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1597년 9월, 조선 수군의 병력은 겨우 전함 12척에 군사 120여명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전함 133척과 군사 3만여명, 도저히 승산이 없는 전투로 보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전함 31척이 격침되고 군사 8천여명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한다. 반면, 조선수군은 단 한척의 전함 손실도 없었으며 부상자 3명과 전사자 2명이 피해 상황의 전부였다. 세계 전쟁사상 그 유례가 없는 명량 해전은 영국 해군사관학교의 교재에 세계 4대해전 중의 하나로 가장 위대한 승리로 손꼽히고 있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거제도 주변은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된다. 그래서 섬 곳곳에는 임진왜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거제도 동북 쪽의 장문포, 이곳에 있는 성 역시 임진왜란 초기에 축조된 것이다. 성벽은 경사져 있고 커다란 바윗돌로 쌓여있다. 그리고 몇차례 꺾여 돌출된 부분도 보인다. 전형적인 왜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군은 이곳 장문포와 송진포, 영등포등 거제도에만 세 곳에 왜성을 쌓았다.

나동욱 부산 역사박물관장 “만약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할 경우 거제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수로를 반드시 거쳐가야 한다. 특히 왜군 입장에서는 번번이 해전에서 패배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내리게 되는데 해안에 가까운 곳에서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조선수군을 공격할수 있는 좋은 위치에서 성을 쌓으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거제도에 성을 쌓고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조선 수군을 포격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의 명령대로 왜군은 부산으로 가는 길목, 거제의 바닷가에 성을 쌓았다. 바닷가의 왜성은 이순신의 함대에 연전연패한 일본 수군이 해전을 피하려는 궁여지책이었지만 조선 수군에게는 위협적인 조치였다.


왜군은 왜 거제도에 성을 쌓았을까?

정두희 교수는 왜군과 조선 수군의 대치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왜군이 성을 쌓은 직접적인 계기를 부산포 해전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정두희 서강대학교 교수 “부산은 왜군이 조선을 침략할 때부터 최고의 보급기지였다. 그것이 조선 수군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왜군에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육전에서 전선이 너무 길어져 고생하던 왜군들이 후방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고 한산도 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이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데 그 재해권에 대해서 왜군이 어떠한 도전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개해서 부산포 해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거둔 이순신의 함대는 약 두달 후 적의 본거지인 부산을 공격한다. 전선 74척, 협선 92척으로 이루어진 조선수군은 여수의 좌수영을 출발한지 한달여 만에 부산에 닿았다. 당시 부산에는 적선 470여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산도 해전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해전 금지령에 따라 모든 전선을 부두에 정박시켜 놓고 있었다. 그리고 왜병들은 대부분 육지에 상륙한 상태였다.

조선 수군은 정박 중인 왜군 선단을 항해 장사진으로 진격해 갔다. 즉 모든 전함을 일렬로 정렬시켜 지나가면서 화포 사격을 한 것이다. 이 전투로 적선 150여척을 격침시켰다. 부산포 해전은 적의 본거지를 직접 타격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로 전략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한산도 해전의 패배 이후 전력을 재정비하던 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후 왜군의 최전방 부대인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보급로의 단절로 평양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정두희 교수 “우선 고니시군이 서해안을 따라 평양까지 가지 않았나. 그의 군대는 원래 빠른 속도로 육지로 진군하면 남해에서 서해를 거친 대규모 수송선단으로 장비와 군량이 보급되기로 한 것인데 그것이 가장 타격을 입었으니 매우 힘들어진 것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해전의 패배로 왜군은 오로지 육로를 통한 보급선만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다.

나카니시 다케시 쿠슈대학교 교수 “예를 들어 200석을 실은 배 열척이 평양에 도착하면 평양의 고니시군은 3일동안 그것으로 먹고 지낼수 있다. 이것을 만약 부산에서 육로로 운반한다면 말이 500여필은 필요하다.”

평양으로 진격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결국 남쪽으로 철수를 한다. 그리고는 진해 웅천에 왜성을 쌓고 주둔하게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조선 수군에게 정박할 항구를 제공하지 않고 또한 조선수군을 육지에서 포격할 수 있는 지역에 왜성을 쌓았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다시 부산을 공격하면 육지에서 공격할 수 있고 또 후방에서 포위할 수 있는 위치에 왜성을 쌓았던 것이다.

일본 수군이 거제 동쪽 부터 부산까지를 요새화하는 동안 이순신은 또다른 선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한산도 해전이 끝나자마자 전라좌수영을 통영 한산도로 옮겨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한산도를 선택한 것은 전략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한산도는 거제와 통영 사이의 내해를 통해 오는 적군과, 거제 바깥의 외해로 들어오는 적을 모두 막을 수 있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당시 목선 위주의 함대는 위험한 외해 대신 안전한 내해로 올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순신의 한산도 선택은 견내량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산도의 조선 수군과 거제도의 일본 수군, 이들의 길고 긴 대치가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약 100여 척의 함대로 수십 만의 왜군을 4년 반 동안 방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압박이었다. 언제든지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절대 열세의 전력으로 적을 막아야 했다. 더구나 조정의 지원도 없고 육군의 도움도 없는 수군만의 외로운 대치였다.

