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40年の間眺めた韓国,

 

1960年代後半在韓米軍でムンサンの非武装地帯に 2年間勤めたゾーンドンコン教授. 彼は当時韓国田舍の姿は朝鮮時代と別段違わない風景だったと回想した. それから 40余年後. ドンコン教授が在職しているアメリカ UCLAでは ‘寒流’に落ちこんだ白人学生たちの姿も不慣れではないと言う. [ギムテソング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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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まにはの外で眺めるのがもっと正確な時がある. アメリカ UCLA 韓国学研究所長であるゾーンドンコン(64) 教授. 彼は韓国で大学を通ったし, 韓国人と結婚したし, 韓国語が完璧で, 今も韓国を随時に行き交う外国人だ. 在韓米軍で韓国に配置されて, 韓国と致命的愛に陷った以後 40余年. 彼は絶えず韓国と韓国人を観察して来た. 彼に 40年前と今の韓国はどう違うか. 何が変わっただろうか. それが聞きたくてドンコン教授に会った. インタビューは去る 9日ソウル市内一ホテルコーヒーショップで成り立った.


-UCLA 大学の韓国学縁旧ソ規模はどの位ですか.

“韓国文学・歴史・美術史・地理学・人類学・音楽・宗教学・言語学など多様な領域を教授 11人が教えています. 学部講義を聞く学生が 2000‾2500人位です. 私は ‘韓国文明社開設’と言う(のは)講義をするのに定員 120人が一杯になります. 私が 20年前 UCLAで初めて講義する時は受講生がほとんど韓国係アメリカ人でした. ところで今年受講生 120人の中 50余人だけ韓国係アメリカ人で残り 70余人は非(非)韓国係学生です.”

-1960年代に在韓米軍で勤めて韓国に魅力を感じて韓国学を専攻したことで分かるのに, 何があまり魅力的だったですか.

“大学を通って学費を儲けようとイブデヘッです. 1966年 9月に韓国へ来て 68年 12月までムンサンの非武装地帯で勤めたが韓国には西洋にないのがありました. 義理して情(情) みたいなもの. 韓国が良くて除隊直前に高麗大史学科に編入学相談をしたんです. 韓国語が短いと落ちました. 帰国したまた帰って来て 1年間語学研修をして尋ねるからその時はお許し願えるんですよ.”

-40年前韓国と今は差が多いですね.

“田舍はほとんどわらぶきだったです. 電気が入って行く村もあまりなくて. 大部分ゴムのはき物はいて歩いたし. もちろんソウルはかなり大きい回ったんです. 70年度に人口が 540余万人だったからです. タクシーしてバスもあって. 上水道が入って行く家たちもかなりあったが下水道施設はあまりなかったです. あの時と比べるとソウルは完全に国際水準の大都市になったんです. ”

-こんな急激な変化の事例がまたありましょうか.

“イギリスが 300年, アメリカが 100年, 日本が 60年かかったのを韓国は 30年の間に成したんです. そんなに短い時間にそんな変化を消化したことも驚きべきですよ. 常にうるさくて問題の多いことが事実だが全般的に韓国はお上手だったと見なければなりません. 経済成長だけではないです. 民主化を争取し出したし, 教育分野も多くの成長がありました. 60年代には大部分小学校だけ卒業したんです. 中学校進学率が 50%がならなかったです. 今はほとんど 100%が高校まで行って, 大学進学率も 80%が越えないですか? 韓国は経済・政治・教育・文化的な面でとても大きい変化を起こした国ですよ.”

-外から見るのに韓国デモクラシーはどうですか.

“私が韓国にある時 3選改憲, 軍人たちの高麗大乱入社でもなどがありました. 今そんな事は想像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ね. デモクラシーがとても根ついたと思います. 市民団体みたいなことはアメリカより韓国がもっと発展しています. 韓国がアメリカよりもっと民主主義的な面貌を見せることもあります. ”

-朝鮮党争から始めて最近の左右対立まで, 韓国人には ‘分裂の DNA’があるようだという話も出ます. 歴史学者としてどんなに見てください.

