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일본역사를 공부한 서양인들이 가장 놀라는 것은

일본의 문화의 대부분이 한국과 관련이 있거나 한국에서 가져온것이다.


한국 문화재는 일본에 엄청나게 존재한지만
일본 문화재는 한국에는 1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일본 역사를 공부하면 백제의 멸망후
일본 지배계층(한반도 도래인)에 의한 거짓말 일본서기를 시작으로 왜곡된 일본역사를 알게 된다.

처음 일본 건국의 역사가 거짓말이니 그후의 일본 역사는 왜곡을 변명하기
전부 날조될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일본 역사의 비극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특이한 발전 방식
수천명의 한국 도자기 기술자를 전부 납치하여 일본이라는 나라가 발전하게 된다.

보통은 기술을 자국민이 기술의 외국에서 배우거나 도입한다.
일본은 한국의 산업 전체를 통째로 약탈, 납치한 아주 특이한 발전 방식이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임진왜란은 도공 납치의 다기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키던 당시의 일본 사회는 다도가 성행되던 시대로서, 이를 대성시킨 센노 리큐가 활약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도요토미는 나고야의 진중에서도 차 모임을 베풀면서 차를 즐기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찻잔은 중국과 조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참전한 대부분의 재후들은 다도를 수련했는데 일본의 국토가 협소하여 전승한 군인들에게 토지 대신에 다구(茶具)로 포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도공 납치와 도자기 수탈로 인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른다. 당시 납치된 천여 명의 도공 후예들은 현재까지 일본의 도예계를 이끌어 가는 주축이 되고 있으며, 지금도 “임란 도공 육가문” 이란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당시 납치된 대표적인 도공들 가운데 바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리타야키의 시조인 이삼평이 있었으며, 사쓰마야키로 알려진 심수관의 선조와 동료들도 같은 경우였다. 이삼평은 아리타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흙을 밝견했는데,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다. 이를 계기로 이삼평은 지금도 일본에서 도조로 추양받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찻단지 한 개와 성 하나를 동격으로 여기던 장군도 있었다. 그래서 장군들이 조선의 도자기에 대해 탐을 내기도 했거니와, 도공을 납치하라는 주인장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정유재란에 참전한 제후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도공을 조선에서 잡아갔다. 납치된 도공들에 의해 도가지 문화의 꽃이 핀 일본에는 지금도 조선의 도예 용어가 전승, 사용되고 있을정도이다.






 

후쿠오카 현


타카토리 - 엔슈 7가마의 하나.1600년 조선인 도공 팔산(八山)에 의해 창시되고 그의 아들들에 의해 계승발전된다. 1614년 지방영주 타카유키에게 귀국 요청을 하다 미움을 받아 산속으로 칩거한다. 칩거도중에도 생계를 위해 도자기 계속 굽는데 양질의 도자기를 많이 생산해 명성을 쌓아 사면받게 되고, 지방영주 타카유키의 소개로 다도의 대가 고보리 엔슈와 교류를 가져 다도용 찻그릇을 본격적으로 생산한다.

 

우에노 - 후쿠오카현 타가와 군, 카와라마치, 복지마치, 오토우마치에서 구워지는 도자기다. 임진왜란때 가토기요마사에 의해 귀화한 조선도공 존해(尊楷)에 의해 창시되었다. 다도에 조예가 깊은 센리큐우로부터 직접 사사받고 영주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고보리 엔슈의 지도를 받고 더욱 격조 높은 다기를 만들어 내어, 엔슈 7가마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카바이케 -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따라 출정한 彦三?方親가 조선에서 자기 기술을 전수 받아 귀국 후 나고야에서 가마를 세워 생산한 도자기를 나고야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한 후 “이에나가(家永)” 라는 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극찬을 받고,  이후 일반에의 판매를 금지한 채 조정과 막부 헌상품으로서 대우받았다.

일의뢰 - 임진왜란 때 일의뢰? 성주가 데려 온 조선도공 이동성(李東成)이 창시했다. 그 후, 명으로부터 온 오상서(?祥瑞)의 자기 기술을 접목했다. 이후 쿠루메번의 용무가마로서 자기를 굽고 있었지만, 메이지 유신 후 단절. 현재의 일의뢰 소(燒)는 쇼와 34년(1659년)에 부활한 것. 


