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필자는 지난 1999년 교환 교수로 북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중국의 고구려사(高句麗史) 왜곡(歪曲)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지만 한국인 학자가 중국의 대학에서 정식으로 강의를 맡은 것은 필자가 처음이었다.

필자의 강의에는 10여명이 고정적으로 참석했고, 그 가운데에는 북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때때로 강의 도중이나 식당 등에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이때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 것이 고구려(高句麗)였다. 그들이 고구려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각이 한국인들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교환 교수로 있을 때, 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과 비슷했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에 발해(渤海)를 자국의 역사로 규정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해서는 달랐다. 필자가 북경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무렵만 해도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이른바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고구려사를 두가지로 동시에 사용한다는 뜻으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도 될수있고 한국사도 될수 있다는 것이다. 곧 서기 427년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하기 전까지의 고구려사는 중국의 역사이고,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시작되기 전까지 중국인들의 고구려사 인식이었다.
그런데 동북공정을 계기로 “고구려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식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손진기(孫進己) 등 일부 중국인 학자들은 동북공정 이전부터 “고구려사는 중국의 역사다.”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 견해였을뿐 통설(通說)이 아니었다. 그랬던 것이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된 것이다.

중국은 이미 발해사(渤海史)와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왜곡해 왔다. 이러한 마당에 기원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이어졌던 고구려사(高句麗史)마저 자기네 역사라고 하는 중국의 주장을 용인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는 2000년밖에 되지않고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는 것이다.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중국이 이러한 역사 왜곡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북공정을 둘러싼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때, 한국 정부 당국자는 “중국의 소장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공식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국경 지방의 역사와 지리 연구 센터”로 번역할수 있는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 약칭 변강중심(邊疆中心)은 중국의 사회과학원 소속이다. 변강중심과 비슷한 연구소를 36군데나 거느리고 있는 사회과학원은 한국의 국무총리실 격인 중국 국무원 소속이다. 사화과학원 원장은 중국 중앙정치위원 가운데 서열 7위에 해당할 정도로 정치적 위상이 만만치 않은데, 이 사회과학원장이 동북공정의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의 제정경제부 장관 격인 제정부장은 고문을 맡고 있다. 이 정도면 동북공정이 중국 정부 차원의 프로젝트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소장 학자 중심”이라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동북공정의 실무 책임자인 마대정(馬大正) 주임은 66세이고, 동북공정의 학문적 리더라 할수있는 손진기는 77세이다.

중국에서 고구려사와 관련된 저작이 많고 활동도 매우 활발한 경철화(耿鐵華)는 56세이다. 이처럼 나름대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견 또는 원로급 학자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동북공정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중국 정부.

그렇다면 이처럼 중국이 중앙정부 차원에서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의 역사 왜곡 작업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1980년대에 개혁,개방 정책을 춪ㄴ하면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通一的多民族國家論)을 내세워 소수민족 정책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란 한족(漢族)을 포함해 56개의 민족이 중국(中國)이라는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구상으로 보면 56개의 민족 가운데 한족이 전체의 92%에 달한다. 문제는 8%에 불과한 소수민족이 중국 전체 영토의 60%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티베트의 경우 면적상으로는 한국의 10배나 되지만 인구는 200만여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이 광활한 땅에 흩어져 살고있는 곳이 중국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개혁,개방이 본격화될 경우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수 없다.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혁과 개방 초기부터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의 거주지 가운데 신강(新疆) 위구르 자치구와 운남성(雲南省) 등 국경 지방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83년 사회과학원 직속으로 국경 지방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변강중심이라는 연구센터를 세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1989년 동구권이 변화하고,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국경 지방의 소수민족 문제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된 중국 정부가 동북지방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였다.

