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한론(侵韓論)은 왜 생겨났나.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을 왕래하던 근세 한일관계는 평화적,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186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일본에서는 조선과 아무런 외교적 알력이 없었는데고 조선을 무력(武力)으로 공격하자는 여론이 발생한다. 이를 “정한론(征韓論)”이라고 일본 측의 사료는 표현하고, 일본인 연구자들도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정(征)”이라는 표현은 상급 국가의 하급 국가에 대한 정벌이라는 표현이므로 일본의 주관적 표현일 분 학문적,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침한론(侵韓論)”이라는 표현이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침한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여론을 형성한 주체가 지금까지 조선과의 외교, 무역을 담당하고, 조선의 은혜를 받아온 대마도(對馬島)의 정치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침한론의 실상을 밝히기 어려운 요인이 되어왔다.
먼저 지금까지의 침한론에 대한 일본 측의 연구를 단순화하여 정치, 사상, 경제, 지방사의 네 가지로 나누어 소개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첫번째는 정치적 관점에서의 설명으로 1861년 대마도에 러시아 군함이 정박하여 개항장을 요구한 사건 이후, 서구 열강의 압력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마주(對馬州) 무사들과 양이파 무사들, 그리고 막부 관료가 공통된 의식을 형성하여 “침한론”이 논의되었다고 하는 설명이다.
두번째의 견해는 사상사적인 관점에서의 설명이다. 즉 뿌리 깊은 조선에 대한 멸시관이 존재하여 외교적인 갈등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침한론이 성립된다는 견해이다. 이는 통신사 외교로 상징되는 근세 외교체계의 우호가 허구였음을 강조하는 논리가 될 수 있지만, 역사를 고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세번째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한일간의 무역 침체로 말미암아 침한론(侵韓論)이 대두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관점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대마주의 무사들이 침한론에 가담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대마주의 재정 수입 가운데 약 80%가 조선 무역과 그에 따른 막부의 지원이었다. 그렇다면 대마주(對馬州)가 조선 무역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얻으려고 했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막부와의 교섭과정에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추구가 없었기에 이 설명은 “조선과의 무역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침한론이 성립되었다.”는 애매한 결론을 내리고, 어떻게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는지 도 그 해결이 대마주에 어떠한 이익을 주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다는 점이 한계라고 하겠다.
이상 살펴본 정치, 사상, 경제적 견해는 모두 일본의 통일성을 가상한 견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양이운동(壤夷運動)에 가담함으로써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던 대마주 무사들과 막부를 타도하려는 서남웅번(西南熊藩)의 에도 막부의 양이파 무사들 그리고 이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는 막부 측 등 모든 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분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과연 그들은 외압에 대해 공통의 대항의식을 소유하였고, 사상적으로 공통되는 조선에 대한 멸시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공통의 이해를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일본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지방사적 측면에서의 연구이다. 이는 대마주 내부에 보수파(保囚派)와 양이파(壤夷派)의 권력 대립이 잇었다는 설명이다. 이들이 가독(家督) 상속 문제로 대립하였고, 이봉운동(移封運動)을 둘러싸고 대립하였으며, 결국 양이파가 승리하여 이들이 침한론을 주장하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도식적인 설명이다. 대마도는 자립이 불가능한 변경의 지역으로서 생존을 위한 논리가 있는 것이다. 이를 무시한다면 이른바 “보수(保囚)”와 “양이(壤夷)”의 사이를 왕래한 대마주 중추부의 활동을 이해할 수 없으며, 나아가 조선과의 무역 담당을 주장하여 이봉운동에 반대한 양이파가 조선 무역을 파탄에 이르게 할 침한론을 주장하였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때로는 독립적으로 또 대로는 얽히면서 막부 말기의 침한론(侵韓論)을 설명하고 있으나 이상과 같은 이유로 그 실상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 세 차례의 침한론(侵韓論)
그러면 당시의 상황을 복원하면서 침한론의 실상을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의 변화 측면에서 살펴보자. 침한론은 크게 1863~1864년의 침한론, 왕정복고의 서계 거부를 둘러싼 1870년의 침한론,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하여 일어난 1873년의 침한론 정변,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는 초기 침한론(侵韓論)을 중심으로, 거시적으로 일본사의 입장에서 일본의 정치세력간 대립을 살피고, 그 속에서 대조선(對朝鮮) 인식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면서 쟁점을 부각시켜 보자.
