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2.독립군(獨立軍)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1910년 국치(國恥) 이후 만주(滿州)와 연해주(沿海州)에서 편성된 항일독립군(抗日獨立軍)은 군사력 배양에 힘써오다가 3·1운동 이후에 본격적인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오는 일본군경(日本軍警)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한편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 병영이나 경찰대 주재소 등을 습격하거나 일제(日帝)의 식민지 지배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일본의 정치적 실권자나 친일파를 살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의 근무 기록을 살펴보면 독립군 항일투쟁(抗日鬪爭)의 단면을 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기 전 국경지방에서는 때때로 중국 마적단(馬賊團)의 침입이 있었을뿐 조선 독립군에 관해서는 큰 일이 없었는데, 3·1운동 발발 후에 있어서는 사건에 관계되는 자의 일부가..... 중국 땅으로 숨어들어 그곳에 주재하는 반역의 무리와 합하여 독립군이 되고, 각종의 불온한 단체를 조직하여 각지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상해의 임시정부 등과 연계하여 무력 침공(武力侵攻)을 감행하기 위해 항상 우리 경비력을 엿보고 교묘하게 국경 연안의 경비망을 통과하여 조선내로 침입한 후 독립운동(獨立運動)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얻는다고 하면서 소재의 민가를 습격하고..... 때로는 주재소, 면사무소, 기타의 관공서를 습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경 일부에 있어서는 아직 그러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

 

독립군은 근거를 중국 땅에 두고 단결하여 항거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골드식, 모젤식 연발총을 소지하고 있으며 그 행동은 민첩하며 지리에 정통하고 야영조식(野營租食)에도 익숙할 뿐 아니라 부대훈련에도 뛰어나 있어 출몰자재하여 교묘하고 대안(對岸)으로부터 월경침입하여 주간은 인적이 미치지 않는 산악 또는 밀림지대에 잠복하였다가 일몰을 기다려 횡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금후 더욱 다사다난할 것으로 그 위험은 예측하기 어렵다.

 

촌각의 안심도 할 수가 없어 경찰관들은 취침에 있어서도 불시에 대비하기 위해 무장한 그대로 총기(銃器)를 목침으로 삼아 가침(假寢)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전혀 휴양 안식할 틈이 없는 상태이다.」

 

독립군의 작전은 주로 조만(朝滿) 국경지대인 평북, 함남, 함북 지방에서 전개되었는데,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벌어진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가운데 중요한 전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0년 3월에 간도(間島)의 독립군이 함북 온성군 풍리동에 있는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평북 벽동군 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두만강 상류 남양동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4월에는 평남 영유군 우편소 면사무소를 습격하였고, 5월에는 함북 회령군 우무령에서 우편물 호송대를 습격하였다. 6월에는 함북 온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초소를 공격하였으며, 평북, 강계, 자성, 벽동, 위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의주군 옥상면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고, 평북 삭주군 양산면 경찰관 주재소도 독립군의 공격을 받았다.

 

동년 8월에는 평북 선천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고, 평북 자성군 대안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평남 대동군 전촌경찰서를 공격하였고, 평북 강계군 고산면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9월에는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고, 평북 용천군 동하면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평북 강계군 문옥면 삼강면에서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10월에는 평남 선천군 내산사, 맹산군 맹산면에서 각각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11월에는 함남 갑산군 보혜면 태평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1년 1월에는 함북 옹기군 신건원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평남 덕천군 태금면 영광리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2월에는 평북 의주군 교외에서 일본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3월에는 평북 영변군 고성면 산중에서 경찰대와 교전하였고, 평남 덕천군 풍덕면 덕주령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평남 영원군 온창 면사무소가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5월에는 평북 맹산군 옥천면에서 독립군과 일본 경찰대간의 총격전(銃擊戰)이 벌어졌다.

 

6월에는 평북 의주군 옥천면, 벽동군 동하면, 자성군 만흥동에서 각각 독립군과 일본 경찰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7월에는 평북 후창군 서례령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함남 강진군 메몰령에서 일본 헌병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8월에 함남 갑산군 오시내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함남 풍산군의 헌병대 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압록강 연안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9월에는 평북 초산군 도원면에서 일본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고, 함남 갑산군 동인면 함정경찰서와 면사무소, 영림창 출장소 등을 공격하였다.