사가현


이마리 아리타 - 통설은 1616년 조선 도공 이삼평이 창시. 조선 도공 집단이 최초의 이마리 가마를 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자기가 구워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중국풍의 채색 자기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왕조교체기의 혼란으로 중국자기 수출이 중단되자 대안으로 이마리 자기가 수출되어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중국 자기의 수출이 재개된 이후에는 이마리의 인기에 힘입어 중국에서 이마리를 모방하기도 했다.

 

히젠 요시다 - 에도초기 (1624-1644) 사가 지방영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조선도공을 요시다 산에 보내 자기를 굽게 한 것이 히젠 요시다 가마의 기원. 1880년에는 정성사라는 도자기 회사가 설립되어 중국과 조선 방면에 생활 식기를 수출. 타이쇼期(1912~1926) 동안에는 한반도의 도자기시장을 석권했다.

 

카라쓰 지역 도자기


가라쓰 지역에서는 적어도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도자기를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현존하는 고도의 도자기 제작 기술은 한반도로부터 온 도공 집단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진왜란은 (1592-1598)은 일반적으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듯 서일본의 諸영주들은 서로 경쟁하듯 조선 각지의 도공을 강제 연행해, 자기영지에서 도자기 제작에 종사시켰다. 현재의 가라쓰 지역 도자기의 직접적인 기원도 조선 도공의 연행에서 시작한다.

 

마츠우라계 古카라쓰 - 다도에 능한 무장 사와 시마 마모루는 마츠우라 지방일대에 가마를 쌓아 올리고 게이쵸 연간(1596-1615)에는 이마리 일대에 가마를 쌓아 올리고, 겐나 연간(1615-1624)에는 고려신제가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타케오계 古카라츠 - 조선 출병 때 나베시마를 따라 종군 한 타케오 영주는 종전하면서 데려온 조선 도공들에게 영내에서 도자기를 제작하게 한 것이 시초

 

佐嘉 카라츠 - 확실한 문헌으로 증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의 이마리시 오오코우치산에 남아 있는 수개의 가마터가 초기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강제 연행된 조선도공들이 쌓아 올린 가마로 추정되고 있다.

 

타쿠계 古카라츠 - 나베시마의 시중을 든 타쿠 영주 타쿠야스요리가 조선에서 데려온 이삼평이 연 가마가 최초 기원이 된다.

 

히라도계 古카라츠 - 히라도 지방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가 조선에서 데려간 김인 외 백수십명의 도공이 쌓아 올린 가마가 기원이 된다. 

 

이사하야 카라츠 - 나베시마번의 지번인 이사하야 영주 상총계 도안(道安)에 의해 연행? 된 조선 도공 도진이 개요(開窯)하였다.

 

타케오 古카라츠 도자기

 

쇼와63년(1988)부터 타케오시 지역에서 구워지는 도자기.
연원은 조선 김해의 도공 심해氏(新太郞宗傳)가 타케우치 땅에서 시작.

타케오 北系 古카라츠 -현재의 타케오시의 타케우치쵸, 와카키쵸, 아사히쵸 등에 분포하고 있는 기술과 그 제품..

타케오 南系 古카라츠 - 현재의 키시마군 야마우치쵸판의 카와치구, 타케오시 히가시카와노보리쵸와 니시카와노보리쵸의 고요후지츠군 시오타쵸 대초 흙막이(sheathing)분에게 분포한 기술과 그 제품.

 

쿠로무타 - 타케오 북부계 코(古)카라츠 계열의 가마. 조선 도공 심해氏를 비롯 조선계 도공에 의해 타케우치의 쿠로무타에 세워진 가마. 주로 생활 잡기가 구워졌고, 그림 도안과 귀얄로 바른 자국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타타라 - 타케오 북부계 코카라츠에 속하며 임진왜란 때 도래한 조선 도공들이 세웠다. “타타라” 라나는 이름은 마츠우라系 코카라츠의 가마가 있던 산의 봉우리에 上타타라, 中타타라, 下타타라 라고 하는 유적이 있어, 타타라의 神이라고 칭해, 고려神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케우치의 우치다나 아사히무라의 한죠, 나가사키현 미카와치의 장 하야마 등에도 타타라 혹은 타타라 가마의 지명이 있어, “타타라 신”과 관계가 있는 명사로서 추정되고 있다.

