鉄道話

朝鮮人 B,C級戦犯の歴史(弔文上の遺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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弔文上(趙文相)

 

個性生まれ, 大学在学中軍属で徴兵, クリスチャン, 日本人ヒラしなさいモリツだね(平原守矩)

 

. 日本人上官の命令を連合軍虜に伝える通訳病で勤めたことから虜たちから多くの憎悪を買ったはずだという推測. しかし彼の普段性分や遺書内容路BoA虜を一番多く理解して手伝ってくれたことで見当がつく.

 

. 死刑執行 2分前まで心の童謡を長文の遺書で残した.

 

友達よ, 弟(妹)よ, 自分の知恵で自分の信頼を守りなさい

 

死を目の前に置いた今の私は私のが何もないということに身の毛がよだつ...

 

. 連合軍虜監視院で虜虐待(泰緬鉄道...未軍浦に動員して ¥”クァイガングの足¥” 建設工事時)したという罪目などで 1947年 2月 25日シンガポール娼妓刑務所で絞首刑(享年 26歳). 処刑 2名の前まで遺書記録

 

1942年連合軍によってシンガポール陷落

 

. BC急転梵字: 虜虐待, 民間人虐殺など

. シンガポール娼妓刑務所に 7,200人戦犯収容(大部分虜虐待疑い)

そのうち 5,700人有罪判決(上古なく), 984名詞形

148人朝鮮人有罪判決. そのうち 28名詞形

 

* 1951年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條約は以前の朝鮮出身日本人を韓国人で規定

 

 

 

[年表で見る朝鮮人 BC急転犯の歴史]

 

1941年

 

日本, マレー上陸, 真珠湾攻撃で対米戦争突入

 

緒戦の大勝利で日本軍は案外多い連合国虜を確保した.

 

1942年 5月

 

朝鮮総督府, 朝鮮全土で虜監視院募集

 

 

形式的には ‘募集’だったが, 協調しなければ食糧配給中止などで脅かして仕方なく ‘応募’一場合が大部分だ. また同じ時期, 朝鮮にも徴兵制を実施することが確実視になって戦争に出るよりましだと思った人も多かった. 朝鮮総督府は 虜監視院になれば故郷に毎月 50円を 送ってくれるという甘ったるい誘惑も忘れなかった

 

1942年 6月

 

朝鮮人青年3223人, ユックグンブサンソミョンイムシグンソックギョユックデ(通り名Noguchi部隊)に倍速訓練

 

2ヶ月間残酷な群山訓練と精神教養を受けてノイローゼにかかった人も出たと言う. 虜監視のための訓練(砲への人道的処遇を決めた国際條約と砲への母国語である英語またはオランダ語など勉強)は全然実施されなかった. 彼らは “上官の命令は天皇の命令と思って絶対服従しなさい” “虜になりそうなら死になさい”と教育受けた.

 

1942年 8月

 

朝鮮人軍属, 南方(タイ, マレー, ジャバ)の虜収容所に倍速

 

日本軍は南方で泰なら(泰緬)鉄道, 軍用道路, 飛行場を建設した. 砲への強制労動は国際條約で禁止されているが, 日本軍は連合軍(アメリカ, イギリス, オーストラリア, オランダ)の虜を苛酷な建設現場に投入した. 食糧, 医薬品も不足な状況で多くの虜たちが伝染病などで死亡した. これら虜を管理するのが朝鮮人虜監視院の任務だった.

 

 

1945年 8月 15日

 

日本敗戦, 朝鮮解放

 

南方各地で連合国による戦犯摘発, 戦犯裁判が始まった. 軍医最末団で何らの権限もなかった朝鮮人虜監視院たちは自分たちが戦犯として逮捕するとは考えもしなかった. しかし逮捕して裁判に回附される結果になった.

 

1946-1947年

 

各地の BC急転凡才版で朝鮮人虜監視院 148人に有罪判決. そのうち 23人死刑判決

 

 

裁判は証人も通訳も不十分だった. 彼らが植民地出身だったという事実が全然考慮されなかった. 裁判結果, 朝鮮人虜監視院 23人は現地で絞首刑または銃刑に処刑された. 125人の遺棄型, 無期刑戦犯は現地で服役した.