중국 정부는 수교 이후 한국인들이 이 지역을 찾아와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한국 역사와 관련된 발언을 할때 매우 긴장했으며, 한국인들의 출입을 감시하고 통제하기도 했다. 재중 동포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면서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급격한 탈북자 유입도 계기로 작용.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들이 대거 동북지방으로 건너오기 시작한 것도 중국 정부가 대책을 서두른 배경으로 분석된다. 20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재중 동포의 절반 정도가 만주 지방에 몰려있다. 여기에다 탈북자들이 몰려오고, 한반도가 남한 중심으로 통일되거나 북한 정권 자체가 붕괴될 경우 공산당 지도부까지 넘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만주 지방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무력(武力) 반일항쟁(反日抗爭)을 펼쳤던 곳이라는 사실도 내심 우려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이 지난해 북한과의 국경 지대에 15만 명에 달하는 정규병력을 배치한 데에는 이러한 “원모심려”가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중국이 이처럼 방어적 차원이 아닌 보다 공세적 차원에서 고구려에 대한 연고권 주장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반도에 어떠한 급격한 변화가 닥칠 경우 이에 개입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사 왜곡에 나섰으리라는 것이다. 현재의 북한 지방은 과거에 고구려가 자리했던 곳인데, 그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지방 정권에 지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한반도에 직접 개입하거나 영행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난 2001년 한국 국화에서 “재중 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자 중국 당국은 재중 동포 및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1년 북한이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 줄것을 신청하자 중국은 동북공정을 본격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만약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라고 주장해 왔던 중국의 명분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2003년 봄 집안시 주변의 고구려 고분군을 새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줄것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족속(族屬) 문제를 들수 있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제(東明聖帝) 고주몽(高朱蒙)이 중국 한족(漢族)의 한 계열인 고이족(高夷族)에서 왔다는 것이다. 고이족은 기원전 1000년경 산동반도에 살았던 족속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은 사료상에도 기원전 37년으로 되어 있다. 고이족 시절과 무려 1000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고이족이 산동반도에서 압록강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근거는 어떤 사료에도 찾아볼수 없다. 따라서 고구려가 고이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중국 측은 고구려가 자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았다는 것도 거론했다. 중원 왕조의 속국(屬國)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럴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그들은 중원 왕조는 중앙 정권이요, 고구려는 지방 정권이었음을 내세운다.

물론 고구려가 때때로 중원 왕조에 조공을 바친 것은 사살이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이라는 사실만으로 지방 정권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속국이 아닌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과 월남도 중원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는 빼놓고 고구려만 골라내 속국이니 지방 정권이니 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시의 조공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근래의 통설은 “조공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라는 것이다. 곧, 중국에 대한 조공을 통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자기 존재를 확힌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UN 대표부를 중국에 두고 이것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이 관계를 맺는 세계 질서였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중원 대륙의 지배자는 꼭 한족(漢族)의 왕조가 아니라 북방 기마민족이 세운 정복왕조이기도 했다.

당시 조공을 바치면 중국으로부터 회사품(廻賜品)을 받아올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바치는 조공품보다 회사품이 훨씬 더 많았다. 주는 것보다는 받아오는 것이 더 많았던 것이다. 고려 때에는 송나라 조정에 대해 조공을 1년에 세번 가겠다는 뜻을 전한 적도 있었다. 이에 송나라는 회사품에 부담을 느꼈던 듯 “3년에 한번만 해도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록 조공 자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훨씬 많은 것을 받아내는 실리를 챙길수 있었던 셈이다.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되 나름대로 실리도 있었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조공 무역”으로 규정하는 견해까지 나와있는 마당이다. 따라서 조공이나 책봉 자체를 놓고 “지방 정권”이었다며 고구려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 역시 비상식적인 논리인 것이다.

고구려가 중원 왕조의 지방 정권이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쌓은 천리장성이다. 세계의 어느 지방 정권이 중앙 정부와의 사이에 그만한 장성을 쌓을수 있는가. 천리장성은 중앙 정권과 지방 정권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국가(고구려)와 국가(당나라) 사이의 경계를 위해 쌓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이 내세우는 “지방 정권” 논리가 설득력이 약한 또 다른 근거는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북방 민족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한족이 쌓은 국경선이다. 따라서 중국의 기본 영토는 만리장성 안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만리장성 안쪽은 중국이요, 그 바깥은 “다른 나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계승성이 없는 것은 고구려가 아닌 중원 왕조.

