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月14日は、南朝鮮ではBlackDay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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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の華僑は、世界で唯一成功できなかった華僑」と言われますが
韓国のチャジャン麺は、朝鮮人の酷い華僑差別を背景として広まりました。
韓国の出前配達文化も酷い華僑差別があったから生まれた文化です。
差別を叫ぶ事も出来ずに海外移民に行くしかなかった在韓華僑と
差別を叫び続けても日本から離れたがらない在日朝鮮人
本当に差別されたのは、どちらか?すぐに分かりますね
〈韓国政府の華僑抑圧政策〉
韓国の華僑が日本の植民地時代から解放直後、そして朝鮮戦争までは羽振りがよかったという話は、多くの華僑から聞いた。
その後の没落の原因は中国との国交断絶という国際情勢とともに、韓国政府の執拗な華僑抑圧政策にあった。
韓国政府は一九四八年の成立直後から、為替取引規制や倉庫封鎖令などで華僑の経済活動を圧迫した。
さらに「外国人名義の貿易商登録は認めない」「外国人は農地・林野を所有できない」など、規制をどんどん強めていった。
貿易業もだめ、農業もだめ、ではどうやって生計を立てればいいのだろう。彼らが頼れるのはもはや故郷の味だけだった。
飲食業に流れた華僑はチャジャン麺に勝負をかけた。
当時の韓国はまだ米不足で代用食の時代。この小麦を作った廉価な食事は爆発的にヒットし、韓国人の中にもこの業種に参入する人が急増したという。
そんな華僑のささやかな成功をこっぱみじんに粉砕したのが、一九七〇年に朴正煕大統領のもとで出された「外国人特別土地法」である。
「土地法」は外国人に対し、五十坪以上の店舗、二百坪以上の住宅用土地使用を禁止した。つまり華僑は大型レストランを経営してはダメ、小さなチャジャンミョン屋やホットック屋をやっていればいいということである。
「むしろ住宅用が五十坪で店舗が二百坪なら」と多くの華僑が嘆いたこの法律こそが、在韓華僑の生活権を奪い、チャイナタウンを消滅させ、さらに韓国における中華料理の発展をストップさせた。
五十坪以下の小さな店舗、よって主力は「ペダル」(配達)という名の出前、定番メニューもそれにふさわしい麺やご飯もの。
そんなふうにして韓国の中華料理店の性格は決まってしまった。
もちろん韓国人経営の大型レストランやホテルなど、各種のコース料理を取り揃えた店もあるにはあったのだが、韓国人にとって身近な中華料理店といえば、やはり街の小さな「チュングックチブ」(中華屋さん)だった。
〈世界で唯一成功できなかった華僑〉
結局、韓国での中華料理店は中華料理を極めるというよりは、韓国料理以外の安くて手軽な料理を庶民に供給する「町の大衆食堂」の役割を担った。
そうなった経過には政府の華僑抑圧政策があり、またそれによって増殖された韓国人の差別意識があった。
多くの華僑は、以前は店に来た韓国人が、露骨な差別発言をしたことなどを記憶している。
「昔は店に来てもパンマル(ぞんざいな口調)で命令するんだ。
あの頃の韓国人は私たちを人間扱いしなかった。
それは中国人に対してだけじゃない。料理という職業そのものを低く見ていた。それを思えば、今は本当によくなった。いい時代になったよ」(韓正華さん)
現在は土地所有や健康保険への加入などの制限もほとんど撤廃され、制度的な差別もなくなった。
若い華僑の中には新しいビジネスに向かって意欲を燃やす人も多い。
これらは一九九〇年代に入ってからの韓国社会の民主化と国際化の成果である。
それにしても韓国で暮らしていると、「町の中華屋さん」が韓国人の日常にとって、どれほど欠かせないものであるかを痛感することが多い。
特に2500W のチャジャンミョン一つでも配達してくれる手軽さは、韓国人の間では圧倒的な人気になっている。
オフィスでも、工事現場でも、家庭でも、昼食時になると街中を中華料理店の出前が行きかい、箸を両手にもち独特のポーズでチャジャンミョンをかき混ぜる人々の姿がいたるところで見られる。
