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標準尺

측정은 모든 과학 기술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표준 시간의 측정에 이어서 표준 길이는 어떻게 관리했는지 알아 보고 표준척을 어떻에 사용했는지 알아 봅시다.
測定はすべての科学技術の根本となる重要なものです。
標準的な時間の測定にあって、標準の長さはどのように管理されているか調べ報告する標準的なふりをいかに使用したかどうか調べてみましょう。

최천약 유척(鍮尺)
유척은 조선시대 도량형 제도상 척도의 표준으로, 지방 수령이 전정, 군정, 환곡 등을 규정대로 관리하는지 살필 때 사용하였으며, 우리에게 단순히 역마를 사용하는 마패보다 훨씬 중요한 암행어사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측정표준의 근간이 되는 “유척” 과연 누가 제작한 것일까요?

유척을 제작한 인물은 18세기 초중반 영조 시대를 풍미했던 경남 동래 출신의 무인 ‘최천약’입니다. 그가 유척을 만들게 된 배경은 조선왕조실록 영조 16년 경신 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영조 16년인 1740년, 조선 후기의 문인 ‘유척기’가 “세종(世宗) 때에 포백척(布帛尺)이 삼척부(三陟府)에 있으니, 최천약(崔天若) 같은 솜씨 좋은 자를 시켜 《대전(大典)》치수에 따라 교정(較正)하게 하면, 황종척(黃鐘尺)·주척(周尺)·예기척(禮器尺)·영조척(營造尺)도 다 그 제도에 맞아 차이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완성되고 나면 중외에 반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제언하였고, 영조의 지시로 최천약이 유척을 제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탄생된 현존하는 놋쇠자 ‘유척’은, 당시 조선시대 척도로서는 가장 정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최근 현대 공업 기술을 이용한 정밀 측정치와도 거의 차이가 없을 정교하고 황동재질도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면서 과학계 일부에서는 국보 지정감이라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崔天若の鍮尺
鍮尺は朝鮮時代の度量衡制度上の尺度の標準として、地方の守令が田政、軍政、還穀等を規定するように管理するかどうか調査するときに使用し、私たちに、単に驛馬を使用している馬牌]よりもはるかに重要な暗行御史の象徴として知られています。このように測定標準の根幹となる”鍮尺 “果たして誰が作られたのでしょうか?

鍮尺を 作られた人物は、18世紀初中期 英祖の時代を風靡した慶尚南道 東莱出身の武人崔天若です。彼が鍮尺を 作ることになった背景には、朝鮮王朝実録英祖16年の庚申 篇には、次のように記されています。朝鮮英祖16年だった1740年、朝鮮後期の文人”兪拓基”は、”世宗時の布帛尺が三陟府にありますので、崔天若のような能手な者をさせて”大典”寸法に応じて、校正にすると、黃鐘尺·周尺·禮器尺·營造尺も、全部、その制度に迎えての違い吸わないもあるでしょうし、完成された後、中外で頒布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と提言し、英祖の指示で崔天若が鍮尺を  製作することになります。

こうして誕生した、現存するノトスェジャ”鍮尺 は、当時の朝鮮時代の尺度としては、最も優秀なものといわれています。最近の現代的な工業技術を用いた高精度の測定値ともほとんど差がない高精度で、真鍮の材質も優れていると判明され、科学界の一部では、国宝指定の見方が出て来ることもありました。

 

조선시대에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 尺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어떤 尺을 사용하고 있었는지 알아 봅시다.
朝鮮時代には、用途に応じて様々な尺を使用したとします。
どのような尺を使用していたかどうか調べてみましょう。

禮器尺
조선시대 태종 때 허조가 오례, 길례, 서례를 편찬할 때 조례기척을 제정하였다. 세종 4년(1422) 주척을 기존으로 개정하였다. 종묘 및 문묘 등 각 종 예기 제작에 사용한다고 해서 예기척이라 한다. 命婦의 印信을 제작하는데 쓰여 印用尺이라고도 하였다. 오늘날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28.63(±)cm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례기척 1척은 황종척 8촌 2분 3리라고 규정하였는데, 1750년 조례기척 1자는 주척 1.38자, 영조척 0.92자, 종서척 1.7자라고 하고 있다.