 

코타지 - 모모야마 시대 말기(덴쇼 연간)으로부터 약 400여년의 역사가 있는 타케오 남부계 코카라츠다. 조선도공 심해氏가 연 가마가 최초 기원으로서 최초는 우치다산, 쿠로무타산, 히라코장 등을 중심으로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남부계 코카라츠는 송회로 대표되는 채색화도 볼 수 있고, 비교적 화려한 물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나가사키 현

 

하사미 - 게이쵸 4년(1599) 오오무라 지방 영주가 조선에서 데려 온 도공 이우경(李祐慶) 형제와 박정의(朴正意) 등이 개요한 것이 기원이 되어 에도시대 말기에는 세계 최대라고도 하는 나카오 가마(전체 길이 160 m이상)를 시작해 100 m이상의 거대한 오름가마가 수기 구워졌다. 현재 일용품 자기를 중심으로 생산하며 일본 국내 일식 그릇의 약 18%를 생산.

 

미카와 우치 - 게이쵸 3년(1598). 히라도 지방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가 임진왜란으로 데려 온 조선 도공 약 100명을 동원해 가마를 쌓아 올리게 한 것이 기원.


카고시마현

 

- 임진왜란으로 사츠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가 데려 온약 80명의 조선 도공들의 개요가 기원,조선 도자기 도래의 연대에 대해서는 문록 4년 1595년설과 게이쵸 3년 1598년설이 있는데, 현재는 후자가 더 신빙성 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1598년 3년 8월 히데요시가 죽고, 요시히로는 군을 정리해 11월에 귀환한다. 조선인 도공들이 일본에 상륙했던 것도 바로 이때라고 추정되는데 상륙지점은 쿠시키노시의 시마 히로시와 히가시치키쵸의 카미노카와, 그리고 카고시마항의 삼개소이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요시히로는 은거했고, 조선도공들은 상륙 후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느끼고, 주민들의 박해를 받으며 궁핍한 생활을 하는 상태였지만, 수년후 히가시이치키의 나에시로(현재의 미야마)의 땅에 가마를 쌓아 올려 생활잡기를 구워 주변의 주민들에게 제공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후 사쿠라지마의 칩거에서 풀린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공 집단의 장이었던 김해(金海: 星山仲次)에게 명해 다기를 굽게 하였다.

 

나에시로가와계(苗代川系) 가마 : 사츠마 반도 서해안 일대의 諸 가마를 말한다. 게이쵸 3년에 도래한 조선 도공 집단에 의해 최초로 개요. 도공 박평의를 대표로 들 수 있다.

 

다테노계(堅野系) 가마 : 시마즈 요시히로가 김해(金海:星山仲次)에 명해 만들게 한 조사의 우츠 가마가 기원이 된다.

 

류몬지계(龍門司系) 가마  : 게이쵸 연간 말 무렵 조선 도공 변방중(卞芳仲)에 의해 시작.

 

니시모치다계(西?田系) 가마  : 간분 연간 초기에 조선 도공 가마 계열에 속하지 않는 가마가 조사의 니시모치다에 일으켜졌다.카고시마현의 4대 도자기 가마로서 예외적으로 이것은 일본인 오노겐류(小野元立)가 도조(陶祖)이다.


오키나와 현

 

츠보야 - 14-16c 무렵 류큐 왕국은 중국이나 동남아 방면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지만, 류큐의 자체적인 도자기 제조기술은 술이나 물을 저장하기 위한 옹이나 단지를 만드는 아주 초보적인 기술밖에는 없었다. 1609년 시마즈 이에히사가 류큐를 침공해 와 류큐 왕국은 사츠마 점령시대에 들어간다. 무역면에서 다양한 제약을 받게 되는데, 이 때문에 왕부는 역내 산업 진흥책을 취했다. 류큐의 쇼네이왕(?寧王)은 조선식 도자기 제작법을 배우기 위해 사츠마에 조선 도공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 결과 3명의 조선 도공이 와 도자기 기법(來流)을 전했고, 이후 상소(上素)로 불리는 제품이 구워지게 되었다. 조선 도공 장일육(張一六:仲地麗伸)은 류큐에 머물며 류큐의 도자기 기술 발전에 온정성을 다했다. 17 세기 초 류큐에는 고아지, 키나, 치바나, 타카라구, 용전 등에 가마가 있었다. 1671년에는, 류큐는 도공 히라타를 중국에 파견해 붉은 그림 도자기의 기법을 배우게 했다.


