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만주의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수차에 걸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감행하여 국경의 일본군 수비대에 큰 타격을 주자, 일본군 제19사단은 1920년 6월초 1개 대대 병력을 파견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도록 했다. 일본군은 간도의 삼둔자(三屯子)에 이르러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으나, 삼둔자 서남방(西南方)에 잠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습격을 받고 패퇴하였으니 이 싸움이 곧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이다.

 

함경도 나남(羅南)에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少佐)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보내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일본군 야스카와 대대는 간도로 진격하여 안산(安山) 후방 고지에서 독립군과 첫 교전을 치르고 계속해서 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까지 독립군을 추격해 왔다.

 

두만강 유역 온성 대안에 있는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지형이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요새였다. 그러므로 주위 야산의 고지만 차지하면 그 안에 들어간 적군을 쳐부수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의 수뇌부인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등은 우선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재만 교포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고 이천오(李千五) 중대를 봉오동 윗마을 서북단에, 강상모(姜尙模) 중대는 동산(東山)에, 강시범(姜時範) 중대는 북산(北山)에, 조권식(曺權植) 중대는 서산(西山)에 각각 매복시켰다. 그리고 홍범도 자신은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서북단에 매복함과 동시에 군무국장 이원(李圓)으로 하여금 본대 병력을 인솔하고 서북고지(西北高地)에서 탄약(彈藥)과 식량을 공급하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퇴로를 확보하도록 했다. 게다가 홍범도는 이화일(李化日) 분대를 보내 고려봉(高麗峰) 북쪽 1천 2미터 고지와 그 북쪽 마을 앞에 잠복하여 기다리다가 적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유인하게 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가 포위망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일본군은 1920년 6월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여 전위중대(前衛中隊)를 내보냈다. 이화일 분대는 적군을 유인하기 위한 퇴각을 하지 않고 맹렬한 공격을 가해 일본군 전위중대를 전멸시켰다. 일시 후퇴하여 대열을 정비한 일본군은 같은 날 11시 30분에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지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척후병이 오후 1시에 독립군의 포위망 안에 당도하였지만 대한북로독군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적군을 기다렸다. 그러자 야스카와 대대는 안심하고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홍범도 장군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매복해 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삼면에서 일본군에게 집중사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를 중심으로 집결하였던 일본군은 갑작스러운 독립군의 기습공격에 당황하여 대열이 흩어지고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상자가 늘어났다. 야스카와 대대는 포위망 안에서 3시간 동안 응전하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강상모 중대가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자만 157명이나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이 전부였으니, 한국의 전쟁사(戰爭史)에 길이 남을 쾌거 가운데 하나인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가 이것이었다.

 

봉오동전투 승리는 독립군이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였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봉오동의 지형에 익숙한 독립군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승전(勝戰)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큰 것이었다. 즉 봉오동전투 승리는 독립군 장병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에게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의 전투를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느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데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었다.

 

●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의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단체들은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다. 이에 일제(日帝)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현지의 경찰이나 소수의 전투 병력만으로는 도저히 이러한 독립군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간도에 대규모 부대를 출병시켜 반일 무장 단체들을 토벌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중국의 영토인 만주 지역에 직접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이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국제외교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출병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훈춘사변(琿春事變)을 일으켰다. 제1차 훈춘사변은 1919년 9월 12일에 일어났는데, 9백여명의 마적단(馬賊團)이 일본 영사관이 있는 훈춘을 공격하여 재만한인(在滿韓人) 30여명이 살해되는 비극이 벌어졌지만 이 사건의 주범이 한국인 무장 단체라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제2차 훈춘사변은 1920년 10월 2일에 일어났는데, 일본의 훈춘 영사관 소속 경찰관 50여명과 중국 경비대가 함께 방어전(防禦戰)에 나섰지만 일본 경찰이 수비를 맡았던 성문이 손쉽게 열려 마적단의 노략질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중국 군인 60명과 한국 민간인 7명이 살해되었으며, 일본의 영사관도 비습되어 일본인 수십명이 사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일본 측은 훈춘을 습격한 마적단이 조선 독립군과 관계가 있었는가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전에 “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국의 병력을 투입하겠다.”는 구실로 미리부터 예정하였던 소위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곧 실천에 옮겼다.