조선시대 태종 때 허조가 오례, 길례, 서례를 편찬할 때 조례기척을 제정하였다. 세종 4년(1422) 주척을 기존으로 개정하였다. 종묘 및 문묘 등 각 종 예기 제작에 사용한다고 해서 예기척이라 한다. 命婦의 印信을 제작하는데 쓰여 印用尺이라고도 하였다. 오늘날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28.63(±)cm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례기척 1척은 황종척 8촌 2분 3리라고 규정하였는데, 1750년 조례기척 1자는 주척 1.38자, 영조척 0.92자, 종서척 1.7자라고 하고 있다.
朝鮮時代の太宗のときに 許稠が 、五禮 、吉禮,序例を編纂するときに造禮器尺を制定した。世宗4年(1422)周尺を基準に修正した。宗廟と文廟などの各種 禮器の製作に使用して、禮器尺とする。命婦の印信を製作するのに使用され印用尺とも呼ばれている。今日ではメートル法に換算すると約28.63cmである。 [経国大典]によると、造禮器尺 1尺は黃鐘尺8寸2分3厘 で規定したが、1750年の造禮器尺 1尺は周尺1.38尺、營造尺0.92尺、縱黍尺1.7尺としている。

 


주척
주척은 주나라 때 거리 면적 등을 사용하는 기준자인데, 고려말 姜天澍가 원 사신 金剛으로부터 구했다고 하는 등 고려말 주자학과 함께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척이 제도적으로 사용된 것은 태조 2년(1393) 許稠가 소유하고 있던 도본을 정식으로 삼으면서부터로 보인다. 조선초기 중심 적인 척의 역할을 하였다. 주척은 측우기 등 전축기구 측정, 사대부집 사당의 神主 만들 때, 그 외 거리 묘지영역, 훈련관 교정의 거리수, 활터 거리 수를 측정하는데 사용되었다. 오늘날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길이는 약 20.6(±)cm, 황종척으로는 6寸 6里이다.
周尺
周尺は周時代の距離,面積などを使用する基準尺、高麗末姜天澍が元使臣金剛から救ったとされる高麗末朱子学とともに伝来されたものとみられる。しかし、周尺が制度的に使用されるのは、太祖2年(1393)許稠が所有していた圖本を正式に採用してからと見られる。朝鮮初期の中心的な尺の役割を果たした。周尺は雨量計などの測器の測定、士大夫の祠堂の神主を作するときに、その他の通り墓地の範囲、訓鍊觀校正、射亭の距離を測定するために使用された。今日ではメートル法に換算すると、長さは約20.6cm、黃鐘尺で6寸6の厘である。

영조척
영조척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건물을 축조할 때 尺을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營造尺’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다만 고려시대 영조에 사용되었던 척이 조선시대로 계승되었고, 세종 28년(1446) ‘新營造尺’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조선전기 영조척은 불타 없어졌다. 영조척은 목수가 사용하는 자로, 가옥, 성벽, 봉화, 사직단 등을 건축하는데 사용되었다. 되, 말 등의 量器를 만들 때 표준척이 되었다. 曲尺, 大尺, 今尺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조척을 오늘날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고려시대 건축에 사용된 경우는 약 31cm이다. 조선 세종대 교정된 영조척은 약 30.8(±)cm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영조척 1척은 황종척으로 환산하면 8촌 9분 9리였는데, 1750년 정리된 환산법에 따르면 영조척 1척(자)은 황종척 0.899자, 주척 1.499자, 조례기척 1.09자, 종서척 1.15자, 횡서척 1.18자로, 황종척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營造尺
營造尺は統一新羅と高麗時代の建物を築造するときに尺を使用するにはしましたが營造尺という概念を使用しているわけではなかった。ちょうど高麗時代の英祖に使用されていた尺が、朝鮮時代に継承されており、世宗28年(1446)新營造尺という概念が登場している。しかし、文禄の役で朝鮮前期營造尺は燃えてなくなった。營造尺は、大工が使用している尺で、家屋、城壁、烽火、社稷壇などを建築するために使用された。升、斗など量器を作するとき、標準尺になった。曲尺、大尺、今尺などとも呼ばれた。營造尺を、今のメートル法に換算すると、高麗時代の建築に使用される場合は約31cmである。朝鮮の世宗代校正された營造尺は約30.8cmである。 [経国大典]によると、營造尺1尺は黃鐘尺に換算すると、8寸9分9厘だったが、1750年の整理された換算法によると、營造尺 1尺は、黃鐘尺 0.899尺、縱黍尺1.499尺、造禮器尺 1.09尺、縱黍尺1.15尺、橫黍尺1.18尺で、黃鐘尺では 変化がなかった。


    