류큐 - 전통적인 호옥(?屋) 가마를 제외하고는 오키나와현의 모든 가마를 총칭해 류큐 가마라고 부르고 있다. 오키나와의 도자기의 발상은15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겐나3년(1617)에 사츠마로부터 초빙 된 조선 도공 일육(一六)、일관(一官)、삼관(三官)에 의해서 조선의 기법이 전래되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간분10년 (1670)에는 도공 히라타가 중국에 건너가 중국식 제도를 배워 기술의 폭을 더욱 넓혔다.


야마구치 현

 

하기 - 임진왜란(1592-1598) 때 모리 데루모토가 데려 간 조선 도공 이작광, 이경 형제가 개요한 것이 기원이 된다. 히데요시의 죽음이후 발발한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패배한 모리 데루모토는 하기로 도망? 가게 되는데 이때 李형제도 모리 데루모토를 따라 히로시마에서 하기(萩)로 옮기게 된다. 이경은 마츠모토 나카노쿠라(하기이치 친토우)에 개요 하는데 그 계통은 마츠모토 하기로 불리고 있고, 이작광은 후카가와 산지레(나가토시)에 개요 해, 이 계통은 후카가와 하기로 불린다. 어느쪽이든 번의 용무가마였지만, 3대째가마까지의 작품을 古하기라고 부르고 있다. 대표적 작풍은 조선계의 영향이 강하고 돌금이 들어가는 금전유의 밥공기가 하기소의 특징이 되고 있다.


도쿄부

라꾸 - 덴쇼 6,7년경 (1577,8) 도래인 아미야(阿米夜)가 창시했다고 전승되고 있다. 고문서에 의하면 초대 쵸지로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중국인 아미야(阿米也)라는 인물이 기재되어 있다. 비록 작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인물이 중국으로부터 삼채도의 기법을 전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교토를 중심으로 중국 카난 지방의 삼채유를 이용하는 도자기가 제작되고 있었지만 초대 쵸지로도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들 중국 삼채유의 영향을 받은 구이와 쵸지로의 요소는 크게 차이가 난다. 기본적인 소성유기술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조형, 유조에 이르는 미의식은 중국 카난 지방의 삼채와는 크게 다르다. 라꾸 도자기의 시초는 어디까지나 쵸지로가 다도의 대성자 센리큐우를 만나 토시야스를 위해 다도에 이용하는 공기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에이로쿠 12년에 쿄토 니죠성이 완성될 때 그 기와를 조선인 일관이 구웠다고 여겨지고 있어, 초대 쵸지로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고, 가토 도우쿠로씨의 설에 의하면, 초대 쵸지로가 구웟다고 현재 확인되어 있는 유일한 것인 사자류개 기와는 하야후네 밥공기와 흙이 같고, 적유도 동일하다. 또 둘 다 천정이 없는 라꾸 가마로 구웠다고 하는 전승으로부터 기와 가마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밖에 발견되는 여러 밥공기가 고려밥공기의 영향이 강하여 초대 초지로가 조선 도래인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주목할 만하다.

미야기현

절입 - 토호쿠 최고의 자기로 불리고 있지만, 창시 시기나 창시자 등은 모두 수수께끼에 싸이고 있다. 에도 초기에 지방 영주 다테 마사무네가, 이마리로부터 조선 도공을 리쿠젠 절입에 불러 개요 한 자기가마라고 하고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에도 말기에 개요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테번의 용무가마로서 돋보였다. 최성기는 요시나가 안정 연간(1848-1860)으로, 찻그릇, 꽃병, 접시, 차분히등이 구워졌다.절입소는,  도석의 고갈이나세토방면에서의 염가의 자기의 유입에 의해서 쇠약해져 메이지 12년경에는 끊어져 버렸다.타이쇼 9년이 되고 부흥이 시도되었다.


★★ 일본의 발전 ★★


일본역사를 공부한 서양인들이 가장 놀라는 것은

일본의 문화의 대부분이 한국과 관련이 있거나 한국에서 가져온것이다.


