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20년전 목조 초등학교 건물이 밤에 불타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열기에 의해 숯이 비산하여 수백미터 떨어진 곳까지 낙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비화라고 말합니다만 초가는 비화에 의해  쉽게 발화하는 화재에 아주 취약한 가옥입니다.

조선 시대의 화재 대비책에 대해 알아 보기 전에 삼국사기의 기록을 잠시 보고 넘어 갑시다.

20年前木造小学校建物が夜に燃えることを見たことがあります.
おびただしい熱気によって炭が飛散して数百メートル 離れた所まで落下する姿を見られました.
これを飛火と言いますが草家は飛火によって易しく発火する火事にとても脆弱した家屋です.

朝鮮時代の火事対備策に対して調べる前に三国史記の記録をしばらくよく見ましょう

삼국사기 헌강왕 6년의 기사
제49대 헌강왕(憲康王  875~886  재위기간 11년)
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 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 風雨順, 歲有年, 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 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 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 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찌기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고려시대에 이미 상당히 앞선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 고려시대(1009~1399)
- 고려 현종 3년 수백 채의 가옥이 소멸된 것을 비롯하여 수십 건의 대형 화재 기록

- 금화제도 시행
• 소방조직인 금화(禁火)관서와 금화(禁火)에 대한 조직을 설치
• 양곡 창고에 대형화재가 발생 : 창고마다 금화관리 배치
• 어사대로 하여금 수시로 점검하게 명령
- 방화자 처벌
• 겨울철에 실수로 밭과 들을 태운 자는 회초리 50대
• 집과 재물을 불태운 자는 곤장 80대
• 가옥, 사당, 묘지, 관청 등에 일부러 불을 지른 방화자(放火者): 징역 3년형
- 방화 대책
•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의 개선권장
• 지하창고 설비: 전란대비 20만석 규모의 창고 설비

高麗時代にもうよほど先に進んだ制度が施行されました.

■高麗時代(1009~1399)
- 高麗 顯宗 3年数百軒の家屋が消滅したことを含めて数十件の大型火事記録

- 禁火制度施行
• 火消し組職である禁火官署と禁火に対する組職を設置
• 糧穀倉庫に大型火って随時に点検するように命令
- 放火者処罰
• 冬季に間違いで畑と野原を焼く人 鞭 50
• 家屋と財物を家屋と財物を焼く人は棍杖 80
• 家屋, 祠堂, 墓地, 官庁などにわざわざ火をつけた放火者: 懲役 3年型
- 放火対策
• 草屋根を瓦屋根での改善勧奨
• 地下倉庫設備: 戦乱備え 20万石規模の倉庫設備


高麗의首都 開城의 한옥 마을
高麗の首都 開城の韓屋村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開京에서 漢陽으로 首都를 천도하게 됩니다.
많은 가옥들이 일시에 지어졌으므로 자연적으로 초가가 많게 되고 초가의 화재를 염려하여 기와지붕으로 바꾸기 위해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朝鮮時代に至るようになれば 開京で 漢陽に 首都を遷都するようになります.
多くの家屋たちが一時に建てられたので自然的に草家が多くなる草家の火事を気づかって瓦屋根に変えるために措置を取るようになります.