포백척
포백척은 고려시대에는 그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세종 4년 왕실의 喪?에 포백척을 사용한다고 하고 있다. 세종 13년(1431)에 교정을 하였다. 針尺, 絹尺, 木棉尺, 麻布尺, 苧布尺, 綿紬尺 등으로도 불리었다. 포목의 무역과 의복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포백척은 지방과 사용자에 따라 일정치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정은 포백척을 만들어 전국에 나누어줬는데, 숙종대 주척, 영조척, 포백척을 구리로 만들거나 돌에 새겼다는 기록이 잇다. 오늘날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46.66(±)cm이다. 광무 6년(1902) 일본 곡척으로 통일하였는데, 일본 곡척은 영조척 길이와 비슷하였다. 따라서 포백척은 곡척에 기준하여 1척 6촌(48cm)가 되었고, 광무 9년(1905) 도량형 제정으로 1척 7촌(52cm)이 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포백척 1척은 황종척으로 1척 3촌 4분 8리였다.
布帛尺
 布帛尺は、高麗時代には、その名称が存在していないが、世宗4年の王室の喪に布帛尺を使用するとしている。世宗13年(1431)の矯正をしている。針尺, 絹尺, 木棉尺, 麻布尺, 苧布尺, 綿紬尺 などでも呼ばれていた。布木の貿易や衣服を作するときに使用した。布帛尺は、地域やユーザーに応じて一定しなかった。このため、朝廷は布帛尺を作し、全国に分けてくれたが、肅宗代に、周尺、營造尺,布帛尺を銅にするか石に刻んだという記録がある。今のメートル法に換算すると約46.66cmである。光武6年(1902)日本の曲尺に統一したが、日本の曲尺は營造尺の長さと似ている。そのため、布帛尺は曲尺に基準して、1尺6寸(48cm)がされており、光武10年(1905年)の度量衡の制定に1尺6寸(52cm)となった。 [経国大典]によると、布帛尺1尺は黃鐘尺で1尺3寸4分8厘した。

 


황종척
조선전기 모든 척의 기준이었다. 악기의 제조와 음률을 맞추는데 사용하는 표준자. 세종 7년(1425) 박연이 해주산 검은 기장 100알을 나란히 쌓은 길이를 황종척 1척으로 하였다. 기장 알 1알은 1分, 10分(10알)은 1寸, 10촌(100알)은 황종척 1척이다. 세종 12년(1430년) 황종척을 새로 정하였는데, 기장 알 길이를 1분으로 하는 縱黍尺과 기장알의 넓이를 1분으로 하는 橫黍尺 [累黍尺]을 만들었다. 세종 15년(1433)에 해주산 검은 기장을 이용하여 교정하였다. 조선전기 황종척 길이는 약 34.48(±)cm였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주척 1척은 황종척 6촌 6리, 영조척 1척은 황종척 8촌 9분 9리, 조례기척 1척은 황종척 8촌 2분 3리, 포백척 1척은 황종척 1척 3촌 4분 8리로 환산하고 있다. 1750년이 되면 황종척 1자는 주척으로 1.5자, 영조척으로 1.001자, 조례기척으로 1.1자, 종서척으로 1.15자, 횡서척으로 1.189자라고 한다.
黃鐘尺
朝鮮前期のすべて尺の基準だった。楽器の製造と音律を合わせるために使用される標準尺。世宗7年(1425)海州産黒キビ100個の横積みの長さを黃鐘尺1尺でいる。キビ1個は1分、10分は、1寸、10寸(100錠)は、黃鐘尺1尺である。世宗12年(1430年)黃鐘尺を新に定めましたが、キビの長さを1分にする纵黍尺とキビの幅を1分にする横黍尺[累黍尺]を作った。世宗15年(1433)に海州産黒のキビを使用して校正している。朝鮮前期黃鐘尺の長さは約34.48cmだったが、[経国大典]によると、周尺1尺は黃鐘尺
6寸6厘、營造尺 1尺は黃鐘尺8寸9分9厘、造禮器尺 1尺は黃鐘尺8村2分3厘布帛尺1尺は黃鐘尺1尺3寸4分8里に換算している。 1750年までに黃鐘尺1尺は周尺1.5尺、營造尺 で1.001尺、造禮器尺で 1.1尺、縱黍尺で1.15尺、橫黍尺で 1.189尺ている。

 

 

 

左上、高句麗時代の尺,下段 華角尺


조선시대의 과학기술 - 표준자

표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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