最近は大学のキャンパスでも、新入生歓迎の頃になると、桜の木の下で輪になってグループごとに中華料理で会食をするのが流行らしい。
キャンパスを縦横無尽に走り回る出前のバイクは見ていると爽快ですらある。
そういえばこんな光景も観た。韓国には月に一度「民防の日」というのがあり、防空演習が行なわれことがある。
サイレント同時に人々は建物の影に入り、自動車などはその場に約十五分間停車していなければいけない。
ある日、私はたまたまバスの中でサイレンを聞き、そのまま交差点で停車していた。全ての車が止まった道路。それは壮観である。
ところがそこに一台のオートバイが現れた。全てが停止している交差点を、果敢に横切っていく。
中華料理屋の出前だった。「チャジャンミョンが伸びたら大変だからね」バスの中の誰かが言って、みんながいっせいに笑った。
「一万八千の在韓華僑は世界で唯一成功できなかった華僑だ」こんな言い方を時々聞くことがある。
確かに横浜の中華街のような大型レストランはないし、ビジネスなど他の分野で成功した華僑の話を聞くこともない。
でも、ここまで中華料理店が庶民生活に密着した国も少ないのではないか。チャジャンミョンにしろチャンポンにしろ、本当にささやかなメニューである。でも、人々はそれを愛してやまない。韓国の中華料理店は大きな感動こそないが、小さな満足が集積している。
〈ある老華僑の回想①〉
ところでチャジャンミョンについて、「日帝時代(日本の植民地時代)に韓国人と日本人の両方が好む味を研究した結果、今のチャジャンミョンのまろやかな味に落ち着いた」という話を聞いたことがある。
これを話してくれたのは、現在も仁川で中華料理店を営む韓正華さんだ。
一八九七年に山東省からやってきた祖父の代から数えて三代目。
今は四代目が後を継ぐ「老華僑」の家柄で、彼の半生はそのまま在韓華僑の歴史を物語っているともいえる。
二〇〇〇年三月の韓さんが経営する中華料理店「豊美」を訪れたときの取材メモから、インタビュー部分を抜粋して紹介したい。
「祖父は仁川で貿易商をやっていた。
当時、このあたり(現仁川市善隣洞・北城洞)には中国人租界があって『清館』と呼ばれていた。
清国領事館をはじめ、貿易商、中華料理店などが集まっていて、それはにぎやかだった。
隣(中央洞)は日本人租界だったから、日本人のお客さんも多かったよ。
日帝時代から解放後も商売は繁盛していたんだけど、朝鮮戦争で傾いた。
中国との貿易ができなくなったからだ。
それでも食堂などに商売替えして、なんとか持ち直した。
チャジャンミョンが爆発的に売れたから、それで財を成した人もいた」華僑人口のピークは日本の植民地時代で、約十万ともいわれてきた。これは現在の華僑人口一万八千人の五倍にもなる。
最大人口は首都ソウルで、現在の中国大使館がある明洞から小公洞一帯、またパゴタ公園の南側あたりが中国人居住区だったといわれる。それは忠武路一帯を中心とした日本人居住区と隣り合わせであり、食文化の交流はおのずと予想される。
チャジャンミョンが「日本人の味覚も意識した」というのはあり得ないことではないだろう。
〈老華僑の回想②〉
韓国の中華料理についての取材をしていて、難しいなと思うのは韓国には老舗といわれる店がほとんど残っていないことにある。
日本の場合は横浜の「萬珍楼」(一八九二年創業)や、長崎の四海楼(一八九九年創業)などの老舗が、それぞれの歴史や街の様子を伝えていたりもするのだが、韓国の場合はそういうメルクマークのような存在がない。
本格的中華レストランとしては一九〇五年に仁川でオープンした「共和春」が最も古いといわれるが、今は廃墟のような建物が残るだけで、店の正史を伝える人もいない。
現存の店として最も古いのは、ソウルの乙支路三街にある安東荘(一九四五年創業)である。
また、老舗とともに老華僑の多くも、今は韓国に住んでいない。
戦前のピーク時には十万人ともいわれた華僑人口だが、現在は約一万八千人にまで減ってしまった。
「生活が苦しかったから、みんな国を出るしかなかった。」と語るのは、仁川で中華料理店を経営する前出での韓正華さんだ。
彼の家族もちりぢりバラバラになっている。韓さんは一家の歴史を話してくれた。
「兄弟は男女あわせて八人だった。
一人交通事故で亡くなって七人が残っているんだけど、私以外はみんなアメリカや台湾に行ってしまった。
七〇〜八〇年代は、韓国で生活するのが、本当に大変だったからね。
