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換局-配達国-古朝鮮-高句麗-渤海皆韓国歴史¥”


 

[周恩来発言専門] ¥”領土侵奪行為, 先祖の代わりをして朝鮮に謝り¥”

 

毛沢東(毛沢東)と一緒に中国革命の両大リーダーに数えられる周恩来(周恩来:1898-1976) 前中国総理が在世に中国ナショナリズム史学者たちの換局-配達国-古朝鮮-高句麗-渤海社歪曲を痛烈に批判して, 中国の膨脹主義で古代韓国の領土が侵奪されたところついて ¥”私たちはあなたたちの地をミルオブチョ小さくして私たちが住んでいる地が大きくなったことに対して先祖の代わりをしてあなたたちに謝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た発言録が公開されてすごい関心を集めている.

 

 

  周恩来の前総理は中国人たちがマオチォトングよりもっと尊敬する歴代最高リーダーで, 中国の韓国古代史歪曲に対する彼のしんらつな批判は現在中国指導部が推進中の <東北公正> など歴史歪曲の根幹を振る重大な指摘に違いないからだ.

 

 

  周恩来 ¥”古朝鮮-高句麗-渤海社は皆韓国歴史¥”

 

 

  このような事実は現在中国北京大学で研修中のソル・フン前議員が 13日自分のインターネットホームページ(www.sh21.or.kr)に中国研修中掘り出した <周恩来総理の中国-朝鮮関係対話>という題目の中国政府発行文件を公開することで知られた.

 

 

  ソル・フン前議員によれば, この文件は周恩来の前総理が去る 1963年 6月28日中国を 42日間訪問した北朝鮮朝鮮科学院代表団 20人と会った席で行った発言を記録したのだ.

 

 

  周恩来当時総理は優先した-中古代-中世史と関連, ¥”歴史連帯に対する両国史学の一部記録は真実にあまりかなわない¥”と ¥”これは中国歴史学者や多い人々が対局株の, 対局ショビニズム(ナショナリズム) 観点で歴史を敍述したことが主要原因であり, そして多い問題が不公正に使われた¥”と歴史歪曲の根本責任が中国にあることを指摘した.

 

 

  彼は具体的実例で ¥”腰下(遼河), 宋花崗(松花江)流域には皆朝鮮民族の足跡が残っている. これは腰下と宋花崗流域, ドムンガング(図們江)流域で発掘された文物, 碑文などで証明されているし幾多の朝鮮文献にもその跡が残っている. 朝鮮族がそこで長い間暮して来たということは皆証明することができる¥”と言った. 彼はまた ¥”明らかなことは朝鮮族一部がもとより韓半島で居住したというのだ. ドムンガング, 腰下, 宋花崗流域で居住したことは明らかな事実で歴史記録と出土された文物がもう証明している¥”と再び強調した.

 

 

  周恩来総理は具体的に渤海社と係わっては, ¥”ジングボ(鏡泊)号近所は渤海の遺跡が残っていてまた渤海の首都だった¥”と ¥”ここで出土された文物が証明することはそこもやっぱり朝鮮民族の恨み支派(支派)だったという事実¥”と言いながら ¥”民族の歴史発展を研究する一番良い方法は出土された文物で証拠を捜すことで, これが一番科学的な方法¥”と言って渤海社を韓国古代史の一支派で認めたりした.

 

 

  彼はまた高句麗社と係わっては, ¥”チン, 一国以後頻繁にリャオホ流域を征伐したがこれは確かに失敗した侵略¥”と言いながら ¥”唐も戦争を経験したしまた失敗したがあなたたちを無視して侮辱した. あの時皆さん国の立派な一将軍が私たちの侵略軍を打ち破った¥”と西紀 644年当たり太宗の高句麗侵攻の時梁マンチュン将軍がANSI性でこれを撃退した事を言及することで高句麗社を韓国歴史で認めた.

