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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韓国政府は70年間知らないふり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62316270005627?did=NA
ハンギョレ (韓国語)2021年9月22日

軍の資料にも明示…ソウル市、江陵戦線だけで128人。02年に論文発表し、軍慰安婦動員を明らかに



韓国戦争



 韓国戦争(1950-53)当時も「慰安婦」が存在したという事実が19年前に初めて世間に明らかになった。 金貴玉(キム・グィオク、59)漢城(ハンソン)大学教授の02年の論文を通じてだった。しかし朝鮮戦争71周年を迎えた今年まで韓国軍の慰安婦に十分にスポットライトが当てられていない。

 日本軍慰安婦とはまたレベルの抑圧と偏見に押されて被害証言も全く出てこないのが実情だ。キム教授は24日、韓国日報とのインタビューで「韓国が未来を眺めるためには過去を必ず整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国家レベルで韓国軍慰安婦被害者に対する明確な調査と謝罪が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調した。

 朝鮮戦争中に韓国軍慰安婦が動員された時点は正確に明らかにされていない。キム教授は「1951年秋ごろ、戦争が小康状態を迎え、戦線が現在の休戦ライン付近に固着した場合、軍人管理を名目に慰安婦が導入された可能性が高い」という立場だ。ただ、慰安婦運営の事実は多くの史料で立証されると、金教授は説明した。例えば1952年12月30日付の東亜日報には「韓国軍のための慰安所が必要だ」という内容の読者投稿が掲載され、翌年の停戦協定締結後の11月16日付のジャギョン新聞には「陸軍会館の4カ所に韓国軍慰安所を増設する」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た。

 韓国軍慰安婦の存在は、軍の公式資料でも確認できる。金教授は1956年、陸軍本部が編纂した「後方戦史」(人事編)で、戦争中に後方支援業務の名目で「特殊慰安隊」を設置したという記録を確認した。 同書には慰安婦を「小隊」に編制して運営した記録の一部が残っているが、これを総合するとソウル3小隊と江陵3小隊だけで128人の慰安婦もあったという推算が出ている。






処刑と引き換えに14歳ぐらいの少女達を強制的に性奴隷にした韓国軍の慰安婦制度。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7241
オーマイニュース (韓国語)2002年2月22日


 漢城大学キム・グィオック女教授は2002年に日本の京都で開かれた第5回 “東アジアの平和と人権国際シンポジウム”で、韓国戦争当時、韓国軍慰安婦がいたという論文を発表した。これは、朝日新聞とオーマイニュースに同時に報道された。朝鮮日報を除く国内主要日刊紙やニュースでも、この衝撃的な事実を扱った。

 しかし、韓国軍の恥部に触れたこの論文はすぐに歴史の裏舞台に片付けられた。国防部資料室に備えた韓国軍慰安婦関連資料の閲覧は禁止され、メディアは約束でもしたかのように沈黙した。大学から “気をつけた方がいい”という連絡が来た。

 公然の秘密となったこの問題は、 “スクープ”に喉が渇いた各放送局の時事番組担当者には置いておいて我慢できない誘惑である。最近もずっと電話がかかってくる。 “韓国軍慰安婦問題を扱いたい”と。しかし、彼女は拒絶する。

 一様に韓国軍慰安婦おばあさんたちの顔公開を要求するからである。扇情的なアングルの横暴からその人たちを守ること、歴史的真実のために個人の犠牲が必要ではないということは、知識人として彼女が守ってきた倫理である。

昼は洗濯婦、夜は慰安婦

 1950年、国連軍に逮捕された金さんは、その部隊に慰安婦がいたと話した。米軍と韓国軍は、50年10月に休戦ラインを突破する時に、すでに韓国で女性を集めて連れて行ったという。