태종 11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1월 28일(기미) 5번째기사
처음으로 별와요를 설치하고, 여러 도에서 와장을 징발하다
始置別瓦窰。 以參知議政府事李膺爲提調, 前典書李士穎ㆍ金光寶爲副提調, 僧海宣爲化主。 海宣嘗言於國曰: “新都大小人家, 皆蓋以茨, 於上國使臣往來, 瞻視不美, 且火災可畏。 若置別窰, 使予掌以燔瓦, 許人人納價買之, 則不滿十年, 城中閭閻, 盡爲瓦屋矣。” 國家然之, 發諸道僧匠有差, 使赴其役。 忠淸、江原道各僧五十名、瓦匠六名, 慶尙道僧八十名、瓦匠十名, 京畿、豐海道各僧三十名、瓦匠五名, 全羅道僧三十名、瓦匠八名。별와요(別瓦窯)604) 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이응(李膺)을 제조(提調)로, 전 전서(典書) 이사영(李士穎)과 김광보(金光寶)를 부제조(副提調)로 삼고, 중 해선(海宣)을 화주(化主)로 삼았다. 해선이 일찍이 나라에 말하기를,
“신도(新都)의 대소 인가(大小人家)가 모두 띠[茅]로 집을 덮어서, 중국(中國) 사신이 왕래할 때에 보기가 아름답지 못하고 또 화재(火災)가 두렵습니다. 만약 별요(別窯)를 설치하고, 나에게 기와 굽는 일을 맡게 하여, 사람마다 값을 내고 이를 사가도록 허락한다면, 10년이 차지 아니하여, 성안의 여염(閭閻)이 모두 기와집[瓦屋]이 될 것입니다”
하 니, 나라에서 그렇게 여겨, 여러 도(道)에서 승·장(僧匠)을 차등 있게 징발해서 그 역(役)에 나아가도록 하였는데, 충청도·강원도에서 각각 중[僧] 50명과 와장(瓦匠) 6명이요, 경상도에서 중 80명과 와장(瓦匠) 10명이요, 경기도·풍해도에서 각각 중 30명과 와장(瓦匠) 5명이요, 전라도에서 중 30명과 와장(瓦匠) 8명이었다.

