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사적 제235호. 면적 22만 6000m2.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산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성하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

성문(城門)은 보은읍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서쪽 수구(水口) 부근에 있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을 따라 견고하고 웅대하게 구축하였는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22m에 달하고, 너비는 5∼8m이며, 전장(全長) 1,680m에 이른다. 성벽의 구축 방법은 내외면 모두 석축으로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이루게 하였고, 전형적인 협축공법(夾築工法)을 채용하였는데, 특히 이 협축성벽은 토사(土砂)를 전혀 섞지 않고 내부까지 전체를 석축으로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중세 유럽의 성벽을 방불케 한다..

 

 

 

 

속이 흙이 아닌 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 아닐수 없다.

 

 

성벽의 두께를 가늠할수 있다.

 

 

 

충북 보은에 세워진 신라의 산성, 삼년산성.
1500년이 흘렀지만 그 웅장한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다. 삼년산성은 470년 신라 자비왕 대에 3년에 걸쳐 장정 3천 명을 동원해 공사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신라는 한강진출이 유리한 교통의 요지에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견고함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산성을 쌓는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출발은 늦었지만 200년 앞서 통일을 준비하는데 …. 

 

 

 

 

 

1. 최고를 자랑하는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그 견고함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은 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워져 있는 이 성벽만으로도 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성벽 바깥쪽으로는 바로 깊은 계곡이 있어 정해진 길이 아니면 성벽까지 오르지 못하는 구조이다.

 


2. 전략적 요충지

5세기 후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댄 곳이 보은 일대, 삼년산성이 세워진 지
점이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보은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에게 있어 보은은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이 싸움에 뛰어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삼년산성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은 현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3. 난공불락의 요새

산성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대결하던 시대에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산성이었다. 거의 모든 전투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견고한 성을 확보하고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따라서 삼국은 성을 쌓은 일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겼다. 삼년산성을 조사하면서 여러 곳에서 신라인들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은 결코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4. 백제 성왕을 죽이다

삼년산성을 세운 지 100여 년 뒤, 삼년산성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신라의 통일전쟁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바로 삼년산성 출신의 한 장수가 백제 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백제의 왕을 역사상 크게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한 장수가 죽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삼년산성의 역할과 삼년산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진흥왕 15년.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로 돌아가본다.

 


5. 신라의 대역사, 삼년산성

3년이나 걸려 만들어진 성, 성을 보수할 때 장정 3천 명을 동원했던 성, 신라는 어떻게 이런 대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486년 신라는 삼년산성을 개축하면서 일선계에서 3천명을 동원했다. 고구려가 최고 전성기에 동원한 군사력이 30만 명, 백제나 신라의 경우 10만 명이 채 안되었음을 놓고 볼 때 보은의 삼년산성을 축조하면서 3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공사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신라는 삼년산성을 통해 두 가지 목표를 이루어낸다.

 


6. 200년을 앞선 신라의 통일 행보

삼년산성을 지은 200년 후, 신라는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통일을 향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삼년산성의 진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와 협상을 마무리 짓고, 백제 사비성을 향해 진군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비성을 함락 시켰다. 그로부터 5일 뒤,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은 축하행사가 한창이던 사비성을 뒤로하고 삼년산성으로 향했다. 


===========================================================


충북 보은 오정산 정상의 삼년산성은 삼국사기에 이례적으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산성이다. 470년 자비왕대에 신라가 삼년에 걸쳐 산성 하나 쌓았는데 그 뒤 486년이 되면 일선계, 그러니까 일선이라는 마을 부근에서 장정 삼천명을 동원해 성을 개축했다. 470년이라면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군사력 경제력 사회전반에 걸쳐 100여년 이상 뒤져있던 시기다. 이런 시기에 대역사를 한 이유는, 그리고 그 성과는 무엇일까?


높이 13-20m 폭 7-6m로 1680m의 능선을 따라 세워진 곡성으로, 다듬은 판석 약 1천만장(8톤 트럭으로 2만5천대 분량)을 이용해 내벽과 외벽사이도 돌로 쌓아 전체가 하나의 돌과 같은 구조인데다 각각 수평을 잡아 단번에 무너지는 것을 막는 등 매우 견고하다. 성내에는 논과 밭우물 5-6개 건물터가 나오는 등 자체적으로 생활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고 사단병력 약 1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성은 470년에 축조되어 통일시까지 한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5세기 후반은 신라가 경주에서 체제를 갖추고 주변을 정벌하던 시기다. 같은 시기 세워진 충북 중원군 입석리 중원고구려비에는 고구려군 지휘관이 신라의 관리에 임명될 정도로 신라가 당시 고구려에 복속된 상태였음을 알려준다. 경주 노서동 호우총에는 광개토대왕을 추모하는 제기도 나왔다.


