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大仏殿の拝観料は500円。

ここを外せば、東大寺に来た意味がない。

 

 

南西の入り口から見る大仏殿

周りに何も建ってないので、大仏殿だけが異様に目立つ。

 

中門から眺める大仏殿

 

「大仏殿」(金堂)

1709年の再建。3代目の大仏殿である。

幅57m・奥行き50m・高さ49mを誇る。

近付くと、かなりの大きさを感じる。

もう何度も訪問してるので驚くことはない。

個人的には、蔵王堂の方が迫力あるように思う。でも大きさは大仏殿の圧勝。

 

だが、奈良時代や鎌倉時代の建立の大仏殿は、さらに大きかった。

 

 

 

8世紀建立の大仏殿(758年~1181年)の想像図。

 

幅は86m、桁行き11間・梁行き7間の大きさを誇った。

大仏殿内部の模型は屋根が寄棟だが、上のように入母屋だったという説もある。

 

 

建築様式は今と大きく異なる。

写真は唐招提寺金堂だが、組物はこれと同じような三手先だったと考えられる。

白鳳時代より構造は進化し、二手目の肘木の中途にも巻斗が置かれ、内側では

繋虹梁と繋がれる。

また、上層は下層の上に築かれており、後代の通し柱方式ではない。

 

建設には、朝鮮半島からの渡来系の2世・3世が多く参加したが、この様式は中国・唐王朝の

もので、8世紀初めに中国から導入されたものだと考えられる。

(特に、平城京大安寺の建設に重大な影響を及ぼした僧:道慈の影響が大きいらしい)

 

 

現在の大仏殿の組物は、南大門と同じく「大仏様6手先」。

柱の上に積まれるのではなく、柱に刺さる。

 

 

創建大仏殿は、とにかく組み立てが大変だったらしい。

一番小さなパーツである巻斗ひとつとってみても、約60cm四方の大きさで、一人で運ぶ事が出来ない状態だった。パーツは全部で700以上あったわけで、作業は困難を極めたであろう。

 

  

     巻斗

 

さらに、建ってからまもなく軒が大きく波打ち、崩壊寸前の状態だったらしく、13年後には

四周に軒を支える支柱が40本も立てられた。

当時の建築技術を超える規模だったわけである。

 

それでも1181年の焼失まで建ってたわけだが、しょっちゅう修理を行っていたらしく、

維持するだけでも大変だったのが想像できる。

 

 

 

鎌倉時代の再建大仏殿(1190年~1567年)の模型

幅88m・奥行き51.5m・高さ45mの大きさを誇った。

 

 

初代の大仏殿があまりに構造的に不安定だったこともあり、再建の際には新たな技術が求められた。

それが「大仏様」といわれる建築様式だった。

導入を先導したのは、南大門でも出てきた僧・重源だが、中国南宋時代の福建省近辺の民家を参考

にしたと言われている。

(或いは、福建省近辺の寺院で突き刺し・突き通し系主体の建築があったのかもしれないが、東大寺

のような規模のものは有り得ないだろう)

 

image

  1234年に作られた「重源上人坐像」

  こちらは国宝ではなく、重要文化財

 

 

2代目の大仏殿は、巻斗の大きさが40cm四方と、組物の大きさが大幅に小さくなった。

貫を縦横無尽に通す構造が、建物を強固にし、組物を小さく出来たのだろう。

また、柱は通し柱となり、初代より大きな材が使われた。直径は1.5mに達し、柱数も初代より8本増えて

92本になった。

 

 

          初代と2代目大仏殿の平面図

 

初代は84本の柱。2代目は大仏の左右に4本づつ追加され、92本になった。

(前出の村田氏は、入母屋屋根から寄棟屋根に変更するに当たり、隅木を受けるために柱を追加した

のではないかと推測している)

 

2代目大仏殿は、初代や現在の大仏殿と違い、上層の屋根と下層の屋根が同じ面積である。

南大門と同じく、下層の屋根は柱の中途でぶら下がっているだけである(初代と現在の大仏殿は、

上層屋根は下層屋根より一歩後退している、裳階が回る構造だ)。

 

覆い被さるような大きな上層屋根の迫力は、歴代大仏殿の中でも最も迫力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

想像している。

また、建物内部の迫力も凄かったかも知れない。前の浄土堂を見てそう思った。

上を見上げると、豪壮な建築を屋根裏まで見上げることが出来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ただし、暗過ぎて見えなかったかも知れないが・・・)

 

この大仏殿も、戦災で焼失した。

 

 

そして、3代目の大仏殿

 

大仏殿の再建が検討された17世紀後半の日本は、木材が不足していた。

そこで、幅を3分の2削って再建が試みられ、幅は57mとなった。

 

 

国宝「金銅八角燈籠」

8世紀の創建時代から存在し、幾度もの戦火をくぐり抜けてきたもので、奈良時代の代表的な

工芸品である。

 

そして、中に入る。


도다이사, 그 2

대불전의 배관료는 500엔.

여기를 제외하면, 도다이사에 온 의미가 없다.

 

 

남서의 입구로부터 보는 대불전

주위에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불전만이 이상하게 눈에 띈다.