 

 

  彼はまた高まりプレゼントと係わっても ¥”中国歴史学者たちはどんな時は古代史を歪曲したし, 甚だしくは朝鮮族は `記者子孫(箕子之后)¥”という言葉を無理やりにさらにかぶせたりしたがこれは歴史歪曲¥”と言いながら ¥”如何にこのようにな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話なのか¥”と高まりプレゼントを韓国歴史で認めた.

 

 

  周恩来 ¥”領土侵奪, 先祖の代わりをしてあなたたちに謝り¥”

 

 

  このように中国麺注意学者たちの韓国古代史歪曲を叱咤した周恩来総理は満州族が支配した清時代韓国のご先祖が支配した領土が清の領土膨脹主義で大きく減ったのに対して公式的に謝ったりした.

 

  周恩来総理は ¥”満州族は中国に対して貢献したところがあるのにすぐ中国の土地を大きく広げたのだ. 旺盛な時期には今の中国の土地よりももっと大きかった. 漢族が統治した時期には国土がこんなに大きくなった事がなかった¥”と言った.

 

  彼は引き続き ¥”ただこんなものなどは皆歴史の跡で過ぎ去ったことだ. どんな仕事に対しては私たちの責任を負う事ではなくてご先祖の分け前だ. ところが当然こんな現象は認めなければならない¥”と ¥”このようになった以上私たちはあなたたちの地をミルオブチョ小さくして私たちが住んでいる地が大きくなったことに対して先祖の代わりをしてあなたたちに謝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公式的に中国の領土侵奪行為を謝ったりした.

 

 

  周恩来総理はこのような謝りの後 ¥”それで必ず歴史の真実性を回復しなければならない. 歴史を歪曲することはできない. ドムンガング, 鴨緑江西の方は歴史にしろと言う中国の土地だったとか, 甚だしくは古代から朝鮮は中国の属国だったと言うことは荒唐な話だ¥”と再び中国学者たちのショビニズムを再び批判した.

 

 

  彼は ¥”中国のこんなデグックショビニズムが封建時代にはよほど強かった. 他の国で贈り物を送れば彼らは朝貢と言ったし, 他の国で謝絶を送ってお互いに友好交流する時も彼らは謁見しに来たと呼んだし, 双方が戦争を終わらせて強化する時も彼らはあなたたちが臣下に従うと言ったし, 彼らは自ら天助(天朝), 上方(上邦)と称したがこれは正しく不平等なのだ. 皆歴史学者筆先から出た間違いだ. 私たちをこんなものなどをすぐ改めなければならない¥”と歴史歪曲是正を約束した.

 

 

  このように周恩来総理在世には韓-中古代史に対する中国指導部の明らかな認識が存在したから歴史歪曲葛藤はこれ以上存在しなかった. しかしその後中国指導部は経済力膨脹に鼓舞されて, 先輩たちの意とは正反対で政府次元の組織的歴史歪曲に出て大きい葛藤をもたらしている. 現中国指導部が自分たちの歴史歪曲が正当だと主張しようとすれば, まず中国人民が最大尊敬する周恩来総理から ¥”人民裁判¥”に付けた後歴史歪曲行為をすべきことだ.

 

 

  次はソル・フン前議員が公開した周恩来総理の発言専門だ.

 

 

  周恩来総理の中国-朝鮮関係対話

 

 

  今年(1963年) 6月28日周恩来総理は朝鮮科学院代表団接見の時中国と朝鮮関係に対して次のように言及した.

 

 

  現在の重曹関係は非常に密接で歴史的でもそうだったが次の三つの時期に分けて見られる.

 

 

  第1時期は重曹両国と二人の民族の歴史的関係だ.

 

 

  第2時期は中国と朝鮮が皆同時に帝国主義侵略にあった時であり, 朝鮮が日本の植民地になって中国は部分的な日本の植民地を含んで帝国主義の半植民地になった時だ. この時期の中国と朝鮮は革命的関係だった.

 

  第3時期はすぐ現在なのに, 私たちの皆は社会主義国家や兄弟当たり’兄弟国家の関係だ.