 

10월에는 함남 갑산, 신흥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함남 삼수군 호인면 운전리의 일본 경찰대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12월에는 함남 단천군 수하면 중평리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고, 함남 갑산군 보혜면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 만주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여러 독립운동 군사단체(獨立運動軍事團體)들은 쉴새없이 조만국경(朝滿國境)을 넘어 국내로 들어와 일본군경(日本軍警)을 기습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20년 초기에는 독립군의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였던 시기로서 특히 2월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은 32회나 되었으며, 일제(日帝)의 경찰관 주재소, 헌병대 초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 파괴한 곳이 34개처나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전투를 벌인 독립군 가운데 특히 괄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한 부대가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인솔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었다. 1919년 8월에는 삼수(三水), 갑산(甲山), 혜산진(惠山鎭) 방면으로 출동하여 일본군 병영을 습격하였으며 10월에는 만포진(滿浦鎭), 자성(慈城)으로 진출하여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20년 안무(安武)가 인솔하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민병대와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합세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독립군연합사령부(獨立軍聯合司令部)를 편성하고 더욱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박차를 가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주요 간부를 살펴보면 사령관에 최진동, 부관에 안무, 연대장에 홍범도, 제1중대장에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에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에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에 조권식(曺權植) 등이었다.

 

이렇게 연합사령부를 편성한 독립군은 1920년 봄부터 두만강 대안의 국경지방은 회령(會零), 종성(鐘城), 온성(穩城) 지방으로 연속적으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즉 이 해 2월에 대규모의 독립군 병력이 회령 부근의 일본군 병영을 습격하여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고, 3월에는 약 80여명의 독립군이 종성지방으로 진격하여 그곳의 일본 헌병대를 습격, 궤멸시키고 총기(銃器)와 탄약(彈藥)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3월 15일부터 10여일간은 온성 진격작전이 전개되었다. 약 2백여명의 독립군이 온성군 유포면 풍리동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였으며, 80명의 독립군은 미포면의 미점 헌병대를 섬멸하였고, 18일에는 약 30명의 독립군 특공대가 유포면 향당동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고, 약 2백명의 병사는 온성읍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5월 28일에는 독립군이 두만강을 도강하여 국내로 진격, 회령에서 경원으로 가는 길목인 운무령(雲霧嶺)에서 일본군 기마대가 호송하는 우편대를 습격하여 이를 전멸시켰으며, 1주일 뒤인 6월 4일에는 종성 북쪽 5리 지점에 있는 강양동(江陽洞)의 일본 헌병대를 공격하였고, 그곳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강양동에서 독립군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대규모의 병력을 독립군 토벌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대장인 아라미[新美二郞] 대좌(大佐)에게 독립군의 본거지인 만주의 삼둔자(三屯子)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사전에 탐지하고, 이에 대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즉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사령관 최진동(崔振東)은 독립군의 일부 병력을 삼둔자 서남쪽에 잠복시킨 후 적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6월 6일에 피아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일본군은 60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하였고, 독립군은 소총(小銃) 150정과 기관총(機關銃) 3문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일본군이 패배하자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주둔해 있는 제19사단 소속 야스가와[安川二郞] 소좌(少佐)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가 아라미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하였으나 역시 고려령(高麗嶺) 서남방에서 이화일(李化日)이 지휘하는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삼둔자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본부가 있는 봉오동(鳳梧洞)으로 돌아와 일본군의 추격에 대비하였다.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독립군 병사 7백여명을 연병장에 집결시키고 전투배치를 하였는데, 이천오(李千五) 중대를 봉오동 윗마을 서북단에 잠복시키고, 강상모(姜尙模) 중대는 동쪽 고지에, 그리고 강시범(姜時範) 중대는 북쪽 고지에, 조권식(曺權植) 중대는 서산 남쪽에 각각 잠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게 하였다. 또한 연대장 홍범도가 직접 인솔하는 병력은 남산에 위치하여 이번 작전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나머지 병력은 이원(李園)이 인솔하여 서북쪽 산 속에 위치, 탄약과 식량보급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독립군의 금번 작전은 어디까지나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일거에 섬멸하려는데 있었으므로 이화일(李化日) 분대를 전방으로 보내어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봉오동으로 유인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화일은 휘하 독립군을 인솔하고 일본군과 교전하여 본대가 봉오동에서 전투준비를 완료할 때까지 싸우다가 점차 봉오동으로 유인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 수뇌부의 전략대로 6월 7일 12시에 봉오동으로 들어왔다. 이때는 이미 독립군의 전투배치가 완료되었으며 주민들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였기 때문에 봉오동 안에는 아무도 없었을 때였다. 봉오동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마을을 수색한 후 그곳 학교로 들어가서 독립군의 매복지점을 세밀히 살펴보았으나 독립군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하자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진입하기 전에 독립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장비를 전부 가지고 산에 들어가 잠복하라. 일본군은 마을과 사방을 수색한 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면 틀림없이 학교로 들어갈 것이다. 그때 재빨리 사방을 포위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발포하거든 학교를 향하여 총공격을 하도록 하라. 그러나 절대로 총을 헛되이 쏘지는 마라. 탄환은 곧 군인의 목숨이다. 탄환이 없는 총은 몽둥이에 지나지 않는다. 꼭 적병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을 때에만 사격하여야 한다.”