중국이 고구려를 중원 국가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논리 가운데에는 “고구려와 고려는 계승성이 없다.”는 것도 들어있다. 중국 사료에는 고구려와 고려 모두가 “고려”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따로 구분하지 않던 것을 이제는 계승성이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애 “고구려는 고씨 왕조요, 고려는 왕씨 왕조”였다며 억지를 떼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 치면 중원 왕조야말로 전혀 계승성을 찾아볼수 없게 된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한족(漢族)이 세운 것도 있지만 북방 민족이 세운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청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등이 모두 그렇다. 성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족속 자체가 다르므로, 고구려와 고려에 들이대는 잣대로 따지면 중원 왕조는 계승성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며 중국 측이 내세우는 근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주장은 각종 사료를 살펴보아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삼국지(三國志)의 위지동이전(魏地東夷傳)에는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예(濊), 마한(馬韓), 진변(辰弁), 일본(倭國)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은 저자인 진수(陳壽)가 이들을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서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보라고 주장한다면 오환(烏丸)과 선비(鮮卑), 동이(東夷) 뿐 아니라 남만(南蠻)과 북적(北狄) 및 서융(西戎)이 모두 중국사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 방식은 중국 사서에 계속 이어졌으며 주서(周書)의 경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이역열전(異域列傳)에 입전되어 있다.

부여와 고구려, 예, 마한의 경우 제천의식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북쪽에 위치한 부여, 고구려, 예 등과 아울러 남쪽의 마한도 제천의식을 치르었다는 것은 남쪽 사회와 북쪽 사회가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원 국가의 경우 오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 사회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제후국이 아닌 다른 독자적인 정치 체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천의식을 행한 고구려, 부여, 예, 마한 등은 중국과는 다른 천하관을 가진 독립 국가였다는 것이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셈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완성하고 나서 국왕에게 올린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를 보면 “신라와 고구려 및 백제의 삼국이 정립하여 능히 예로써 중국과 교통한 때문에 범엽(氾曄)의 후한서(後漢書)라든가 송기(宋祁)의 신당서(新唐書)에 다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사서는 자기 국내에 관한 것을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실리지 아니했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신라와 고구려 및 백제를 포함해 “삼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으며, 이들 삼국은 중원 국가와 다른 “외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후국에서 사용하는 세가(世家)라는 표현이 아니라 중국 사서에서 사용하는 본기(本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를 한국 역사 속에서 함께 인식한 것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서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를 신라, 백제와 함께 삼국으로 인식하고 “삼국시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고구려사가 한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삼국시대”가 아닌 “양국시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백제와 신라가 중원 국가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했던 반면, 고구려는 영락(永樂)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 점 역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역사 왜곡보다 더 심각한 문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하기 위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은 검인정 교과서 가운데 하나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었지만, 중국의 역사 왜곡은 중국 정부 기관이 나서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가장 먼저 생각할수 있는 것이 남한,북한 공조이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놓고 자기 나름의 잣대대로 왜곡해 온다면, 결론은 남북 간의 공조가 최선의 길이다. 먼저 북한에 남아있는 유물이나 유적만이라도 제대로 보고 공유할수 있어야 한다.
북한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할 UNESCO 총회가 올 여름 중국에서 열린다. 특단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등재가 유력하지만, 여전히 변수는 남아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최종적으로 결정되기까지 북한 고분군의 보존과 관리를 위한 시설, 기술, 재정 지원에 나서는 등 남북 간의 공조가 필요한 것이다.

북한에는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고구려 유적이 많다. 이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가능해지려면 돈과 장비와 기술이 필요하므로 남북이 서로 공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관한 남북 간의 학술 교류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에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정확히 어떻게 되고, 이를 중국이 어떻게 왜곡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외국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국제화”도 중요하다. 우리의 연구 성과와 입장을 해당 외국어로 번역해 해외의 학자와 언론사, 출판사 등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빼놓을수 없다. 이러한 일들을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연구 센터와 같은 전담 기구 또는 기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왜 지금 고구려인가. 단순히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나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강대한 영토와 웅혼한 기상, 민족 정기를 뽐냈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기 때문이다. 그 고구려가 고려가 되었고, 고려는 지금의 “코리아(Korea)”가 된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싹튼 지금을 역사 인식의 대전환점으로 삼아 우리의 역사를 탄탄히 다져나가야 한다. 그래야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 역사의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역사를 지켜갈수 있을 것이다.

출처; 범우사 版 “대고구려(

大高句麗)의 역사, 중국에는 없다.” (2003년)

해설; 최광식 고려대학교 교수

{이상}


中国の歴史歪曲東北公正(東北工程), 改革開放以後 ¥"少数民族¥" 対策で出発.