● 대마주(對馬州) - 조슈[長州] 동맹과 1863년의 침한론(侵韓論)
일본의 개국과 새로운 개항장의 설치는 막부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여러 다이묘[大名]들에게는 경제적 위기를 느끼게 했다. 따라서 막부 중심의 개항정책을 반대하는 이른바 양이파(壤夷派)가 등장하여 반막부운동(反幕府運動)이 일어났다. 한편 지금가지 일본의 외교를 담당해온 대마주의 지위도 크게 흔들렸다. 새로운 개항장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조선과의 중개무역으로 이익을 취해온 대마주의 경제는 어려워졌다. 더욱이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담당해온 “통신지국”으로서의 지위가 상대화되어 오랫동안 조선과의 외교를 독점해온 대마주보다 서양 열강과 외교를 담당하는 막부의 “외국봉행(外國奉行)”들이 외교상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여기에 러시아 군함 포사드닉 호가 대마도에 들어와 개항을 요구하자 대마주는 안전된 지행(地倖) 확보를 위하여 개항을 전제로 대마도를 막부 직할로 하고 자신들에게 큐슈[九州]에 있는 막부 토지 10만 석을 달라는 이봉운동(移封運動)을 1861년에 전개하였다. 이는 막부의 입장에서도 조선과의 직접 외교, 즉 막부의 관리에 의한 외교관계의 수립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었으므로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었고 대마도 처리 문제가 중요한 정책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862년, 개항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던 막부 로주[老中] 안도 노부마사[安葬信正]가 반막부(反幕府) 양이파 무사들에게 피습을 받고 실각하였으며, 반막부 양이파 다이묘들의 개항 반대를 위한 연대가 일본 조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막부의 국정 장악능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막부는 반막부 다이묘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정략적이나마 조정에 대하여 쇄항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항을 전재로 한 대마주의 이봉운동이 실패하였음이 명확해지자, 대마주의 안정된 지행 확보의 염원은 다른 길을 찾게 되엇다. 즉 새로이 성장하는 양이세력과의 동맹을 통하여 대마도(對馬島)의 자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대마주(對馬州) - 조슈[長州] 동맹으로 상징되는 대마주 양이정권(壤夷政權)의 성립이다.
이제 대마도 측은 점차 성장하는 일본 민족주의에 호소하여 지금까지 조선에 의지하여 식량을 얻어먹은 것은 일본의 수치라고 주장하고 대마주의 자입을 요구하는 원조요구운동(援助要求運動)을 전개하는 한편, 그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조선의 태도가 얼마나 오만한지를 강조하면서 조선을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에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나타났다고 보인다. 이러한 대마주의 원조요구운동은 소위 “막부 말기의 침한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즉 원조요구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침한(侵韓)을 통해 일본의 국위를 빛내기 위해서는 대마주(對馬州)의 자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양이파 무사들에게 조선에 대한 대결의식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반막부 양이파에 속한 일본인들은 지금까지의 막부와 조선 간의 평화교린 외교관계를 치욕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제까지의 조선에 대한 열등감이 오히려 조선에 대한 우월감으로 표출되면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진구왕후[神功王后]의 삼한정벌(三韓征伐) 기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생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이 일본의 국위를 빛낸 쾌거였다는 주장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조선에 대한 부당한 적개심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양이파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막부는 대마주에 10만 석의 연조(年租)에 해당하는 3만 석을 매년 지급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 대마주에 원조를 허락한 상태에서 대마도를 직접 지배하고 조선과 직접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를 단속적(斷續的)으로 드러낸다.
결국 1863년의 침한론(侵韓論)은 대마주의 원조요구운동(援助要求運動), 이를 이용하고 지원하면서 막부 측을 공격한 조슈를 중심으로 한 양이파(壤夷派)의 활동, 그리고 이를 무마하면서 조선과 직접 외교를 맺고자 하였던 막부 측의 대응이라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864년의 대마도 무사 오시마 도모노조[大鳥叛之允]의 침한론 건백서(侵韓論建白書)는 제1차 죠슈 정벌로 막부의 입김이 강해지고 반막부 양이운동의 선두 주자였던 조슈의 힘은 약해져 대마주에 대한 원조가 끊어질 조짐을 보이자, 막부의 논리를 역이용하여 대마도 원조가 필요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에 불과하였는데 이는 막부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1864년의 침한론은 무시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아직 중앙정부(막부)의 입장에서 침한론이 생겼다거나 조선관에 특별한 변화가 나타났다고는 볼 수 없게 때문이다. 일본 중앙정부의 조선 인식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1866년 조선이 서계(書契)를 보내 프랑스 군함의 강화도 침공을 격퇴시켰다고 알렸을 때였다. 곧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함이다.
