미국의 요구하는 헐·노트를 받아 들이면 일시적으로하라 일·미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일시적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해도, 당시의 약육강식의 국제 정세를 생각하면, 미국으로부터 제2, 제3 의 요구가 나왔을 것이다 (일)것은 용이하게 상상이 붙는다.

 

결과적으로 현재에 사는 우리는 백인 국가의 식민지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가능성이 대이다.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나 세탁기나 파소콘 등은 방치하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양성한다.그러나 인류의 역사 중(안)에서 지배, 피지배의 관계는 전쟁에 의해서만 해결되어 왔다.강자가 스스로 양보하는 것 등 있을 수 없다.싸우지 않는 사람은 지배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대동아전쟁의 뒤,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이 백인 국가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게 되었다.인종 평등의 세계가 도래해 국가간의 문제도 대화에 의해서 해결되게 되었다.그것은 러일 전쟁, 그리고 대동아전쟁을 싸운 일본의 힘에 의하는 것이다.

 

만약 일본이 그 때 대동아전쟁을 싸우지 않으면, 현재와 같은 인종 평등의 세계가 오는 것이 앞으로 백년, 2 백년 늦었을지도 모른다.그러한 의미로 우리는 일본의 나라를 위해서 싸운 선인,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영령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그 덕분으로 오늘 우리는 평화롭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한편으로 대동아전쟁을 「그 어리석고 못난 전쟁」등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전쟁 등 하지 않아도 오늘의 평화롭고 풍부한 사회를 실현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당시의 우리 나라의 지도자는 모두 바보같았다고 말하지 않아(뿐)만이다.하지 않아도 괜찮은 전쟁을 해 많은 일본국민의 생명을 빼앗았다.죽은 사람은 모두 개죽음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일)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이 안다.현재에 있어 조차 한 번 결정된 국제 관계를 뒤집는 것은 지극히 곤란하다.일·미 안보 조약에 근거해 미국은 일본의 수도권에도 훌륭한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이것을 일본이 돌려주어 줘라고 해도 그렇게 간단하게는 되돌아 오지 않는다.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북방 시시마는 6 0연이상 불법으로 점거된 채로 있다.타케시마도 한국의 실행 지배가 계속 되고 있다.

 도쿄 재판은 그 전쟁의 책임을 모두 일본에 꽉 누르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인드 컨트롤은 전후 63 년을 거쳐도 아직 일본인을 유혹할 수 있고 있다.

 

일본의 군은 강해지면 반드시 폭주 해 타국을 침략하는, 그러니까 자위대는 가능한 한 움직이기 어렵게 해 두자고 하는 것이다.자위대는 영역의 경비도 할 수 없는, 집단적 자위권도 행사 할 수 없는, 무기의 사용도 지극히 제약이 많은, 또 공격적 병기의 보유도 금지되고 있다.여러 나라의 군과 비교하면 자위대는 안자익 찬미해 동작할 수 없게 되어 있다.이 마인드 컨트롤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우리 나라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는 체제가 언제가 되어도 완성하지 않는다.미국에 지켜 줄 수 밖에 없다.미국에 지켜 주면 일본의 미국화가 가속한다.일본의 경제도, 금융도, 상관행도, 고용도, 사법도 미국의 시스템에 가까워져 간다.개혁의 온퍼레이드로 우리 나라의 전통 문화가 부수어져 간다.일본에서는 지금 문화대혁명이 진행중인 것은 아닌가.일본국민은 2 0년전과 지금과는 어느 쪽이 마음이 편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일본은 좋은 나라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나는 일·미 동맹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양호한 일·미 관계가 필수이다.단 일·미 관계는 필요한 때에 서로 돕는 양호한 부모와 자식 관계와 같은 것임이 바람직하다.아이가 언제까지나 부모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는 관계는 개선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체제를 정돈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미연에 억제하는 것과 동시에 외교교섭의 후원자가 된다.여러 나라에서는, 극히 보통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것이 우리 나라에 있고는 국민에게 이해가 두루 미치지 않는다.지금 더 대동아전쟁으로 우리 나라의 침략이 아시아제국에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아시아제국이 대동아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타이에서, 버마에서, 인도에서, 신거 포로, 인도네시아에서, 대동아전쟁을 싸운 일본의 평가는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에 직접 접하고 있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일본군에 높은 평가를 주어 일본군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선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일도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일본군의 군대의 규율이 타국과 비교해 여하에 엄정했는지 많은 외국인의 증언도 있다.우리 나라가 침략 국가였다 등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누명이다.