정두희 교수 “그때 이순신의 함대에 있어 가장 큰 약점은 이 함대 이외에는 보충할 병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한번 지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수군을 총지휘하는 이순신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 아니면 해선 안된다는 부담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야 될 일이 많고 이것이 이순신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 것이 아닌가...”

당시 이순신 자신의 상태와 심경은 그가 남긴 난중일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는 몸이 불편하거나 아팠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팽팽한 긴장과 압박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강한 적과 대치하면서도 전혀 보급과 지원을 받지 못했던 야전 사령관 이순신, 한산도 통제영 시절은 고난의 시기였다.

한산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 이순신에게 조정은 부산을 선제공격하라는 명령을 몇 차례에 걸쳐 내린다. 결국 이것은 이순신의 파직을 불렀다.

이순신은 부산을 공격 하지 않았다. 견내량을 넘으면 위험했기 때문이다. 적군은 이미 이순신의 공격에 모든 방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견내량은 함부로 넘을 수 없는 군사분계선이었다.

정두희 교수 “이순신도 지략이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왜군 장수들도 전쟁에는 경험이 많은 고수들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선제공격할 틈을 서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할 비전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공격을 했다간 오히려 약점을 드러내 질수가 있으니까 한산도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선제공격도 못하고 꼼짝할 수밖에 없는 이순신의 절박한 심정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균형은 왜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조선 수군이 거제의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고 마는 것이다. 부산공격 명령을 어긴 죄로 투옥된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부산 공격에 나섰다. 그것은 조정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정면 대결을 피했다. 적을 쫓던 조선 수군은 풍랑을 만났고 결국 부산에는 접근조차 못한 채 후퇴해야 했다.

기타지마 만지 교수 “왜군은 조선 수군에 다가갔다가 바로 도망친다. 그러면 조선 수군은 쫓아간다. 또다시 한쪽에서 조선군에게 접근했다가 다시 도망간다. 그렇게 해서 원균 함대의 배들이 흩어져버려 반대로 공격을 당한 것이다. 한산도 해전 때에 이순신이 와키쟈카의 함대를 유인해서 끌어낸 것과 같은 방법을 왜군이 취했다고 생각한다.”

가덕도에 상륙하려다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400 명의 군사를 잃은 원균의 함대는 풍랑에 시달리며 거제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정박중이던 조선수군은 새벽 4시, 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수백 척의 왜 수군 연합선단이 조선수군을 완전 포위, 공격해 왔다. 전투는 조선 수군의 참패로 끝이 났다. 조선수군의 전함 100여 척이 격침되었고 원균과 이억기는 전사했다.

조선수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한산도 통제영도 궤멸했다.

견내량 군사 분계선은 무너졌다. 왜군은 이 물길을 지나 곧장 전라도로 진격했다. 정유재란의 첫번째 목표는 전라도였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왜군은 전라도를 차지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그 때문에 이기지 못했다고 믿고 있었다.

칠천량 패전 후, 이순신은 전황 파악을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진주의 수곡에서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 교지를 받았다. 전함도 없고 군사도 없는 해군 사령관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이 휩쓸고 간 지역에서 재기를 준비했다. 각 지역을 돌면서 칠천량 패전으로 흩어진 수군들을 다시 모았다. 순천에서 60명, 보성에서 80명 등 군사를 모았으나 수 십만 왜군에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군사들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이순신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른 용사들이었다.

이순신은 군사와 버려진 군량, 병장기를 수습해가며 서쪽으로 이동했다. 칠천량 패전 한 달 후, 장흥의 회령포에 닿았다. 당시 회령포에는 칠천량에서 도망쳐온 경상우수사 배설의 전함 12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은 통제사 자격으로 그 전함을 인수했다. 그리고 몇 안되는 병사들과 함께 왕명에 따라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조정의 생각은 달랐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데리고 권율 장군 휘하에서 싸우라고 명령했다. 수군 해체령이었다!

이순신은 즉각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군을 해체하면 적군은 충청도를 거쳐 곧장 한양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성토하였다. 아직 자신에게는 전함 12척이 있으니 온 힘을 다해 왜적을 막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전주성을 함락했던 왜군은 진로를 변경하여 일부는 계속 북상, 충청도로 올라가고 일부는 다시 남하해서 전라도 해안으로 진격했다. 그것은 이순신의 이동경로를 뒤쫓는 길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섬멸시킨 일등공신 도도 다카도라, 역시 칠천량 해전의 주역 가토 요시아키, 그리고 한산도 해전의 패장 와키쟈카 야쓰하루와 명량 해전에서 전사하는 비운의 주인공 구루시마 미치후사까지 이들이 총집결하여 이순신을 쫓았다.

명량 해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특히 이순신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곽란으로 인사불성에 빠지기도 했으며,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더구나 적은 회령포를 지나 해남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명량해전 하루 전, 해남 어란포에 적선 55 척이 들어왔다. 이를 확인한 이순신은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전라 우수영은 명량의 물길 뒤쪽, 이순신은 여기서 적을 기다렸다.