세종 26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2월 7일(무신) 2번째기사
별요의 화주 도대사 해선이 기와 굽는 안을 올리자 시행하게 하다
別窰化主都大師海宣呈書于戶曹。 其辭曰:
僧海宣伏觀, 歲在乙酉, :DisableLayer();” style=”“>太宗大王還都于此, 念營建之未久, 慮民戶之未葺, 命設別窰陶瓦, 許人買賣, 不數年而瓦屋成者過半, 豈惟免於火災? 將永觀於厥成。 不幸値數年之歉, 以省經費而見罷焉。 小僧仰體聖慈, 發大誓願, 於丙申年申聞, 而復建別窰, 欲令一城之內皆爲瓦家, 俾無修葺之勞, 亦無延燒之患, 苦心奔走, 于今九年, 事巨力微, 未能博施, 草屋猶多, 僧心疹瘁。
竊念, 僧年老耄, 西景迫近, 將恐志願之未畢, 聖澤之未廣, 思所以久長之計, 無如立寶。夫燔瓦之功, 其難有三, 燒木之辦一也, 供給之費二也, 工役之錢三也。 如得緜布三千匹, 立爲三色之寶, 定其考察之官, 率領僧徒, 米賤則買之, 米貴則賣之, 存其本, 取其利, 以贍其用, 則三事可辦, 燔瓦何難? 後之繼吾志者, 將永久而不替, 庶幾都城之內, 皆爲瓦家矣。 僧於平安、黃海兩道, 私備米一千石, 願納於其道, 充爲軍須, 受忠州慶原倉陳米, 以爲立寶之本, 則無害於國家, 而有益於都人矣。 伏望轉達於上, 明降施行。
戶曹啓: “上項海宣所備之米, 姑令平安、黃海道所在各官收納, 錄之會計, 換給以慶原倉米。 但全委僧徒, 任之別窰未便, 依歸厚所例, 朝官二員差定, 其餘布置, 一從所言。” 從之。
별요(別窰)의 화주(化主) 도대사(都大師) 해선(海宣)이 호조에 글을 올려 이르기를,
“승 (僧) 해선은 보건대 태종 5년에 태종 대왕이 이곳 〈서울〉에 환도하여 아직 〈도시를〉 영건(營建)한 지 오래지 않아서 민호가 지붕을 덮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별요(別窰)를 설치하고 기와를 구워 매매하게 하였더니, 수년도 지나지 아니하여 기와집이 반을 넘었습니다. 어찌 화재만 면할 뿐이겠습니까. 장차 영구히 그렇게 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는데, 불행히도 수년 동안 흉년이 들어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별요를〉 혁파한 것이었습니다. 소승이 우러러 태종의 자애한 마음을 체득하고 〈부처에게〉 큰 서원(誓願)을 빌어, 태종 16년에 임금께 신청하여 다시 별요를 설치하고, 도성 안이 모두 기와집이 되어 〈해마다〉 지붕을 이는 노고를 없애고 화재 연소의 걱정을 없애고자 고심 분주한 지 지금까지 9년입니다. 그러나, 일은 크고 힘은 미약하여 널리 보급시키지 못하여, 초가집이 오히려 많으니, 소승의 마음은 괴롭기만 합니다. 생각하건대, 소승의 나이 차차 늙어서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마음 먹은 것을 끝내지 못하고 〈태종의〉 성스러운 덕택이 널리 퍼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 일을 위한 장구한 계획을 생각하니, 보(寶)를 세우는 것이 제일이겠습니다. 대개 기와를 굽는데 세 가지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땔나무를 준비하는 것이 첫째요, 〈물자를〉 공급하는 비용이 둘째요, 공전을 주는 돈이 셋째입니다. 만일 면포(緜布) 3천 필이 있으면, 세 가지 보(寶)를 만들어 고찰관(考察官)을 정하고, 승도(僧徒)를 거느리고 쌀값이 쌀 때에 사들이고, 비쌀 때에 팔아서, 그 본전은 두고 이자를 취하여 그 비용에 쓰면, 세 가지 일을 다 해결할 수 있으니, 기와를 굽는데 어찌 어렵겠습니까. 뒷사람이 나의 뜻을 계승하여 영구히 변경하지 아니하면, 도성 안이 모두 기와집이 될 것입니다. 소승이 평안·황해 양도에 사사로이 쌀 1천 석을 준비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그 도에 바쳐 군수 물자에 충당하고, 충주(忠州) 경원창(慶原倉)의 진미(陳米)를 받아서 보를 세우는 본전을 삼으면, 국가에는 해가 되지 않고 서울 사람에게 이익이 있는 일이니, 임금께 전달하여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호조에서 계하기를,
“윗항 해선(海宣)이 준비한 쌀은 우선 평안·황해도 소재지 각 관에서 수납하여 회계에 기록하고 경원창의 쌀로 바꾸어 주되, 다만 승도들에게만 별요를 위임할 수 없으니, 귀후소(歸厚所)의 예(例)에 의하여 조관(朝官) 2명을 파견하고, 그 나머지 계획은 모두 그 말대로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31권,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2월 29일(계사) 2번째기사
불탄 가옥의 보수를 위해 별요를 설치하여 싼 값으로 기와를 보급하게 하다
戶曹啓: “今失火人家舍及貧窮未能自備蓋瓦者, 請設別窰令燔瓦, 輕價分給, 其事件條列于後。 一, 提調及監役官差定。 一, 瓦匠四十名, 僧人爲先抄定。 一, 助役人三百名, 自願人及外方僧人, 刷出給衣糧。 僧人則考其赴役日數及勤慢賞職。 一, 踏泥牛二十頭, 以各司鼠損布貨, 許於自願人貿易。 一, 燔瓦木, 量宜定數, 每年令京畿、江原、黃海道, 當領船軍於漢江上流斫伐, 用水站船輸納。 一, 瓦匠助役人供給及踏泥牛養飼米豆, 初年酌量支給, 自次年以瓦價供給。 其醬及魚藿, 以各司陳醬及司宰監, 義盈庫陳魚藿支給。 一, 瓦窰基地, 令漢城府折給, 其餘未備事件, 別窰官吏, 臨時續議以啓。” 從之。
호조에서 계하기를,
“지금 화재를 당한 가옥과 빈궁하여 자기의 힘으로 기와를 준비하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 별요(別窰)를 설치하여 기와를 구워서 싼 값으로 나누어 주게 하소서. 이에 대한 것을 조항 별로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1. 제조(提調) 및 감역관(監役官)을 선정 임명할 것.
1. 기와장이 40명을 우선 중[僧]으로 뽑아서 선정할 것.
1. 일을 보좌하는 사람 3백 명은 자진 희망하는 사람과 지방의 중들로 뽑아서 의복과 식량을 지급하고, 중은 그가 노동한 날수와 근무 성적을 조사하여 관직으로 상을 줄 것.
1. 흙 밟는 소[踏泥牛] 20마리는 각 관청에 있는 쥐가 쓸은 포화(布貨)로써 자원(自願)하는 사람에게 매매할 것을 허락할 것.
1. 기와를 굽는 장작은 적당한 수를 책정하여 해마다 경기·강원·황해도에 소속된 선군(船軍)으로 하여금 한강 상류에서 벌채하여 가지고 수참섬(水站船)으로 수송하여 들이게 할 것.
1. 기와장이와 보좌하는 사람의 급료(給料) 및 흙 밟는 소를 먹일 쌀과 콩은 첫 해부터는 수량을 계산하여 지급하고, 다음 해부터는 기와로서 값을 지급하며, 장(醬)과 해산물[魚藿]은 각 관청에 저장된 묵은 장과 사재감과 의영고에 저장된 묵은 해산물로 지급할 것.
1. 기와를 구울 요지(窰地)는 한성부에서 마련하여 주며, 그밖에 미비한 조항은 별요의 관리가 수시로 계속 상의하여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단종 10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3월 10일(신유) 5번째기사
서울의 일반 민호에 기와를 공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아를 파하게 하다
議政府啓: “宣德元年二月間, 都城內適有火災, 因多草家, 勢易延爇。 其時復立別窰, 燔瓦賤賣。 今京中蓋瓦家舍已多, 請罷別窰。” 從之。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선 덕(宣德)원년2338) 2월에 도성(都城) 안에 마침 화재(火災)가 있었는데, 초가(草家)가 많았으므로 불길이 잘 번져서 연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에 다시 별요(別窯)2339) 를 세워서 기와를 구워 싸게 팔아, 지금 경중(京中)은 기와를 이은 집이 많사오니, 청컨대 별요를 파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2338]선덕(宣德)원년 : 1426 세종 8년.

