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長文なので 性格破綻者やつらは文を読まないでください.

 

日本軍が民間人を拉致して慰安婦で作ったというものを言えば

軍 末端による犯罪であるだけだ と言って

 

朝鮮人の創氏改名は日帝の強制性を言わざるを得ない.

総督府(日製)と関係ない末端行政官僚の忠誠心の問題とものを言う.

 

が位に責任感ないやつらは普通日本でも歓迎受けることができない嫌韓右翼で

韓国と係わる問題に対して一応発狂からしてみようという式だ.

 

反韓と 嫌韓は明らかな差がある.

 

今日は創氏改名に対して一緒に考える時間を持とうとする.

 

創氏改名は, 1940年 2月11日から実施された.ここで検討することは, 申告期間を半年で思われたさんの設定に対してだ.8月 10日までの期間を便宜的に全般(4月まで)と後半(5月以後)過労分けて検討する.

 

 

前半期を見るようになれば 申告湖(累計)が前号数に占める割合は, 2月末0・4%, 3月末1・5%, 4月末3・9% ポイント 位の劣悪な水準でこんな状況に対して総督府機関紙京城日報は

『さびしい創氏受付』という記事を書いて当時の朝鮮人の創氏改名に対する認識を言っている.

 

こんな雰囲気の反転された時は上で言った後半期に来て始まる.

 

氏 設定のはいてからは 「強制ではない」と言明をしていた朝鮮総督府は

 

月下旬に開かれた道知事会議前後に現われた.同会議で, 難消毒は 「さん制度下半島統治思想マーサだから一生化スルモノ−デアリマシテ, オレッイェッナルノ−サシルニゴミ, 野馬土台サラングノ−国が含めゾングシンボングズル国家ボンヨンノ−所産デアルトモドニネセンイチチェノ−デロジンミトトアル半島ドングポニギャングニムンゲキタルモノ−ニウェナラズ.ヨロブンウィシクボンゼドノ−デゾングシングメ官下ミンズングノ−ガックツングニ徹底セシメラレタシ」と訓示して  「 アンセンイチチェ」 「国が含め精神」を強調している.

 

「さん制度の主旨の主旨チォルゾブンに係って引き受けて犬□ いる具体的方策如何」

道知事会議でさんの申告を促進するための具体的方策が協議されたと思うことができる

 

戸籍事務を監督する権限を持つ地方法院が村役場に対して申告を強くて督励するように指示した文書が残っている.6月日この日付に釜山地方法院長が管内の富潤・邑長細く送った 「さんソルゾングドックリョニグァンスルでも」と題目を付ける文書だ(韓国政府記録保存ここあそこ倉庫).この文書は, さんの新告解について, 「一般ミンズングニ主旨チォルゾブンガングゾシとリタル」が 「チォングホスニビスレバミだ働くゾングドニグァギズシムサギェハ 3 分以下老少集めようぞ」と現象を言った後, 「ユドルギした切迫の時」とあるので, 事務処理後からも 「来てル 7月 20日までお前前号首奴さん申告完了お酒模様トックビョルノ−思いやり上声里他市」として, 申告篤励を急き立てている(付け加えてこの文書は 「アブズシノ−設定係提出セシメミョングノ−ビョンギョングハフイルテムンス模様ツィグブヒサングソングリタシ」とも少なく改名が重視されていなかったことを現わしている).

 

 

 他の地方の法院からも同じ指示が成り立っていたことは, 新聞記事から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が, 6月中旬の時点で 「前号首奴さん申告」が指示受けたことは, 公権力による強制がいっそうもっと強まったことを現わしている.このようにして, 各部落に創氏相談所を設置して, 球場が各号を回って申告を急き立てて, あるいは申告用紙の代書を行うと言う 「篤励」になったのだ.

 

その結果, 申告湖(の割合)は, 5月末12・5%, 6月末27・0%, 7月末53・7%で 「幾何級数的」で増加して, 期間終了の 8月 10日には 80・3% ポイントになった.

 

大まかに意味を把握した人もいるが.. そうではない人のためにもうちょっと付衍して見よう.

 

 

行政機関による創氏改名の篤励と共に深刻に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問題は

創氏改名を批判する人々に処された不当な公権力の行事だ.

こんな社会的な雰囲気がわずか数ヶ月ぶりに 80%の創氏改名者を作り上げる.

 

創氏改名を批判して保安法違反で起訴になって有罪を認められる事件が発生する.

 

有罪判定を一検事が新聞に談話した内容を見よう..

