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古代から韓国の弓はすぐれた性能で有名だった.
古代から韓


한국의 활

고대부터 한국의 활은 뛰어난 성능으로 유명했다.
古代から韓国の弓はすぐれた性能で有名だった.



무용총 [舞踊塚] 수렵도(狩獵圖)




안악3호분

 


덕흥리(德興里) 고분벽화 마사희(馬射嬉)

고대 한국의 활에 우수성에 대한 기록이 몇개 남아 있으나
한국 활의 우수성에 대한  다음 기록을 살펴 보자.
古代韓国の弓に優秀性に対する記録がいくつ残っているが韓国弓の優秀性に対する次の記録をよく見よう.

入唐獻磁石二箱, 又遣欽純角干良圖波珍?, 入唐謝罪, 冬, 唐使到, 傳詔, 與弩師仇珍川沙?廻, 命造木弩, 放箭三十步, 帝問曰, 聞在爾國, 造弩射一千步, 今?三十步何也, 對曰, 材不良也, 若取材本國, 則可以作之, 天子降使求之, 卽遣福漢大奈麻, 獻木, 乃命改造, 射至六十步, 問其故, 答曰, 臣亦不能知其所以然, 殆木過海, 爲濕氣所侵者歟, 天子疑其故不爲, ?之以重罪而終不盡呈其能
삼국사기 권 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문무왕 9년(669년)

당의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고 노사(弩師 - 쇠뇌의 名手(명수)) 구진천(仇珍川) 사찬(沙飡)을 데리고 가서,
황제의 명(帝命)으로 목노(木弩)를 만들게 하여 쏘아보니 30보밖에 가지 아니하였다.
당 고종이 묻기를
 "너의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000보를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겨우 30보밖에 가지 아니하니 무슨 까닭이냐"

구진천이 대답하기를,
"재료가 좋지 못한 때문이니, (만일) 목재를 본국에서 가져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였다.
 
천자(天子 고종)가 사신을 보내어 목재를 구하니, 왕(문무왕)이 곧 대내마(大奈馬) 복한(福漢)을 보내어 나무를 바쳤다.
다시 만들게 하여 쏘아보니 60보에 이르고 말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구진천이 대답하기를,

"臣(신)도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으나, 아마 그 목재가 바다를 거쳐 올 때 습기를 머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였다.

천자는 그가 일부러 하지 않는 줄로 의심하여 중죄로써 위협하였으나, 마침내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였다.


고려시대는 활의 성능 개량 및 활용이 극에 달했다.
高麗時代は弓の性能改良及び活用が極まった.

고려 시대에는 성을 방어하는 수성(守城) 작전시 쇠뇌를 매우 중시했다. 특히 김부의(金富儀·1079~1136)가 금나라에 대항할 방안을 논한 상소는 쇠뇌의 전술적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高麗時代には城を防御する守城 作戦の時弩を結ぶ重視した. 特に金富儀(1079~1136)が金国に対抗する方案を論じた上訴は弩の戦術的大切さをよく見るよ与える.

이 상소에서 김부의는 “훈련된 기병들이 들판에서 접전해 승패를 겨누는 것은 북방 기마민족의 장점이며 성곽에 올라 강한 쇠뇌로 굳게 성을 지키는 것은 중국의 장점”이라고 분석하면서 “고려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중국의 장점을 본받아 성벽을 높게 세우고 쇠뇌와 독화살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この上訴で金富儀は "訓練された騎兵たちが野原でせめより戦って勝敗を狙うことは北方騎馬民族の長所で城郭に上がって強い弩で固く城を守ることは中国の長所"と分析しながら "高麗の立場では適切に中国の長所を模範として城壁を高く建てる弩と毒矢を準備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たこと.

이처럼 쇠뇌를 중시한 고려에서는 특수한 종류의 쇠뇌가 개발되기도 했다.
このように弩を重視した高麗では特殊な種類の弩が開発されたりした.


朴元綽(박원작) : 박원작이
請以八牛弩二十四般兵器(청이팔우노이십사반병기) : 팔우노(八牛弩) 24반(般) 병기를
置邊城(치변성) : 변방의 성에 비치해 두도록 청하니,
從之(종지) : 따랐다.

