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ナショナルジオグレピックチャンネルで資金性に対するドキュメンタリーを報告
本当にすごいという考えをしました.
ふとこの間朝鮮族観光ガイドが中国人観光客たちに景福宮を
案内しながら景福宮は資金性トイレに如くと言うというニュースが思い出して
果してどの位で規模差が出るか分かりたかったです.
検索して見たら本当に驚くべきですね.
景福宮も日製が崩す前にはおびただしい規模だったし(今は元々の 10分の 1)
高句麗アンハックグングの宮殿はドキュメンタリーでほめたたえた資金性胎化前よりもっと大きかったという...
今まで私自分も景福宮は資金性に比べればすずめのなみだと思っていた
歴史的無識が恥ずかしいだけです. 資金性は 9999間, 景福宮は 999間だと分かっていたんですよ.
アンハックグングは景福宮よりもチォラハンズル分かったんです.

私が分かりやすく規模を比べて見ました.

資金性-元々 9999間だったし, 現在 8800余間だ. 面積は 72万


지금은 절단나 있는 경북궁 소개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자금성에 대한 다큐를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득 얼마전 조선족 관광 가이드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경복궁을
안내하면서 경복궁은 자금성 화장실 만하다고 한다는 뉴스가 생각나서
과연 어느정도로 규모차이가 날까 궁금해졌습니다.
검색해보니 정말 놀랍더군요.
경복궁도 일제가 허물기 전에는 엄청난 규모였고(지금은 원래의 10분의 1)
고구려 안학궁의 궁전은 다큐에서 칭송한 자금성 태화전보다 더 컸다는...
지금까지 저 자신도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역사적 무식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자금성은 9999칸, 경복궁은 999칸인줄 알고있었거든요.
안학궁은 경복궁보다도 초라한줄 알았고요.

제가 알기 쉽게 규모를 비교해봤습니다.

자금성-원래 9999칸이었고, 현재 8800여 칸이다. 면적은 72만㎡
경복궁-원래 7481칸이었지만 현재 700여 칸이다. 면적은 34만 3888.1㎡
고구려 안학궁-면적은 38만 ㎡

자금성은 동서 760m 남북 960m 규모
경복궁은 동서 500m 남북 700m 규모,
고구려 안학궁은 정사각형-한변 622m

자금성 태화전은 남북 33m, 동서 60m 높이 35미터
경복궁 근정전은 앞면 30미터.·옆면 21미터. 높이 25미터
고구려 안학궁-남궁은 앞면 62미터
고구려 안학궁-중궁은 앞면 87미터. 옆면 27미터-높이 2m가 넘는 치미(기와장식품)


그리고 참고로 경복궁 근정전 내부가 신하들이 옥좌앞에 도열해서 국사를 논하기에는 너무 좁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자금성 태화전 역시 신하들이 도열할 내부공간은 별로 없었습니다.
태화전은 가로로 길게 건설되어 배치되어있고 그 직각 방향으로 문이 있어서
옥좌가 그 방향으로 되어있으니까요.
그 웅장한 태화전도 옥좌 앞에서 출입문까지 별로 공간이 없었습니다.
둘다 조회나 의식에 쓰였고 신하들은 광장에 도열했던 거였더군요.

태화전의 크기는 동서 60미터가 아니라 64미터라는 자료도 있던데
여러번 불에 타고 다시 지었던거라 서로 다른것같습니다.
경복궁앞에 원래 경복궁이 7481칸이었고 9999칸의 자금성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웅장했었다는 푯말이라도 세워놓으면 화장실 어쩌구 하는 말따위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은 황세옥님이 경복궁과 안학궁의 규모를 비교할수있게 해주신 자료입니다.

============================================

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http://blog.daum.net/tasofhso/10356473


위에서부터

1. 경복궁 근정전 30.7m 앞면 5칸

2.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3.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4.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사진에서는 양쪽이 잘려나왔습니다.) 앞면 19칸


순수하게 건물 크기만을 비교하기 위해 경복궁 근정전의 기단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고구려 안학궁의 궁궐 남문이 경복궁 정전보다 크고 남대문 면적의 3배에 달합니다.

흔히 과거로 갈수록 초라하고, 빈곤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나라의 고대는 소박한 조선의 이미지와 달리 거대하고 화려했습니다.



서동요의 경우도 예산문제로 셋트의 규모가 너무 작게 만들어졌는데 안타깝습니다.

사진의 가로폭이 좁아 더이상의 건물비교를 하지 못했는데 발해 상경용천부 황궁의 건물 크기는 더 큰것도 있으며 안학궁의 동궁도 가로 100m가 넘습니다.



현존하는 전세계 최대 목조건축물이라는 일본의 동대사 대불전도 행기, 고려복신, 국중마려, 저명부백세등등 삼국인들이 지은것입니다.



일본은 비교적 고건축물이 잘 남아있고 파손되었다 해도 오히려 처음의 건물과 다른 건물처럼 날조하다 싶이 화려하게 복원해 문화관광상품으로 탈바꿈 시키는 데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엔 수많은 화려한 유적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복원에는 엄두도 못내어 직접 피부에 와닿지 않는 어린 학생들은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를 동경하는 일까지 생기고있습니다.본 국민들이 이런 상황이니 외국에서도 한국을 중국이나 일본의 아류로 여기고 있고 삼성은 알아도 한국은 모르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자금성
(태묘와 사직단 구역 제외한 궁궐 지역만..이걸 포함시키면 경복궁도 똑같은 비교를 위해
종묘와 사직단을 포함시켜야 함...실제로 자금성이라고 하면 태묘와 사직단을 제외시킴)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총 둘레 길이....약 3.52km

경복궁 ( 고종 중건 당시 궁궐지,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궁성둘레 1,813보(1보=6척=약 180cm)....환산하면....총 둘레 길이....약 3.26km(이것도 청와대 지역 포함으로
여겨짐...제외시 2.xxkm 정도)

참고로...

