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尹東柱

1917年 12月 30日 ‾1945年 2月16日

北間島生まれ

 

1931年北間島明洞小学校卒業

1933年ヨンジョン恩津 [恩真]中学校入学

1935年平壌スングシル [崇実]中学校転校したが 神社参拜問題が発生して閉校

1941年ソウル延喜 [延禧]専門学校 [現在 延世 大学 ]卒業

1942年日本東京 立教大学英文科入学

京都ドシシャ [同志社]大学英文科授業

 

尹東柱は裕福な家庭で生まれて育ったが祖国が植民地になった  現実で若い知性人として

悩んだ詩人だ

 

1942年 1月 24日に使った彼の 詩 真実会録の中で

 

私は私の懺悔の文を1行に減らそう

満二十巳年  一ヶ月を何の喜びを望んで暮して来たのか

明日やあさってやどんな楽しい日に

私はまた1行の真実会録を使わなければならない

 

あの時その若い年にどうしてそんな恥ずかしい告白をしたのか

 

が 詩は尹東柱が日本留学のために不可避に創氏改名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状況で

自分の心を治めて整理した後書いたことと見えます

 

1943年 7月 14日

 

京都 同志社大学学業の中で 7月お休みに迎え帰郷しようとしていた時点で尹東柱は治安維持法違反罪で

日本警察に逮捕して 2年宣告を受けて福岡刑務所に収監になった

 

治安維持法違反適用に対しては朝鮮人徴兵制度を批判したことからと知られたりしたが

日本検察の尹東柱判決文原文コピー公開きっかけで

京都大学みずのNaoki教授によれば

尹東柱が果して徴兵制度批判発言のため逮捕したのか疑問というのだ

 

1943年逮捕した後日本警察は 5ヶ月の間尹東柱など留学生たちを調査して

尹東柱の学校での朝鮮語科目廃止を批判したことや

朝鮮民族文化有志のために独立が必要だという話をしたという内容を中心に

 

調書作成になっていた時点で事件を渡された検察は民族文化より徴兵制も批判を強調して

公訴状を作成するようになって結局治安維持法違反が適用になって実刑判決になった可能性が大きいという

のだ

 

 

 

京都ウジガングで開かれた尹東柱 [先方左に 2番目 ]送別会写真

写真の中女性であるドシシャ大学同窓たちは尹東柱を希望多くてはにかみ多い青年で回考した

 

太平洋戦争で日本は朝鮮人徴兵を依頼したし日本の朝鮮人留学生たちの状況は悪くなって

あったこの時点で 7月お休みに迎えた尹東柱は帰国を決心する

朝鮮に帰る尹東柱のために級友たちは送別会を用意した

歌を歌ってくれないのかだと級友たちが要請すると尹東柱は送別会を用意してくれた級友たちの

ありがたさに遠慮しないでアリランを歌ったと言う

 

 

治安維持法は 1945年日本が敗戦するまで天皇制を反対する日本共産党を統制するため

適用した法律で日本はまだ 1945年以前の判決文を公開する制度を作っていない

 

逮捕する前尹東柱の周辺人物たちの証言によれば

彼は学校での朝鮮語科目廃止を批判したし

朝鮮民族文化有志のために独立が必要だ .戦争で徴兵になれば朝鮮人は無力で武装するのに

実力を取り揃えて独立するのに有利だろうと言ったと言う

 

彼は祖国の植民地現実で  独立運動に直接加わることはない自分に対してつらくて 

しながらも  彼の望む世の中は民族と国境を飛び越えた人類精神ではなかっただろうか思われます

彼の 詩はそんな思想が現われていると思います

 

尹東柱の死

 

尹東柱の死に対してはまだ正確に明かされていないが生体実験で死亡した可能性が

大きいと思っている

 

 

アメリカワシントン州国立図書館機密解除した文書

1948年日本戦犯裁判関連文書に当時九州帝国大学が福岡刑務所提訴者たちを相手で

生体実験をしたという証言が出た

 

 

 

1945年 米 空軍 B29 爆撃機が福岡に墜落したし乗っていた  米空軍 11人の中に赤い色で

ズルチン名前 6人は九州帝国大学病院に行かせたと言う 6人は生体実験対象者

というのだ

 

福岡刑務所にお父さんがお兄さん[尹東柱 ]死体を持ちに行った時

一日もっと遅く来たら死体を実験用で持って行ったはずだと日本人看守は言ったと

尹東柱弟(妹)は証言している

尹東柱と一緒に収監になっていたソングモングギュは当時悽惨な姿だったが彼は強制で疑問の注射を

 

当たったとお父さん連中に証言したと言う

注射を打ちなさいと言って当たったが  尹東柱もこの模様になったし私もこの模様になっただと

証言した後彼は 3週後に獄死した

 

