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写真用量が大きい関係で分けてあげます

 

 

 

 

 

我が国には色んな所に多い書院が残っているのにこの中とても特別な書院一つが逹城郡にあります.

 

書院(書院)と言う(のは)朝鮮中期以後研究と先賢祭享のために惜しむによって設立された社説教育機関である同時に郷村自治運営器具を言うのにこれがさまざまな理由で大院君によって全国に 47個の書院だけ残して残りは皆撤廃したがこの時月だね嘉昌面ウルックリにある鹿洞書院もその対象になって 1868年(高宗 5)に撤廃されてから 1885年また作ったし 1972年現在より 100m 程度離れた場所にあったが規模がとても狭小でこれを現在の位置にこれはして今の姿で保存しているのです.

 

書き始めに申し上げたようにこの書院はとても特別です.

 

壬辰の乱時の倭将が朝鮮に帰順してまた味方だった倭軍を打ち破って以後丙子胡乱とイ・グァルの乱の時もかっかくした功を立てて正二品官職を受けて賃金に金さん性を下賜受けて ‘金忠善’と言う(のは)名前を得て朝鮮人になって暮した彼の位牌の面倒を見た書院です.

 

金忠善(金忠善)の日本名前はサヤが(沙也可), 彼は壬辰の乱当時日本の長寿加藤紀要マーサ(加藤清正)旗下の左禅鳳凰模様タンスで軍卒三遷人を導いて東莱性で進撃したがその翌日名分ない戦争は不可だと言いながら直ちに慶尚道兵馬節度使迫真(朴晋)に投降して帰順しました. 日本軍長寿で朝鮮軍長水路 転向した サヤがは日本軍を相手で義兵, 官軍とともに 78回戦闘で勝戦したし以後色んな所の戦闘で多くの功を立てました. この後末年にはこちらウロックドング(友鹿洞)で末年を送って静かに住んだと言います. 先祖賃金は彼の元々名前であるサヤが(沙也可)で大人死(沙)から出る保釈人金(金)と海(海)を渡ったと言ってこれを合した字である金海(金海)を本館で決めてやりました. 現在金忠善の子孫は全国に 17台までおおよそ 2000世代, 7000人余り子孫がいると言って有名人では金熾烈の前内務省長官と金再起の前水源池剣匠等があることと知られています.

 

それでは最後に誰もここまで見ながら思い出す知りたい事一つ...

壬辰の乱と言う(のは)戦争をしながら朝鮮に投降した金忠善, 彼は朝鮮の立場(入場)では友好的な立場だが日本の立場(入場)では断然売国奴になるしかなくて特に戦争に出て敵国に投降したから背信感の程度がとてもすごかったことは見当が可能です. 天下の反逆者に滅門指話にあうのに十分である事だったがそのままうまくはかどったんでしょうか? 当然これはそのまま事実化になって日本人たちに多くの嫌われたりしたが 1915年彼の号を取って作った暮夏当たり文集が才幹されると日本学者たちはこのような売国奴が同胞の中にあるという事実だけで残念の劇だと言う位憎悪の対象になったりしました. しかしこれを取り返しするきっかけがあったんです. すぐ 1970年代日本で局所に仰ぎ敬う小説家 siba Ryotaでがこちらウロックドングを訪問してその内容を見て本を書きながら雰囲気が変わり始めました. その後日本の放送でも金忠善の内容を放送しながら彼を再照明するきっかけになりました. 天下の背信者が平和論者で復活して韓日両国の友好的な水の出入り口をトイウォズは役割をし始めたのです. この後日本人観光客がこちら鹿洞書院を尋ね始めながらこちらは新しい韓日関係を定立する特別な場所になられたのです. 今も鹿洞書院裏手には金忠善の畝があるのに(下の写真参照) 我が国の人が鹿洞書院を訪問すればこちら畝までは参拜がお上手ではないのに日本人たちがこちらを尋ねれば必ず山道を結構上がって会うこちら墓所まで捜して参拜をすると言います.

 

現在鹿洞書院の隣には 98年開館した遺物展示館忠節当たりと生活館であるチォムモダングがあって反対側には 2012年 5月に開館した韓日友好官が位置しています. 1階には広報映像官, 伝統礼節室, 交流歴史体験官があり, 2階には企画ショールームと野外伝統遊び体験施設が用意されました. この外にも暮夏だ金忠善将軍の足跡を盛った 3D 立体映像と通信謝絶など韓日交流歴史を見られるし企画ショールームには日本が寄贈するとか賃貸してくれた各種遺物が展示されています. 鹿洞書院と一緒に聞こえて見回せば良い場所です.

 
 
 
 
 
(鹿洞書院指導)
 

 

 
 
 
 
歌唱で腕條令に項する道のそばには鹿洞書院を案内する表示版が立てられています
 
 
 
 

 

鹿洞書院到着.

先にウェサムムンであるヒャングヤングムンに会います.