“やれやれ, 日本学者たちの主張した植民地史観がまだ生き残りましたよね. そうです. 朝鮮時代党争はひどかったんです. 東西に変わってから, ナムイン・北人変わって, 老論・少論に対北・小北まで, 限りなくグロしたでしょう. それで日本が朝鮮人々は自ら国を治めることができないと話したんです. しかし私は(前)近代的な中央集権官僚国々はどこでもすべて党争がひどかったです. 韓国が特別ではないんですよ.”

-他の私でも同じですって?

“私が高麗大卒業してハワイ大で修士をしたんです, そこもダミンゾック社会じゃないか. そこで韓国の人々が ‘日本はあのようによくひと固めになるのにわれらは何か’と言います. 一所に日系アメリカ人たちに問って見れば ‘ 私たちは中に分裂がとてもひどい. よくひと固めになるのは中国人だ’と言います. それで中国人に問って見れば ‘ウリキリン会う争う. よくひと固めになるのは白人だ. だからハワイ人口で 25%しかならないうえ掌握していないか’と言います. 白人に問って見れば何という竝びご存じですか? ‘あの東洋から来たやつら気を付けなさい. 彼らどうしよく団結する’ このようです.”

-全世界的に衰退する民族主義がどうして韓国でばかり強まっていましょうか?

“ヨーロッパも 70‾80年前には今の北東アジアに似ている状況だったです. フランスとドイツがとても良くなかったんです. 戦争もして. それでもヨーロッパはイギリス・フランス・ドイツの経済規模が似ていたんです. 一所に北東アジアはそうじゃないです. 中国がとても大き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 均衡がつかまらない体制ですよ. 韓国立場(入場)では民族主義を完全に無くすには時期尚早です. 周辺強大国の中で統一を成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そんな面で民族主義的な情緒が必要です. しかし閉鎖的なのではなく ‘開かれた民族主義’に進ま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韓国では法治にならないと言いますよ.

“いくらそれでもたくさんよくなりました. 昔には本当の力で, 露骨的にそうだったです. 権力機関の不正腐敗も日常の中で常に経験しました. 警察もそうで, 区役所だけ行ってもそうだったんです. 韓国は昔よりは法を尊重する国になったと見ます.”

-自負心を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ですか.

“それではこれです. 私が中南米学者たちとネットワークがあるのにメキシコ・ブラジル・チリ・アルゼンチン, こんな国々行って見れば韓国に対する関心がこの上なく大きいです. どのようにすると韓国のように経済成長もして民主化もするのかはんですよ. 東南アジアの方でも韓国をそのように眺めていて. 中国も事実は韓国を一つのモデルにしているという指摘をする人々もいます.”

-一部学者は韓国の歴史を自虐的に評価する場合もあります. 日製清算もできなかったし, 農地改革も失敗したし既得権層だけの歴史としながら.

“私も昔にはそんな考えをしたことが事実ですが, 今ではないと思います.”

対談=金ゾンヒョク文化スポーツエディタ
整理=梨老筆記者<PENBAE@JOONGANG.CO.KR>


写真=ギムテソング記者

◆ゾーンドンコン博士=1945年生まれ. アメリカアリゾナ州(州) 出身. アメリカで韓国研究が一番活発な UCLA 韓国学研究所長だ. 在韓米軍勤務を終えた後通った大学をやめて高麗大史学科に編入した位韓国に対する愛情が強い人だ. 奥さんは高麗大で会った大学 1年先輩. 米ハワイ大とワシントン大で高麗言葉‾造船超に対する研究で修士と博士の学位を受けた. アメリカ国内の代表的な親韓派人士でアメリカ中・高校教科書にある韓国関連内容を肯定的に変える運動を主導したりした. 韓国を 1年に三四番(回)ずつ訪問する. 著書に 『朝鮮王朝の起源』(2000), 『また思う儒教: 韓・中・日, ベトナムの過去と現在』(共編・2002) など