うちだけじゃなくて沢山の人が韓国を去った。病気になっても医療保険が使えないし、店を大きくしようと思っても法律的な制約がある。
韓国人は自由に商売ができたから、大きな中華料理店をやって儲けることもできたけど、私たちはそれもできなかった。
とにかく外国人だという理由で、あらゆる権利が制限されていた。
みんな我慢しきれずに韓国を離れた。それでチャイナタウンもすっかりさびれてしまったんだ。
七〇年代後半には最後にたった一軒だけ残っていた中華料理店もつぶれて、とうとうこの街に中華料理店が一軒もなくなってしまったこともあった。」
韓さん自身も七〇年代に十年間ほど韓国を離れ、日本で暮らしていたことがある。
その後、再起をかけて仁川に戻り、祖父の代からの土地でホットック屋から始めた。
「日本にずっと居たかったけど、ビザがなかった仕方がない。
それに韓国は生まれ故郷だから、それで帰ってきた。女房と二人でホットックを売って、お金を一生懸命貯めてね。
それで今の店をオープンした。その後、少しずつ華僑も戻り始めて、街は徐々ににぎやかになってきた」
私が訪れた時も、韓さんの店のちょうど向かいに新しい中華料理店がオープンしていた。それを眺める韓さんはとても嬉しそうだった。
4월 14일은, 남조선에서는 BlackDa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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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화교는, 세계에서 유일 성공할 수 없었던 화교」라고 해집니다만
한국의 짜장면은, 한국인의 심한 화교 차별을 배경으로서 퍼졌습니다.
한국의 요리 배달 배달 문화도 심한 화교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문화입니다.
차별을 외치는 일도 하지 못하고 해외 이민하러 갈 수 밖에 없었던 주한 화교와
차별을 외쳐 계속해도 일본에서 멀어졌지만들 없는 재일 한국인
정말로 차별된 것은, 어느 쪽인지?곧바로 알지요
〈한국 정부의 화교 억압 정책〉
그 후의 몰락의 원인은 중국과의 국교 단절이라고 하는 국제 정세와 함께, 한국 정부의 집요한 화교 억압 정책에 있었다.
한국 정부는 1948년의 성립 직후부터, 외환거래 규제나 창고 봉쇄령등에서 화교의 경제활동을 압박했다.
한층 더 「외국인 명의의 무역상 등록은 인정하지 않는다」 「외국인은 농지·임야를 소유할 수 없다」 등, 규제를 자꾸자꾸 강하게 해 갔다.
무역업도 안되, 농업도 안되, 그럼 어떻게 생계를 세우면 좋겠지.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고향의 맛 뿐이었다.
음식업에 흐른 화교는 짜장면에 승부를 걸었다.
당시의 한국은 아직 미 부족하고 대용식의 시대.이 밀을 재배한 염가인 식사는 폭발적으로 히트 해, 한국인안에도 이 업종에 참가하는 사람이 급증했다고 한다.
그런 화교의 자그마한 성공봐 인에 분쇄했던 것이, 일구칠0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아래에서 나온 「외국인 특별 토지법」이다.
「토지법」은 외국인에 대해, 50평 이상의 점포, 2백평 이상의 주택용 토지 사용을 금지했다.즉 화교는 대형 레스토랑을 경영해 다 메, 작은 체잘몰가게나 호떡가게를 하고 있으면 좋다고 하는 것이다.
「오히려 주택용이 50평으로 점포가 2백평이라면」이라고 많은 화교가 한탄한 이 법률이, 주한 화교의 생활권을 빼앗아, 차이나타운을 소멸시켜, 한층 더 한국에 있어서의 중화 요리의 발전을 스톱 시켰다.
50평 이하의 작은 점포, 따라 주력은 「페달」(배달)이라고 하는 이름의 요리 배달, 정평 메뉴도 거기에 적격인 면이나 밥의.
그런 식으로 해 한국의 중화 요리점의 성격은 정해져 버렸다.