1406년 부터 대대적으로 보급된 기와는 1454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민가에 보급되어 기와를 굽기 위해 만들어진 別窯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화재 대비책을 살펴 보겠습니다.
1406年から大大的に普及された瓦は 1454年に至る大部分の民家に普及される瓦を焼くための 別窯が必要なくなりました.
次は火事対備策をよく見ます.


태종 30권, 15년(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9월 21일(을묘) 4번째기사
한성부에서 화재를 방비하는 계목을 올리다

 漢城府上備火災啓目:
司僕寺、內資寺、軍資監、濟用監、豐儲倉等各司, 密近人居, 火災可慮。 且行廊之北, 人家逼近, 竝皆分揀破去。 其上項破家之人, 聽其自願, 將各人畢造家餘地及城內各司、寺院菜田, 盤松坊、盤石坊里倉庫、藍田、靑苔田菜地, 城內射廳、沈藏庫菜地折給何如?
從之。 柳廷顯、朴訔啓曰: “家之當毁者, 以千餘計, 民必失所。 乞勿毁, 而使當毁之家及居行廊者各勉其力, 築墻外楹, 使火不得延及, 又畜水以備火。” 上曰: “火之爲用, 冬月爲甚, 嚴加禁火之令, 待明春築墻。”
한성부에서 화재를 방비하는 계목을 올리었다.
“사 복시(司僕寺)·내자시(內資寺)·군자감(軍資監)·제용감(濟用監)·풍저창(豐儲倉) 등 각사가 인가가 조밀하고 가까와서 화재가 염려되고, 또 행랑의 북쪽에 인가가 매우 가까이 붙었으므로, 아울러 모두 분간하여 헐어 버리고, 위의 집이 헐린 사람은 자원을 들어서 각 사람이 집을 다 지은 남은 땅과 성 안 각사(各司)·사원(寺院)의 채전(菜田)과 반송방(盤松坊)·반석방(盤石坊)·마을 창고·남전(藍田)·청태전(靑苔田)의 채지(菜地)와 성 안의 사청(射廳)·침장고(沈藏庫)의 채지(菜地)를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정현(柳廷顯)·박은(朴訔)이 아뢰기를,
“마땅히 헐어야 할 집이 1천여 호로 계산되니, 백성이 반드시 살 곳을 잃을 것입니다. 빌건대, 헐지 말고 꼭 헐어야 할 집과 행랑에 사는 자로 하여금 각각 힘을 써서 외영(外楹)에 담을 쌓아 불이 번지지 못하게 하고, 또 물을 비축하여 불을 방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불을 쓰는 것은 겨울이 심하니, 금화(焚火)의 영(令)을 엄하게 더하고, 명년 봄을 기다려 담을 쌓게 하라.”


