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にも末期儒者 古賀精里と朝鮮人出身儒者洪好演 (洪浩然)と家門関係は

 

洪浩然の 6代孫 安商と 古賀精里の妹さんが結婚しながら結ばれた

 

古賀精里は 1811年最後の朝鮮通信使派遣 時  ギムイギョを応対したりしたが当時自分の妹さんが

洪浩然の子孫と結婚したと明らかにしたと言う

 

洪浩然の話を書いた 洪浩然伝は 古賀精里が 1783年に著わしたことで現在日本宮内性

図書館に所長されている

 

洪好演(洪浩然)が日本に来るようになった理由は壬辰の乱当時倭軍に拉致されて

虜になったからだ

 

壬辰の乱当時 1593年 6月晋州城 (晉州城)が陷落されて日本軍は 軍官 民 7万名を虐殺して

掠奪して火をつけた

日本軍は慶南内陸地方まで入って来て山陰県 (現在慶南山清)で親と二人の兄嫁を失って

道を迷った 12歳少年  洪浩然をつかまえた

 

 

洪浩然をつかまえた倭軍はナベシマ (過島直茂)旗下の倭軍だった

つかまった当時  洪浩然は大きい筆をあぶ担いでいたと言う

 

洪浩然は親を失って惨めな状況から日本に来るようになったが

私邸 (佐賀)ボンズナベシマは彼の賢さを認めて自分の息子 勝茂と友達になるようにしてくれたし

京都に留学を送ってくれた

 

その後私邸に帰って来た 洪浩然は私邸 (佐賀)の 儒学の大父になったしその所の知識人に

儒学を教えた

 

 

扁舟意不忘

 

小さな船に乗ることを忘れないという意味だ

 

洪浩然の字

 

洪浩然は日本女性と結婚したし 70歳に

友達で私邸のボンズ 勝茂に朝鮮で帰国するように訴えたが 勝茂の懇切な

挽留で志を果た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いつも南無阿彌陀仏 仏号と 慈父 悲母李氏妹韓氏同妹四位 だと書いた額縁をかけておいて

親と二人の兄嫁の冥福を祈ったと言う

 

慈悲深いお父さん悲しいお母さんと兄嫁の冥福を祈って毎日お辞儀をしたと言う

 

 

 

 

日本  頂法寺の懸板

洪浩然の字

 

帰国が挫折された  洪好演 (洪浩然)は私邸(佐賀)に定着するようになってボンズに自分の地位と俸禄を

子孫たちに継いでくれるのを頼んだと言う

 

 

しかし 1657年 勝茂が江戸にチァムグンを行ってから死にあおう

 

近くの阿彌陀寺に行って 76歳に自ら自決をした

彼は死ぬ前に長男 安実を呼んで (忍)字を大きく使ってその下の

忍即心之宝 不忍心之殃だと書いて

 

堪えることは心の財宝堪え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身の不幸になるという遺言を残したと言う

 

洪浩然の 12台子孫 洪悦朗は( 1992年当時 )北海道大学名誉教授で関東学院大学建築学と

教授に仕事をしたコンクリート工学協会副会長を引き受けている建築学界の元老だ

 

日本で 400年の間子孫台どおり改名をしないで 洪氏 性を維持したことは先祖の意を受け継いで

洪氏を固守したからだ

 

洪好演 (洪浩然)の遺品は彼の子孫が名古屋性博物館に寄贈した

 

洪浩然今週死以後に自決した理由はボンズに対する忠誠心を表現したことで

朝鮮虜後裔の安危と社会的立地を保障するための選択だったことで見える

 

 

 

韓日の 洪浩然 子孫が出会いを持った

左側韓国人 洪浩然の兄弟の 12代孫右側日本の 洪浩然の 14代孫コウギミヒコ

 

 

 

 

 

 


임진왜란 소년 포로 洪浩然

에도 말기 유학자 古賀精里와 한국인 출신 유학자 홍호연 (洪浩然)과 가문 관계는

 

洪浩然의 6대손 安商과 古賀精里의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맺어졌다

 

古賀精里는 1811년 마지막 조선통신사 파견 때  김이교를 응대하기도 했는데 당시 자신의 여동생이

洪浩然의 후손과 결혼하였다고 밝혔다고 한다

 

洪浩然의 이야기를 쓴 洪浩然傳은 古賀精里가 1783년에 저술한 것으로 현재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홍호연(洪浩然)이 일본으로 오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납치되어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1593년 6월 진주성 (晉州城)이 함락되어 일본군은 軍官 民 7만명을 학살하고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경남 내륙지방까지 들어와 산음현 (현재 경남 산청)에서 부모와 두 형수를 잃고

길을 헤매던 12세 소년  洪浩然을 붙잡았다

 

 

洪浩然을 붙잡은 왜군은 나베시마 (過島直茂)휘하의 왜군이었다

붙잡힌 당시  洪浩然은 큰 붓을 등에 메고 있었다고 한다

 

洪浩然은 부모를 잃어 비참한 상황에서 일본으로 오게 되었지만

사가 (佐賀)번주 나베시마는 그의 영리함을 인정해 자신의 아들 勝茂와 친구가 되게 하여 주었고

교토에 유학을 보내 주었다

 

그후 사가로 돌아온 洪浩然은 사가 (佐賀)의 儒學의 대부가 되었으며 그 곳의 지식인에게

儒學을 가르쳤다

 

 

扁舟意不忘

 

작은 배를 타는 것을 잊지 않겠다 라는 뜻이다

 

洪浩然의 글씨

 

洪浩然은 일본 여성과 결혼했고 70세에

친구이며 사가의 번주 勝茂에게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호소하였으나 勝茂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항상 나무아미타불 佛號와 慈父 悲母李氏妹韓氏同妹四位 라고 쓴 액자를 걸어 놓고

부모와 두 형수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자비로운 아버지 슬픈 어머니와 형수의 명복을 기원하며 매일 절을 했다고 한다

 

 

 

 

일본 頂法寺의 현판

洪浩然의 글씨

 

귀국이 좌절된  홍호연 (洪浩然)은 사가(佐賀)에 정착하게 되고 번주에게 자신의 지위와 봉록을

자손들에게 상속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1657년 勝茂가 에도에 참근을 갔다가 죽음을 당하자

 

근처의 아미타寺에 가서 76세에 스스로 자결을 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장남 安實을 불러 (忍)字를 크게 쓰고 그 아래

忍卽心之寶 不忍心之殃이라고 쓰고

 

참는 것은 마음의 보배 참지 못하면 몸의 불행이 된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洪浩然의 12대 후손 洪悅朗은( 1992년 당시 )북해도 대학 명예 교수이며 관동학원 대학 건축학과

교수로 일본 콘크리트 공학 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건축학계의 원로이다

 

일본에서 400년 동안 자손대대로 개명을 하지 않고 洪氏 성을 유지한 것은 선조의 뜻을 이어 받아

洪氏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홍호연 (洪浩然)의 유품은 그의 후손이 나고야성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洪浩然이 번주 죽음 이후에 자결한 이유는 번주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한 것이면서

조선 포로 후예의 안위와 사회적 입지를 보장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韓日의 洪浩然 후손이 만남을 가졌다

왼쪽 한국인 洪浩然의 형제의 12대손 오른쪽 일본의 洪浩然의 14대손 코우 기미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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