필자는 지난 1999년 교환 교수로 북경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중국의 고구려사(高句麗史) 왜곡(歪曲)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지만 한국인 학자가 중국의 대학에서 정식으로 강의를 맡은 것은 필자가 처음이었다.

필자의 강의에는 10여명이 고정적으로 참석했고, 그 가운데에는 북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때때로 강의 도중이나 식당 등에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이때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 것이 고구려(高句麗)였다. 그들이 고구려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각이 한국인들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교환 교수로 있을 때, 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과 비슷했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에 발해(渤海)를 자국의 역사로 규정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해서는 달랐다. 필자가 북경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무렵만 해도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이른바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고구려사를 두가지로 동시에 사용한다는 뜻으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도 될수있고 한국사도 될수 있다는 것이다. 곧 서기 427년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하기 전까지의 고구려사는 중국의 역사이고,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시작되기 전까지 중국인들의 고구려사 인식이었다.
그런데 동북공정을 계기로 "고구려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식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손진기(孫進己) 등 일부 중국인 학자들은 동북공정 이전부터 "고구려사는 중국의 역사다."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 견해였을뿐 통설(通說)이 아니었다. 그랬던 것이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된 것이다.

중국은 이미 발해사(渤海史)와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왜곡해 왔다. 이러한 마당에 기원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이어졌던 고구려사(高句麗史)마저 자기네 역사라고 하는 중국의 주장을 용인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는 2000년밖에 되지않고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는 것이다.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중국이 이러한 역사 왜곡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북공정을 둘러싼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때, 한국 정부 당국자는 "중국의 소장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공식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국경 지방의 역사와 지리 연구 센터"로 번역할수 있는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 약칭 변강중심(邊疆中心)은 중국의 사회과학원 소속이다. 변강중심과 비슷한 연구소를 36군데나 거느리고 있는 사회과학원은 한국의 국무총리실 격인 중국 국무원 소속이다. 사화과학원 원장은 중국 중앙정치위원 가운데 서열 7위에 해당할 정도로 정치적 위상이 만만치 않은데, 이 사회과학원장이 동북공정의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의 제정경제부 장관 격인 제정부장은 고문을 맡고 있다. 이 정도면 동북공정이 중국 정부 차원의 프로젝트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소장 학자 중심"이라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동북공정의 실무 책임자인 마대정(馬大正) 주임은 66세이고, 동북공정의 학문적 리더라 할수있는 손진기는 77세이다.

중국에서 고구려사와 관련된 저작이 많고 활동도 매우 활발한 경철화(耿鐵華)는 56세이다. 이처럼 나름대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견 또는 원로급 학자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동북공정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중국 정부.

그렇다면 이처럼 중국이 중앙정부 차원에서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의 역사 왜곡 작업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1980년대에 개혁,개방 정책을 춪ㄴ하면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通一的多民族國家論)을 내세워 소수민족 정책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란 한족(漢族)을 포함해 56개의 민족이 중국(中國)이라는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구상으로 보면 56개의 민족 가운데 한족이 전체의 92%에 달한다. 문제는 8%에 불과한 소수민족이 중국 전체 영토의 60%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티베트의 경우 면적상으로는 한국의 10배나 되지만 인구는 200만여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이 광활한 땅에 흩어져 살고있는 곳이 중국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개혁,개방이 본격화될 경우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수 없다.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혁과 개방 초기부터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의 거주지 가운데 신강(新疆) 위구르 자치구와 운남성(雲南省) 등 국경 지방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83년 사회과학원 직속으로 국경 지방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변강중심이라는 연구센터를 세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1989년 동구권이 변화하고,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국경 지방의 소수민족 문제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된 중국 정부가 동북지방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였다.

