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前回時代/考えの間違いを修正しないまま堂々とスレ立てをしてしまい、結構凹みつつ、何はともあれ話をまとめる方向に持っていかないといけないと、おどおど。写経が足りない。お金をもっともっと掛けろと悪魔がささやく。あと『築地と土塀』が主として中世絵画史料に出てくる塀を検討したものであることを書いてなかった。
調べていって自分の考えがおかしくなったら有無をいわさず土下座モードで修正していきます。
調べ直しいぱーい。書きためた物全部やり直しかもしんない。一回目からグダグダで面目ない。

 

では孤盲猫を撫でる 第1 塀の話2 古代の築地など

 

塀(へい)とは、家や敷地などにおいて、他との境界に設置する囲いのこと。

 

前回定義として
塀とは「敷地を画する境界装置」

分類として
「築地塀」 版築工法による塀。
「土塀A」 日干し煉瓦状の土塊を積み上げる塀。強度を得るために石を含む場合がある。
「土塀B」 貫を用い木舞下地・竹子舞下地を持ち主に土を塗ることによって作られる塀。
「練塀」  瓦・磚・石と土(粘土や漆喰を含む)を交互に積むことによって構成される塀。

というお話しをさせてもらった。一旦ここで土塀からちょっと離れる。

というのは、こういった土塀という物がそもそも日本でいつ頃からあるのだろうか?という話をするためである。一般的に土を使った壁構造物は、仏教伝来時に建築方法が日本にやってきたと考えられており、大筋ではおそらく間違っていないと思う。たとえば木舞下地については日本最古の物が法隆寺五重塔に残っている。中国には残念ながらその時代の物は遺されていないが、五台山南禅寺の大雄宝殿(建中3:782再建)の前面上部には漆喰が使用されており、伝播ルートはともかくこうした技術が日本にやってきて、土壁文化は始まったと考えて良いだろう。

 

法隆寺五重塔下地 木舞下地

 

では、それ以前日本には住居土台以外に土を利用したケースがないのか?というと、実はある。
宮本長二郎氏の「竪穴住居の復元」の模式図(『考古学による日本歴史l5家族と住まい』)を見ても分かるとおり、屋根に土をかぶせる方法は古くから存在している。なかでも面白いのは二重伏屋式竪穴住居である。

 


宮本長二郎 「竪穴住居の復元」の模式図

 

本題から離れることになるのであまり調べなかったのだが、おそらく日本で最も古いこの方式の住居跡は群馬県渋川市の中筋遺跡の「冬の住居」である。この遺跡は6世紀初頭の榛名山二ツ岳の火砕流によってポンペイ状態になったため、当時の生活面がパック状態で出土し、屋根構造等もかなり判明している。

 

中筋遺跡住居復元 屋根部分

 

中筋遺跡住居復元 断面模式図


写真でおわかりの通り、桁の上に茅・土を重ね断熱材とし、また茅を重ねている。間の土も塗り込め用のものと思われる(成分までは追えなかった)。6世紀ということもあり、こういった工法が大陸由来の物なのかどうかまでは不明だが、仏教伝来以前から日本では土壁状の物を建築に利用していたことが分かる。土を使って建築構造物を構成することを知っていたわけだから、日本に土壁の工法が招来されたときには、ある程度スムーズに理解され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版築については鬼塚克忠氏が『日本の古代土木技術(盛土構築技術)のルーツとその変遷―中国・江南における土とん墓から吉野ヶ里墳丘墓まで』(論文概要しか確認できなかった)で、江南土とん(土偏に敦)墓がその源流であり、版築工法が直接大陸から日本にもたらされたと断定している。搗き固める、という行為そのものは獣道を踏み固めることによるものが最も古いそれであろうが、人為的に行われた物としては吉野ヶ里墳丘墓は日本最古ということだ。この工法は古墳にも使われ、その後の建築を含め日本全国に見られるようになる。

 

さて、戻ろう。
では、土で構成された塀はいつ頃から存在するのだろうか?と問われると実のところ非常に難しい。出土例では高麗寺跡からのものが最も古く7世紀後半。ここでは版築を伴う築地、屋根瓦を伴わない上土(あげつち)塀の両方がでており、ともに日本最古の遺例である。前述したとおり、現存する最古の土壁は法隆寺五重塔。7世紀後半から8世紀。さしあたって写真を見てもらいたいが、この時代の牆壁が非常に分厚いものであったことをまず心に留めてもらいたい。
 その筋の権威の方からは怒られそうだが、平城宮の復元と豊前国府の再現は、どちらも発掘された物を元に立ち上げているので、基礎部分の巾はく正しい。中央と地方の建築物の差、と言う点でも興味深い。