존 던컨 박사의 한국에 대한 고찰

“40년 동안 바라본 한국,

1960년대 후반 주한미군으로 문산의 비무장지대에 2년간 근무했던 존 던컨 교수. 그는 당시 한국 시골의 모습은 조선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을 풍경이었을 거라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 던컨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미국 UCLA에선 ‘한류’에 빠져든 백인 학생들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고 한다. [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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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밖에서 바라보는 게 더 정확할 때가 있다. 미국 UCLA 한국학연구소장인 존 던컨(64) 교수.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한국인과 결혼했고, 한국말이 완벽하고, 지금도 한국을 수시로 오가는 외국인이다.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배치돼, 한국과 치명적 사랑에 빠진 이후 40여 년. 그는 끊임없이 한국과 한국인을 관찰해왔다. 그에게 40년 전과 지금의 한국은 어떻게 다를까. 뭐가 변했을까. 그게 듣고 싶어 던컨 교수를 만났다. 인터뷰는 지난 9일 서울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이뤄졌다.


-UCLA 대학의 한국학연구소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한국 문학·역사·미술사·지리학·인류학·음악·종교학·언어학 등 다양한 영역을 교수 11명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부 강의를 듣는 학생이 2000~2500명 정도입니다. 저는 ‘한국 문명사 개설’이란 강의를 하는데 정원 120명이 꽉 찹니다. 제가 20년 전 UCLA에서 처음 강의할 때는 수강생이 거의 한국계 미국인이었죠. 그런데 올해 수강생 120명 중 50여 명만 한국계 미국인이고 나머지 70여 명은 비(非)한국계 학생이에요.”

-1960년대에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다 한국에 매력을 느껴서 한국학을 전공한 걸로 아는데, 뭐가 그리 매력적이던가요.

“대학을 다니다 학비를 벌려고 입대했어요. 1966년 9월에 한국에 와서 68년 12월까지 문산의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했는데 한국에는 서양에 없는 게 있었어요. 의리하고 정(情) 같은 것. 한국이 좋아서 제대 직전에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학 상담을 했죠. 한국말이 짧다고 떨어졌어요. 귀국했다 다시 돌아와 1년간 어학연수를 하고 찾아가니까 그땐 허락하시더라고요.”

-40년 전 한국과 지금은 차이가 많겠죠.

“시골은 거의 다 초가집이었어요. 전기가 들어가는 마을도 별로 없고요. 대부분 고무신 신고 다녔고. 물론 서울은 꽤 큰 도시였죠. 70년도에 인구가 540여만 명이었으니까요. 택시하고 버스도 있고. 상수도가 들어가는 집들도 꽤 있었지만 하수도 시설은 별로 없었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서울은 완전히 국제수준의 대도시가 됐지요. ”

-이런 급격한 변화의 사례가 또 있을까요.

“영국이 300년, 미국이 100년, 일본이 60년 걸린 걸 한국은 30년 사이에 이룬 거예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런 변화를 소화해낸 것도 놀라운 일이죠. 늘 시끄럽고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전반적으로 한국은 잘했다고 봐야 해요. 경제성장뿐만이 아닙니다. 민주화를 쟁취해 냈고, 교육 분야도 많은 성장이 있었습니다. 60년대엔 대부분 초등학교만 졸업했죠. 중학교 진학률이 50%가 안 됐어요. 지금은 거의 100%가 고교까지 가고, 대학 진학률도 80%가 넘지 않습니까? 한국은 경제·정치·교육·문화적인 면에서 굉장히 큰 변화를 일으킨 나라거든요.”