중국 정부는 수교 이후 한국인들이 이 지역을 찾아와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한국 역사와 관련된 발언을 할때 매우 긴장했으며, 한국인들의 출입을 감시하고 통제하기도 했다. 재중 동포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면서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급격한 탈북자 유입도 계기로 작용.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들이 대거 동북지방으로 건너오기 시작한 것도 중국 정부가 대책을 서두른 배경으로 분석된다. 20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재중 동포의 절반 정도가 만주 지방에 몰려있다. 여기에다 탈북자들이 몰려오고, 한반도가 남한 중심으로 통일되거나 북한 정권 자체가 붕괴될 경우 공산당 지도부까지 넘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만주 지방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무력(武力) 반일항쟁(反日抗爭)을 펼쳤던 곳이라는 사실도 내심 우려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이 지난해 북한과의 국경 지대에 15만 명에 달하는 정규병력을 배치한 데에는 이러한 "원모심려"가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중국이 이처럼 방어적 차원이 아닌 보다 공세적 차원에서 고구려에 대한 연고권 주장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반도에 어떠한 급격한 변화가 닥칠 경우 이에 개입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사 왜곡에 나섰으리라는 것이다. 현재의 북한 지방은 과거에 고구려가 자리했던 곳인데, 그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지방 정권에 지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한반도에 직접 개입하거나 영행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난 2001년 한국 국화에서 "재중 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자 중국 당국은 재중 동포 및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1년 북한이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 줄것을 신청하자 중국은 동북공정을 본격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만약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라고 주장해 왔던 중국의 명분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2003년 봄 집안시 주변의 고구려 고분군을 새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줄것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족속(族屬) 문제를 들수 있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제(東明聖帝) 고주몽(高朱蒙)이 중국 한족(漢族)의 한 계열인 고이족(高夷族)에서 왔다는 것이다. 고이족은 기원전 1000년경 산동반도에 살았던 족속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은 사료상에도 기원전 37년으로 되어 있다. 고이족 시절과 무려 1000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고이족이 산동반도에서 압록강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근거는 어떤 사료에도 찾아볼수 없다. 따라서 고구려가 고이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중국 측은 고구려가 자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았다는 것도 거론했다. 중원 왕조의 속국(屬國)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럴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그들은 중원 왕조는 중앙 정권이요, 고구려는 지방 정권이었음을 내세운다.

물론 고구려가 때때로 중원 왕조에 조공을 바친 것은 사살이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이라는 사실만으로 지방 정권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속국이 아닌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과 월남도 중원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는 빼놓고 고구려만 골라내 속국이니 지방 정권이니 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시의 조공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근래의 통설은 "조공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라는 것이다. 곧, 중국에 대한 조공을 통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자기 존재를 확힌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UN 대표부를 중국에 두고 이것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이 관계를 맺는 세계 질서였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중원 대륙의 지배자는 꼭 한족(漢族)의 왕조가 아니라 북방 기마민족이 세운 정복왕조이기도 했다.

당시 조공을 바치면 중국으로부터 회사품(廻賜品)을 받아올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바치는 조공품보다 회사품이 훨씬 더 많았다. 주는 것보다는 받아오는 것이 더 많았던 것이다. 고려 때에는 송나라 조정에 대해 조공을 1년에 세번 가겠다는 뜻을 전한 적도 있었다. 이에 송나라는 회사품에 부담을 느꼈던 듯 "3년에 한번만 해도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록 조공 자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훨씬 많은 것을 받아내는 실리를 챙길수 있었던 셈이다.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되 나름대로 실리도 있었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조공 무역"으로 규정하는 견해까지 나와있는 마당이다. 따라서 조공이나 책봉 자체를 놓고 "지방 정권"이었다며 고구려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 역시 비상식적인 논리인 것이다.

고구려가 중원 왕조의 지방 정권이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쌓은 천리장성이다. 세계의 어느 지방 정권이 중앙 정부와의 사이에 그만한 장성을 쌓을수 있는가. 천리장성은 중앙 정권과 지방 정권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국가(고구려)와 국가(당나라) 사이의 경계를 위해 쌓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이 내세우는 "지방 정권" 논리가 설득력이 약한 또 다른 근거는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북방 민족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한족이 쌓은 국경선이다. 따라서 중국의 기본 영토는 만리장성 안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만리장성 안쪽은 중국이요, 그 바깥은 "다른 나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계승성이 없는 것은 고구려가 아닌 중원 왕조.