 

高麗寺南辺築地出土状況

 

平城宮築地塀復元(版築の様子がよく分かるが、本当にこのような物だったかは不明)

 

 

平城宮築地回廊(築地を中心に左右に回廊を造っていたという)

 

豊後国府築地塀復元(こちらも実際こういう物だったかは不明)

 

 『築地と土塀』は日本紀略(国史大系11巻)から以下の引用をして、官位による制限を指摘している。

 

廿三日乙巳。仗儀。諸国吏居処不可過四分一宅。近来多造営一町家。不済公事。又六位以下築垣。并檜皮葺宅可停止者。(日本紀略1030:長元3)

 

 これによれば平安時代には六位以下の者が築地を築くことは許可されておらず、おそらく寺社についても寺格などである程度適用されていたと考えられる。その他にも脇壁・定規筋(最高は原則5。塀の壁面に平行に走らせた白い線のこと)等で、塀の持ち主の身分が分かるようになっていた。ただしこれも当該論文によれば応仁の乱以降一旦崩壊する。
 平安時代の年中行事絵巻には土塀の例があるが、土塀が絵画史料に増加してくるのは応仁の乱以降である。また当該論文の引用(黒田日出男氏:網代壁・板壁・土壁 町屋のイメージの変貌 絵巻物の建築を読む:1996)によれば町屋(庶民層)の家壁は網代(平安末)→板壁(鎌倉室町)→土壁(戦国)という変化が明らかであり、土壁の一般化と土塀の増加が同じ時期に起こっているとしている。
 
 また、洛中洛外図(歴博甲本1526-1536?頃の京都)において土塀が立っている場所が築地のあった場所であることも指摘し、京都が条里復旧を目指していたことから土塀が築地を建築するまでの仮設的存在であったが常設化していったと指摘している。ただし、当該論文は土塀Bの形式について議論していないこと(絵画史料では確認できないため議論されていない)、年中行事絵巻や官位の問題をスキップしていることなど多少問題を感じる。確かに土塀という構築方法の一般化は応仁の乱以降だと思われるし、牆壁が築地中心から築地風の土塀・練塀などに変わっていくのもその時代と考えて良いかもしれない。※1

 

 たとえば前掲(塀の話1)興福寺中藏院周辺の末寺は歴博甲本成立以前に確実に存在している。

 

 慈恩院之片岡絵事、以松林院借用之処、悉以修南院ニ在之云々、可借給云々、

 (尋尊大僧正記文明3年:1471)
 
 広橋守光の叔父に広橋静兼(興福寺慈恩院:尊卑分脈):守光は大永6:1527没

 

この慈恩院は興福寺東南の末寺(現在の江戸三あたり?)であり、忠蔵院にほど近いところにある院である。この地域の末寺は洛中洛外図以前に塀を持った建造物として存在していたと考えられる。塀残欠自体がいつの物か不明ながら、被災歴などを検討すればかなりのことが分か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
 ただし、興福寺は1451に大乗院焼失、1717に金堂をはじめとしたほぼ全て焼失、明治の廃仏毀釈、興福寺の場合1870の大教宣布と寺地の没収で、仏像などはともかく建造物についてははなはだ心許ない。また興福寺南大門遺跡発掘調査現地報告(20090927:奈文研)では絵図面にあった南大門東西の築地痕跡は未発見と報告されている。奈文研ですら現状興福寺中心部の発掘をしているようなので、末寺に関する調査など一体いつのことになるか皆目見当も付かない。

 

※1 土塀Aの形式が古いと思われると前回書いたが、これは左官従事者も発言している。正確なところははっきりしない。中国での外壁構造物を考えると、版築+表面磚・日干し煉瓦積・磚積・日干し煉瓦+表面磚積等は日本より早くから存在しており、この工法(芯になる物のない工法)も早い段階で日本に入ってきたと考えたい。今後こうした部分についての研究が進むことが期待される。
 なお庶民層や武家層の家屋は土塀以前には板塀や垣根を使っていたことは、諸般の史料・遺跡からも明白である。