‘고려사’에 따르면 덕종 1년(1032) 3월 상사봉어(尙舍奉御)라는 직함을 가진 박원작(朴元綽)이 수질노(繡質弩)와 팔우노(八牛弩)라 불리는 특수한 쇠뇌를 개발했다고 한다.
"高麗史"によれば德宗1年(1032) 3月尙舍奉御という職することを持った朴元綽が繍質弩と八牛弩だと呼ばれる特殊な弩を開発したと言う.
덕종 6년(1037)에도 박원작(朴元綽)이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 화살이 잇달아 나가게 한 장치)를 개발했다. 이를 본 덕종은 “매우 신기하고 교묘하기 그지없다”고 찬탄하며 “추가 제작해 각지 요충지에 비치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 외에 박원작이 천균노(千鈞弩)라는 특수한 쇠뇌를 제작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德宗6年(1037)にも朴元綽が繍質九弓弩(矢が相次いで行くようにした装置)を開発した. これを見た德宗は "非常に不思議だ巧みなこと言い尽くせない"と賛嘆して "追加製作して各地要衝地に備える"と言い付けたりした. この外に朴元綽が千鈞弩という特殊な弩を製作したという記録も残っている.

 강노(强弩)·는 길이가 최소 2m 이상인 대형 쇠뇌로 10발의 화살을 동시에 사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성곽 방어용으로 적합한 강노는 기록상 최대 사거리가 1000보(약 1200m)로 알려져 있다.
強弩は長さが最小 2m 以上の大型弩で 10発の矢を同時に射撃することはできる力強い武器だ. 城郭防御用で相応しい強弩は記録上最大射距離が 1000歩(約 1200m)で知られるある.

 그보다 조금 작은 중노(中弩)는 7~8발의 화살을 동시에 사격할 수 있으며 매복할 때 사용하기에 적합한 무기였다. 중노는 300~400보를 날아가 갑옷을 뚫을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을 갖고 있었다.
 3~4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소노(小弩)는 이동이 상대적으로 간편한 쇠뇌다. 들판에서 진을 치고 싸울 때 사용하던 무기다.
それより少し小さな中弩は 7~8発の矢を同時に射撃することはできながら待ち伏せる時使うのに相応しい武器だった. 中弩は 300~400歩を飛ぶよろいをくぐることができる位の性能を持つあった.
 3~4発の矢を発射することはできる小弩は移動が相対的に簡便な弩だ. 野原で陣を張る争う時使った武器だ.


조선시대에는 화약무기의 등장으로 활의 활용도가 고려 시대보다 당연히 낮아져야 했다.
유교를 국시로 정한 조선시대 다음 문장의 영향으로 활쏘기는 권장되었다.
화약무기의 발전을 저해한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朝鮮時代には火薬武器の登場で弓の活用度が高麗時代より当然低くなると はした.
儒教を国是で決めた朝鮮時代次の文章の影響で弓術は勧奨された.
火薬武器の発展を阻害した要因にならなかっただろうか?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공자왈, 군자는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 다만 활쏘기는 예외다.)



 成宗 239卷, 21年(1490 庚戌 / 명 홍치(弘治) 3年) 4月 6日(戊子) 6번째기사
下書全罷左道水軍節度使朴巖曰:
今送弓弩筒兒各二件、片箭十二介及弓弩發射小孔樣子, 其依樣造作試驗後, 其樣子及制度, 圖形送于慶尙左道水軍節度使, 亦令試驗。 其制筒兒, 或受三矢, 或受二矢, 下端後面凹處受弓, 上端岐鐵受弦, 岐鐵後端, 有方環、游鐵、鉤弦, 後用游鐵, 支鉤弦、岐鐵, 欲其不吐弦也。 岐鐵受處後端, 有木稍, 以拒方環, 欲使游鐵不退却也。 岐鐵受覈有三處, 弓長則彎深, 弓短則彎淺, 欲隨弓之長短, 臨時前後也。 一弓中折, 欲其便於佩持也。 或防牌或船窓作穴, 將筒兒末端納穴中, 臨敵則開却方環、游鐵以發矢。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박암(朴巖)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이제 궁노(弓弩)22069) 의 통[筒兒] 각 2건(件)과 편전(片箭) 12개 및 궁노 발사 소공(弓弩發射小孔)의 본보기[樣子]를 보내니, 본보기에 의거하여 만들어서 시험(試驗)한 후 그 본보기와 제도(制度)의 도형(圖形)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게 보내어 또한 시험하게 하도록 하라. 그 통[筒兒]의 제도는, 세 개의 화살[矢]이나 두 개의 화살을 꽂게 하고, 하단(下端) 후면(後面)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활[弓]을 꽂고, 상단(上端)의 기철(岐鐵)에 활시위[弦]를 꽂으며, 기철의 후단(後端)에 방환(方環)·유철(游鐵)·구현(鉤弦)이 있어 뒤의 유철을 써서 구현·기철을 지탱하여 활시위가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철의 꽂는 곳 후단(後端)에는 나무가 조금 볼록하게 솟은 곳이 있어 방환(方環)을 버티어 유철(游鐵)이 물러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철(岐鐵)의 꽂는 구멍은 세 곳이 있어, 활이 길면 활이 많이 휘고 활이 짧으면 활이 조금 휘어서, 활의 길고 짧음에 따라 그 때에 임하여 앞뒤로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개의 활은 가운데를 꺾어서 가지고 다니기에 편리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방패(防牌)와 배[船]의 창(窓)에 구멍을 뚫어 통[筒兒]의 끝부분을 구멍 안에 넣고서, 적(敵)을 만나면 방환(方環)·유철(游鐵)을 열어버리고 활을 쏘도록 하는 것이다.”