尹東柱の生体実験死亡可能性に対して日本の文学評論家河野エージは当時九州帝国大学

で実験していた血漿代用生理食塩水であった可能性が大きいと主張した

 

刑務所側は脳溢血で死亡原因を明らかにしているが

専門家によれば海水に含まれた動物性プランクトンなどで細菌によって感染が発生することができるし

脳まで血液が伝達する場合血液が脳ですり抜けて来るようになるのにこの時見える症状が

脳溢血のようだと言う

 

 

 


시인 윤동주

 

윤동주

1917년 12월 30일 ~1945년 2월16일

북간도 출생

 

1931년 북간도 명동 소학교 졸업

1933년 용정 은진 [恩眞]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 [崇實]중학교 전학 하였으나 神社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교

1941년 서울 연희 [延禧]전문학교 [현재 延世 대학교 ]졸업

1942년 일본 도쿄 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교토 도시샤 [同志社]대학 영문과 수업

 

윤동주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조국이 식민지가 된  현실에서 젊은 지성인으로서

고뇌 했던 시인이었다

 

1942년 1월 24일에 쓴 그의 詩 참회록 중에서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滿이십사년  一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고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이 詩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위해 불가피 하게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정리한 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1943년 7월 14일

 

교토 同志社대학 학업 중 7월 휴가를 맞아 귀향 하려던 시점에서 윤동주는 치안 유지법 위반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2년 선고를 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 적용에 대해서는 한국인 징병제도를 비판한 것 때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일본 검찰의 윤동주 판결문 원문 복사 공개 계기로

교토대학 미즈노 나오키 교수에 의하면

윤동주가 과연 징병제도 비판 발언 때문에 체포 되었는지 의문 이라는 것이다

 

1943년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은 5개월 동안 윤동주 등 유학생들을 조사해

윤동주의 학교에서의 조선어 과목 폐지를 비판한 것이나

조선 민족 문화 유지를 위해 독립이 필요하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조서 작성 되고 있던 시점에서 사건을 넘겨 받은 검찰은 민족 문화 보다 징병제도 비판을 강조해서

공소장을 작성하게 되고 결국 치안 유지법 위반이 적용 되어 실형 판결이 된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쿄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 [앞쪽 왼쪽으로 2번째 ]송별회 사진

사진 속 여성인 도시샤 대학 동창들은 윤동주를 꿈 많고 수줍음 많은 청년으로 회고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은 한국인 징병을 의뢰했고 일본의 한국인 유학생들의 상황은 악화 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7월 휴가를 맞은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한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윤동주를 위해 급우들은 송별회를 마련했다

노래를 불러 주지 않겠는가 라고 급우들이 요청하자 윤동주는 송별회를 마련해준 급우들의

고마움에 사양하지 않고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치안 유지법은 1945년 일본이 패전할때 까지 천황제를 반대하는 일본 공산당을 통제하기 위해

적용한 법률로 일본은 아직 1945년 이전의 판결문을 공개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고 있다

 

체포 되기 전 윤동주의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학교에서의 조선어 과목 폐지를 비판했고

조선 민족 문화 유지를 위해 독립이 필요하다 .전쟁으로 징병 되면 한국인은 무력으로 무장 하는데

실력을 갖추고 독립 하는데 유리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조국의 식민지 현실에서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 하거나 하지 않은 자신에 대해 괴로워 

하면서도  그가 바라는 세상은 민족과 국경을 뛰어 넘은 인류 정신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의 詩는 그런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윤동주의 죽음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생체실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미국 워싱턴 주 국립도서관 기밀 해제한 문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규슈 제국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제소자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1945년 米 공군 B29 폭격기가 후쿠오카에 추락했고 탑승해 있던  米공군 11명 중에 빨간 색으로

줄친 이름 6명은 규슈 제국대학 병원에 보내졌다고 한다 6명은 생체 실험 대상자

라는 것이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아버지가 오빠[윤동주 ]시신을 가지러 갔을때

하루 더 늦게 왔다면 시신을 실험용으로 가져 갔을 것이라고 일본인 간수는 말했다고

윤동주 동생은 증언 하고 있다

윤동주와 함께 수감 되고 있던 송몽규는 당시 처참한 모습이었는데 그는 강제로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아버지 일행에게 증언 했다고 한다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는데  윤동주도 이 모양이 되었고 나도 이 모양이 되었다 라고

증언한 후 그는 3주 후에 옥사했다

 

윤동주의 생체실험 사망 가능성에 대해서 일본의 문학 평론가 고노 에이지는 당시 규슈 제국대학

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 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형무소측은 뇌일혈로 사망 원인을 밝히고 있지만

전문가에 의하면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 으로 세균에 의해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 까지 혈액이 전달될 경우 혈액이 뇌로 빠져 나오게 되는데 이때 보이는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 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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