年中行事絵巻(京都大学所蔵本:以下全て同)から網代塀

同 板塀

同 生け垣

同 神社裏手の木の柵

同 土塀と思われる塀


 調べていくと調べていくほどグダグダ感が免れない。「これで大丈夫」と思うとぽちっと染みが出来、瞬く間に広がっていく。特に問題なのは、「日本には半島・中国建築技術の受容期に磚を使用した工法は入って来ているのだが、中世にはほとんど見られなくなる」ことである。煉瓦といっても良いような磚、半島由来と考えられている瓦積。どちらも古代以降見つけられなくなる。これは私の勉強不足と感じている。それ以外にも、結構「なんだこれは?」という物があって電凸モードも必要かもしれない。
綱伸也氏は日本考古学20号で、百済で一般的だった瓦積基壇を日本が積極的に採用しなかった姿勢について指摘しており、こちらは技術の伝播が中国から直接来た物を尊ぶ傾向としてみるべきだろうか。だとしても煉瓦状の磚文化が消えていくことの説明にはならない。
 今回の最後はこうした磚を使用した基壇を上げておこう。

 

河内田辺廃寺東塔跡磚積基壇(白鳳期)

 

摂津伊丹廃寺塔磚積基壇(復元:白鳳期)


고맹묘를 어루만지는 제1 담의 이야기 2 고대의 츠키지 등

 전회 시대/생각의 실수를 수정하지 않는 채 당당히 스레 세워를 해 버려, 상당히 패이면서, 무엇은 여하튼 이야기를 정리할 방향으로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면 벌벌.사경이 부족하다.돈을 좀더 좀더 걸라고 악마가 속삭인다.그리고 「츠키지와 흙벽」이 주로 중세 회화 사료에 나오는 담을 검토한 것인 것을 쓰여 있지 않았다.
조사해 가 자신의 생각이 이상해지면 유무를 있어 원좌도 땅에 엎드려 조아림 모드로 수정해 갈 것입니다.
조사 수선-있어.써 모아 둔 것전부 재시도일지도 하지 않지 있어.1회째부터 그다그다로 면목없다.

 

그럼 고맹묘를 어루만지는 제1 담의 이야기 2 고대의 츠키지 등

 

담(에 있어)이란, 집이나 부지 등에 있고, 외와의 경계에 설치하는 울타리.

 

전회 정의로서
담과는 「부지를 선을 긋는 경계 장치」

분류로서
「츠키지담」판 축공법에 따르는 담.
「흙벽 A」일조 벽돌장의 흙덩이를 쌓아 올리는 담.강도를 얻기 위해서 돌을 포함한 경우가 있다.
「흙벽 B」관을 이용해 목무시모지·타카제무용 기초를 소유자에게 흙을 바르는 것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담.
「련담」와·전·석과 흙(점토나 회반죽을 포함한다)을 교대로 쌓는 것에 의해서 구성되는 담.

그렇다고 하는 이야기를 시켜 주었다.일단 여기서 흙벽으로부터 조금 떨어진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흙벽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일본에서 언제쯤부터 있는 것일까?그렇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해)이다.일반적으로 흙을 사용한 벽구조물은, 불교 전래시에 건축 방법이 일본에 왔다고 생각되고 있어 대략에서는 아마 잘못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예를 들어 목무기초에 대해서는 일본 최고의 물건이 호류사 오층탑에 남아 있다.중국에는 유감스럽지만 그 시대의 물건은 남겨지지 않지만, 고다이산 난젠사의 타이유우 호텐(건중 3:782 재건)의 전면 상부에는 회반죽이 사용되고 있어 전파 루트는 차치하고 이러한 기술이 일본에 오고, 토담 문화는 시작되었다고 생각해 좋을 것이다.

 

호류사 오층 토우노시타지목 무용 기초

 

그럼, 그 이전 일본에는 주거 토대 이외에 흙을 이용한 케이스가 없는가?그렇다고 하면, 실은 있다.
미야모토 나가지로우씨의 「수혈 주거의 복원」의 모식도( 「고고학에 의한 일본 역사 l5가족과 거주지」)를 봐도 아는 대로, 지붕에 흙을 씌우는 방법은 옛부터 존재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이중 후시야식 수혈 주거이다.

 


미야모토 나가지로우 「수혈 주거의 복원」의 모식도

 

주제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으로 너무 조사했던 것이다가, 아마 일본에서 가장 낡은 이 방식의 주거자취는 군마현 시부카와시의 나카스지 유적의 「 겨울의 주거」이다.이 유적은 6 세기 초두의 하루나 산2트악의 화쇄류에 의해서 폼페이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면이 팩 상태로 출토해, 지붕 구조등도 꽤 판명되어 있다.