 

홍범도의 예상은 적중하여 일본군은 짐작한 대로 학교 교정에 모였던 것이다. 봉오동 윗마을에 이르도록 독립군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일본군은 아무런 의심도 지니지 않은 채 선봉부대의 뒤를 이어 주력 부대까지 봉오동으로 들어와 학교 교정에 모였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홍범도 장군이 장총(長銃)을 겨누어 들고 방아쇠를 당기자 이것을 신호로 학교를 완전히 포위한 독립군 병사들은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독립군은 홍범도의 지시에 따라 정확히 적병들을 조준하여 사격하였다. 갑작스러운 독립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당황하여 교정에서 갈팡질팡하였고 미처 응사할 겨를도 없이 쏟아지는 총탄에 쓰러져 나갔다.

 

오후 1시경에 전열을 수습한 일본군은 대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장 야스가와[安川] 소좌는 휘하의 카미야[神谷] 중대와 나카니시[中西] 중대를 지휘하여 동쪽 고지에 매복해 있는 강상모 중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의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일본군을 맹공하여 이를 격퇴시키고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야스가와 소좌는 다시 예비 병력인 모리[森宗] 중대와 앞서 패퇴한 카미야 중대의 잔류 병력을 합하여 기관총대(機關銃隊)를 선두로 하여 재공격을 감행하였다. 중대장 강상모는 적군이 양쪽으로 공격하여 오는 것을 보고는 일부 병력만을 잔류시키고 중대원을 모두 퇴각시켰다. 그리고 잔류 병력을 지휘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맹렬한 총격전(銃擊戰)을 전개하던 강상모 중대는 조용히 격전장에서 빠져나왔고, 양쪽으로 올라오던 적군은 저희들끼리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4시간 동안 벌어진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157명 부상자 2백여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만 보았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전력을 얕잡아보고 덤벼들었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일본군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고 그날 저녁 잔존 부대를 수습하여 공산동(空山洞)으로 철수하였으며 독립군은 승전(勝戰)의 기쁨을 가득 안고 명월구(明月溝)로 행군하였다. 명월구로 오는 도중 노두구(老頭溝)에서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 소속 고등계 형사 쯔보이[坪井] 경정(警正)이 인솔하는 경찰수색대와 조우(遭遇)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 경찰관 22명을 사살하고 명월구로 돌아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들의 환대를 받았다.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를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당시 나이가 53세로 약간 몸집이 뚱뚱하였다. 그는 계급장도 없이 언제나 병졸 차림으로 다녔으며 무기도 권총(拳銃)이 아닌 장총(長銃)을 휴대하였고, 탁월한 전략과 백발백중(百發百中)의 사격술(射擊術)로 전투에 임하여서는 패배를 모르는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지용(智勇)을 겸비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지역에서 6일간 계속된 10여회의 접전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라 한다. 이 전투의 주역은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총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이었다. 이 북로군정서 부대는 본영을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두고 16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면서 총기(銃器) 1800정으로 무장하고 대포(大砲) 3문까지 장비된 재만(在滿) 독립군 가운데 최강의 정예부대였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완패한 일본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날로 증강되어 가는 조선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만주로 병력을 출병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의 마적단(馬賊團)을 매수, 동년 10월 2일 훈춘(琿春)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유명한 훈춘사변(琿春事變)이다.

