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하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조선왕조 제26대 국왕 고종(高宗)의 왕비로 흔히 민비(閔妃)로 불린다. 본관은 여흥이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라는 이름은 고종이 1897년 10월에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죽은 민비에게 내린 시호였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자라나 16세 때인 1866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한 살 아래인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민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國政)이 농단된 순조(純組), 헌종(憲宗), 철종(哲宗) 3대 60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뛰어났던 민비는 왕비에 오른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치적 대립으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민비와 대원군의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공작 때문이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의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 간의 갈등이 작용했다.
그리하여 민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밀어내려고 노력하였는데,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인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독점을 염려한 조대비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 재면(載冕)과 형 이최응(李最應) 세력 및 유림 세력과 결탁하여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규탄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그 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맺는 등 일련의 시책을 추진하였다.
1882년에는 민씨 세력의 정책에 불만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문제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틈을 이용하여 민비를 제거하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나라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청나라 군사들을 출동하게 하고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민씨 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민비는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 잠시 개화당 정부에 정권을 배앗겼으나 곧 청국 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민비는 왕궁에서 외교적 국면에 매우 능숙하게 대응하여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이 일어나자 해관총세무사(海關總稅務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 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으로 조선의 정국이 혼미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개혁(甲午改革)에 관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민비 세력을 제거하려고 공작하였다. 민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지원하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 압력을 가하게 되자 사세가 불리해진 민비는 친러정책[親露政策]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일본 세력에 대항하였다. 게다가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대결하는 민비와 그 척족 및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정객과 음모를 꾸몄다. 1895년 8월 일본 군사들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만행을 저질렀다.
● 누가 시해를 주모했나?
그러면 민비 시해의 주모자는 누구이며 어떠한 실행경로를 거쳤는가.
현재 학계에 밝혀진 견해는 흥선대원군과 조선 훈련대가 주모했다는 설, 미우라 고로가 주모했다는 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주모했다는 설로 대별된다. 대원군과 훈련대가 민비 시해를 주모했다는 설은 대부분 일본 역사학자들의 입장으로 일본의 책임회피 및 사건은폐의 의도로 주장된 것이다. 또한 대원군이 민비 시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우라 고로가 주모했다는 설 역시 당시 한국 주재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의 사건 개입 여부가 누가 보더라도 자명해진 상태에서 미우라의 개인적인 공명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함으로써 그 배후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하고 일본의 사건 배후 조작설을 강하게 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편 이노우에 가오루 주모설은 실제로 범죄를 실행한 미우라의 범행동기의 허구성을 밝히고 일본 정부를 배후로 이노우에와 미우라의 공모에 의해서 민비가 시해됐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대원군은 일본 정부의 사건은폐 및 조작을 위해 동원된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미우라도 일본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의 변화에 따라 실행에 옮긴 청부 살인범일 뿐이며 실제로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후원하에 있었던 이노우에가 주모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세 가지 견해 가운데 이노우에 주모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우선 미우라가 조선 공사로 부임(9월 1일)한 지 37일 만에 사건이 일어났고, 특히 이노우에가 외교관례를 무시하고 공사관에서 17일간이나 함께 있으면서 업무를 인계하고 조선을 떠난 지 20일 만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미우라는 일본 예비역 육군 중장으로 조선 문제에 전혀 관여한 적도 없었는데, 이러한 그가 조선내 사정을 제대로 익힐 겨를도 없이 37일 만에 민비 시해라는 국운이 걸린 사건을 계획부터 실행까지 독단적으로 주모하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해를 위한 세부계획이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 직후부터 가시화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미우라는 이노우에의 정책을 수행한 종범(從犯) 내지는 현지 행동책임자에 불과했고, 주모자는 어디까지나 이노우에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노우에가 민비 시해를 주모하였다면 이는 그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함께 당시 일본 정계를 좌우하던 원로(元老)였다는 점에 비추어 이 사건에 일본 정부가 직접 관여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원로란 메이지 헌법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국정 전반에 걸친 일본 황제의 광범위한 기능을 실질상 집단적으로 대행하는 일본 정계의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민비 시해를 위한 미우라의 세부행동계획은 이노우에가 서울을 떠나고 나서 9월 20일부터 구체화되었다. 미우라가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에게 “여우 사냥” 운운한 점, 시바 시로[柴四朗] 등이 이주회(李周會)와 빈번하게 만난 점,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귀국하려는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이노우에와 미우라가 간곡하게 만류하여 대원군 이용계획을 담당케 한 점, 하순에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一]가 대원군을 찾아간 점 등이 모두 각본에 따른 준비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우라는 계획의 성패가 대원군의 이용문제에 달렸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미우라는 10월 2일을 전후하여 결행 날짜를 10월 10일로 정한 후 각기 책임자를 정해 역할을 분담시키고 행동지침을 시달했다. 즉 시바와 아다치는 낭인 동원을, 오카모토는 대원군을, 스기무라는 일본인과 조선 관련자 사이의 연락을 구스노케 유키히코와 바야바라 쓰토모토는 일본군 수비대 및 조선 훈련대 동원을 책임맡았다. 그리고 대원군 이용계획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오카모토와 구스노케를 귀국하는 것처엄 인천으로 보내 대기시키는 연극까지 꾸몄다. 그런데 풍문으로 나돌던 군대 해산이 예상보다 앞당겨져 7일 오전 9시에 군부대신 안경수(安傾壽)가 미우라에게 정식으로 통고해 오자 결행 날짜는 8일 새벽으로 수정되었다. 훈련대가 해산되면 이들을 동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려던 미우라의 계획이 차질을 빚기 때문이었다.