세종 20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6월 23일(임신) 5번째기사
호조에서 각처 창고의 화재 차단책을 아뢰다
戶曹啓: “京外各處倉庫, 累有火災延燒之弊。 其倉庫隔五六楹築墻, 使火氣不得相通, 屋上厚塗, 仍蓋瓦。 且於簷下周回築墻, 高至沒簷, 以防火災。” 從之。
호조에서 계하기를,
“경 외(京外) 각처의 창고(倉庫)가 여러 번 화재(火災)로 인하여 연소(延燒)되는 폐단이 있으니, 그 창고를 5, 6영(楹)의 간격을 두고 담을 싸서, 불기운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옥상에도 두껍게 바르고 기와로 덮고, 또한 처마 밑에 돌아가면서 담을 쌓아, 그 높이가 처마까지 닿도록 하여 화재를 방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20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6월 27일(병자) 4번째기사
병조에서 화재로 인해 금화 조건을 건의하다
 兵曹啓: “火災不可不愼, 其禁火條件, 具列于後。
一, 救火梯子及貯水之器、汲水之具, 令工曹量宜造作, 闕內各處, 隨地之宜, 分置貯水, 使入番司鑰掌之, 以備不虞。 其汲水人, 令刑曹定屬。
一, 萬一闕內有火災, 則掌漏者救火事畢爲限擊鍾, 令入直別監、小親侍、防牌、近仗、司饔各色掌、內侍、茶房、行首、牽龍救火, 其餘軍士, 不離直所, 各守其任, 堅守各門, 承命者外, 不許出入。
一, 出番甲士、防牌則各於本衛, 內禁、內侍衛、忠義、別侍衛各軍五員, 近仗則中軍營攝隊長、隊副, 補充軍則月差所、軍器監別軍、藥匠、義禁府、都府外百戶, 司僕寺諸員則各其朝房, 隨其聞鍾聲先後, 聚會待令。
一, 議政府、異姓諸君府、敦寧府、諸曹、三軍都摠制府、漢城府及各司成衆、愛馬, 各於朝房, 趨赴待令。
一, 出番內侍府別監、小親侍, 俱詣闕門外待令。
一, 萬一景福宮火變時, 宮祿官奔告代言司。 火變初發時, 令其宮入直照刺赤, 救火畢爲限擊鍾, 預定之人, 卽入救火。 時座所入直大小人員, 不在此限。
一, 壽康宮火變時, 宮入直速古赤一人, 卽詣闕入啓, 入番鎭撫, 奔告代言司。 火變初發時, 令其所使令擊樓門鼓, 令入直速古赤、別監、小親侍、司饔各色掌、防牌、司僕諸員等救火, 其餘入直軍士, 亦依上項例施行。
一, 景福宮則中部壽進坊ㆍ澄淸坊ㆍ觀光坊ㆍ順化坊ㆍ義通坊, 西部積善坊, 昌德宮則北部陽德坊ㆍ廣化坊、中部貞善坊ㆍ慶幸坊, 壽康宮則東部蓮花坊ㆍ瑞雲坊ㆍ德成坊ㆍ燕喜坊管領, 聞鍾聲, 卽率各戶男女, 各持汲水之具, 趨會闕門外及各宮門外待令。
一, 景福宮、壽康宮則議政府以下各司外, 上項身親救火之人, 俱詣宮門外待令。
一, 出番別監、小親侍則司謁、司鑰掌之, 甲士、防牌、近仗、別軍、藥匠、都府外百戶、攝隊長、隊副、補充軍、司僕諸員則兵曹鎭撫所掌之, 坊里人則漢城府掌之, 各自考察整齊待令。
一, 火勢盛發, 不得已外人進來救火, 則急迫中, 數多人信符分給勢難, 除信符分給, 內臣受牙牌出來, 命入則各率整齊人, 卽入救火。 景福宮則直入救火, 壽康宮則亦依上項例承命, 卽入救火。
一。 移御所救火, 一依昌德宮例救火。
一, 軍士則兵曹、鎭撫所, 各司則司憲府, 坊里人則漢城府, 到未到考察。”
병조에서 계하기를,
“화재(火災)를 조심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 금화 조건(禁火條件)을 아래에 나열합니다.
1. 구화(救火)하는 사다리[梯子]및 저수기(貯水器)·급수구(汲水具)는 공조(工曹)로 하여금 적당하게 만들어 궐내의 각처에 적당한 곳에 두고 저수(貯水)하여, 번(番)을 든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여 뜻하지 않은 근심을 대비하고, 급수인은 형조(刑曹)로 하여금 정하게 할 것이며,
1. 만일 궐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장루자(掌漏者)는 불을 끌 때까지 종(鍾)을 칠 것이며, 입직별감(入直別監)·소친시(小親侍)·방패(防牌)·근장(近仗)·사옹(司饔)·각색장(各色掌)·내시(內侍)·다방(茶房)·행수(行首)·견 룡(牽龍) 들은 불을 끄며, 그밖의 군사(軍士)들은 직소(直所)를 떠나지 아니하고 각기 그들의 소임을 지킬 것이며, 굳게 각 문(門)을 지키고 승명(承命)하는 자 외에는 출입을 허락하지 아니할 것이요,