 

곧 일본군은 1920년 10월 7일부터 간도에 침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소바야시[磯林直明] 지대(支隊)는 10월 14일에 훈춘하(琿春河) 골짜기로 출동하였으며, 기무라[木村益三] 지대는 10월 17일에 왕청(汪淸)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그리고 아즈마[東正彦] 지대는 15일에 용정에 도착한 후 18일에 삼도구(三道溝)에 주둔해 있는 홍범도의 부대를 찾아서 출발하였다.

 

일본군 아즈마 지대는 10월 20일 포병 약 5천명의 병력으로 이도구(二道溝)와 삼도구를 포위하여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洪範圖)가 총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의군부(義軍府), 한민회(韓民會), 한국광복단(韓國光復團), 의민단(義民團), 신민단(新民團) 등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을 모두 섬멸하고자 하였다.

 

독립군 측은 처음에는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피전책(避戰策)을 채택하였으나, 일본의 침략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들어와 한국인 마을을 불지르고 죄 없는 교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자 결정을 바꾸어 일본군을 맞아 싸우기로 하고 작전을 논의하였다.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여단이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7일간 단독작전 혹은 합동작전으로 일본군 1만 5천여명의 전투 병력과 맞서 10회의 접전을 벌여 승리한 싸움이다. 청산리대결전 최초의 전투는 21일에 있었던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로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야마다[山田] 보병연대를 삼도구 골짜기인 백운평 부근에서 격퇴시킨 싸움이다. 두번째 전투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전개된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로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여단이 아즈마 지대의 일부 병력을 격멸한 승전(勝戰)이었다. 세번째 전투는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로 북로군정서가 시마다[島田] 기병중대 120명을 전멸시킨 싸움이다.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가장 치열하고 사상자가 많았던 전투는 22일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였는데, 김좌진(金佐鎭) 부대와 홍범도(洪範圖) 부대가 함께 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호 고지를 선점하고 공동으로 일본군의 돌격전(突擊戰)을 저지하며 맹렬한 혈전(血戰)을 벌여 적군 1천 6백여명을 살상하였다. 그 밖에도 맹개골 전투, 쉬구 전투, 만기구전투(萬麒溝戰鬪), 천보산전투(天寶山戰鬪), 고동하곡전투(古洞河谷戰鬪) 등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소련과의 국경지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총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완패를 당하자 그 보복으로 한국인 마을을 불사르고 비무장 상태인 한국인 농민들을 무참히 살육했으며 학교와 교회를 불태웠다. 청산리대결전 때부터 그 해 연말까지 간도 일대에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무고한 한국인의 수는 공식통계로는 3115명이었고 실제로는 무려 1만명이나 되었다. 당시 일본군 장교들은 패전(敗戰)을 은폐하기 위하여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희생된 한국 민간인들을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독립군으로 조작하여 사령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승리한 여러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북쪽으로 이동하여 1920년 12월 말경에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군부(義軍府), 혈성단(血誠團), 야단(野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10개 독립군 부대가 집결하여 지도자들간의 회의 끝에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라는 통합 부대가 결성되었는데,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조성환(曺成煥), 총사령관에 김규식(金奎植),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에 이청천(李靑天) 등이 각각 취임하였다.

 

●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0년 10월 이후 일본군의 간도 침입과 동시에 만주 지역의 독립군은 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은 좀 더 활동하기에 유리하고 일본 측의 위협이 적은 곳에 정착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문창범(文昌範), 한창해(韓滄海) 등의 도움으로 소만(蘇滿) 국경 하천인 우스리 강을 넘어 이만(Iman)으로 이동하였다.