 일본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된 역사와 뛰어난 전통을 가지는 훌륭한 나라다.우리는 일본인으로서 우리 나라의 역사에 대하고 자랑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사람은 특별한 사상이 주입되지 않는 한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나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것이다.일본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을 열심히 보고 가는 것만으로 이 나라가 실시해 왔던 것이 훌륭한 것인 것을 알 수 있다.거짓말이나 조작은 전혀 필요가 없다.개별 사상에 관심을 가지면 악행이라고 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그것은 현재의 선진국 중(안)에서도 폭행이나 살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훌륭한 일본의 역사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가 말살된 국가는 쇠퇴가 일로를 걸을 뿐이다.

 

「타모가미 토시오」논문 전문 게재:
http://officematsunaga.livedoor.biz/archives/50734794.html

 


 

 


論文をもう一度¥"精読¥"しよう。

 

 

 

日本は侵略国家であったのか
田母神俊雄


 アメリカ合衆国軍隊は日米安全保障条約により日本国内に駐留している。これをアメリカによる日本侵略とは言わない。二国間で合意された条約に基づいているからである。我が国は戦前中国大陸や朝鮮半島を侵略したと言われるが、実は日本軍のこれらの国に対する駐留も条約に基づいたものであることは意外に知られていない。

日本は19世紀の後半以降、朝鮮半島や中国大陸に軍を進めることになるが相手国の了承を得ないで一方的に軍を進めたことはない。現在の中国政府から「日本の侵略」を執拗に追求されるが、我が国は日清戦争、日露戦争などによって国際法上合法的に中国大陸に権益を得て、これを守るために条約等に基づいて軍を配置したのである。

 

これに対し、圧力をかけて条約を無理矢理締結させたのだから条約そのものが無効だという人もいるが、昔も今も多少の圧力を伴わない条約など存在したことがない。

 この日本軍に対し蒋介石国民党は頻繁にテロ行為を繰り返す。邦人に対する大規模な暴¥行、惨殺事件も繰り返し発生する。これは現在日本に存在する米軍の横田基地や横須賀基地などに自衛隊が攻撃を仕掛け、米国軍人及びその家族などを暴¥行、惨殺するようものであり、とても許容できるものではない。

 

これに対し日本政府は辛抱強く和平を追求するが、その都度蒋介石に裏切られるのである。実は蒋介石はコミンテルンに動かされていた。1936 年の第2 次国共合作によりコミンテルンの手先である毛沢東共産党のゲリラが国民党内に多数入り込んでいた。コミンテルンの目的は日本軍と国民党を戦わせ、両者を疲弊させ、最終的に毛沢東共産党に中国大陸を支配させることであった。我が国は国民党の度重なる挑発に遂に我慢しきれなくなって1937 年8 月15 日、日本の近衛文麿内閣は「支那軍の暴¥戻(ぼうれい)を膺懲(ようちょう)し以って南京政府の反省を促す為、今や断乎たる措置をとる」と言う声明を発表¥した。我が国は蒋介石により日中戦争に引きずり込まれた被害者なのである。

 1928 年の張作霖列車爆破事件も関東軍の仕業であると長い間言われてきたが、近年ではソ¥連情報機関の資料が発掘され、少なくとも日本軍がやったとは断定できなくなった。「マオ( 誰も知らなかった毛沢東)( ユン・チアン、講談社)」、「黄文雄の大東亜戦争肯定論( 黄文雄、ワック出版)」及び「日本よ、「歴史力」を磨け( 櫻井よしこ編、文藝春秋)」などによると、最近ではコミンテルンの仕業という説が極めて有力になってきている。日中戦争の開始直前の1937 年7 月7 日の廬溝橋事件についても、これまで日本の中国侵略の証みたいに言われてきた。しかし今では、東京裁判の最中に中国共産党の劉少奇が西側の記者との記者会見で「廬溝橋の仕掛け人は中国共産党で、現地指揮官はこの俺だった」と証言していたことがわかっている「大東亜解放戦争( 岩間弘、岩間書店)」。

 

もし日本が侵略国家であったというのならば、

当時の列強といわれる国で侵略国家でなかった国はどこかと問いたい。

 

よその国がやったから日本もやっていいということにはならないが、日本だけが侵略国家だといわれる筋合いもない。

 我が国は満州も朝鮮半島も台湾も日本本土と同じように開発しようとした。当時列強といわれる国の中で植民地の内地化を図ろうとした国は日本のみである。我が国は他国との比較で言えば極めて穏健な植民地統治をしたのである。満州帝國は、成立当初の1932 年1 月には3 千万人の人口であったが、毎年100 万人以上も人口が増え続け、1945 年の終戦時には5 千万人に増加していたのである。