1. 출번 갑사(出番甲士)·방패(防牌)는 각기 본아(本衙)에서 내금(內禁)·내시위(內侍衛)·충의(忠義)·별시위(別侍衛)에서 각각 군사 5명, 근장(近仗)은 중군영(中軍營)·섭대장(攝隊長)·대부(隊副), 보충군(補充軍)은 월차소(月差所), 군기감(軍器監)은 별군(別軍)·약장(藥匠), 의금부(義禁府)는 도부외 백호(都府外百戶), 사복시(司僕寺)의 여러 인원들은 각기 그 조방(朝房)에서 종소리를 듣는 대로 선후로 모여서 명령을 기다릴 것이며,
1. 의정부(議政府)·이성 제군부(異姓諸君府)·돈녕부(敦寧府)·제조(諸曹)·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한성부(漢城府) 및 각사(各司)의 성중 애마(成衆愛馬)는 각기 그들의 조방에서 달려와 명령을 기다릴 것이요,
1. 출번 내시부(出番內侍府)·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는 모두 궐문 밖에 나와 대령(待令)하고,
1. 만일 경복궁(景福宮)에 화재가 났을 때에는 궁록관(宮祿官)이 대언사(代言司)에게 달려가서 고한다. 화재가 처음 발생할 때에, 그 궁에 입직하던 조라치[照剌赤]는 불을 다 끌 때까지 종(鍾)을 친다. 예정(豫定)된 사람은 바로 들어와 불을 끄는데, 시좌소(時座所)에 입직(入直)하던 대소 인원들도 이에 한하지 않는다.
1. 수강궁(壽康宮)에 화재가 났을 때에는, 궁에 입직(入直)하던 속고치[速古赤] 한 사람이 예궐(詣闕)하여 들어가 계(啓)하고, 입번(入番)하던 진무(鎭撫)는 대언사(代言司)에 달려가 고한다. 화재가 처음 났을 때에 그 곳 사령(使令)으로 하여금 누문(樓門)에 있는 북을 치게 하고, 입직(入直)하던 속고치[速古赤]·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사옹(司饔)·각 색장(各色掌)·방패(防牌)·사복(司僕)의 여러 인원들은 불을 끄게 하고, 그 나머지 입직하던 군사(軍士)는 또한 윗항에 의하여 시행한다.
1. 경복궁(景福宮)은, 중부(中部)는 수진방(壽進坊)·징청방(澄淸坊)·관광방(觀光坊)·순화방(順化坊)·의통방(義通坊)이요, 서부(西部)는 적선방(積善坊)이요, 창덕궁(昌德宮)은, 북부(北部)는 양덕방(陽德坊)·광화방(廣化坊)이며, 중부(中部)는 정선방(貞善坊)·경행방(慶幸坊)이요, 수강궁(壽康宮)은, 동부(東部)는 연화방(蓮花坊)·서운방(瑞雲坊)·덕성방(德成坊)·연희방(燕喜坊)에서 관령(管領)하는데, 종소리를 듣자 바로 각 호(戶)의 남녀를 거느리고 각기 급수하는 기구를 가지고 궐문 밖이나 각 궁문 밖에 달려와 모여서 대령하고,
1. 경복궁(景福宮)·수강궁(壽康宮)에서는 의정부(議政府) 이하 각사(各司) 외의 윗항에서 말한 몸으로 친히 불을 끌 만한 사람은 모두 궁문 밖에 나아가 대령하고,
1. 출번 별감(出番別監)·소친시(小親侍)는 사알(司謁)·사약(司鑰)이 관장하고, 갑사(甲士)·방패(防牌)·근장(近仗)·별군(別軍)·약장(藥匠)·도부외 백호(都府外百戶)·섭대장(攝隊長)·대부(隊副)·보충군(補充軍)·사복시(司僕寺)의 여러 인원은 병조 진무(兵曹鎭撫)가 관장하고, 방리(坊里)의 사람은 한성부(漢城府)에서 관장하여, 각자가 고찰(考察)하여 정제(整齊)하게 대령할 것이요,
1. 화세(火勢)가 심하여 부득이 외인이 들어와야 불을 끌 경우이면, 급박한 중에 많은 사람에게 신부(信符)를 나누어 준다는 것은 형편상 어려운 일이니, 신부(信符)를 나누어 주는 것은 제폐하고, 내신(內臣)이 아패(牙牌)를 받아 가지고 나와서 들어오라고 명하면, 각기 정제(整齊)한 사람을 거느리고 바로 들어가 불을 끈다. 경복궁에는 바로 들어가 불을 끄고, 수강궁에는 윗항의 예에 의하여 명령을 받은 다음에 불을 끈다.
1. 이어소(移御所)의 불 끄는 것은 한결같이 창덕궁의 예에 의하여 불을 끄고,
1. 군사(軍士)는 병조 진무소(兵曹鎭撫所)에서, 각사(各司)는 사헌부(司憲府)에서, 방리(坊里) 사람은 한성부(漢城府)에서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를 고찰한다.”
고 하였다.