당시 고구려는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인질로 잡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실시하고 있었다. 실성의 급사로 눌지가 왕이 되고 차차 자립을 모색해 450년(눌지 마립간 34년) 실직성 사건, 신라의 실직성 성주가 고구려인 장수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고구려를 바탕으로 발전한 신라가 이제 발목을 잡는 고구려를 뿌리치고 백제와 협력하려 한 정황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당시 마침 백제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이 죽고 웅진으로 쫒겨 위기에 쳐했다. 때문에 이시기 나제동맹은 눌지∼진흥 100여년간 지속된다. 이 때 삼국이 국경을 맞댄 곳이 충북 보은 일대로 신라가 북진하여 한강을 장악을 위해서, 또 주변 주요도시와 교통을 위해서 이 지역의 안전한 장악이 주요했다.


삼년산성은 정교한 수구가 나있어 성벽을 닿지 않고 물이 밖으로 배출된다. 서문은 성밖 하단에 자연암반을 지나 성벽까지 기어올라야 하고 성문은 옹성으로 보호되며 성문은 바깥쪽으로 열리도록 되어있어 밀거나 때려서 열기 어려우며 연다 해도 바로 연못이 있어 모르고 들어올 경우 빠지도록 되어 있다. 동문은 성벽 자체를 Z자 형으로 꺽어 놓아 들어오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돼 있다. 북문은 앞으로 2중 차단 석축을 S자형으로 돌아들어 오는 구조로 옹성을 대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남문은 5m가 넘는 사다리가 아니고는 들어갈 수 없게 성벽 위쪽에 문이 매달려 있었다.


진흥왕은 한강 동북방면을 공격해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삼는다. 나제동맹을 파기한 것이다. 이에 백제가 공격하여 삼년산성과 이곳에서 유관으로 보이는 백제의 한림산성 사이는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다. 554년 백제 3만 대군이 관산성을 공격하자 다급해진 신라군은 구원병을 청하고 이에 김무력의 비장(보좌장수)이자 관산성을 측면지원하는 위치에 있던 삼년산성의 고간도도가 관산성으로 오게된다. 그런데 이동중 성왕이 친위대 50명만을 이끌고 전투를 독려하려 관산성으로 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관산성 부근에서 매복하다가 기습하여 성왕을 죽인다. 성왕의 죽음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좌평 4명, 병사 29600명이 전멸하고 “사람과 말이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는 기록만을 남긴다. 이후 신라는 계속 확장된다.


고구려의 군사력이 30만, 신라나 백제는 10만이 채 안됐을 때에 신라는 무려 3천명을 3년간 동원해 삼년산성을 쌓는다. 당시 동원된 인원들은 이곳에서 60km나 떨러진 곳인 일선계(경북 선산)에서 모았다. 산성 인근은 아직 행정적 지배력이 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축성후 곧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단양적성비에 보면 중앙관리인 훼부와 지방관리인 당주가 구분돼 있고 직명, 부서, 이름, 관등까지 표기되어 위계가 확실했고 협조자와 이탈자를 유화강경책을 구분해 포섭에 힘섰다. 고관인 이찬이 공사 책임을 지고, 소지왕이 일선계를 순행하는 등 국가적 관심을 갖는다.


결국 삼년산성은 요지에 산성을 세워 교두보로 삼아 한강을 차지한 것이고 또 국력을 모아 국가인력체계를 다진 것이다. 당시 수당전에 바쁜 고구려와 위기가 계속되는 백제사이에서 신라는 통일행보를 급진전시키는데 이때가 통일 200년전이다. 삼년산성 축성 이후 많은 산성을 부근에 세우고 서주 휘하로 이 성의 주변민을 취합시키는 등 준비 끝에 통일전쟁이 시작된다.