 

満州の人口は何故爆発的に増えたのか。それは満州が豊かで治安が良かったからである。

侵略といわれるような行為が行われるところに人が集まるわけがない。

 

農業以外にほとんど産業がなかった満州の荒野は、わずか15年の間に日本政府によって活力ある工業国家に生まれ変わった。朝鮮半島も日本統治下の35 年間で1 千3 百万人の人口が2 千5 百万人と約2 倍に増えている「朝鮮総督府統計年鑑」。日本統治下の朝鮮も豊かで治安が良かった証拠である。戦後の日本においては、満州や朝鮮半島の平和な暮らしが、日本軍によって破壊されたかのように言われている。しかし実際には日本政府と日本軍の努力によって、現地の人々はそれまでの圧政から解放され、また生活水準も格段に向上したのである。

 我が国は満州や朝鮮半島や台湾に学校を多く造り現地人の教育に力を入れた。道路、発電所、水道など生活のインフラも数多く残している。また1924 年には朝鮮に京城帝国大学、1928 年には台湾に台北帝国大学を設立した。日本政府は明治維新以降9 つの帝国大学を設立したが、京城帝国大学は6 番目、台北帝国大学は7 番目に造られた。その後8 番目が1931 年の大阪帝国大学、9 番目が1939 年の名古屋帝国大学という順である。

 

なんと日本政府は大阪や名古屋よりも先に朝鮮や台湾に帝国大学を造っているのだ。

 

また日本政府は朝鮮人も中国人も陸軍士官学校への入校を認めた。戦後マニラの軍事裁判で死刑になった朝鮮出身の洪思翊(ホンサイク)という陸軍中将がいる。この人は陸軍士官学校2 6 期生で、硫黄島で勇名をはせた栗林忠道中将と同期生である。朝鮮名のままで帝国陸軍の中将に栄進した人である。またその1 期後輩には金(キン)錫源(ソ¥グォン)大佐がいる。日中戦争の時、中国で大隊長であった。日本兵約1 千名を率いて何百年も虐められ続けた元宗主国の中国軍を蹴散らした。その軍功著しいことにより天皇陛下の金賜勲章を頂いている。もちろん創氏改名などしていない。中国では蒋介石も日本の陸軍士官学校を卒業し新潟の高田の連隊で隊付き教育を受けている。1 期後輩で蒋介石の参謀で何応欽(カオウキン)もいる。

 李王朝の最後の殿下である李垠(イウン)殿下も陸軍士官学校の2 9 期の卒業生である。李垠(イウン)殿下は日本に対する人質のような形で1 0 歳の時に日本に来られることになった。しかし日本政府は殿下を王族として丁重に遇し、殿下は学習院で学んだあと陸軍士官学校をご卒業になった。陸軍では陸軍中将に栄進されご活躍された。この李垠(イウン)殿下のお妃となられたのが日本の梨本宮方子(まさこ)妃殿下である。この方は昭和天皇のお妃候補であった高貴なお方である。

 

もし日本政府が李王朝を潰すつもりならこのような高貴な方を李垠(イウン)殿下のもとに嫁がせることはなかったであろう。

 

因みに宮内省はお二人のために1930 年に新居を建設した。現在の赤坂プリンスホテル別館である。また清朝最後の皇帝また満州帝国皇帝であった溥儀(フギ)殿下の弟君である溥(フ)傑(ケツ)殿下のもとに嫁がれたのは、日本の華族嵯峨家の嵯峨浩妃殿下である。

 これを当時の列強といわれる国々との比較で考えてみると日本の満州や朝鮮や台湾に対する思い入れは、列強の植民地統治とは全く違っていることに気がつくであろう。イギリスがインドを占領したがインド人のために教育を与えることはなかった。インド人をイギリスの士官学校に入れることもなかった。もちろんイギリスの王室からインドに嫁がせることなど考えられない。これはオランダ、フランス、アメリカなどの国々でも同じことである。

 

一方日本は第2 次大戦前から5族協和を唱え、

大和、朝鮮、漢、満州、蒙古の各民族が入り交じって仲良く暮らすことを夢に描いていた。

 

人種差別が当然と考えられていた当時にあって画期的なことである。第1 次大戦後のパリ講和会議において、日本が人種差別撤廃を条約に書き込むことを主張した際、イギリスやアメリカから一笑に付されたのである。現在の世界を見れば当時日本が主張していたとおりの世界になっている。