 

1950-1951年

 

戦犯たちは南方の刑務所で占領下日本の巣鴨プリズン(米軍管理)で移送

 

1952年 4月 28日

 

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條約で日本独立

 

以後巣鴨プリズンは巣鴨刑務所に改名されて日本政府が管理するようになった. この日から在日朝鮮人は日本国籍を一方的に ‘喪失’するようになる. 朝鮮人戦犯たちは玉の中で釈放請求裁判を請求した. しかし 3ヶ月後, 最高裁判所はこの請求を棄却した. “兄さん(型)を受けた時は日本人だったから”というのが理由だった.

 

1955年

 

朝鮮人戦犯とその遺族, 家族が ‘ハングックツルシンゾンボムザドングジンフェ’ 結成

 

鳩山Ichiro(鳩山一?) 総理大臣に生活保護を要求する要請書を提出. 1950年代に立ち入ると, 多くの朝鮮人戦犯が仮釈放, 満期釈放された. しかし出所される時, 東京都内紛の交通費と軍服だけだった. 家族も頼る打ったのもない日本で極貧生活で追い出された. 彼どおりは生きて行くことができなくなると, 彼らは ‘ハングックツルシンゾンボムザドングジンフェ’を結成して日本政府に援護を要請した.

 

 

*問題が 生じれば 日本軍たちは 徹底的に 避けてしまった. ひもじさを 堪えるの できなかった 虜たちが 炊事場で 隠れて 入って来て 食べる のを ちょっと つけなさいといいながら 涙を 流す 仕事が 多かった. 認定に 弱い 朝鮮 青年たちは 番(回) 断っていながらも お焦げ たいてい 泣いてすも 握ってくれたり した. これが 禍根だった. イギリス軍 たいてい 人が お焦げを 急に のんでから 腹痛が 出たし, これに 人海 お焦げを こっそりと 軍属の 名前が 明かされた. 結局 朝鮮 青年と イギリス軍 砲では 3m 深みで 水たまり 監獄に 入れられて 五日 飢えて 群れの モックイッガムが になった.

 

 

連合軍虜たちは国際虜規定にもかかわらず飢えと暴行強制労役に苦しまれなくなり

 

故郷に帰ることができずに他国の地で若い年に死んだ.


타이멘 철도의 희생자들...

한국인 B,C급 전범자의 역사(조문상의 유서)

 

조문상(趙文相)

 

개성 출생, 대학 재학중 군속으로 징병, 크리스찬, 일본명 히라하라 모리츠네(平原守矩)

 

. 일본인 상관의 명령을 연합군 포로에 전하는 통역병으로 근무한 것 때문에 포로들로부터 많은 증오를 샀을 것이라는 추측. 그러나 그의 평소 성품이나 유서 내용로 보아 포로를 가장 많이 이해하고 도와주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사형 집행 2분 전까지 마음의 동요를 장문의 유서로 남겼다.

 

"친구야, 동생아, 자신의 지혜로 자기의 믿음을 지켜라"

"죽음을 눈 앞에 둔 지금의 나는 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소름이 끼친다..."

 

.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포로학대(泰緬鐵道...미군포로 동원하여 "콰이강의 다리" 건설 공사 시)했다는 죄목 등으로 1947년 2월 25일 싱가포르 창기형무소에서 교수형(향년 26세). 처형 2분 전까지 유서 기록

 

1942년 연합군에 의해 싱가포르 함락

 

. BC급전범자: 포로학대, 민간인 학살 등

. 싱가포르 창기형무소에 7,200명 전범 수용(대부분 포로학대 혐의)

그 중 5,700명 유죄 판결(상고 없이), 984명 사형

148명 한국인 유죄판결. 그 중 28명 사형

 

*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이전의 조선출신 일본인을 한국인으로 규정

 

 

[연표로 보는 한국인 BC급전범의 역사]

 

1941년

 

일본, 말레이 상륙, 진주만 공격으로 대미전쟁 돌입

 

서전의 대승리로 일본군은 예상외로 많은 연합국포로를 확보했다.