 

중문으로부터 바라보는 대불전

 

「대불전」(금당)

1709년의 재건.3대째의 대불전이다.

폭 57 m·깊이 50 m·높이 49 m를 자랑한다.

가까워지면, 상당한 크기를 느낀다.

더이상 몇번이나 방문하고 있기 때문에 놀랄 것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자오당이 박력 있다고 생각한다.그렇지만 크기는 대불전의 압승.

 

하지만, 나라시대나 가마쿠라 시대의 건립의 대불전은, 한층 더 컸다.

 

 

 

8 세기 건립의 대불전(758년~1181년)의 상상도.

 

폭은 86 m, 도리 간수나무 11간·대들보행 7간의 크기를 자랑했다.

대불전 내부의 모형은 지붕이 기동이지만, 위와 같게 입안방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건축 양식은 지금크게 다르다.

사진은 토우쇼우다이사 금당이지만, 공포는 이것과 같은 미테 앞섰다고 생각된다.

백봉시대부터 구조는 진화해, 두 패눈의 주목의 중도에도 권두가 놓여져 안쪽에서는

계홍량과 연결될 수 있다.

또, 상층은 하층 위에 쌓아 올려지고 있어 후대의 안내기둥 방식은 아니다.

 

건설에는, 한반도로부터의 도래계의 2세·3세가 많이 참가했지만, 이 양식은 중국·토우노우아침의

물건으로, 8 세기 처음에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헤이조쿄 다이안지의 건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승려:도지의 영향이 큰 것 같다)

 

 

현재의 대불전의 공포는, 남대문과 같이 「대불양식 6 손끝」.

기둥 위에 쌓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둥에 박힌다.

 

 

창건 대불전은, 어쨌든 조립이 큰 일이었던 것 같다.

제일 작은 파트인 권두하나와는 봐도, 약 60 cm사방의 크기로, 혼자서 옮길 수가 없는 상태였다.파트는 전부 700이상 있던 것으로, 작업은 곤란을 다했을 것이다.

 

  

     권두

 

게다가 세워지고 나서 곧 채가 크게 물결쳐, 붕괴 직전 상태라면 까는, 13년 후에는

4주에 채를 지탱하는 지주가 40개나 세울 수 있었다.

당시의 건축 기술을 넘는 규모였던 (뜻)이유이다.

 

그런데도 1181년의 소실까지 건은 익살떨어이지만, 언제나 수리를 실시하고 있던 것 같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재건 대불전(1190년~1567년)의 모형

폭 88 m·깊이 51.5 m·높이 45 m의 크기를 자랑했다.

 

 

초대의 대불전이 너무나 구조적으로 불안정했던 일도 있어, 재건 시에는 새로운 기술이 요구되었다.

그것이 「대불양식」이라고 말해지는 건축 양식이었다.

도입을 선도한 것은, 남대문이라도 나온 승려·쵸우겐이지만, 중국 남송 시대의 푸젠성 부근의 민가를 참고

(으)로 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혹은, 푸젠성 부근의 사원에서 찔러·꿰뚫어 계 주체의 건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도다이사

(와)과 같은 규모의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image

  1234년에 만들어진 「쵸우겐 고승좌상」

  이쪽은 국보가 아니고, 중요문화재

 

 

2대째의 대불전은, 권두의 크기가 40 cm사방과 공포의 크기가 큰폭으로 작아졌다.

관을 종횡 무진에 통하는 구조가, 건물을 강고하게 해, 공포를 작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기둥은 통해 기둥이 되어, 초대보다 큰 재가 사용되었다.직경은 1.5 m에 이르러, 주수도 초대보다 8개 증가해

92개가 되었다.

 

 

          초대와 2대째 대불전의 평면도

 

초대는 84개의 기둥.2대째는 대불의 좌우에 4개씩 추가되어 92개가 되었다.

(전출의 무라타씨는, 입안방 지붕에서 기동지붕으로 변경하는에 해당되어, 우목을 받기 위해서 기둥을 추가했다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2대째 대불전은, 초대나 현재의 대불전과 달라, 상층의 지붕과 하층의 지붕이 같은 면적이다.

남대문과 같이, 하층의 지붕은 기둥의 중도에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 있다(초대와 현재의 대불전은,

상층 지붕은 하층 지붕에서(보다) 한 걸음 후퇴하고 있는, 덧댄 차양 모양의 지붕이 도는 구조다).

 

지워지는 큰 상층 지붕의 박력은, 역대 대불전 중(안)에서도 가장 박력이 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하고 있다.

또, 건물내부의 박력도 굉장했을지도 모르다.전의 정토당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위를 올려보면, 크고 호화로운 건축을 지붕 밑까지 올려볼 수 있던 것은 아닐까.

(다만, 너무 어두워서 안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대불전도, 전재로 소실했다.

 

 

그리고, 3대째의 대불전

 

대불전의 재건이 검토된 17 세기 후반의 일본은, 목재가 부족했다.

거기서, 폭을 3분의 2깎고 재건이 시도되어 폭은 57 m가 되었다.

 

 

국보 「금동 야스미등롱」

8 세기의 창건 시대부터 존재해, 몇번이고의 전화를 빠져 나가 온 것으로, 나라시대의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그리고, 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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