 세종 31권,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2월 20일(갑신) 6번째기사
행랑에 방화장을 쌓고, 성내 도로를 넓게 만드는 등 화재 방비책을 명하다
命: “京都行廊, 築防火墻, 廣開城內道路, 使之四通宮城。 及有錢穀各司, 逼近家舍, 量宜撤去。 行廊十間, 私家五間, 作一坎井。各司內作二坎井貯水。 宗廟、闕內及鍾樓樓門, 作救火器械藏之, 見火起則奔救。 有軍人奴婢各司, 亦備救火諸緣, 聞火災, 則各領其屬救之。”
명령을 내리기를,
“서울의 행랑(行廊)에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성내의 도로를 넓게 사방으로 통하게 만들고, 궁성이나 전곡(錢穀)이 있는 각 관청과 가까이 붙어 있는 가옥은 적당히 철거하며, 행랑은 10간마다, 개인 집은 5간마다 우물 하나씩을 파고, 각 관청 안에는 우물 두 개씩을 파서 물을 저장하여 두고, 종묘와 대궐 안과 종루의 누문(樓門)에는 불을 끄는 기계를 만들어서 비치하였다가, 화재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 곧 쫓아가서 끄게 하며, 군인과 노비가 있는 각 관청에도 불을 끄는 모든 시설을 갖추었다가,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각각 그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가서 끄게 하라.”
하였다.