 

이를 기화로 일제는 만주에 있는 일본인과 자기들의 공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을 단행하였다. 당시 만주로 출병한 일본군은 제19사단 전부, 제20사단과 제13사단 및 제14사단의 일부 병력과 관동군으로서 총 3만여명의 전투병력이었다. 이 거대한 병력으로 동서남북 사면으로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일본군의 출병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중국 당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근거지를 떠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였다. 북로군정서도 장백산(長白山) 산중으로 이동할 것을 결의하고 본거지인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10월 5일에 삼도구에 도착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비전투원(非戰鬪員)을 포함하여 2800여명이었으며 군수장비를 수송하는 수레가 180여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북로군정서의 편제를 보면 다음과 같았다.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장 나중소(羅仲昭)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중군장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백종렬(白鍾烈) 한건원(韓建源)

보병대대장 김규식(金奎植)

제1중대장 강화린(姜華麟)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熙)

제3중대장 김인수(金仁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특무정사 나상원(羅尙元) 권중행(權重行)

 

북로군정서가 삼도구로 이동하고 있을 때 일본군은 그 일대를 포위하고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이 작전을 총지휘하게 된 아즈마[東正彦] 소장(少將)은 자신의 부대를 4개 제대로 나누어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金佐鎭) 부대와 홍범도(洪範圖) 부대 2천여명, 그리고 아즈마 소장이 거느린 일본군 병사 1만 5천여명 사이에 십여 차례의 치열한 총격전(銃擊戰)과 포격전(砲擊戰)이 전개된 것이다.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사전에 부대를 4개 제대로 나누었다. 비전투원과 훈련이 부족한 병사를 제1제대에 포함시켜 총사령관인 김좌진이 직접 지휘하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정예병력은 제2제대로 편성하여 연성대장인 이범석이 지휘하게 되었다.

 

독립군은 백운평 계곡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출현을 기다렸다. 독립군은 좌측이 산림이 울창한 약 80도의 급경사지대이며 우측은 암석이 험준한 고산에 매복하였다. 전투의 주력은 이범석 휘하의 제2제대였다.

 

10월 21일 9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군 전위부대가 나타나자 독립군 병사들은 소총(小銃) 6백여정, 기관총(機關銃) 4문, 박격포(迫擊砲) 2문 등 소유하고 있는 각종 화력을 동원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산포(山砲)와 기관총 등으로 응사하였으나 지리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방어진을 구축한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에 여지없이 무너져 갔다.

 

이때 이도구(二道溝) 방면에서 우회하던 일본군이 독립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독립군은 좌우 양측에서 적군의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독립군은 아군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작전상 후퇴하여 22일 새벽 2시 30분에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보병 2백여명이 전멸당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②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는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와는 달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의군부(義軍府), 한민회(韓民會), 한국광복단(韓國光復團), 의민단(義民團), 신민단(新民團) 등의 독립군 부대가 합쳐진 독립군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이 수행한 전투로서 10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어랑촌(漁浪村) 서북방 완루구 산림 가운데에서 벌어졌다.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 진격하여 온 일본군의 동태를 정찰병으로부터 보고 받은 연합여단의 총지휘관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미리 마련되었던 방어선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배치시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동시에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예비대 병력으로 하여금 산림 중간로를 우회하여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군충돌(自軍衝突)을 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즉 북쪽에서 진격하던 일본군은 독립군의 중앙 고지 방어선을 향하여 돌격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고 공격함으로써 서로 우군끼리 총격전을 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중앙고지를 향하던 일본군은 한쪽에서 독립군의 공격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상태에 빠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4백여명이라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③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에서 일본군 1개 보병연대 병력을 무너뜨린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천수동(泉水洞) 민가에 일본 기병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재만(在滿) 조선 민간인의 제보를 받게 되었다. 이 첩보를 받은 독립군은 즉시 전투준비를 하고 22일 새벽 4시에 출발하여 1시간 동안 행군, 천수평 어귀에 도착하였다. 김훈(金勳) 중대는 북쪽으로 가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민화(李敏華) 중대는 천수평 남방고지를 점령하였으며 이범석(李範奭)이 거느린 2개 중대 병력이 곧장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새벽 5시 30분에 독립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응사할 기회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무너졌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이 아직도 1백여리 떨어진 청산리 쪽에 있다고 판단하여 아무런 대책도 없이 진을 치고 있다가 독립군의 습격을 받았으며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전의를 잃고 도주로만 찾다가 패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기병 120여명을 사살하였는데 탈출에 성공한 일본군은 4명뿐이었다고 한다.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는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와 같은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는 천수동에서 사살된 일본군 장교 시마다[島田彬] 중위(中尉)의 군복에서 전문을 발견하고 일본군 2개 대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가 어랑촌(漁郞村)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급히 어랑촌으로 이동하여 서남방 고지를 선점하였다.