명량은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물길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연안에서 조류의 흐름이 가장 센 곳이다. 6시간 마다 방향이 바뀌는 조류가 좁은 해역을 통과하면서 엄청난 속도와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명량 조류의 최고 속도는 시속 11노트, 전투는 커녕 배를 정지해 있기도 힘든 물살인 것이다.

이순신은 이 급류 앞에서 적의 대군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당시 왜군은 명량의 조류 상황을 모르고 있었을까?

일본 수군의 본거지인 에이메현, 이곳에는 일반인들에게 인기있는 관광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조류체험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이곳의 조류는 최고 시속 10노트, 이 조류 역시 육지와 섬, 섬과 섬 사이의 좁은 해역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작은 섬들은 왜 수군의 군사기지들이었다. 기지는 빠른 조류를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일본 수군들 역시 이런 조류에 잘 적응하고 이용하지 않았을까?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모두 명량의 물길을 잘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명량의 급류는 어떻게 형성되어 흐르고 있을까?

명량을 중심으로 목포와 해남 쪽은 상대적으로 넓은 바다이다. 이 넓은 바다의 물이 좁은 수로를 통과하면서 수심은 1미터 이상 높아지고 급류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수중의 암초로 인해 소용돌이까지 생긴다. 그렇다면 명량해전 당일의 조류는 어땠을까?

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 조류는 컴퓨터로 수 백년전의 상황도 정확하게 조회할 수 있다.

1597년 음력 9월, 명량의 조류표가 완성되었다. 명량의 조류 역시 6시간 마다 방향이 바뀌고 있었다. 명량 해전 당일인 9월16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25일, 물길이 바뀌는 시간은 5시 18분, 11시 8분 등이었고, 최고조 시간은 8시 9분, 2시 45분 등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전의 조류방향은 남해에서 서해, 즉 일본군 측에서 명량쪽으로 들어오는 조류였다. 당시 조류의 최고 속도는 9.5 노트, 명량은 바다의 고속도로였다.

그 날 난중일기는 적의 출현 시간을 적고 있다. 그것은 조조, 즉 이른 아침이었다.

일본 수군은 조류를 정확하게 타고 출발했다. 이른 아침 조류가 서해쪽으로 바뀌었을 때 어란진을 출발했던 것이다. 일본 수군은 순조를 타고 빠르게 돌진해 왔다. 일본 수군은 조류를 최대한 이용하여 명량을 통과하려 했을 것이다.

당시 적의 숫자에 대해 난중일기는 적선 부지기수, 즉,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이런 적에 대해 어떤 대비책이 있었을까?

명량해전의 승리 비결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일본측 자료가 있다.

정한역일반사적에는 철쇄란 단어가 등장한다. 철쇄, 왜군이 다가오자 이순신은 물 속에 늘어뜨렸던 철쇄를 당겨 왜군 전함이 걸리게 했다. 즉, 이순신은 명량의 수중에 장애물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난중일기에도 수중 장애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은 하루 종일 바다에 쇠사슬을 설치하는 것을 감독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순신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우세한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곳을 찾아 간 것이다.

그리고 명량의 급류를 선택했다. 그는 이 급류속에 비장의 무기를 감추고 있었다.

조류를 타고 빠른 속도로 돌진하던 일본 수군은 철쇄에 걸려 전선들끼리 연쇄충돌을 일으켰다. 대혼란의 순간을 이순신의 함대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적선 31척이 격침되었고 왜병 8천여명이 수장되었다. 나머지는 멀리 동쪽으로 도망을 갔다.

마지막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 이곳이 바로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노량이다. 노량해전은 조선수군과 왜 수군의 정면 충돌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 바다에서 최후를 맞았다. 7년 전쟁의 종말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비롯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의 철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당시 일본의 주력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왜성을 쌓고 농성 중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명나라 수군과 함께 순천 앞바다를 에워싼 채 약 두 달간 이들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안전한 철수를 원했다. 그는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연락선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고성과 사천등의 왜군 선단이 연락을 받고 노량 바다로 진격해 왔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노량으로 나가 적을 맞았다.

전투는 새벽 두시에 시작되었다. 노량의 좁은 바다에 수백 척의 전함이 뒤엉켜 전투를 벌였다. 처음부터 치열한 접근전으로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왜군은 200여 척의 전함을 잃었고 1만여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생겼다.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지만 조선 수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투 도중 남해 먼 바다를 통해 도주했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직접 북을 치며 독전하던 도중 이순신은 총탄을 맞았다. 그의 전사는 즉각 알려지지 않았고 전투는 정오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7년 전쟁도 마침내 끝이 났다. 그는 마지막까지 급류를 선택 했고 그 앞에서 최후를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영의정 이항복은 이순신이 남해의 세군데 물길을 지켰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경상도를 거치어
전라도로 가자면은
가로막힌 곳이 한산이요,
경계는 노량이요,
그 목은 명량이라.
......

그 날에 뉘 공로로
세 군데 험관을 막아냈던고,
그는 곧 으뜸 공신 통제사이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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