-밖에서 보기에 한국 민주주의는 어떻습니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3선 개헌, 군인들의 고려대 난입사건 등이 있었어요. 지금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죠. 민주주의가 아주 뿌리박혔다고 생각해요. 시민단체 같은 건 미국보다 한국이 더 발전해 있어요. 한국이 미국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도 있어요. ”

-조선 당쟁부터 시작해 최근의 좌우 대립까지, 한국인에겐 ‘분열의 DNA’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보세요.

“아이고, 일본 학자들이 주장한 식민지사관이 아직도 살아남았군요. 그래요. 조선시대 당쟁은 심했죠. 동서로 갈렸다가, 남인·북인 갈리고, 노론·소론에 대북·소북까지, 한없이 그랬잖아요. 그래서 일본이 조선 사람들은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얘기했죠. 하지만 전(前)근대적인 중앙집권 관료 국가들은 어디나 다 당쟁이 심했습니다. 한국이 특별한 게 아니거든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고요?

“제가 고려대 졸업하고 하와이대에서 석사를 했는데요, 거기도 다민족 사회잖아요. 거기서 한국 사람들이 ‘일본은 저렇게 잘 뭉치는데 우린 뭐냐’고 해요. 한데 일본계 미국인들한테 물어보면 ‘ 우리는 안으로 분열이 굉장히 심하다. 잘 뭉치는 건 중국인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인한테 물어보면 ‘우리끼린 만날 싸운다. 잘 뭉치는 건 백인이다. 그러니까 하와이 인구에서 25%밖에 안 되는데 다 장악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해요. 백인한테 물어보면 뭐라는 줄 아세요? ‘저 동양에서 온 놈들 조심해라. 지들끼리 잘 뭉친다’ 이럽니다.”

-전 세계적으로 쇠퇴하는 민족주의가 왜 한국에서만 강해지고 있을까요?

“유럽도 70~80년 전에는 지금의 동북아와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프랑스와 독일이 굉장히 안 좋았죠. 전쟁도 하고. 그래도 유럽은 영국·프랑스·독일의 경제 규모가 비슷했죠. 한데 동북아는 안 그래요. 중국이 너무 커버렸어요. 균형이 안 잡히는 체제거든요. 한국 입장에선 민족주의를 완전히 없애기엔 시기상조입니다. 주변 강대국 속에서 통일을 이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민족주의적인 정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폐쇄적인 게 아니라 ‘열린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하죠.”

-한국에선 법치가 안 된다고 하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옛날에는 진짜 힘으로, 노골적으로 그랬지요. 권력기관의 부정부패도 일상 속에서 늘 겪었어요. 경찰도 그렇고, 구청만 가도 그랬고요. 한국은 옛날보다는 법을 존중하는 나라가 됐다고 봐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까.

“그럼요. 제가 중남미 학자들과 네트워크가 있는데 멕시코·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 이런 나라들 가보면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어떻게 해야 한국처럼 경제성장도 하고 민주화도 하느냐는 거죠. 동남아 쪽에서도 한국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고요. 중국도 사실은 한국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일부 학자는 한국의 역사를 자학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제 청산도 못했고, 농지개혁도 실패했고 기득권층만의 역사라면서.

“저도 옛날엔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인데요, 이젠 아니라고 봅니다.”

대담=김종혁 문화스포츠에디터
정리=배노필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존 던컨 박사=1945년생. 미국 애리조나주(州) 출신. 미국에서 한국연구가 가장 활발한 UCLA 한국학연구소장이다. 주한미군 근무를 마친 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했을 만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강한 사람이다. 부인은 고려대에서 만난 대학 1년 선배. 미 하와이대와 워싱턴대에서 고려 말~조선 초에 대한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내의 대표적인 친한파 인사로 미국 중·고교 교과서에 있는 한국 관련 내용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국을 1년에 서너 번씩 방문한다. 저서에 『조선 왕조의 기원』(2000), 『다시 생각하는 유교: 한·중·일,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공편·200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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