「創氏制度は孤児大成業の完遂上における画期的なことで実にアンセンイチチェファの世紀的営団として今半島のツツポドルに至るまで支管感激の歓声にイルヒョンサングの下に, こんなブルオングックヒ万般国民的言動は断然容赦の余地がない, 神聖な私たち国体に対する不遜行為インのの皆等しなくて虫良い半島同胞の名誉にけがをさせる事もまた深刻なことだ」「不穏言動の流布を防止することと同時に厳しく他界に行ってくれる」「京城日報」1940年 5月9日付け

 

 

検事の談話があった直後.. 創氏改名は 2倍の増加傾向を見せている.

朝鮮民衆は取り締まりと処罰の権力機関から義こんな措置にはっきりと脅威を受けていたという推測ができる.

 

創氏に対して親族との論議自体も承諾しなかった当時の日製の皇国化政策を

見られる. これは政策の問題なので朝鮮教育領と連関させて思えば日製の政策を

效果的に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と思う.

 

政策の完成のために民衆の政策批判を承諾しない状況.そういう雰囲気の強制が

あると言う事実を認めなければならない.  

 

 

長文に脆弱な人のために簡単に整理して見る.

 

 

39年 11月に発砲された朝鮮総督領第 19号 「朝鮮民事領中ゲゾングノ−でも」 中(の内)で決まって次 40年 2月に施行された.

皇民化の第一歩として頑張って始めた創氏改名だったが, 創氏係の提出者は 3ヶ月次にわずか 7・6%に過ぎなかった.それが 6ヶ月後に約80%まで行ったゴッイダからどんな強制力が仕事したことは否定しにくい.

 

追加で 「創氏改名は元々朝鮮総督府の意志で始めたのではなくて, 朝鮮人が熱烈に見送って始まった」という話を易しく聞くことができる. 果してそうであろうか?

 

1940年の 2月 11日の初日のはいてからはわずか 48件である. 上の主張は完全な捏造の

話になる. 一部日本人の嘘根性が作り上げた嫌韓メントに過ぎない.

 

 

日製の強圧と暴政で創氏改名(創氏改名)に応じざるを得ないように作っておいた過程は隠して, 結果的 Data 数値(数値)だけで朝鮮人たちが自ら望んで創氏改名をしたとヒドラが BREAK DANCEを踊る事を言っている.

 

創氏改名は朝鮮人が望んだのだという実は未確認の話を馬鹿で馬鹿に

派トンが移る形象で歪曲させた一種のハプニングに過ぎない.

 

今日はここまで作成して見るようにします.

韓日の良民皆さん楽しい一日になってください‾

 


창씨개명은 한국인이 원했다.

장문이므로 성격 파탄자 녀석들은 글을 읽지 말아주세요.

 

일본軍이 민간인을 납치하여 위안부로 만들었다 라는 말을 하면

軍 말단에 의한 범죄일 뿐이다 라고 말하며

 

한국인의 창씨 개명은 일제의 강제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총독부(일제)와 관계없는 말단 행정 관료의 충성심의 문제라고 말을 한다.

 

이 정도로 책임감 없는 녀석들은 보통 일본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혐한 우익이며

한국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일단 발광부터 하고 보자는 식이다.

 

反韓과 嫌韓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오늘은 창씨개명에 대해서 함께 생각할 시간을 갖고자 한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11일부터 실시되었다.여기서 검토하는 것은, 신고 기간을 반년으로 여겨진 씨의 설정에 대해이다.8월 10일까지의 기간을 편의적으로 전반(4월까지)과 후반(5월이후)과로 나누어 검토한다.

 

전반기를 보게 되면 신고 호수(누계)가 전호수에 차지하는 비율은, 2월말0·4%, 3월말1·5%, 4월말3·9% 포인트 정도의 열악한 수준이며 이런 상황에 대해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외로운 창씨접수』라는 기사를 써서 당시의 한국인의 창씨 개명에 대한 인식을 말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반전된 때는 위에서 말한 후반기에 와서 시작된다.

 

氏 설정의 신고는 「강제가 아니다」라고 언명을 하고 있던 조선 총독부는

 

월 하순에 열린 도지사 회의 전후에 나타났다.동회의에서, 난소독은 「씨 제도하 반도 통치 사상 마사니 한평생화 스르모노데아리마시테, 오랫 옛날노 사실니고미, 야마토대 사랑노 나라가 비롯함 정신봉즐 국가 본연노 소산 데아르트모두니내 센이치체노 대로진미트트알 반도 동포니갱니 문개키타르모노니외 나라즈.여러분의시크본제도노대정신구메 관하 민중노 각층니 철저 세시메라레타시」라고 훈시하며  「 안센이치체」 「나라가 비롯함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씨 제도의 취지의 주지 철저분에 관계되어 맡아 개□ 있는 구체적 방책 여하」