 
 
 
ウェサムムンを立ち入ればすぐ講堂であるスングウィだ(崇義堂)がありますよ. 全面には鹿洞書院と言う(のは)懸板が付いています.
 
 
 


김충선과 녹동서원 1

사진 용량이 큰 관계로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곳에 많은 서원이 남아 있는데 이 중 아주 특별한 서원 하나가 달성군에 있습니다.

 

서원(書院)이란 조선 중기 이후 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 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 기구를 말하는데 이게 여러가지 이유로 대원군에 의하여 전국에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하였는데 이때 달군 가창면 우륵리에 있는 녹동서원도 그 대상이 되어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다가 1885년 다시 지었고 1972년 현재보다 100m 정도 떨어진 장소에 있었는데 규모가 너무 협소하여 이것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 드렸듯이 이 서원은 아주 특별합니다.

임진왜란때의 왜장이 조선에 귀순하여 다시 자기편이었던 왜군을 무찌르고 이후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워 정이품 벼슬을 받고 임금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아 ‘김충선’이란 이름을 얻어 한국인이 돼서 살았던 그의 위패를 모신 서원입니다.

 

김충선(金忠善)의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휘하의 좌선봉장으로 군졸 삼천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진격하였으나 그 다음날 명분없는 전쟁은 불가라고 하면서 곧바로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晋)에게 투항하여 귀순하였습니다. 일본군 장수에서 조선군 장수로 전향한 사야가는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관군과 함께 78회 전투에서 승전하였으며 이후 여러곳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이 후 말년에는 이곳 우록동(友鹿洞)에서 말년을 보내며 조용히 살았다고 합니다. 선조임금은 그의 원래 이름인 사야가(沙也可)에서 성인 사(沙)에서 나오는 보석인 금(金)과 바다(海)를 건너왔다고 하여 이를 합친 글자인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정해주었습니다. 현재 김충선의 후손은 전국에 17대까지 대략 2000세대, 7000여명 후손이 있다고 하며 유명인으로는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과 김재기 전 수원지검장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누구나 여기까지 보면서 생각나는 궁금증 하나...

임진왜란이란 전쟁을 치루면서 조선에 투항한 김충선, 그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우호적인 입장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단연 매국노가 될 수 밖에 없고 특히 전쟁에 나가서 적국에 투항하였으니 배신감의 정도가 아주 대단하였을 것은 짐작이 가능합니다. 천하의 반역자에다가 멸문지화를 당하고도 남을 일이었는데 그대로 넘어 갔을까요? 당연히 이건 그대로 사실화 되어 일본인들에게 많은 미움을 받기도 하였는데 1915년 그의 호를 따서 만든 모하당문집이 재간되자 일본학자들은 이와 같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유감의 극이라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만회하는 계기가 있었는데요. 바로 1970년대 일본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소설家 siba 료타로가 이곳 우록동을 방문해 그 내용을 보고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뒤 일본의 방송에서도 김충선의 내용을 방송하면서 그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하의 배신자가 평화론자로 부활하여 한일양국의 우호적인 물꼬를 튀워주는 역활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후 일본인 관광객이 이곳 녹동서원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는 특별한 장소가 되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녹동서원 뒷편에는 김충선의 묘가 있는데(아래 사진 참고) 우리나라 사람이 녹동서원을 방문하면 이곳 묘까지는 참배를 잘 하지 않는데 일본인들이 이곳을 찾으면 반드시 산길을 제법 올라 만나는 이곳 묘소까지 찾아 참배를 한다고 합니다.

 

현재 녹동서원 옆에는 98년 개관한 유물전시관 충절당과 생활관인 첨모당이 있고 반대편에는 2012년 5월에 개관한 한일우호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층에는 홍보영상관, 전통예절실, 교류역사 체험관이 있으며, 2층에는 기획전시실과 야외 전통놀이 체험시설이 마련됐습니다. 이 외에도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발자취를 담은 3D 입체영상과 통신사절 등 한일 교류역사를 볼 수 있고 기획전시실에는 일본이 기증하거나 임대해준 각종 유물이 전시돼 있습니다. 녹동서원과 함께 들려서 둘러보면 좋은 장소입니다.

 
 
 
 
 
(녹동서원 지도)
 
 
 
 
 
가창에서 팔조령으로 항하는 길 옆에는 녹동서원을 안내하는 표시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녹동서원 도착.

먼저 외삼문인 향양문을 만나게 됩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강당인 숭의당(崇義堂)이 있는데요. 전면에는 녹동서원이란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TOTAL: 9241

番号 タイトル ライター 参照 推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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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也可って日本人 dkool 2013-04-05 402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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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う一度 やろうか!! dkool 2013-04-01 355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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更に暇なんで史料を読むスレ( ´H....... ジョンお姉さん 2013-04-01 416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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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いでに史料を読んでみるスレ( ´....... ジョンお姉さん 2013-03-31 393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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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璧な論理破綻というか、自爆( ´....... ジョンお姉さん 2013-04-01 639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