군인의 진급을 좌우한 활쏘기
軍人の進級を左右した弓術

심지어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1598년(선조 31년)에 출간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예 서적으로 손꼽히는 《무예제보》에는 “조선은 칼 쓰는 법과 창 쓰는 법은 전혀 배우지 않고 오로지 활쏘기만 연습했다”는 구절도 나온다.
甚だしくは壬辰の乱以前直後の 1598年(先祖 31年)に出刊される我が国で一番古い武技書籍で指折り数えられる 武藝諸譜には "朝鮮は刀使う方法と槍使う方法は全然学んだのないひたすら弓術だけ練習した"と言う句節も出る.

1543년에 작성된 법전인 大典後續錄에는 군인들의 활쏘기 성적에 따른 포상과 처벌 규정이 명기되어 있다. 활쏘기 성적이 나쁘면 진급과 포상의 기준이 되는 근무 인정 일수를 삭감했고, 두 차례 활쏘기 시험에 불참할 경우 품계를 강등하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런 만큼 조선의 군인이라면 활쏘기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1543年に作成された法典な 大典後續錄には軍人たちの弓術成績による褒賞と処罰規定が銘記されるある. 弓術成績が悪ければ進級と褒賞の基準になる勤務認定日数を削減する, 二度弓術試験に不参する場合品階を降等するまでした. 事情がこんな位朝鮮の軍人なら弓術に命をかけざるを得なかった.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가장 자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과 중에 하나가 활쏘기다. 이순신은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그 중 1593일 분의 일기가 남아 있다. 이 1593일 분의 일기에 총 264회의 활쏘기 연습 기록이 등장한다. 남아 있는 일기만으로 치면 대략 6일에 한 번 활쏘기 연습을 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한 번 활을 쏠 때 평균 35발(7순)을 쏘았으므로 임진왜란 중 장군이 연습용으로 쏜 화살의 수는 최하 8000발이 넘었을 것이다.
李舜臣将軍の 《乱中日記》に一番よく繰り返し的に登場する事と中に一つが弓術だ. 李舜臣は 1592年 1月 1日から 1598年 11月 17日まで 7年の間日記を書いたが 中 1593日分の日記が残っている. この 1593日分の日記のに総 264回の弓術演習記録が登場する. 残っている日記だけでこみ上げるおおよそ 6日に一回弓術演習をしたのだ. 李舜臣将軍は一回弓を射る時平均 35発(7順)をおごったので壬辰の乱の中で将軍が演習用でうつ矢の数は最下 8000発が超えたはずだ.

조선시대 군인의 활 실력
朝鮮時代軍人の弓実力

이순신 장군은 1592년 3월 28일자 일기에서 50발을 쏘아 표적에 43발을 명중했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성적은 조선시대 군인들의 활쏘기 실력 중 어느 정도 수준일까. 임진왜란 종전 8년 후인 1605년에 함경도에서 군관으로 군 생활을 한 박계숙과 역시 1644년에 함경도에서 군관으로 복무한 박취문 부자가 대를 이어 기록한 《부북일기》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李舜臣将軍は 1592年 3月 28日付け日記で 50発をうって 標的に 43発が命中したと記録した. このような成績は朝鮮時代軍人たちの弓術実力の中でどの位水準だろう. 壬辰の乱終戰8年後の 1605年に咸境道で軍官に軍生活をした朴繼叔と1644年に咸境道で軍官に服務した朴就文父子が代を引き継ぐ記録した 赴北日記でその解答を求めることはできる.