 その後5年間、キム教授はインタビューなどを通じて、 “直接慰安所を利用したことがある”、 “軍に拉致されて慰安婦になった”など、男女8人の証言を聴取した。最終的に韓国陸軍本部が1956年に編纂された公文書である<後方戦史>にて、「固定式慰安所 - 特殊慰安隊」と書かれた部分を発見した。この本に載っていた特殊慰安隊実績統計表は、1952年にソウル、江陵など4つの小隊に編成された慰安婦89人が、年間20万4560人の兵力を「慰安」したと記録している。慰安婦1人で一日平均6〜7人の将兵を慰安したのだ。

 チェ・ミョンシン、キム・フィオなど予備役将軍たちの回顧録も韓国軍慰安婦の実体を支えている。
 「当時、私たちの軍隊は士気高揚のために60人余りを1個中隊とする慰安婦部隊を三、四隊運用していた”、 “チケット制で運用された。戦場で勇敢に戦った順にチケットを配った(チェ・ミョンシン著書「死線を超えて超えて」)。」

 「私たちの中隊にも週間8時間の制限で6人の慰安婦が割り当てられていた。これは、過去、日本軍の従軍経験のある何人かの連帯幹部たちが、部下の士気高揚のために、わざわざ巨額の厚生費をかけてソウルから調達してきた(キム・フィオ著書「人間の香り」)。 」

 50年までは女性が非正規な形で軍部隊と共に移動しながら昼は洗濯、夜は慰安をする形だったがには、戦況が膠着状態に陥る51年から慰安隊の設置が本格化したと金教授は推定した。軍の記録によると、慰安隊設置の表面的な目的は、 “国軍の士気高揚と戦闘力の損失を防ぐこと”である。

左翼容疑者たちを性奴隷​​にしていた

 男性の証言者たちに、慰安婦の女性たちがどんな感じだったか聞いてみた。化粧したり洒落た感じの売春街の女性ではなく、陳腐な容姿の15〜16歳程度の少女だという。もちろん、戦争孤児もいただろうけど、ほとんどは共産主義容疑者と推定される。

共産主義者の疑いをされている少女が、軍人たちへの慰安婦を拒むなんて、それは死を意味することだった。左翼であることを口実に、連れてくることなど簡単だったはずだ。これは根本的羞恥心に触れる処罰で、左翼への暴力的報復であると見ることができる。

 ムン某氏(1936年生まれ)は、1951年当時16歳で、ウォンサンの前の海にあるヨドという島で、女性同盟(女盟)会議をしていたが、夜中に諜報工作活動をしていた北派工作員(※韓国が北朝鮮に派遣したスパイのこと)に拉致された。その工作員の一人に体を強姦された後、強制的に慰安婦生活を余儀なくされ、子供を二人も生んだ。

 苦労して探し回って、彼女を見つけたが、 “戦争の時に子供を産んで・・苦労して・・生き残りました”と、彼女は多くを語らずに口述を拒否した。

 1950年当時、医科大学生だった李某(73)氏は、拉致または強要によって慰安婦になるところだった、また別の女性の事例である。

 625(韓国戦争)当時、ソウルに残っていたが、人民軍に協力したことで軍に逮捕された李さんは、他の女性医学生3人と一緒に、引き渡された部隊の将校4人に慰安婦として配当された。

 李さんは、幸いにも、彼女を哀れに思ったある将校の助けで釈放されたが、他の3人はそれ以来二度と見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

 慰安婦は週に2回、軍務官の協力で性病検査を受けた。つまり、公娼制度や日本軍慰安婦制度で性感検査を行ったのと同じように、国は、女性の体を管理し、制御することにより、兵士の体を保護する “身体の政治学”を活用したのである。 これらの施設は1954年3月、これを一斉に閉鎖した”と書かれている。

 韓国軍慰安婦問題に対して、公娼だと断定して、再論の余地がないとする。国からみれば、公娼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が、女性の立場から見ると韓国軍慰安婦制度は軍による性奴隷制度だ。

2002年、韓国軍慰安婦問題が公式提起されたが、韓半島は沈黙した。当時、女性界、高度の男性知識人、社会学会を問わず、そのほとんどが日本による悪用を懸念するだけだった。
 金教授には、「日本軍慰安婦問題と関連させてはいけない」と、無言の圧力が加えられた。