도지사 회의에서 씨의 신고를 촉진하기 위한 구체적 방책이 협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호적 사무를 감독하는 권한을 가지는 지방 법원이 면사무소에 대해서 신고를 강하고 독려 하도록 지시한 문서가 남아 있다.6월일이날짜에 부산 지방 법원장이 관내의 부윤·읍 갸름하게 보낸 「씨 설정독려니관술건」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문서이다(한국 정부 기록 보존 여기저기창고).이 문서는, 씨의 신고해에 관해서, 「일반 민중니 주지 철저분강조시 와 리탈」이 「총호수니비스레바미다 일할 정도니과기즈심사계하 3 분 이하노소 모아리」라고 현상을 말한 다음, 「유들기한 임박시」라고 있으므로, 사무 처리 후로부터도 「와 르 7월 20일까지 니 전호수노씨 신고완료 술 모양 특별노 배려상성리타시」로서, 신고독려를 재촉하고 있다(덧붙여 이 문서는 「앞즈씨노 설정계제출 세시메명노 변경하 후일때문스 모양 취급히상성리타시」라고도 적고 있어 개명이 중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지방의 법원으로부터도 같은 지시가 이루어지고 있던 것은, 신문 기사로부터 추측할 수 있지만, 6월 중순의 시점에서 「전호수노씨 신고」가 지시받은 것은, 공권력에 의한 강제가 한층 더 강해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이렇게 하고, 각부락에 창씨 상담소를 설치해, 구장이 각 호를 돌고 신고를 재촉해, 혹은 신고 용지의 대서를 행한다고 하는 「독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신고 호수(비율)는, 5월말12·5%, 6월말27·0%, 7월말53·7%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기간 종료의 8월 10일에는 80·3% 포인트가 됐다.

 

대충 의미를 파악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조금 더 부연해보자.

 

행정 기관에 의한 창씨 개명의 독려와 함께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창씨 개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처해진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이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불과 몇달만에 80%의 창씨 개명자를 만들어 낸다.

 

창씨 개명을 비판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가 되고 유죄를 인정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죄 판정을 한 검사가 신문에 담화한 내용을 보자..

「창씨 제도는 고아대성업의 완수상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것으로 실로 안센이치체화의 세기적 영단으로서 지금 반도의 츠츠포들에 이르기까지 지관감격의 환성에 일현상의 아래에, 이런 불온극히 만반국민적 언동은 단연 용서의 여지가 없는, 신성한 우리 국체에 대한 불손 행위 인 것의 모두등않고 충 좋은 반도 동포의 명예를 다치게 하는 일도 또 심대한 것이다」「불온 언동의 유포를 방지하는 것과 동시에 엄하게 타계를 가 준다」「경성 일보」1940년 5월9일자

 

검사의 담화가 있던 직후.. 창씨 개명은 2배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조선 민중은 단속과 처벌의 권력 기관으로 부터 의 이런 조치에 확실하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있다.

 

창씨에 대해서 친족과의 논의 자체도 허락하지 않았던 당시의 일제의 황국화 정책을

볼수 있다. 이것은 정책의 문제이므로 조선 교육령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일제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책의 완성을 위해서 민중의 정책 비판을 허락하지 않은 상황.그러한 분위기의 강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장문에 취약한 사람을 위해서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39년 11월에 발포된 조선 총독령 제 19호 「조선 민사령중 개정노건」 중(안)에서 정해져 다음 40년 2월에 시행되었다.

황민화의 제일보로서 분발해 시작한 창씨개명이었지만, 창씨계의 제출자는 3개월 다음에 불과 7·6%에 지나지 않았다.그것이 6개월 후에 약80%까지 갔던 것이다로부터 어떠한 강제력이 일한 것은 부정 하기 어렵다.

 

추가로 「창씨개명은 원래 조선 총독부의 의지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한국인이 열렬하게 바래서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1940년의 2월 11일의 첫날의 신고는 불과 48건 이다. 위의 주장은 완전한 날조의

이야기가 된다. 일부 일본인의 거짓말 근성이 만들어 낸 혐한 멘트에 불과하다.

 

일제의 강압과 폭정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응하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과정은 숨기고, 결과적 Data 수치(數値)만으로 한국인들이 스스로 원해서 창씨개명을 했다 라고 히드라가 BREAK DANCE를 추는 일을 말하고 있다.

 

창씨개명은 한국인이 바라던 것이다 라는 사실 미확인의 이야기를 바보에서 바보에게

파톤이 넘어가는 형상으로 왜곡시킨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작성해 보도록 합니다.

韓日의 양민 여러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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