 

1942년 5월

 

조선총독부, 조선 전토에서 포로감시원 모집

 

형식적으로는 ‘모집’이었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식량배급 중지 등으로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응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같은 시기,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할 것이 확실시 되어 전쟁에 나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조선총독부는 포로감시원이 되면 고향으로 매달 50엔을 보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도 잊지 않았다

 

1942년 6월

 

한국인청년3223명,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통칭 노구치부대)에 배속 훈련

 

2개월간 혹독한 군산훈련과 정신교양을 받으며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도 나왔다고 한다. 포로감시를 위한 훈련(포로의 인도적 처우를 정한 국제조약과 포로의 모국어인 영어 또는 네덜란드어 등 공부)은 전혀 실시되지 않았다. 그들은 “상관의 명령은 천황의 명령으로 생각해서 절대복종하라” “포로가 될 지경이면 죽으라”고 교육받았다.

 

1942년 8월

 

한국인군속, 남방(태국, 말레이, 쟈바)의 포로수용소에 배속

 

일본군은 남방에서 태면(泰緬)철도, 군용도로, 비행장을 건설했다. 포로의 강제노동은 국제조약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일본군은 연합군(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의 포로를 가혹한 건설현장에 투입했다. 식량, 의약품도 부족한 상황에서 많은 포로들이 전염병 등으로 사망했다. 이들 포로를 관리하는 것이 한국인 포로감시원의 임무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조선 해방

 

남방 각지에서 연합국에 의한 전범 적발, 전범재판이 시작되었다. 군의 최말단에서 아무런 권한도 없었던 한국인포로감시원들은 자기들이 전범자로서 체포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결과가 되었다.

 

1946-1947년

 

각지의 BC급전범재판에서 한국인포로감시원 148명에 유죄 판결. 그 중 23명 사형 판결

 

재판은 증인도 통역도 불충분했다. 그들이 식민지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재판 결과, 한국인포로감시원 23명은 현지에서 교수형 또는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125명의 유기형, 무기형 전범은 현지에서 복역했다.

 

1950-1951년

 

전범들은 남방의 형무소에서 점령하 일본의 스가모 프리즌(미군 관리)로 이송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 독립

 

이후 스가모 프리즌은 스가모형무소로 개명되어 일본정부가 관리하게 되었다. 이 날부터 재일한국인은 일본국적을 일방적으로 ‘상실’하게 된다. 한국인전범들은 옥중에서 석방청구재판을 청구했다. 그러나 3개월 후, 최고재판소는 이 청구를 기각했다. “형을 받은 때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1955년

 

한국인 전범과 그 유족, 가족이 ‘한국출신전범자동진회’ 결성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 총리대신에 생활보호를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 1950년대에 들어서자, 많은 한국인전범이 가석방, 만기석방되었다. 그러나 출소될 때, 동경도 내분의 교통비와 군복뿐이었다. 가족도 의지할 친지도 없는 일본에서 극빈생활로 내몰렸다. 그대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한국출신전범자동진회’를 결성해서 일본정부에 원호를 요청하였다.

 

*문제가 생기면 일본군들은 철저하게 피해버렸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포로들이 취사장으로 숨어 들어와 먹을 것을 달라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인정에 약한 조선 청년들은 거절하다가도 누룽지 움큼이라도 쥐어주곤 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영국군 포로 명이 누룽지를 급하게 삼켰다가 배탈이 났고, 이로 인해 누룽지를 몰래 군속의 이름이 밝혀졌다. 결국 조선 청년과 영국군 포로는 3m 깊이로 물웅덩이 감옥에 넣어져 닷새 동안 굶주리며 모기 떼의 먹잇감이 되었다.

 

 

연합군 포로들은 국제포로규정에도 불구하고 굶주림과 폭행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못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의 땅에서 젊은 나이에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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