8일 새벽 실행에 옮긴 일본인들은 흥선대원군을 끌어내는데 시간이 늦어지고 서대문에서 수비대와의 합류에 차질이 빚어져 5시 30분에야 겨우 광화문에도착하였다. 여기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이 거느리는 훈련대 병사들과 총격전을 벌여 그를 살해하고 광화문을 통과한 시간이 5시 50분이었다. 대원군을 6시 10분경에 근정전 옆의 강령전에 내려놓고 나서 폭도들은 근정전을 끼고 경회루 동편을 지나 북향하여 국왕의 편전인 건청궁으로 몰려갔다. 여기서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가 지휘하는 시위대와 다시 한번 교전이 벌어졌으나 이 시위대 병사들도 20분만에 패주하였다. 폭도들은 건청궁 안에 난입하여 국왕의 침전인 곤령전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를 침범하였다. 궁녀들이 당황하여 울부짖고 있을 때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이 달려와 실내에서 왕비를 보호해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왕비는 처참하게 폭도들의 칼부림에 난자당해 쓰러졌으며, 3명의 궁녀와 이경직도 살해되었다. 살해에 참여했던 낭인배들은 궁녀와 세자 이탁(李拓)을 통해 왕비의 시신을 확인하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이 있기 직전에 시신에 대해 “시간(屍姦)”의 흉행도 서슴지 않았던 것 같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시신을 근처의 녹원 숲속으로 옮겨 석유를 뿌려 불태우는 악랄한 행동까지 자행하였다.
한편 미우라는 왕궁 침입을 확인한 후 6시 5분에 공사관을 떠나 왕궁으로 들어가 7시에 고종을 알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그가 사건현장에 직접 가서 왕비의 시신을 확인하고 그 처리를 지시하는 등 마무리 작업을 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 자국의 이익 앞에 침묵한 서구 열강
일본 정부는 사건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시치미를 떼고 일본인의 관련을 부인했지만 차츰 사건을 목도한 증인들에 의해 사실이 알려지고 조선 주재 외국공관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미우라를 위시해 사건 주모자들을 전부 일본에 송환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이후부터 일본 정부는 절대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선으로 그들의 외교노력을 집중시켰다. 게다가 열강들의 간섭으로 사건이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급거 일본에 송환한 주모자들도 모두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였고, 그들은 오히려 국수주의적인 일본 국민들에게 영웅으로서 환영받았다.
이에 대해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들은 가능한 일본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하려는 입장에서 사건을 처리하였다. 처음부터 이들 국가는 조선 주재 공사관으로부터 사건의 진상에 관한 보고를 접하였지만 어차피 조선에서 일본의 우위권을 인정한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불사하면서까지 더 이상 자국의 불이익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연일 회의를 열고 미우라에게 항의하는 등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며, 자국의 명령을 기다리던 조선 주재 각 공사관들은 자국의 이익선을 보호하라는 보고문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의 개입이 명백히 드러났지만 더 이상의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비화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편 민비 시해 직후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민비를 폐비로 격하하고 극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음식물조차 제대로 섭취할 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민비 시해사건에 대한 처리는 미우라가 사전에 계획하여 출범시킨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에서 단독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은 미우라의 각본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본인의 개입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구미 공사들의 진상조사에 대한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 당시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던 윤석우(尹錫禹), 사건 당일 궁궐 근처에 거주한 관계로 사건의 진상을 알아채고 있던 이주회 등을 사건이 탄로날 것을 우려하여 진범으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러한 조선 정부의 고식적인 사건처리는 미우라의 각본에 따른 것이었고, 결국 일본에 송환된 미우라를 위시한 가담자들은 조선 정부가 사건의 진범을 이미 처리한 상황이라는 이유로 단순히 종범으로서 가담한 정도로 판결받고 전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비 시해 사건은 조선 민중들의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우라와 김홍집 내각이 사건을 훈련대의 소행이라고 선전하기에 애썼지만 한국인은 처음부터 시해의 범인은 일본 군인이라는 사실과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생들의 “폐후조치를 철회하고 범죄자의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반일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출처; 자작나무 版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1998년)
해설; 엄찬호(嚴燦鎬) 춘천교육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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