당군을 만나고 돌아와 삼년산성에서 출정한 5만 신라군은 백제 계백의 5천 결사대를 무찌르고 사비성을 함락한다. 그리고 경주도 아니고 사비도 아닌 이곳 삼년산성에서 당나라 사신에게서 당황제의 조서를 받는 국제의식을 거행한다. 이는 아마 자신감의 표현이자 신라를 넘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難攻不落의 요새, 삼년산성 [三年山城]

사적 제235호. 면적 22만 6000m2.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산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성하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

성문(城門)은 보은읍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서쪽 수구(水口) 부근에 있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을 따라 견고하고 웅대하게 구축하였는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22m에 달하고, 너비는 5∼8m이며, 전장(全長) 1,680m에 이른다. 성벽의 구축 방법은 내외면 모두 석축으로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이루게 하였고, 전형적인 협축공법(夾築工法)을 채용하였는데, 특히 이 협축성벽은 토사(土砂)를 전혀 섞지 않고 내부까지 전체를 석축으로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중세 유럽의 성벽을 방불케 한다..

 

 

 

 

속이 흙이 아닌 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 아닐수 없다.

 

 

성벽의 두께를 가늠할수 있다.

 

 

 

충북 보은에 세워진 신라의 산성, 삼년산성.
1500년이 흘렀지만 그 웅장한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다. 삼년산성은 470년 신라 자비왕 대에 3년에 걸쳐 장정 3천 명을 동원해 공사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신라는 한강진출이 유리한 교통의 요지에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견고함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산성을 쌓는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출발은 늦었지만 200년 앞서 통일을 준비하는데 …. 

 

 

 

 

 

1. 최고를 자랑하는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그 견고함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은 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워져 있는 이 성벽만으로도 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성벽 바깥쪽으로는 바로 깊은 계곡이 있어 정해진 길이 아니면 성벽까지 오르지 못하는 구조이다.

 


2. 전략적 요충지

5세기 후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댄 곳이 보은 일대, 삼년산성이 세워진 지
점이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보은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에게 있어 보은은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이 싸움에 뛰어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삼년산성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은 현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3. 난공불락의 요새

산성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대결하던 시대에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산성이었다. 거의 모든 전투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견고한 성을 확보하고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따라서 삼국은 성을 쌓은 일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겼다. 삼년산성을 조사하면서 여러 곳에서 신라인들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은 결코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4. 백제 성왕을 죽이다

삼년산성을 세운 지 100여 년 뒤, 삼년산성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신라의 통일전쟁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바로 삼년산성 출신의 한 장수가 백제 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백제의 왕을 역사상 크게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한 장수가 죽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삼년산성의 역할과 삼년산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진흥왕 15년.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로 돌아가본다.

 


5. 신라의 대역사, 삼년산성

3년이나 걸려 만들어진 성, 성을 보수할 때 장정 3천 명을 동원했던 성, 신라는 어떻게 이런 대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486년 신라는 삼년산성을 개축하면서 일선계에서 3천명을 동원했다. 고구려가 최고 전성기에 동원한 군사력이 30만 명, 백제나 신라의 경우 10만 명이 채 안되었음을 놓고 볼 때 보은의 삼년산성을 축조하면서 3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공사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신라는 삼년산성을 통해 두 가지 목표를 이루어낸다.

 


6. 200년을 앞선 신라의 통일 행보

삼년산성을 지은 200년 후, 신라는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통일을 향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삼년산성의 진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와 협상을 마무리 짓고, 백제 사비성을 향해 진군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비성을 함락 시켰다. 그로부터 5일 뒤,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은 축하행사가 한창이던 사비성을 뒤로하고 삼년산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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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 오정산 정상의 삼년산성은 삼국사기에 이례적으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산성이다. 470년 자비왕대에 신라가 삼년에 걸쳐 산성 하나 쌓았는데 그 뒤 486년이 되면 일선계, 그러니까 일선이라는 마을 부근에서 장정 삼천명을 동원해 성을 개축했다. 470년이라면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군사력 경제력 사회전반에 걸쳐 100여년 이상 뒤져있던 시기다. 이런 시기에 대역사를 한 이유는, 그리고 그 성과는 무엇일까?


높이 13-20m 폭 7-6m로 1680m의 능선을 따라 세워진 곡성으로, 다듬은 판석 약 1천만장(8톤 트럭으로 2만5천대 분량)을 이용해 내벽과 외벽사이도 돌로 쌓아 전체가 하나의 돌과 같은 구조인데다 각각 수평을 잡아 단번에 무너지는 것을 막는 등 매우 견고하다. 성내에는 논과 밭우물 5-6개 건물터가 나오는 등 자체적으로 생활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고 사단병력 약 1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성은 470년에 축조되어 통일시까지 한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5세기 후반은 신라가 경주에서 체제를 갖추고 주변을 정벌하던 시기다. 같은 시기 세워진 충북 중원군 입석리 중원고구려비에는 고구려군 지휘관이 신라의 관리에 임명될 정도로 신라가 당시 고구려에 복속된 상태였음을 알려준다. 경주 노서동 호우총에는 광개토대왕을 추모하는 제기도 나왔다.


