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ソンスンチョル江原大学名誉教授に敬意を表することになるか、そうでないかはわからないが、自分なりに通信使の歴史についての考えを語ろう。————

 

1443年、幼君、足利義勝の将軍擁立の機をとらえて、朝鮮の第四代国王世宗が日本に送った3回目の通信使は5月末~6月にかけて、兵庫に上陸し京都に向かった。前回の通信使は1439年の派遣であったから、わずか4年しか経っていなかったことになる。

 この時の通信使に関して、中原康富の日記『康富記』には興味深い記述がある。なんと、室町幕府は一行の入京を拒否し、この儀礼行事をなんとか止めさせようと苦心していたのである。それは幕府自身が政治的な不安定と深刻な財源難に苦しんでいたためだ。

1441年に突発した、赤満満祐による将軍足利義教の暗殺(嘉吉の変)以来、京都は南北朝合体以来の緊張状態であった。嘉吉の変、嘉吉の土一揆、および徳政令と続き、幕府の財政は破たんしていた。室町幕府には外交を展開する意思も余裕もなく巨額の出費をともなう儀礼外交をなんとか避けようとした。

「康富記」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る。通信使の一行に対して幕府は「新将軍はまだまだ幼く、諸大名も(恥ずかしながら)現在は外交儀礼のための多額の費用を捻出することが出来ない、京都に来てもらっても無益である(原文・町殿御幼稚時分也、諸大名国役已下要脚無沙汰之時節也、旁為無益歟)」と申し渡した。兵庫の津での交易を行った後、そのまま帰ってもらいたい、という機関決定を伝えた。

『康富記』1443.6.19の条の一部

 

 

 

しかしこの通知に対して通信使の側は「すべて前例にのっとって行ってもらいたい」と強硬に主張し、結局京都での儀礼行事を実行させた。

通常、国書を携えての平時の王使の往来にあたっては、事前に通告し相手の了解を得たうえで派遣するものであろう。しかし、この時の通信使(世宗が日本に送った7回目の王使)は合意に基づいて出発した形跡がない。幕府財政が崩壊の際にあること、歓迎されざる客であること、それらを百も承知の上で日本に向かったのである。

じつはこの通信使派遣には秘めたる重要な目的があり、何が何でも日本の国都にゆかねばならない事情があった。まさに同時期、世宗とその世子が力を入れていたのは朝鮮の独自の国字(ハングル)の創製プロジェクトであった。大詰めに差し掛かっていたこの計画の中核を担っていた若手の官僚が一行の序列3位である書状官として日本に送り出されていた。その人物とは後に朝鮮初期を代表する文人政治家となる申叔舟(当時二五歳)である。

 


입경이 거부된 세종의 사자_통신사의 역사의 진상_(01)

-------손슨쵸르 강원 대학 명예 교수에게 경의를 나타내게 되는지, 그렇지 않은가는 모르지만, 자기 나름대로 통신사의 역사에 대한 생각을 말하자.--------

1443년, 어린 군주, 아시카가 요시카쓰의 장군 옹립의 기를 파악하고, 조선의 제4대 국왕 세종이 일본에 보낸 3번째의 통신사는 5월말~6월에 걸쳐, 효고에 상륙해 쿄토로 향했다.전회의 통신사는 1439년의 파견이었기 때문에, 불과 4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이 때의 통신사에 관해서, 나카하라 야스시부의 일기 「강부기」에는 흥미로운 기술이 있다.무려, 무로마치 막부는 일행의 입경을 거부해, 이 의례 행사를 어떻게든 세우게 하려고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은 막부 자신이 정치적인 불안정과 심각한 재원난에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441년에 돌발한, 빨강 만만우에 의한 장군 아시카가의교의 암살(요시키치의 변) 이래, 쿄토는 남북조 합체 이래의 긴장 상태였다.요시키치의 변, 요시키치의 무로마치시대 농민폭동, 및 덕정령과 계속 되어, 막부의 재정은 파탄하고 있었다.무로마치 막부에는 외교를 전개할 의사도 여유도 없게 거액의 지출을 동반하는 의례 외교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강부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통신사의 일행에 대해서 막부는 「 신장군은 아직도 어리고, 제오나도(부끄럽지만) 현재는 외교 의례를 위한 고액의 비용을 염출 할 수 할 수 없는, 쿄토에 와 주어도 무익하다(원문·정전 유치 시분야, 제오나국역이하요각무소식지시절야, 방 때문 무익여)라고 언도했다.효고의 진으로의 교역을 실시한 후, 그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관 결정을 전했다.

「강부기」1443.6.19의 조의 일부

그러나 이 통지에 대해서 통신사의 옆은 「모두 전례에 따라서 가 주었으면 한다」라고 강경하게 주장해, 결국 쿄토에서의 의례 행사를 실행시켰다.

통상, 국서를 가지고 간 평시의 왕사의 왕래에 임해서는, 사전에 통고해 상대의 양해를 얻은 위에 파견하는 것일 것이다.그러나, 이 때의 통신사(세종이 일본에 보낸 7번째의 왕사)는 합의에 근거해 출발한 형적이 없다.막부 재정이 붕괴 시에 있다 일, 환영되어 바구니객인 것, 그것들을 백도 감안하고 일본으로 향했던 것이다.

실은 이 통신사파견에는 은밀한인 중요한 목적이 있어, 어쨌든지 일본의 수도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 있었다.확실히 동시기, 세종과 그 세코가 힘을 쓰고 있던 것은 조선의 독자적인 국자(한글)의 창제 프로젝트였다.마지막에 도달해 있던 이 계획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던 젊은이의 관료가 일행의 서열 3위인 서신관으로서 일본에 내보내지고 있었다.그 인물과는 후에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인 정치가가 되는 신숙주(당시 25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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