이때에는 일본 막부 측 사료에서도 조선 측에 대한 반감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1866년 당시 막부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하여 양이파의 다이묘와 대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공사 로슈의 조언에 따라 제도를 개혁하고, 양이운동을 불안하게나마 통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 막부 측의 입장에서 조선이 서양 국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사실은 위협이 되었다. 반막부 양이파가 조선의 승리를 이용하여 조선도 양이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막부는 무엇을 하는가. 비겁하다.”는 형태로 막부 공격을 강화할까봐 두려워하는 막부 각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을 “완고 악습의 나라” 라거나 “구교의 나라”라고 헐뜯으며 차별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조선 측이 일본에 대하여 아무런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일본 측은 서양과의 관계와 내정 문제로 일방적으로 반한감정을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메이지 정권[明治政權]의 성립과 1870년의 침한론(侵韓論)
1867년 12월 9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메이지 신정부가 성립되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반막부(反幕府) 양이파(壤夷派)의 연합정권이었고, 특히 조슈[長州]와 사쓰마[薩摩]의 세력이 강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모든 외국에 대하여 막부의 개항정책을 준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메이지 정권은 왕정복고를 알리는 서계(書契)를 조선에 보내도록 하였고, 대마주(對馬州)는 신정부, 특히 죠슈의 구미에 맞게 “외교 개혁”을 추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외교 개혁이란 조선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조선 측이 준 도서(圖書)를 폐지하고 일본 측의 도장을 사용하며, 조선의 관직체계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직을 사용하며, 대마주가 조선의 예조참판과 동등한 입장에 서고, 왜관 관수가 역관을 통하지 않고 동래부와 직접 교섭을 한다는, 말하자면 전통적인 교린관계의 예절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대마주가 이러한 서계를 조선에 보내게 된 것은 메이지 정권 내의 조슈파는 조선 측의 거절을 끌어내 이를 바탕으로 전쟁의 위기를 만들고, 이 위기를 이용하여 친병(親兵)을 만들어 번벌정부를 중앙집권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때에 자신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사실은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대마주의 권력자이며 조슈의 기도와 가까웠던 오시마는 조선 측이 이 서한에 분노하여 철공철시를 단행하고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면 대마도가 기아에 빠질 것이므로, 원조 요구의 근거가 된다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이를 기회로 한일 양국의 변경이라는 불안한 지위에서 벗어나 숙원인 안정된 지행(토지)을 확보하고자 이를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즉 왕정복고를 알리는 서계는 단순한 왕정복고를 알리는 서계가 아니었고 전통적인 한일관계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른바 거절당하기 위한 서한이었다. 따라서 거절당하리라는 것을 대마주와 조슈는 예상하고 거절을 전제로 침한론을 주장했다는 것이 사료에서 확인된다.
여기에 대해서 조선 측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다만, 서계의 내용을 수정해오도록 대마주를 설득하기만 하였다. 따라서 조슈와 대마주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대마주로서는 서계의 내용을 수정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점차 조선 측은 당연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마주를 불쾌하게 생각하였고 외교관계는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 측이 거절하였다고 할 만한 서한을 넘겨준 것은 1870년 3월에 들어서였다. 즉 일본 외무성이 파견한 사다 하쿠보[左田白茅],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등이 왜관에 도착하였을 때, 훈도 안동준(安東準)은 동래부사와 협의하여 옛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서계를 고쳐와야만 한다는 뜻을 동래부사의 서한을 통해 명확히 하였다.