 韓国軍の慰安婦と経験したある男性は、 「韓国軍慰安婦は日本人ではなく韓国人としたのだから、よい方ではないか」と弁解した。)
 軍が作成した公式文書がある限り、話をすべきだと思う。しかし、誰も言わなかった。







韓国軍に強制的に引きずられて行った慰安婦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2981
プレシアン(韓国語) 2015.1.8


 2002年、韓国戦争当時、韓国軍「慰安婦」があった研究結果が世に出てきた。国内外のマスコミの報道が続いた。しかし、そこまでだった。13年が過ぎた2015年、韓国軍慰安婦を覚えている人はほとんどなく、韓国軍慰安婦被害者の証言はまだ出ていない。

 当時「韓国戦争と女性:軍慰安婦と軍慰安所を中心に」という論文を通じて韓国軍慰安婦問題を初めて世に知らしめた漢城大学ギムグィオック教授は、12年後の2014年秋の「日本式民主のが韓国戦争期韓国軍慰安婦制度にクレイジー影響と課題」というタイトルの論文を介して再びこの問題を照明した。彼は10年がふらりと経った今の時点で再び論文を書いた理由は、日本の右翼たちが、彼の論文を悪意を持って利用しているからである。

 キム教授は、「日本のインターネットサイトを見ると、私の名前が非常に多く出てくる。論文の全体的なものを紹介する文ではなく、「韓国戦争当時、韓国軍によって創設された韓国軍慰安婦があった」とする事実を明らかにした部分だけを引用したもの」とし「日本の右翼は「韓国軍も慰安婦がいた太平洋戦争当時の慰安婦がどのような問題になるのか」と、慰安婦を作った歴史的事実を歪曲したり、糊塗しようとする態度を取っている」と批判した。


教授が韓国軍慰安婦の記録を発見した<後方戦史>




 彼は「日帝によって作成された日本軍慰安婦問題と韓国軍慰安婦問題がどのように関連しているかどうか明らかにすることが問題意識だったこれが歪曲されているので、より具体的に論証するという考えに論文を新たに発表した」と明らかにした。

 しかし、この問題を解くのに重要なとすることができる被害者の証言は、まだ外の世界に出ていない。日本軍慰安婦問題が水面上に上がってきたのが1991年金学順さんの証言だったという点を思い出して見たときに、被害者の証言は、問題の公論化と解決へのうえ決定的な役割をす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ある。

 これに対してキム教授は、韓国軍慰安婦に連れて行かれ、これらは誰なのかを見てみると話した。展示の性暴力が相手を制圧するという意味が含まれている特殊性がある、このため慰安婦に連行された女性の多くが、人民軍賦役たという疑いを受けた人々であった。キム教授は「性暴力を受けたと、自分の痛い過去に加え理念的な問題まで結合され、韓国軍慰安婦被害者だ自分の被害事実を沈黙で一貫した」と伝えた。

 キム教授は「日本軍慰安婦被害者たちは、この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日本と戦うのに、韓国軍慰安婦被害者たちは、自分が属している国と戦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このような側面も韓国軍慰安婦被害者が自分の話を取り出しにくくする要因」と分析した。

 彼は「被害者の苦痛を考えれば、国家が一度は過去の過ちを打ち明け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か」とし「韓国政府が日本軍慰安婦制度によって作成された韓国軍慰安婦問題を顧みずに、日本軍慰安婦問題だけを解決しようとすると矛盾に陥るしかない」と主張した。

 キム教授は、政府が韓国軍慰安婦問題を解決することが日本軍慰安婦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邪魔ではなく、むしろ有用であることを強調した。彼は「韓国軍慰安婦は日本の植民地主義や軍国主義を内在化した満州国軍や日本軍出身の韓国軍幹部がなければ、生じなかった」とし「日本の右翼勢力が韓国軍慰安婦があったと主張する場合、それがすなわち日本軍慰安婦の存在を認めざるを得ない状況に陥ることになるだろう」と主張した。