 時間は遡るが、清国は1900 年の義和団事件の事後処理を迫られ1901 年に我が国を含む11 カ国との間で義和団最終議定書を締結した。その結果として我が国は清国に駐兵権を獲得し当初2 600 名の兵を置いた「廬溝橋事件の研究(秦郁彦、東京大学出版会) 」。また1915 年には袁世凱政府との4 ヶ月にわたる交渉の末、中国の言い分も入れて、いわゆる対華21 箇条の要求について合意した。これを日本の中国侵略の始まりとか言う人がいるが、この要求が、列強の植民地支配が一般的な当時の国際常識に照らして、それほどおかしなものとは思わない。中国も一度は完全に承諾し批准した。しかし4 年後の1919 年、パリ講和会議に列席を許された中国が、アメリカの後押しで対華21箇条の要求に対する不満を述べることになる。それでもイギリスやフランスなどは日本の言い分を支持してくれたのである「日本史から見た日本人・昭和編( 渡部昇一、祥社)」。

 

また我が国は蒋介石国民党との間でも合意を得ずして軍を進めたことはない。

常に中国側の承認の下に軍を進めている。

 

1901 年から置かれることになった北京の日本軍は、36 年後の廬溝橋事件の時でさえ5600 名にしかなっていない「廬溝橋事件の研究(秦郁彦、東京大学出版会) 」。このとき北京周辺には数十¥万の国民党軍が展開しており、形の上でも侵略にはほど遠い。幣原喜重郎外務大臣に象徴される対中融和外交こそが我が国の基本方針であり、それは今も昔も変わらない。

 さて日本が中国大陸や朝鮮半島を侵略したために、遂に日米戦争に突入し3 百万人もの犠牲者を出して敗戦を迎えることになった、日本は取り返しの付かない過ちを犯したという人がいる。しかしこれも今では、日本を戦争に引きずり込むために、アメリカによって慎重に仕掛けられた罠であったことが判明している。実はアメリカもコミンテルンに動かされていた。ヴェノナファイルというアメリカの公式文書がある。米国国家安全保障局( N S A )のホームページに載っている。膨大な文書であるが、月刊正論平成18 年5 月号に青山学院大学の福井助教授(当時)が内容をかいつまんで紹介してくれている。ヴェノナファイルとは、コミンテルンとアメリカにいたエージェントとの交信記録をまとめたものである。アメリカは1940 年から1948 年までの8年間これをモニターしていた。当時ソ¥連は1 回限りの暗号書を使用していたためアメリカはこれを解読できなかった。そこでアメリカは、日米戦争の最中である1943 年から解読作業を開始した。そしてなんと37 年もかかって、レーガン政権が出来る直前の1980 年に至って解読作業を終えたというから驚きである。しかし当時は冷戦の真っ只中であったためにアメリカはこれを機密文書とした。その後冷戦が終了し1995 年に機密が解除され一般に公開されることになった。

 

これによれば1933 年に生まれたアメリカのフランクリン・ルーズベルト政権の中には3 百人のコミンテルンのスパイがいたという。

 

その中で昇りつめたのは財務省ナンバー2 の財務次官ハリー・ホワイトであった。ハリー・ホワイトは日本に対する最後通牒ハル・ノートを書いた張本人であると言われている。彼はルーズベルト大統領の親友であるモーゲンソ¥ー財務長官を通じてルーズベルト大統領を動かし、我が国を日米戦争に追い込んでいく。当時ルーズベルトは共産主義の恐ろしさを認識していなかった。彼はハリー・ホワイトらを通じてコミンテルンの工作を受け、戦闘機100 機からなるフライイングタイガースを派遣するなど、日本と戦う蒋介石を、陰で強力に支援していた。真珠湾攻撃に先立つ1 ヶ月半も前から中国大陸においてアメリカは日本に対し、隠密に航空攻撃を開始していたのである。

 ルーズベルトは戦争をしないという公約で大統領になったため、日米戦争を開始するにはどうしても見かけ上日本に第1 撃を引かせる必要があった。日本はルーズベルトの仕掛けた罠にはまり真珠湾攻撃を決行することになる。さて日米戦争は避けることが出来たのだろうか。日本がアメリカの要求するハル・ノートを受け入れれば一時的にせよ日米戦争を避けることは出来たかもしれない。しかし一時的に戦争を避けることが出来たとしても、当時の弱肉強食の国際情勢を考えれば、アメリカから第2, 第3 の要求が出てきたであろうことは容易に想像がつく。

 

結果として現在に生きる私たちは白人国家の植民地である日本で生活していた可能¥性が大である。

 

文明の利器である自動車や洗濯機やパソ¥コンなどは放っておけばいつかは誰かが造る。しかし人類の歴史の中で支配、被支配の関係は戦争によってのみ解決されてきた。強者が自ら譲歩することなどあり得ない。戦わない者は支配されることに甘んじなければならない。