자금성...9999칸(원래).....약8800여칸(현재)
경복궁...7481칸(원래<--현 청와대 지역의 경복궁 후원포함...후원지역 제외하면 7225칸인가 그러함)
).....현재 1/10수준 좀 넘게 남아있고...복원중

결론 : 개개 건물 규모 크기 차이일 뿐..경복궁이 자금성 화장실 운운하는 건 개헛소리에 불과

*참고로 조선시대 궁궐지(궁궐 조성 기록한 책)에는 경복궁 권역에 후원까지 포함시킴
19세기 서울 전도를 봐도 그렇게 표시됨

 

 

 

 

 

 

 

그것 뿐만이 아니고.. 광화문 앞의 큰 대로는 원래 관청거리로 여기에 이,호,예,병,형,공조가 있던 것을 합치면 규모는 더 거대해진다,, 그리고 경복궁 주변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었는데 지금은 콘크리트로 다 덮여 버렸다.. 교보문고 뒤편, 미국대사관 뒤편의 골목 아래는 지금도 개천이 흐르고 있어

 

아 경복궁 담장 안으로 건물 없도 없이 헐려서 휑한걸 . . 교활한 새끼들 . .

 

1. 조선시대

 
2. 일제
 

3. 2009년 단기 복원 후 모습

 

 

 

 

 

 

 

 

북악산과 경복궁 (멀리 보이는 건물) 

 

서지는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었다.
서지는《한경지략(漢京識略)》에 “연꽃이 무성하여 여름철에 성안의 사람들이 연꽃 구경하는 곳으로 여기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연못가에는 천연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원래 이곳은 이해중(李海重)이라는 사람의 별장이었다가 경기감영의 중영(中營)으로 사용되었다. 천연정 옆에는 고려시대 어느 임금이 비를 피했다는 멋진 반송정(盤松亭)이 있었다고 한다.

경북궁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의 모습은]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

[서울에는]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 명나라 사신 동월의 조선부(1488년) ,  1488년(성종 19)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본국에 돌아가  조선 풍토(風土)를 묘사한 책 -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 선교사 , 루이스 프로이스 -

 

 

 

 

5월3일 술시.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했다. 거기서 황궁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시황의 궁궐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 장군도 천자의 옥좌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 고니시 휘하 장수 오오제키의 조선정벌기中 -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그린 기린, 봉황, 공작, 학, 용,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단학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종군승(從軍僧) 제다쿠(是琢)의 조선일기 -

 

 

 

 

 

 

 

조선 사람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이라도

집에 책이 있고 학문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다.

이는 선진국으로 자부하는 우리의 자존심마져 겸연쩍게 만든다

 

                                                                     -<뚜르드 몽드> (1866)

 

조선에는 종이,인삼,금과 은, 각종 유약과 향료 등 귀한 물자와

3피트 높이의 조랑말 등 진기한 동물들이 풍부하다.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창덕궁

 

홍화문과

 

 

경북궁 근정전

 

일제 민족말살 경북궁을 해체하고 조선총독부 건축중

죽일놈들

유서 깊은 민족의 궁궐을 절단내고 이러고 있단다

 

일본 씨x놈들

 

 

 

 

 

 

본래 경복궁의 그림입니다

 

 

 

 

경희궁은 일제의 조선궁궐 훼손 정책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비운의 궁궐’이다.

원래 조선 인조의 생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1616년(광해군 8년) 건립 당시에는 ‘경덕궁’이라고 불렀으나,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은 경사진 야산 지형과 조화를 이룬 구조로 건축적, 예술적으로도 뛰어났다.

숙종 때 편찬한 ‘궁궐지’를 보면, 전각과 문루가 99동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

그러나 경희궁은 일제의 침략 뒤 경성중학교로 바뀌면서 완전히 해체됐다.

이는

              경복궁을 조선총독부로!!,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창덕궁을 비원으로,

            덕수궁을 미술관으로 격하!!!!

정전인 숭정전은 1908년 경성중학교의 교실로 이용되다가 일본 절 ‘조계사’로 팔렸고,

현재는 동국대의 ‘정각원’이라는 불당으로 남아 있다.

정문인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의 북문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뒤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쓰였다.

 

현재 아주 일부의 모습만  남아있는 경복궁

 

 

복원중인 경복궁...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경복궁은 실제 경복궁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합니다

본래 경복궁은 북쪽의 청와대부터 남쪽까지가 웅장하고 상당히 넓고 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그 경복궁이 임진왜란때 불타고 고종때에 재건될때까지만 해도, 재건의 주도자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왕권강화의 명목으로 삼았던 만큼 규모가 컸으면 컸지, 기존보다 줄여서 복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 . .

재건된 경복궁은 당연히 조선의 정궁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지만, 대원군 실각후 누구 소행인지 모를 화재가 나 경복궁 일부가 불에 타고, 일제시기에 다시 일본이 훼손을 자행하면서 심각하게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결론은 경복궁을 축소 훼손한 것은 일본이란 얘깁니다..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일제는 경복궁은 물론이고,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특히 창경궁에는 동물원까지 만들어 궁이 아니라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원구실을 했을 정도니..

그 훼손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 .

 
 
 
피해 상태가 크기 때문에 2030까지 복원을 한다는것 같습니다 . .
 

 

         

            성군 고종황제에 대한 쓰라린 연민의 눈물만  . .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언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일본을 가리킴)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을 뜻함)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박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요.

나ㅡ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깊은 곳에 갇힌 몸이 되어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한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지금 나 경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認准)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들을 도우리라.

(조정구에게 조칙을 나리우심)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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