한국군 위안부는 증거가 많이 있는

한국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한국 정부는 70년간 모르는 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62316270005627?did=NA
한겨레 (한국어) 2021년 9월 22일

군의 자료에도 명시…서울시, 강릉 전선만으로 128명.02년에 논문 발표해, 군위안부 동원을 분명하게



한국전쟁



 한국전쟁(1950-53) 당시도 「위안부」가 존재했다고 하는 사실이 19년전에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금귀옥(김·그오크, 59) 한성(한 손) 대학교수의 02년의 논문을 통해서였다.그러나 한국 전쟁 71주년을 맞이한 금년까지 한국군의 위안부에게 충분히 스포트 라이트를 맞힐 수 있지 않았다.

 일본군위안부와는 또 레벨의 억압과 편견에 밀려 피해 증언도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 실정이다.김 교수는 24일, 한국 일보와의 인터뷰로 「한국이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반드시 정리해야 한다」라고 해 「국가 레벨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명확한 조사와 사죄가 없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한국 전쟁중에 한국군 위안부가 동원된 시점은 정확하게 분명하지 않다.김 교수는 「1951년 가을경, 전쟁이 소강 상태를 맞이해 전선이 현재의 휴전 라인 부근에 고착했을 경우, 군인 관리를 명목에 위안부가 도입된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는 입장이다.단지, 위안부 운영의 사실은 많은 사료로 입증되면, 김 교수는 설명했다.예를 들면 1952년 12월 30 일자의 동아일보에는 「한국군을 위한 위안소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내용의 독자 투고가 게재되어 다음 해의 정전협정 체결 후의 11월 16 일자의 쟈골 신문에는 「육군 회관의 4개소에 한국군 위안소를 증설한다」라고 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위·`타부의 존재는, 군의 공식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김 교수는 1956년, 육군 본부가 편찬 한 「후방 전사」(인사편)로, 전쟁중에 후방 지원 업무의 명목으로 「특수 위안대」를 설치했다고 하는 기록을 확인했다. 동서에는 위안부를 「소대」에 편제 해 운영한 기록의 일부가 남아 있지만, 이것을 종합 하면 서울 3 소대와 강릉 3 소대만으로 128명의 위안부도 있었다고 하는 추산이 나와 있다.






처형과 교환에 14세 정도의 소녀들을 강제적으로 성 노예로 한 한국군의 위안부 제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7241
오 마이 뉴스 (한국어)2002년 2월 22일


 한성대학 김·그옥크녀 교수는 2002년에 일본의 쿄토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국제 심포지엄"에서,한국전쟁당시 ,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하는 논문을 발표했다.이것은, 아사히 신문과 오 마이 뉴스에 동시에 보도되었다.조선일보를 제외한 국내 주요 일간지나 뉴스에서도, 이 충격적인 사실을 취급했다.

 그러나, 한국군의 치부에 접한 이 논문은 곧바로 역사의 뒤무대에 정리할 수 있었다.국방부 자료실에 대비한 한국군 위안부 관련 자료의 열람은 금지되어 미디어는 약속이라도 했는지와 같이 침묵했다.대학으로부터 "조심하는 것이 좋은"이라고 하는 연락이 왔다.

 공연한 비밀이 된 이 문제는, "스쿠프"에 목이 마른 각 방송국의 시사 프로그램 담당자에게는 놓아두어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최근도 쭉 전화가 걸려온다."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취급하고 싶다"와.그러나, 그녀는 거절한다.

 한결같게 한국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 공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선정적인 앵글의 횡포로부터 그 사람들을 지키는 것, 역사적 진실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그녀가 지켜 온 윤리이다.