물론 한국인 경영의 대형 레스토랑이나 호텔 등, 각종의 코스 요리를 갖춘 가게도 있으려면 있었지만, 한국인에 있어서 친밀한 중화 요리점이라고 하면, 역시 거리의 작은 「츄국크치브」(중화가게)이었다.
〈세계에서 유일 성공할 수 없었던 화교〉
결국, 한국에서의 중화 요리점은 중화 요리를 다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한국요리 이외의 싸고 간편한 요리를 서민에게 공급하는 「마을의 대중 식당」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게 된 경과에는 정부의 화교 억압 정책이 있어, 또 거기에 따라 증식 된 한국인의 차별 의식이 있었다.
많은 화교는, 이전에는점에 온 한국인이, 노골적인 차별 발언을 한 것 등을 기억하고 있다.
「옛날은 가게에 와도 판말(조략한 어조)로 명령한다.
그 무렵의 한국인은 우리를 인간 취급해 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인에 대해서 만이 아니다.요리라고 하는 직업 그 자체를 낮게 보고 있었다.그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로 좋아졌다.좋은 시대가 되었어」(한정화씨)
현재는 토지 소유나 건강 보험에의 가입등의 제한도 거의 철폐되어 제도적인 차별도 없어졌다.
젊은 화교중에는 새로운 비지니스로 향하고 의욕을 태우는 사람도 많다.
이것들은 1990년대에 들어오고 나서의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국제화의 성과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에서 살고 있으면, 「마을의 중화가게」가 한국인의 일상에 있어서, 얼마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인지를 통감하는?`아가 많다.
특히 2500W의 체잘몰 하나에서도 배달해 주는 손쉬움은, 한국인의 사이에서는 압도적인 인기가 생기고 있다.
오피스에서도, 공사 현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점심 식사시가 되면 거리를 중화 요리점의 요리 배달이 왕래해, 젓가락을 양손에 가져 독특한 포즈로 체잘몰을 뒤 사람들의 모습이 도처에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대학의 캠퍼스에서도, 신입생 환영의 무렵이 되면, 벚꽃나무아래에서 원을 이루어 그룹 마다 중화 요리로 회식을 하는 것이 유행시켜 있어.
캠퍼스를 종횡 무진에 돌아다니는 요리 배달의 오토바이는 보고 있으면 상쾌합니다들 있다.
그러고 보면 이런 광경도 보았다.한국에는 달에 한 번 「민방일」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 방공 연습이 행해져서 일이 있다.
사일런트 동시에 사람들은 건물의 그림자에 들어가, 자동차 등은 그 자리에 약15분간 정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버스안에서 사이렌을 (들)물어, 그대로 교차점에서 정차하고 있었다.모든 차가 멈춘 도로.그것은 장관이다.
그런데 거기에 1대의 오토바이가 나타났다.모두가 정지하고 있는 교차점을, 과감하게 횡단해 간다.
중화 요리가게의 요리 배달이었다.「체잘몰이 성장하면 큰 일이니까」버스안의 누군가가 말하고, 모두가 있어 키있어에 웃었다.
「1만8천의 주한 화교는 세계에서 유일 성공할 수 없었던 화교다」이런 말투를 가끔 (듣)묻는 일이 있다.
확실히 요코하마의 중화가와 같은 대형 레스토랑은 없고, 비지니스 등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화교의 이야기를 들을 것도 없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중화 요리점이 서민 생활에 밀착한 나라도 적은 것이 아닌가.체잘몰로 해라 짬뽕으로 해라, 정말로 자그마한 메뉴이다.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해 마지않다.한국의 중화 요리점은 큰 감동이야말로 없지만, 작은 만족이 집적하고 있다.
〈있는 로화교의 회상①〉
그런데 체잘몰에 대해서, 「일제 시대(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한국인과 일본인의 양쪽 모두가 좋아하는 맛을 연구한 결과, 지금의 체잘몰의 순한 맛에 침착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이것을 이야기해 준 것은, 현재도 인천에서 중화 요리점을 영위하는 한정화씨다.
18구7년에 산둥성으로부터 온 조부의 대로부터 세어 삼대눈.