중국이 고구려를 중원 국가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논리 가운데에는 "고구려와 고려는 계승성이 없다."는 것도 들어있다. 중국 사료에는 고구려와 고려 모두가 "고려"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따로 구분하지 않던 것을 이제는 계승성이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애 "고구려는 고씨 왕조요, 고려는 왕씨 왕조"였다며 억지를 떼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 치면 중원 왕조야말로 전혀 계승성을 찾아볼수 없게 된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한족(漢族)이 세운 것도 있지만 북방 민족이 세운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청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등이 모두 그렇다. 성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족속 자체가 다르므로, 고구려와 고려에 들이대는 잣대로 따지면 중원 왕조는 계승성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며 중국 측이 내세우는 근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주장은 각종 사료를 살펴보아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삼국지(三國志)의 위지동이전(魏地東夷傳)에는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예(濊), 마한(馬韓), 진변(辰弁), 왜국(倭國)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은 저자인 진수(陳壽)가 이들을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서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보라고 주장한다면 오환(烏丸)과 선비(鮮卑), 동이(東夷) 뿐 아니라 남만(南蠻)과 북적(北狄) 및 서융(西戎)이 모두 중국사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 방식은 중국 사서에 계속 이어졌으며 주서(周書)의 경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이역열전(異域列傳)에 입전되어 있다.

부여와 고구려, 예, 마한의 경우 제천의식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북쪽에 위치한 부여, 고구려, 예 등과 아울러 남쪽의 마한도 제천의식을 치르었다는 것은 남쪽 사회와 북쪽 사회가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원 국가의 경우 오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 사회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제후국이 아닌 다른 독자적인 정치 체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천의식을 행한 고구려, 부여, 예, 마한 등은 중국과는 다른 천하관을 가진 독립 국가였다는 것이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셈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완성하고 나서 국왕에게 올린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를 보면 "신라와 고구려 및 백제의 삼국이 정립하여 능히 예로써 중국과 교통한 때문에 범엽(氾曄)의 후한서(後漢書)라든가 송기(宋祁)의 신당서(新唐書)에 다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사서는 자기 국내에 관한 것을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실리지 아니했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신라와 고구려 및 백제를 포함해 "삼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으며, 이들 삼국은 중원 국가와 다른 "외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후국에서 사용하는 세가(世家)라는 표현이 아니라 중국 사서에서 사용하는 본기(本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를 한국 역사 속에서 함께 인식한 것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서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를 신라, 백제와 함께 삼국으로 인식하고 "삼국시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고구려사가 한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삼국시대"가 아닌 "양국시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백제와 신라가 중원 국가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했던 반면, 고구려는 영락(永樂)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 점 역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역사 왜곡보다 더 심각한 문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하기 위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은 검인정 교과서 가운데 하나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었지만, 중국의 역사 왜곡은 중국 정부 기관이 나서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가장 먼저 생각할수 있는 것이 남한,북한 공조이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놓고 자기 나름의 잣대대로 왜곡해 온다면, 결론은 남북 간의 공조가 최선의 길이다. 먼저 북한에 남아있는 유물이나 유적만이라도 제대로 보고 공유할수 있어야 한다.
북한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할 UNESCO 총회가 올 여름 중국에서 열린다. 특단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등재가 유력하지만, 여전히 변수는 남아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최종적으로 결정되기까지 북한 고분군의 보존과 관리를 위한 시설, 기술, 재정 지원에 나서는 등 남북 간의 공조가 필요한 것이다.

북한에는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고구려 유적이 많다. 이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가능해지려면 돈과 장비와 기술이 필요하므로 남북이 서로 공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관한 남북 간의 학술 교류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에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정확히 어떻게 되고, 이를 중국이 어떻게 왜곡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외국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국제화"도 중요하다. 우리의 연구 성과와 입장을 해당 외국어로 번역해 해외의 학자와 언론사, 출판사 등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빼놓을수 없다. 이러한 일들을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연구 센터와 같은 전담 기구 또는 기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왜 지금 고구려인가. 단순히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나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강대한 영토와 웅혼한 기상, 민족 정기를 뽐냈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기 때문이다. 그 고구려가 고려가 되었고, 고려는 지금의 "코리아(Korea)"가 된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싹튼 지금을 역사 인식의 대전환점으로 삼아 우리의 역사를 탄탄히 다져나가야 한다. 그래야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 역사의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역사를 지켜갈수 있을 것이다.

출처; 범우사 版 "대고구려(大高句麗)의 역사, 중국에는 없다." (2003년)

해설; 최광식 고려대학교 교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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