낮은 세탁부, 밤은 위안부

 1950년, 국제 연합군에게 체포된 김씨는, 그 부대에 위안부가 있었다고 이야기했다.미군과 한국군은, 50년 10월에 휴전 라인을 돌파할 때에, 벌써 한국에서 여성을 모아 데려서 갔다고 한다.

 그 앞으로 5년간, 김 교수는 인터뷰등을 통해서, "직접 위안소를 이용했던 것이 있다", "군에 납치되어 위안부가 되었다"등, 남녀 8명의 증언을 청취했다.최종적으로 한국 육군 본부가 1956년에 편찬 된 공문서인<후방 전사>에서, 「고정식 위안소 -특수 위안대」라고 쓰여진 부분을 발견했다.이 책에 실려 있던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는,1952년에 서울, 강릉 등 4개의 소대에 편성된 위안부 89명이, 연간 20만 4560명의 병력을 「위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위안부 혼자서 하루 평균 6~7명의 장병을 위안 했던 것이다.

 최·몰신, 김·피오 등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도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를 지지하고 있다.
 「당시 , 우리의 군대는 사기 고양을 위해서 60명남짓을 1 개중대로 하는 위안부 부대를 3, 4대 운용하고 있던", "티켓제로 운용되었다.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운 순서에 티켓을 나눠주었다(최·몰신 저서 「사선을 넘고 넘어」).」

 「우리의 중대에도주간 8시간의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할당할 수 있고 있었다.이것은, 과거, 일본군의 종군 경험이 있는 몇명의 연대 간부들이, 부하의 사기 고양을 위해서, 일부러 거액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로부터 조달해 왔다(김·피오 저서 「인간의 향기」).」

 50년까지는 여성이 비정규인 형태로 군부대와 함께 이동하면서 낮은 세탁, 밤은 위안을 하는 형태였지만에는,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는 51년부터 위안대의 설치가 본격화했다고 김 교수는 추정했다.군의 기록에 의하면, 위안대 설치의 표면적인 목적은, "국군의 사기 고양과 전투력의 손실을 막는 것"이다.

좌익 용의자들을 성 노예로 하고 있었다

 남성의 증언자들에게, 위안부의 여성들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들)물어 보았다.화장하거나 멋부린 느낌의 매춘거리의 여성이 아니고,진부한 용모의 15~16세 정도의 소녀라고 한다.물론, 전쟁 고아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대부분은 공산주의 용의자와 추정된다.

공산주의자의 혐의 를 하고 있는 소녀가, 군인들에게의 위안부를 거절하다니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좌익인 것을 구실에, 데려 오는 것 등 간단했을 것이다.이것은 근본적 수치심에 접하는 처벌로, 좌익에의 폭력적 보복이다고 볼 수 있다.

 문 모씨(1936 년생)는, 1951년 당시 16세에, 워산의 전의 바다에 있는 요드라고 하는 섬에서, 여성 동맹(녀맹) 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한밤중에 첩보 공작 활동을 하고 있던 키타파 공작원(※한국이 북한에 파견한 스파이)에게 납치되었다.그 공작원의 한 명에게 몸이 강간된 후, 강제적으로 위안부 생활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아이를 두 명도 낳았다.

 고생해 찾아 돌고, 그녀를 찾아냈지만, "전쟁때에 자식을 낳아··고생해··살아 남았던"과 그녀는 대부분을 말하지 않고 구술을 거부했다.

 1950년 당시 , 의과 대학생이었던 리모(73) 씨는,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서 위안부가 되려고 했다 ,또 다른 여성의 사례이다.

 625(한국전쟁) 당시 , 서울에 남아 있었지만, 인민군에 협력한 것으로 군에 체포된 이씨는, 다른 여성 의학생 3명과 함께, 인도해진 부대의 장교 4명에게 위안부로서 배당되었다.

 이씨는, 다행히도,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한 있다 장교 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다른 3명은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볼 수 할 수 없었다.