 

나카스지 유적 주거 복원 지붕 부분

 

나카스지 유적 주거 복원 단면 모식도


사진으로 이해대로, 자리수 위에 모·토를 겹침 단열재로 해, 또 모를 거듭하고 있다.사이의 흙도 발라 담아 용무의 것이라고 생각된다(성분까지는 쫓을 수 없었다).6 세기라고 하기도 해, 이러한 공법이 대륙 유래의 물건인가 어떤가까지는 불명하지만, 불교 전래 이전부터 일본에서는 토담장의 물건을 건축에 이용하고 있던 것을 안다.흙을 사용해 건축 구조물을 구성하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니까, 일본에 토담의 공법이 초래 되었을 때에는, 어느 정도 부드럽게 이해된 것은 아닐까.

 

판축에 대해서는 오니즈카극 타다시씨가 「일본의 고대 토목 기술(성토구축 기술)의 루트와 그 변천-중국·강남에 있어서의 흙과 무덤으로부터 요시노리분구묘까지」(논문 개요 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로, 강남흙과 (흙토변에 돈) 무덤이 그 원류이며, 판축공법이 직접 대륙에서 일본에 가져와졌다고 단정하고 있다.찧어 굳힌다, 라고 하는 행위 그 자체는 짐승 순서를 밟아 굳히는 것에 의하는 것이 가장 낡은 그것으로 있든지, 인위적으로 행해진 것으로서는 요시노리분구묘는 일본 최고라고 하는 것이다.이 공법은 고분에도 사용되어 그 후의 건축을 포함 일본 전국으로 보여지게 된다.

 

자,그럼, 돌아오자.
그럼, 흙으로 구성된 담은 언제쯤부터 존재하는 것일까?(이)라고 추궁 당하면 사실 매우 어렵다.출토예에서는 고려 테라토로부터의 것이 가장 낡고 7 세기 후반.여기에서는 판축을 수반하는 츠키지, 지붕 기와를 수반하지 않는 상흙() 담의 양쪽 모두가 나오고 있어 함께 일본 최고의 유례이다.전술했던 대로, 현존 하는 최고의 토담은 호류사 오층탑.7 세기 후반부터 8 세기.직면하고 사진을 보이고 싶지만, 이 시대의 장벽이 매우 두꺼운 것인 것을 우선 명심해 주었으면 한다.
 그 방면의 권위로부터는 화가 날 것 같지만, 히라죠오궁의 복원과 토요마에 코우다의 재현은, 어느쪽이나 발굴된 것을 바탕으로 시작하고 있으므로, 기초 부분의 건은 구 올바르다.중앙과 지방의 건축물의 차이, 라고 하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고려 테라미나미옆츠키지 출토 상황

 

히라죠오궁츠키지담복원(판축의 모습을 잘 알지만, 정말로 이러한 물건이었는지는 불명)

 

 

히라죠오궁츠키지 회랑(츠키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회랑을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분고 코우다 츠키지담복원(이쪽도 실제 이런 물건이었는지는 불명)

 

 「츠키지와 흙벽」은 일본기략(국사 대계 11권)으로부터 이하의 인용을 하고, 관직의 등급에 의한 제한을 지적하고 있다.

 

입3일 을미.장의.제국리거처 불가과시부이치택.근래다축조 일정가.불제공사.또 6위 이하축원.병 히노키피즙택가정지자.(일본기략1030:장 원 3)

 

 이것에 의하면 헤이안 시대에는 6위 이하의 사람이 츠키지를 쌓아 올리는 것은 허가되지 않고, 아마 지샤에 대해서도 사격등인 정도 적용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그 외에도 협벽·자 관계(최고는 원칙 5.담의 벽면에 평행에 달리게 한 흰 선) 등으로, 담의 소유자의 신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다만 이것도 해당 논문에 의하면 오닌의 란 이후 일단 붕괴한다.
 헤이안 시대의 연중 행사 그림 두루마기에는 흙벽의 예가 있지만, 흙벽이 회화 사료에 증가해 오는 것은 오닌의 란 이후이다.또 해당 논문의 인용(쿠로다 히데오씨:아지로벽·판자 벽·토담 마치야의 이미지의 변모 그림 두루마리의 건축을 읽는:1996)에 의하면 마치야(서민층)의 가 벽은 아지로(헤이안말)→판자 벽(카마쿠라 무로마치)→토담(전국)이라고 하는 변화가 분명하고, 토담의 일반화와 흙벽의 증가가 같은 시기에 일어나고 있다고 하고 있다.
 
 또, 낙중낙외도(력박코모토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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