지금은 4대째가 후를 잇는 「로화교」의 집안에서, 그의 반생은 그대로 주한 화교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2000년 3월의 한씨가 경영하는 중화 요리점 「토요미」를 방문했을 때의 취재 메모로부터, 인터뷰 부분을 발췌해 소개하고 싶다.
「조부는 인천에서 무역상을 하고 있었다.
당시 , 이 근처(현인천시 선린호라·북성동)에는 중국인 조계가 있어 「청관」으로 불리고 있었다.
청나라 영사관을 시작해 무역상, 중화 요리점등이 모여 있고, 그것은 떠들썩했다.
근처(중앙동)는 일본인 조계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손님도 많았어요.
일제 시대부터 해방 후도 장사는 번성하고 있었지만, 한국 전쟁으로 기울었다.
중국과의 무역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에서도 식당 등에 장사 바꾸어 하고, 어떻게든 회복했다.
체잘몰이 폭발적으로 팔렸기 때문에, 그래서 재산을 모은 사람도 있었다」화교 인구의 피크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로, 약10만이라고도 해 왔다.이것은 현재의 화교 인구1만8천명의 5배나 된다.
최대 인구는 수도 서울에서, 현재의 중국 대사관이 있는 명동으로부터 소공동 일대, 또 파고타 공원의 남쪽 근처가 중국인 이스미구였다고 말해진다.그것은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이스미구와 옆에 있어여, 식생활 문화의 교류는 저절로 예상된다.
체잘몰이 「일본인의 미각도 의식했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로화교의 회상②〉
한국의 중화 요리에 대한 취재를 하고 있고, 어렵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에는 노포라고 하는 가게가 거의 남지 않은 것에 있다.
일본의 경우는 요코하마의 「만진루」(1892년 창업)이나, 나가사키의 사해누각(1899년 창업)등의 노포가, 각각의 역사나 거리의 모습을 전해 있거나도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러한 머크 마크와 같은 존재가 없다.
본격적 중화 레스토랑으로서는 1905년에 인천에서 오픈한 「공화봄」이 가장 낡다고 말해지지만, 지금은 폐허와 같은 건물이 남는 것만으로, 가게의 정사를 전하는 사람도 없다.
현존의 가게로서 가장 낡은 것은, 서울의 을지로3가에 있는 안동장(1945년 창업)이다.
또, 노포와 함께 로화교가 많지도, 지금은 한국에 살지 않았다.
전쟁 전의 피크시에는 10만인이라고도 한 화교 인구이지만, 현재는 약1만8천명에게까지 줄어 들어 버렸다.
「생활이 어려웠으니까, 모두국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천에서 중화 요리점을 경영하기 전출로의 한정화씨다.
그의 가족도 뿔뿔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있다.한씨는 일가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형제는 남녀 아울러 8진`l였다.
한 명 교통사고로 죽고 일곱 명이 남아 있는데, 나 이외는 모두 미국이나 대만에 가 버렸다.
70~80년대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정말로 큰 일이었기 때문에.
집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한국을 떠났다.병이 들어도 의료보험을 사용할 수 없고, 가게를 크게 하려고 해도 법률적인 제약이 있다.
한국인은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중화 요리점을 해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외국인이라고 하는 이유로, 모든 권리가 제한되고 있었다.
모두 참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다.그래서 차이나타운도 완전히 쇠퇴해져 버렸다.
70 연대 후반에는 마지막에 단 한 채만 남아 있던 중화 요리점도 부서지고, 드디어 이 거리에 중화 요리점이 한 채도 없어져 버린 적도 있었다.」
한씨자신도 70 연대에 10년간 정도 한국을 떠나고 일본에서 살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 후, 재기를 걸고 인천으로 돌아와, 조부의 대로부터의 토지에서 호떡가게로부터 시작했다.
「일본에 쭉 주거지 싶었지만, 비자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
거기에 한국은 태어난 고향이니까, 그래서 돌아왔다.부인과 둘이서 홋툿타 `N를 팔고, 돈을 열심히 모아.
그래서 지금의 가게를 오픈했다.그 후, 조금씩 화교도 돌아오기 시작해, 거리는 서서히 떠들썩하게 되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한씨의 가게의 막 향해 새로운 중화 요리점이 오픈하고 있었다.그것을 바라보는 한씨는 매우 기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