 위안부는 주에 2회, 군무관의 협력으로 성병 검사를 받았다.즉, 공창 제도나 일본군위안부 제도로 성감 검사를 실시한 것과 같이, 나라는, 여성의 몸을 관리해, 제어하는 것으로써, 병사의 몸을 보호하는 "신체의 정치학"을 활용했던 것이다.이러한 시설은 1954년 3월, 이것을 일제히 폐쇄했다"라고 쓰여져 있다.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공창이라고 단정하고, 재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나라에서 보면, 공창이었는지도 모르지만,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군 위안부 제도는 군에 의한 성 노예 제도다.

2002년, 한국군 위안부 문제가 공식 제기되었지만, 한반도는 침묵했다.당시 , 여성계, 고도의 남성 지식인, 사회학회를 불문하고, 그 대부분이일본에 의한 악용을 염려할 뿐(만큼)이었다.
 김 교수에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시켜 안 된다」라고, 무언의 압력이 더해졌다.

 한국군의 위안부와 경험한 있다 남성은,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인은 아니고 한국인으로 했으니까, 좋은 분이 아닌가」라고 변명했다.)
 군이 작성한 공식 문서가 있다 한정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한국군에게 강제적으로 끌려가서 간 위안부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2981
프레시안(한국어) 2015.1.8


 2002년, 한국전쟁당시 , 한국군 「위안부」가 있던 연구 결과가 출세해 왔다.국내외의 매스컴의 보도가 계속 되었다.그러나, 거기까지였다.13년이 지난 2015년, 한국군 위안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아직 나와 있지 않다.

 당시 「한국전쟁과 여성:군위안부와 군위안소를 중심으로」라고 하는 논문을 통해서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게 한 한성대학 김그옥크 교수는, 12년 후의 2014년 가을의 「일본식 민주의 것이 한국전쟁기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크레이지 영향과 과제」라고 하는 타이틀의 논문을 개입시켜 다시 이 문제를 조명 했다.그는 10년이 홱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논문을 쓴 이유는, 일본의 우익들이, 그의 논문을 악의를 가져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나의 이름이 매우 많이 나온다.논문의 전체적인 물건을 소개하는 문장이 아니고, 「한국전쟁당시 , 한국군에 의해서 창설된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한 부분만큼을 인용한 것」이라고 해 「일본의 우익은 「한국군도 위안부가 있던 태평양전쟁 당시의 위안부가 어떠한 문제가 되는 것인가」라고, 위안부를 만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미봉하려고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교수가 한국군 위안부의 기록을 발견한<후방 전사>




 그는 「일제에 의해서 작성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한국군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관련하고 있을지 분명히 하는 것이 문제 의식이었던 이것이 왜곡되고 있으므로, 보다 구체적으로 논증한다고 하는 생각에 논문을 새롭게 발표했다」라고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푸는데 중요한으로 할 수 있는 피해자의 증언은, 아직 밖의 세계에 나와 있지 않다.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수면상에 올라 온 것이 1991 연금학순씨의 증언이었다고 하는 점을 생각해 내 보았을 때에, 피해자의 증언은, 문제의 공론화와 해결에의 이식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에게 데리고 가져 이것들은 누구인가를 본다고 이야기했다.전시의 성 폭력이 상대를 제압한다고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특수성이 있다, 이 때문에 위안부에게 연행된 여성의 대부분이, 인민군부역라고 하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김 교수는 「성 폭력을 받았다고, 자신의 아픈 과거에 가세해 이념적인 문제까지 결합되어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침묵으로 일관했다」라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과 싸우는데,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이 속하고 있는 나라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해 「이러한 측면도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피해자의 고통을 생각하면, 국가가 한 번은 과거의 잘못을 털어 놓지 않으면 안 될까」라고 해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의해서 작성된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돌아보지 않고 , 일본군위안부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하면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해가 아니고, 오히려 유용한 것을 강조했다.그는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의 식민지 주의나 군국주의를 내재화한 만주국군이나 일본 군출신의 한국군 간부가 없으면, 생기지 않았다」라고 해 「일본의 우익 세력이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 그것이 즉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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