 さて大東亜戦争の後、多くのアジア、アフリカ諸国が白人国家の支配から解放されることになった。人種平等の世界が到来し国家間の問題も話し合いによって解決されるようになった。それは日露戦争、そして大東亜戦争を戦った日本の力によるものである。

 

もし日本があの時大東亜戦争を戦わなければ、現在のような人種平等の世界が来るのがあと百年、2 百年遅れていたかもしれない。そういう意味で私たちは日本の国のために戦った先人、そして国のために尊い命を捧げた英霊に対し感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お陰で今日私たちは平和で豊かな生活を営むことが出来るのだ。

 一方で大東亜戦争を「あの愚劣な戦争」などという人がいる。戦争などしなくても今日の平和で豊かな社会が実現できたと思っているのであろう。当時の我が国の指導者はみんな馬鹿だったと言わんばかりである。やらなくてもいい戦争をやって多くの日本国民の命を奪った。亡くなった人はみんな犬死にだったと言っているようなものである。しかし人類の歴史を振り返ればことはそう簡単ではないことが解る。現在においてさえ一度決定された国際関係を覆すことは極めて困難である。日米安保条約に基づきアメリカは日本の首都圏にも立派な基地を保有している。これを日本が返してくれと言ってもそう簡単には返ってこない。ロシアとの関係でも北方四島は6 0 年以上不法に占拠されたままである。竹島も韓国の実行支配が続いている。

 東京裁判はあの戦争の責任を全て日本に押し付け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そしてその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は戦後63 年を経てもなお日本人を惑わせている。

 

日本の軍は強くなると必ず暴¥走し他国を侵略する、だから自衛隊は出来るだけ動きにくいようにしておこうというものである。自衛隊は領域の警備も出来ない、集団的自衛権も行使出来ない、武器の使用も極めて制約が多い、また攻撃的兵器の保有も禁止されている。諸外国の軍と比べれば自衛隊は雁字搦めで身動きできないようになっている。この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から解放されない限り我が国を自らの力で守る体制がいつになっても完成しない。アメリカに守ってもらうしかない。アメリカに守ってもらえば日本のアメリカ化が加速する。日本の経済も、金融も、商慣行も、雇用も、司法もアメリカのシステムに近づいていく。改革のオンパレードで我が国の伝統文化が壊されていく。日本ではいま文化大革命が進行中なのではないか。日本国民は2 0 年前と今とではどちらが心安らかに暮らしているのだろうか。日本は良い国に向かっているのだろうか。私は日米同盟を否定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アジア地域の安定のためには良好な日米関係が必須である。但し日米関係は必要なときに助け合う良好な親子関係のようなものであることが望ましい。子供がいつまでも親に頼りきっているような関係は改善の必要があると思っている。

 自分の国を自分で守る体制を整えることは、我が国に対する侵略を未然に抑止するとともに外交交渉の後ろ盾になる。諸外国では、ごく普通に理解されているこのことが我が国においては国民に理解が行き届かない。今なお大東亜戦争で我が国の侵略がアジア諸国に耐えがたい苦しみを与えたと思っている人が多い。

 

しかし私たちは多くのアジア諸国が大東亜戦争を肯定的に評価していることを認識しておく必要がある。タイで、ビルマで、インドで、シンガポーで、インドネシアで、大東亜戦争を戦った日本の評価は高いのだ

 

そして日本軍に直接接していた人たちの多くは日本軍に高い評価を与え、日本軍を直接見ていない人たちが日本軍の残虐行為を吹聴している場合が多いことも知っ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日本軍の軍紀が他国に比較して如何に厳正であったか多くの外国人の証言もある。我が国が侵略国家だったなどというのは正に濡れ衣である。

 日本というのは古い歴史と優れた伝統を持つ素晴らしい国なのだ。私たちは日本人として我が国の歴史について誇りを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人は特別な思想を注入されない限りは自分の生まれた故郷や自分の生まれた国を自然に愛するものである。日本の場合は歴史的事実を丹念に見ていくだけでこの国が実施してきたことが素晴らしいことであることがわかる。嘘やねつ造は全く必要がない。個別事象に目を向ければ悪行と言われるものもあるだろう。それは現在の先進国の中でも暴¥行や殺人が起こるのと同じことである。

 

私たちは輝かしい日本の歴史を取り戻さなければならない。

歴史を抹殺された国家は衰退の一途を辿るのみである。

 

「田母神俊雄」論文 全文掲載:
http://officematsunaga.livedoor.biz/archives/507347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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