 

1921년 3월 하순까지 일단 이만에 집결한 조선 독립군은 단합하여 1921년 4월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대한독립단은 당시 흑룡주(黑龍州)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적군(赤軍)으로부터 대일공동전선(對日共同戰線)을 형성하자는 제의를 받고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됨에 따라 해체되었다. 그 결과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 등 북로군정서 계열은 이만에서 다시 밀산으로 되돌아갔으며,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이청천(李靑天) 등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서로군정서 계열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이처럼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자, 각기 사정이 다른 부대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즉 적군(赤軍)의 제2군단 제6연대장으로서 흑하 지방의 수비대장 직책을 겸임하고 있던 오하묵(吳夏默)과 니항군(尼港軍)이라는 적계(赤系)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박일리아간의 군권(軍權) 장악을 위한 암투가 그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홍범도와 최진동은 오하묵, 박일리아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도리어 이들의 주도권 쟁탈전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그리하여 1921년 6월 28일에 자유시대대의 오하묵이 소련 적군의 지원을 받아 박일리아의 군대에게 선제공격을 가하여 6시간의 교전 끝에 박일리아 측 군인 36명을 사살하고 864명을 포로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다.

 

박일리아 세력을 제압한 오하묵은 소련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부대를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킴과 아울러 독립군도 강제로 그곳으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독립군 장병들은 이만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다.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독립군은 적군(赤軍) 제5군단 예하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동년 10월 3일에는 갈난다라사발리 대신에 오하묵이 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 여단에서는 1921년 10월 28일에 6개월 수업기간의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이청천(李靑天), 교관에 채영(蔡英), 김승빈(金勝彬) 등을 각각 임명하였다.

 

1922년 2월 17일에 여단은 특립연대(特立聯隊)로 개편되었는데, 연대장은 오하묵이 담당하였으며 군정위원장에는 박승만(朴承萬)이 임명되었다.

 

한편, 자유시사변을 피하여 은신하였던 이용(李鏞), 김규면(金圭冕) 등은 1921년 7월에 연해주에 도착하여 장기영(張基英), 한운용(韓雲用) 등과 합세, 박일리아를 만나 10월 29일에 재차 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를 조직하였다. 한국의용군사회는 한인(韓人) 이주민들에 대한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군자금 조달과 무기 구입에 주력한 결과 단기간에 500여정에 달하는 총기(銃器)를 획득하여 의용군 대원을 무장시켰다. 이 무렵 연해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백군(白軍)을 동원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백당임시정부(白黨臨時政府)를 창립하고 11월 상순부터 백군으로 하여금 스파스크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북진하도록 지원하였다.

 

이만시가 백군(白軍)의 공격 위협을 받게 되자 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는 연해주 지구의 적군(赤軍)과 제휴하여 백군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소련 측으로부터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제공받은 한국의용군은 11월 13일에 이만에서 시가전(市街戰)을 벌였다. 그러나 백군이 이만을 점령하고 적군이 퇴각함에 따라 한국의용군도 이만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한운용이 이끄는 한국의용군 제3중대 제1소대 45명은 이만 역에서 벌어진 백군과의 전투에서 끝까지 퇴각하지 않고 전원이 전사하는 분전을 보여 “까렌스키 빨치산은 죽어서도 총을 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곳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게다가 한국의용군은 하바로스크를 공격하는 전투에도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편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에 편입된 독립군은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이들을 자극시킨 것은 연해주에서 이용이 이끄는 한국의용군이 용전분투(勇戰奮鬪)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르쿠츠크를 탈출하여 어떻게 하면 연해주의 한국의용군과 합세할 수 있을까에 대해 궁리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을 우려하는 소련 당국의 태도로는 만주로의 출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채영과 황하일(黃河一) 등은 1차로 30명을 탈출시키고 2차로 다시 병력을 탈출시키려다 발각되었다.

 

그 후 이르쿠츠크에 있던 오하묵 등은 소련 당국과 협의하여 자기들도 연해주로 이동시켜 줄 것을 간청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의용군의 세력과 명성이 날로 커져 갔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22년 8월 15일부터 오하묵의 이르쿠츠크 주둔군은 연해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오하묵 부대와 한국의용군 사이에는 또다시 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한국의용군은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었다.

 

1922년 10월 이후 소련 공산주의 정권은 극동에서 백군(白軍)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며 일본군 역시 연해주에서 철병하였다. 그리하여 소련 당국은 이 지역의 공산화작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더욱이 소련은 소련 영토에서 철수한 일본군에게 다시는 소련에 진주할 구실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국인들의 무장 활동을 적극 제재하였다. 따라서 이를 계기로 적군에 편입되어 있던 병력을 제외하고는 모든 한국인의 무장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출처; 박영석 著「만주, 노령 지역의 독립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編(1999년版)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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