당시 고구려는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인질로 잡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실시하고 있었다. 실성의 급사로 눌지가 왕이 되고 차차 자립을 모색해 450년(눌지 마립간 34년) 실직성 사건, 신라의 실직성 성주가 고구려인 장수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고구려를 바탕으로 발전한 신라가 이제 발목을 잡는 고구려를 뿌리치고 백제와 협력하려 한 정황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당시 마침 백제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이 죽고 웅진으로 쫒겨 위기에 쳐했다. 때문에 이시기 나제동맹은 눌지∼진흥 100여년간 지속된다. 이 때 삼국이 국경을 맞댄 곳이 충북 보은 일대로 신라가 북진하여 한강을 장악을 위해서, 또 주변 주요도시와 교통을 위해서 이 지역의 안전한 장악이 주요했다.


삼년산성은 정교한 수구가 나있어 성벽을 닿지 않고 물이 밖으로 배출된다. 서문은 성밖 하단에 자연암반을 지나 성벽까지 기어올라야 하고 성문은 옹성으로 보호되며 성문은 바깥쪽으로 열리도록 되어있어 밀거나 때려서 열기 어려우며 연다 해도 바로 연못이 있어 모르고 들어올 경우 빠지도록 되어 있다. 동문은 성벽 자체를 Z자 형으로 꺽어 놓아 들어오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돼 있다. 북문은 앞으로 2중 차단 석축을 S자형으로 돌아들어 오는 구조로 옹성을 대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남문은 5m가 넘는 사다리가 아니고는 들어갈 수 없게 성벽 위쪽에 문이 매달려 있었다.


진흥왕은 한강 동북방면을 공격해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삼는다. 나제동맹을 파기한 것이다. 이에 백제가 공격하여 삼년산성과 이곳에서 유관으로 보이는 백제의 한림산성 사이는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다. 554년 백제 3만 대군이 관산성을 공격하자 다급해진 신라군은 구원병을 청하고 이에 김무력의 비장(보좌장수)이자 관산성을 측면지원하는 위치에 있던 삼년산성의 고간도도가 관산성으로 오게된다. 그런데 이동중 성왕이 친위대 50명만을 이끌고 전투를 독려하려 관산성으로 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관산성 부근에서 매복하다가 기습하여 성왕을 죽인다. 성왕의 죽음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좌평 4명, 병사 29600명이 전멸하고 "사람과 말이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는 기록만을 남긴다. 이후 신라는 계속 확장된다.


고구려의 군사력이 30만, 신라나 백제는 10만이 채 안됐을 때에 신라는 무려 3천명을 3년간 동원해 삼년산성을 쌓는다. 당시 동원된 인원들은 이곳에서 60km나 떨러진 곳인 일선계(경북 선산)에서 모았다. 산성 인근은 아직 행정적 지배력이 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축성후 곧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단양적성비에 보면 중앙관리인 훼부와 지방관리인 당주가 구분돼 있고 직명, 부서, 이름, 관등까지 표기되어 위계가 확실했고 협조자와 이탈자를 유화강경책을 구분해 포섭에 힘섰다. 고관인 이찬이 공사 책임을 지고, 소지왕이 일선계를 순행하는 등 국가적 관심을 갖는다.


결국 삼년산성은 요지에 산성을 세워 교두보로 삼아 한강을 차지한 것이고 또 국력을 모아 국가인력체계를 다진 것이다. 당시 수당전에 바쁜 고구려와 위기가 계속되는 백제사이에서 신라는 통일행보를 급진전시키는데 이때가 통일 200년전이다. 삼년산성 축성 이후 많은 산성을 부근에 세우고 서주 휘하로 이 성의 주변민을 취합시키는 등 준비 끝에 통일전쟁이 시작된다.


당군을 만나고 돌아와 삼년산성에서 출정한 5만 신라군은 백제 계백의 5천 결사대를 무찌르고 사비성을 함락한다. 그리고 경주도 아니고 사비도 아닌 이곳 삼년산성에서 당나라 사신에게서 당황제의 조서를 받는 국제의식을 거행한다. 이는 아마 자신감의 표현이자 신라를 넘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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