이 동래부사의 서한은 조선 측이 정식으로 왕정복고의 통지를 거부하였다는 공식 서한으로 일본 측에 받아들여졌다. 이 서한은 침한론(侵韓論)의 분위기를 만들고 이를 통하여 번벌정부를 중앙집권화하며, 이때 자신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조슈[長州] 측의 전략에 이용되었다. 또한 대마도주(對馬島主)도 이 기회에 안정된 영토를 받아 황무지나 다름없는 대마도를 떠나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 서한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1870년 4월부터 조선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본의 조야에 널리 퍼졌다. 예를 들면, 이 시기 소우 요시사토[宗義達]의 상신서와 사절들의 보고서는 모두 전쟁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1870년의 침한론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대마도와 조슈의 오랜 전략이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1870년 전반기에 일본의 조야에 조선을 무력 침공(武力侵攻)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7월 말에 들어서 사쓰마[薩摩] 출신의 무사 요코야마 쇼타로[潢山正太郞]가 침한불가(侵韓不可)를 역설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함으로써 반전되었다. 그 후 중국과의 관계에서 정책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사쓰마 출신의 입김이 강화되면서 청나라와 먼저 조약을 맺어두면 전쟁을 일으켜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명나라 군사들이 원조하듯 청나라가 조선을 지원할 수 없을 것이므로 청나라와 조약을 맺는 것이 급선무이고, 일단 조선과의 관계는 조선 측의 요구대로 서계를 수정하여 화평을 유지하자는 의견이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과의 외교관계도 사쓰마 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 이와쿠라 사절단의 파견과 1873년의 침한론(侵韓論)
1871년 7월 14일 친병(親兵)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폐번치현(廢藩治縣)이 단행되어 번벌정부는 중앙집권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 정부는 청나라와 수호조규(修好條規)를 체결하고 10월 8일에는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특명 전권으로 하는 대규모의 구미(歐美)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조슈의 기도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함께 파견됨으로써, 대마주의 입장을 일본 조정에 대변해 줄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대마주의 정치적 위상은 급속히 약화되어 12월 28일 외무성 준주임 오시마가 해임되고, 전 대마도주 소우 요시사토[宗義達]를 조선에 파견하고자 했던 이전의 계획을 중지시키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는 외교관계에서 대마주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하였던 외무성의 의도가 현실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사절단 파견 이후, 조선문제는 외무성 관원 요시오카[吉岡]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과거 대마주의 잔재세력은 청산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외무성은 왜관 정리를 계획하여 왜관에서 과거 대마도 출신의 상인들을 철수시키고자 하였고, 1872년 6월 이를 실행하였다. 9월에 들어서는 일본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왜관을 접수하였고, 1873년에 들어서 왜관은 대일본국공관(大日本國公館)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이제 명실공히 대마주를 배제한 한일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루스[留守] 정부에 의해 일본은 근대화 작업을 추진하였고, 일련의 근대화 작업은 점차 사족(士族)들의 불평, 불만을 격화시켰다. 루스 정부에 남아있던 사쓰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격화되는 사족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고 스스로 침한(侵韓)의 구실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1873년 8월에 사이고를 조선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옛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넘치는 무사들의 처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입안자만 바뀌었을뿐 조슈의 기도가 의도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인다. 새롭게 한일간에 외교 갈등이 생긴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바로 직후인 1873년 9월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하여 루스 정부로부터 권력을 돌려받기 위해 이 계획에 반대함으로써 일본의 정계는 크게 흔들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제까지 침한론을 주장한 조슈 출신의 기도가 이번에는 침한 반대의 편에 섰다는 점이다. 이 정치적 대립으로 결국 메이지 정권은 분열되었다. 이것이 1873년의 침한론(侵韓論)이다.
결국 1873년의 침한론은 메이지 정권 수립에 공로가 많았던 무사들의 불만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며, 막부 말기에 양산된 무사층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이는 훗날 사이고를 중심으로 한 가고시마[鹿兒島]의 사족(士族)들이 일으킨 반란,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을 통하여 해소된다. 이 1873년의 침한론에는 대마도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미 일본 정계의 중앙집권화는 상당히 이루어져 있었다.
● 침한론(侵韓論)의 진짜 이유는 일본 내부의 정쟁(政爭)이었다.
지금까지 1863년의 침한론을 중심으로 1870년의 침한론, 그리고 1873년의 침한론의 실체에 대해 대략의 윤곽을 그려보았다. 그 결과 기존 연구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복원할 수 있었다. 우선 근대 초기의 침한론(侵韓論)이 일본 내부문제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1863년의 침한론은 일본의 개국으로 존립 위기에 바진 한일 양국의 변경 대마주(對馬州)가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치욕이라 주장함으로써 반막부(反幕府) 양이파(壤夷派)에 막부 측의 실정을 공격할 구실을 주고, 반막부 양이파는 그 대가로 대마도 자립을 보장하는 원조 요구를 측면 지원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이후의 침한론 역시 조선 측의 쇄국정책이나 외교적 무례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밝혔다.
”황(皇)” 자나 “칙(勅)” 자 등 사소한 자구를 이유로 조선 측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한일관계가 어렵게 되었다는 종전의 인식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우(內憂)를 외환(外患)을 통해 극복한다는 일본의 전략과 정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정쟁(政爭)이 침한론(侵韓論)의 배경으로 좀 더 강조되어야 일본사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다. 전환기의 연구는 일본 외교사의 연구에서도 중요하며 우리의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더욱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
출처; 자작나무 版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1998년)
해설; 현명철(玄明哲) 홍익대학교 강사
{이상}
정한론(征韓論)이 아니라 침한론(侵韓論)이다.
鼎韓論(征韓論)ではなくチムハンでは(侵韓論)だ.
TOTAL: 9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