일기의 주인공인 박계숙은 50발을 쏘아 48발을 맞춘 기록도 있고, 50발을 쏘아 50발을 모두 명중한 사례도 있다. 그의 아들 박취문은 더 뛰어나서 5발을 10번 쏘아 모두 명중하는 ‘5순 몰기’ 기록이 여러 번 보인다. 심지어 다른 명사수인 군관 이시복과 활쏘기 시합을 벌여 189발을 연속 명중하기도 했다. 박취문의 활쏘기 능력이 대단해 보이지만 시합결과는 200발을 연속 명중한 군관 이시복의 승리였다.
日記の主人公である朴繼叔は50発をうって 48発を合わせる記録もある, 50発をうって 50発を皆命中した事例もある. 彼の息子朴就文はもっとすぐれて 5発を 10回うって皆命中する "5巡沒技" 記録が何回見える. 甚だしくは他の名射手である軍官李時復と弓術試合をする 189発を連続命中したりした.朴就文の弓術能力がすごく見えるが試合結果は  200発を連続命中した軍官李時復の勝利だった.

《부북일기》(赴北日記)에서 함경도 군관들의 활쏘기 기록을 보면 성적이 가장 나쁜 군관들의 기록이 50발을 쏘아 43발을 맞추는 수준이었다. ‘50발 발사 43발 명중’이라는 이순신의 활쏘기 성적은 1600년대 중반 함경도 군인들의 활쏘기 실력과 비교하면 하위권에 해당하는 셈이다. 일반 병사들의 활쏘기 실력은 이보다 낮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조선시대 군관 이상 무관들의 활쏘기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이 분명하다.
赴北日記で咸境道軍官たちの弓術記録を見れば成績が一番悪い軍官たちの記録が 50発をうって 43発を合わせる水準だった. "50発うって43発命中"という李舜臣の弓術成績は 1600年代中盤咸境道軍人たちの弓術実力と比べると下位圏にあたるわけだ. 一般兵士らの弓術実力はこれより低かった可能性が高いが朝鮮時代軍官以上武官たちの弓術能力は相当な水準だったということが明らかだ.

조선시대 각궁은 다시 뿔의 종류와 사용하는 나무의 종류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군대에서 사용한 군용 각궁 중 가장 성능이 좋은 활은 흑각궁이었다. 흑각군궁(黑角軍弓)으로 불리는 군용 흑각궁은 활채를 대나무가 아니라 산뽕나무로 만들고, 뿔은 수입산 검은색 물소뿔을 사용했다. 또 표면을 실로 감고 옻칠도 해서 내구성을 보강한 것이 특징이다.
朝鮮時代角弓はまた角の種類と使う木の種類によって何種類で分けられるのに軍隊で使った軍用角弓の中で一番性能の良い弓は黑角弓だった.黒角軍弓と呼ばれる軍用黑角弓は弓の体を竹ではない山桑で作る, 角は輸入産黒い色水牛の角を使った. また表面を糸に何回も巻いた漆もして耐久性を補強したのが特徴だ.

 


 


국내에서 자취를 감춘 조선시대 실전용 활로 보이는 유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A급 전범이 합사된 일본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스쿠니신사 내 유물 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은 8일까지 개최하는 전시회에 이 활을 내놓았다.

‘조선궁’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 이 활은 검은색으로 칠해졌으며 실 등으로 여러 차례 감은 흔적이 뚜렷하다. 조선 활은 활줄을 오래 걸어두면 쉽게 갈라지기 때문에 쏜 뒤에는 줄을 풀어놓지만 실전용 활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실을 감아 강도를 보강하고 그 위에 옻칠까지 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활은 연습용이거나 한 번에 짧은 화살 여러 발을 발사하는 수노궁(手弩弓)이라는 특수한 활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실전용 활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 따르면 실전용 활은 실물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国内で影をひそめる朝鮮時代実戦用弓で見える遺物が第2次世界大戦当時 A級戦犯が合リされた日本靖国に姿を現わした. 靖国神社内遺物展示館である遊就館は 8日まで開催する展示会にこの弓を出した.

朝鮮弓という名前に展示されたこの弓は黒い色で塗られたし糸などに何回も巻いた跡が明確だ. 朝鮮弓は弓弦を長く掛けるおけば易しく割れるから射る後には竝びを解いておくが 実戦用弓はそんなに出来ないから糸を巻いて强度を補強するその上に漆までした. 現在国内に残っている朝鮮時代弓は演習用や一番(回)に短い矢を多くの矢を発射する手弩弓という特殊な弓が大部分だ. 朝鮮時代実戦用弓が公開されたことは今度が初めてだ. 1929年発刊された "朝鮮の弓術"に注げば実戦用弓は実物が皆消えたと言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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