 

  この三つの時期の中国’朝鮮両国と二つの幢竿の関係で研究するに値する価値がある多くの問題がある. 歴史関係, 民族関係, 革命関係に対する調査研究を通じて双方の観点と見解を完全に一致させた後文件と書籍に皆記録した. これは私たちの歴史学者の一大事件で当然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仕事だ. これはまた政治活動をする党活動家である私たちが当然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方面の一つだ.

 

 

  第1時期は歴史記録以来に発掘された文物によって証明される. 両国, 二人の民族関係は帝国主義侵略に中止されるまで 3, 4千年以上非常に長い時間だった.

 

 

  このような歴史連帯に対する両国史学の一部記録は真実にあまりかなわない. これは中国歴史学者や多い人々が対局株の, デグックショビニズムの観点で歴史を敍述したことが主要原因だ. そして多い問題が不公正に使われた.

 

  先に両国民族の発展に対する過去中国一部学者たちの観点はあまり正確なことではなかったしあまり実際に符合しなかった. 朝鮮民族は朝鮮半島と東北大陸に進出した以後長い間そこで暮して来た. 腰下(遼河), 宋花崗(松花江)流域には皆朝鮮民族の足跡が残っている. これは腰下と宋花崗流域, ドムンガング(図們江)流域で発掘された文物, 碑文などで証明されているし幾多の朝鮮文献にもその跡が残っている. 朝鮮族がそこで長い間暮して来たということは皆証明することができる. 敬白号近所は渤海(渤海)の遺跡が残っていて, また渤海の首都だった. ここで出土された文物が証明することはそこもやっぱり朝鮮族の一支派(支派)だったという事実だ. この国は歴史的によほど長い間存在した. したがって朝鮮族が朝鮮半島で暮しただけでなく同時に腰下, 宋花崗流域でも長い間暮したということが証明される. 朝鮮族がもっとずいぶん前にもあったと言うのに対しては, 一部はアジア南部から漂流して来たと言ったりするがこれは別個の問題だ. ただ明らかなことは朝鮮族一部がもとより韓半島で居住したというのだ. ドムンガング, 腰下, 宋花崗流域で居住したことは明らかな事実で歴史記録と出土された文物がもう証明している.

 

 

 


한국의 고대사는 1만년

 

"환국-배달국-고조선-고구려-발해 모두 한국역사"


[주은래 발언 전문] "영토침탈행위, 조상을 대신해 조선에 사과"

모택동(毛澤東)과 함께 중국혁명의 양대 지도자로 꼽히는 주은래(周恩來:1898-1976) 전 중국총리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환국-배달국-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하며, 중국의 팽창주의로 고대 한국의 영토가 침탈된 데 대해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 발언록이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은래 전 총리는 중국인들이 마오쩌뚱보다 더 존경하는 역대 최고지도자로,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현재 중국지도부가 추진중인 <동북공정> 등 역사왜곡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지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역사"

 

  이같은 사실은 현재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연수중인 설훈 전 의원이 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중국연수중 발굴한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을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설훈 전의원에 따르면, 이 문건은 주은래 전 총리가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발언을 기록한 것이다.

 

  주은래 당시 총리는 우선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주은래 총리는 구체적으로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말해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서기 644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시 양만춘 장군이 안시성에서 이를 격퇴한 일을 언급함으로써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또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주은래 "영토침탈, 조상을 대신해 당신들에게 사과"

 

  이처럼 중국 국수주의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질타한 주은래 총리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 행위를 사과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이같은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이처럼 주은래 총리 생전에는 한-중 고대사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분명한 인식이 존재했기에 역사왜곡 갈등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중국지도부는 경제력 팽창에 고무돼, 선배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정부차원의 조직적 역사왜곡에 나서 큰 갈등을 빚고 있다. 현 중국지도부가 자신들의 역사왜곡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우선 중국인민이 최대 존경하는 주은래 총리부터 "인민재판"에 붙인 뒤 역사왜곡 행위를 할 일이다.

 

  다음은 설훈 전의원이 공개한 주은래 총리의 발언 전문이다.

 

  주은래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금년(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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