 

일본군 병사들은 일제히 대포와 기관총을 쏘며 고지를 향해 올라왔다. 이에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고 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각종 개인화기(個人火器)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일본군의 돌격전(突擊戰)을 저지하였다. 당시 독립군은 병력이나 화력에 있어서 일본군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열세였을뿐 아니라 백운평에서 첫 교전을 치르고 1백여리를 강행군한 직후라 체력이 많이 소진되어 있었다. 다만 선점한 지형이 유리하다는 것밖에 강점이 없었다.

 

22일 9시에 시작된 이 전투는 일본군의 포탄이 고지 중앙에 떨어져 독전(督戰)하던 김좌진(金佐鎭)의 군모(軍帽)가 파편에 맞아 날아갔으며 이범석(李範奭)이 적진을 향해 내뻗은 군도(軍刀)가 총탄에 맞아 두 동강이 나는 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최인걸(崔麟杰)이 이끄는 기관총대(機關銃隊)는 산등에 엎드려 기어 올라오는 일본군을 향하여 맹사격을 가하였으며 인근 마을에 살고 있던 교민들이 고지에 올라와 수류탄(手榴彈)을 운반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전투에 여념이 없는 독립군 장병의 입에 넣어 주는 등 감동적이며 처절한 혈전(血戰)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거세게 압박하는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에 독립군의 저항은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이때 최인걸은 밧줄로 기관총을 자신의 몸에 붙들어 매고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적군의 빗발치는 총탄에 벌집이 되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10배 이상의 적군과 대적하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점차 위기에 몰릴 때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에서 승리한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독립군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이 참전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의 후방을 기습하여 포위망을 뚫고 즉각 지원사격을 하여 적군의 공격을 물리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 장병들은 일본군 3백여명을 사살하였다.

 

기타 전투

 

22일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를 승전(勝戰)으로 이끈 독립군은 23일 병력을 정비한 후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 날 이동중 맹개골에서 일본군 기병 30명과 조우하여 교전함으로써 10여명을 사살하였고, 또 그 후 마르꼬우 산림 중에서 일본군 50명과 교전하여 30여명을 사살하였다.

 

24일 아침에는 쉬구를 향하여 행군중 일본군 보병 100여명을 발견하여 공격하였고 다시 일본군 기병 1개 소대를 쳐서 패주시켰다. 그 후 독립군은 10월 25일 천보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25일 밤에서 26일 새벽까지 고동하곡(古洞河谷)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전개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독립군은 통쾌한 승전(勝戰)을 기록하여 일제(日帝)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가 결코 용이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발행하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숫자를 1200여명이라고 보도하였고, 당시 중국 언론인 요동일일신문(遼東一日新聞)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2천여명이 사살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제19사단의 전투 보고서 기록에는 일본군의 패전(敗戰) 사실이 누락(漏落)되어 있어 큰 대조(對照)를 보이고 있다.

 

해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위원 신재홍(申載洪) 박사

 

「계속」


1920・30年代日帝強制占領期間(日帝強占期) 抗日独立戦争(抗日独立戦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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