세종 31권,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2월 26일(경인) 5번째기사
금화 도감을 설치하게 하다
吏曹啓: “都城內無專掌禁火之法, 閭巷無識之徒, 不能用心愼守, 以致失火, 延燒家舍, 財産蕩盡, 民生可惜。 別立禁火都監, 提調七、使五、 副使ㆍ判官各六。 提調七內, 兵曹判書、義禁府都提調、三軍爲頭都鎭撫軍器監爲頭提調判漢城府事爲實案, 其二, 隨時差命。使五內, 義禁府爲頭鎭撫、軍器判事、繕工判事、司宰判事。 副使六內, 三軍、護軍、司僕爲頭、少尹、月差所爲頭、護軍。 判官六內, 兵曹、武備司、正郞、工曹爲頭、正郞、漢城府判官, 以爲恒式。 其餘口傳, 常置不罷, 考察禁火。” 從之。
이조에서 계하기를,
“도 성 안에 금화(禁火)의 법을 전장(專掌)한 기관이 없어 거리에 사는 지각 없는 무리들이 주의하여 잘 지키지 못하고 화재를 발생시켜, 가옥이 연소되어 재산을 탕진하게 되오니, 백성의 생명이 애석합니다. 따로 금화 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여 제조(提調)가 7, 사(使)가 5, 부사(副使)와 판관(判官)은 6명씩으로 하여, 제조 7명 중에 병조 판서와 의금부 도제조가 삼군(三軍)의 우두머리가 되고, 도진무(都鎭撫)와 군기감(軍器監)이 우두머리 제조(提調)가 되게 하여,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실제 사무를 맡고, 그밖의 2명은 때에 따라 임명할 것이며, 사(使) 5명 중에 의금부가 우두머리가 되게 하고, 진무·군기 판사(軍器判事)·선공판사(繕工判事)·사재 판사(司宰判事)를 이에 임명하며, 부사(副使) 6명 중에 삼군의 호군과 사복이 우두머리가 되게 하고, 소윤과 월차소(月差所)가 우두머리 호군이 되게 하며, 판관 6명 중에 병조와 무비사(武備司)의 정랑으로 하는데, 공조가 우두머리 정랑이 되게 하되, 한성부의 판관을 임명하는 것으로 일정한 규례를 삼고, 그 나머지는 구전(口傳)하여 상설 기관으로 하고 폐지하지 말아 화재 방지하는 것을 사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38권,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11월 17일(신축) 4번째기사
성안의 도로를 침범한 가옥의 철거에 대한 가부를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다
上曰: “城中道路廣狹, 祖宗建都時已定, 姦民侵占造家, 年前火災後, 雖令復正, 間或侵占如舊。 撤去侵路人家, 則幾家見破?” 代言等對曰: “幾至萬餘家。” 上曰: “然則破毁便否, 更商搉啓達施行。”
임금이 말하기를,
“성 안 도로의 넓고 좁음은, 조종께서 도읍을 세울 때에 이미 정한 것인데, 간특한 백성들이 길을 침범하여 집을 지으므로 연전에 화재가 있은 뒤에 다시 바루기는 하였으나 또 전처럼 침범한 집들이 간혹 있다 하니, 이제 길을 침범한 인가를 철거하자면 몇 집이나 헐어야 되겠는가.”
하니, 대언 등이 대답하기를,
“거의 만여 호에 이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헐게 하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한지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고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 80권,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3월 15일(기해) 4번째기사
의정부에서 소방 대책을 올리다
議政府據工曹呈啓: “修城禁火都監每日巡行五部坊里, 禁火之令, 家喩戶曉, 然火出不意, 疾如奔電, 及時救火甚難。 近觀救火之勢, 只齎火牌及不濕滅火子, 持水救火者少, 自今爲始, 每一統十家, 五家汲水, 五家持滅火子救火。 每一統汲水栍五、滅火栍五, 本監着署給之, 後日救火之時, 憑考勸戒, 其餘救火器械, 依前例施行。”
의정부에서 공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수성 금화 도감(修城禁火都監)이 날마다 오부의 방(坊)·리(里)를 순행하면서 화재를 단속하는 영을 집마다 타이르고 호마다 깨우쳐 주나, 뜻밖으로 불을 내게 되면 번개같이 빨라서, 때맞추어 구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근래에 화재를 구하는 형편을 보니, 화패(火牌)와 물에 젖지도 않은 불채[滅火子]를 가지고 다닐 뿐이고 물을 가지고 불을 끄는 자는 적으니, 지금부터는 한 통(統)을 열 집으로 하여 다섯 집은 물을 긷고 다섯 집은 불채를 가지고 화재를 구하도록 하되, 한 통마다 물 긷는 통[汲水栍] 다섯 개와 불채 다섯 개씩을 본감에서 이름을 적어 놓고 주게 하되, 후일 화재를 구할 때에 참고하고 조심하도록 권하며, 그 외에 불을 끄는 기구는 전례를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720년 桟瓦가 개발되어 가까스로 기와를 보급할 수 있었던 슬픈 역사를 자랑했던 불쌍한 일본인을 떠올려 봅니다.
고려시대를 제외하드라도 300년 뒤진 기와의 보급 이것이 한일 양국의 문화의 차이가 아닐까요?
1720年 桟瓦が開発されるやっと瓦を普及することはできた悲しい歴史を誇った可哀相な日本人を思い浮かぶ見ます.
高麗時代を除いても 300年立ち後れた瓦の普及これが韓日両国の文化の差ではないでしょうか?


조선시대의 화재 대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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