한국 문화재는 일본에 엄청나게 존재한지만
일본 문화재는 한국에는 1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일본 역사를 공부하면 백제의 멸망후
일본 지배계층(한반도 도래인)에 의한 거짓말 일본서기를 시작으로 왜곡된 일본역사를 알게 된다.

처음 일본 건국의 역사가 거짓말이니 그후의 일본 역사는 왜곡을 변명하기
전부 날조될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일본 역사의 비극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특이한 발전 방식
수천명의 한국 도자기 기술자를 전부 납치하여 일본이라는 나라가 발전하게 된다.

보통은 기술을 자국민이 기술의 외국에서 배우거나 도입한다.
일본은 한국의 산업 전체를 통째로 약탈, 납치한 아주 특이한 발전 방식이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임진왜란은 도공 납치의 다기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키던 당시의 일본 사회는 다도가 성행되던 시대로서, 이를 대성시킨 센노 리큐가 활약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도요토미는 나고야의 진중에서도 차 모임을 베풀면서 차를 즐기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찻잔은 중국과 조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참전한 대부분의 재후들은 다도를 수련했는데 일본의 국토가 협소하여 전승한 군인들에게 토지 대신에 다구(茶具)로 포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도공 납치와 도자기 수탈로 인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른다. 당시 납치된 천여 명의 도공 후예들은 현재까지 일본의 도예계를 이끌어 가는 주축이 되고 있으며, 지금도 "임란 도공 육가문" 이란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당시 납치된 대표적인 도공들 가운데 바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리타야키의 시조인 이삼평이 있었으며, 사쓰마야키로 알려진 심수관의 선조와 동료들도 같은 경우였다. 이삼평은 아리타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흙을 밝견했는데,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다. 이를 계기로 이삼평은 지금도 일본에서 도조로 추양받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찻단지 한 개와 성 하나를 동격으로 여기던 장군도 있었다. 그래서 장군들이 조선의 도자기에 대해 탐을 내기도 했거니와, 도공을 납치하라는 주인장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정유재란에 참전한 제후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도공을 조선에서 잡아갔다. 납치된 도공들에 의해 도가지 문화의 꽃이 핀 일본에는 지금도 조선의 도예 용어가 전승, 사용되고 있을정도이다.






 

후쿠오카 현


타카토리 - 엔슈 7가마의 하나.1600년 한국인 도공 팔산(八山)에 의해 창시되고 그의 아들들에 의해 계승발전된다. 1614년 지방영주 타카유키에게 귀국 요청을 하다 미움을 받아 산속으로 칩거한다. 칩거도중에도 생계를 위해 도자기 계속 굽는데 양질의 도자기를 많이 생산해 명성을 쌓아 사면받게 되고, 지방영주 타카유키의 소개로 다도의 대가 고보리 엔슈와 교류를 가져 다도용 찻그릇을 본격적으로 생산한다.

 

우에노 - 후쿠오카현 타가와 군, 카와라마치, 복지마치, 오토우마치에서 구워지는 도자기다. 임진왜란때 가토기요마사에 의해 귀화한 조선도공 존해(尊楷)에 의해 창시되었다. 다도에 조예가 깊은 센리큐우로부터 직접 사사받고 영주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고보리 엔슈의 지도를 받고 더욱 격조 높은 다기를 만들어 내어, 엔슈 7가마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카바이케 -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따라 출정한 彦三?方親가 조선에서 자기 기술을 전수 받아 귀국 후 나고야에서 가마를 세워 생산한 도자기를 나고야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한 후 "이에나가(家永)" 라는 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극찬을 받고,  이후 일반에의 판매를 금지한 채 조정과 막부 헌상품으로서 대우받았다.

일의뢰 - 임진왜란 때 일의뢰? 성주가 데려 온 조선도공 이동성(李東成)이 창시했다. 그 후, 명으로부터 온 오상서(?祥瑞)의 자기 기술을 접목했다. 이후 쿠루메번의 용무가마로서 자기를 굽고 있었지만, 메이지 유신 후 단절. 현재의 일의뢰 소(燒)는 쇼와 34년(1659년)에 부활한 것. 


사가현


이마리 아리타 - 통설은 1616년 조선 도공 이삼평이 창시. 조선 도공 집단이 최초의 이마리 가마를 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자기가 구워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중국풍의 채색 자기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왕조교체기의 혼란으로 중국자기 수출이 중단되자 대안으로 이마리 자기가 수출되어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중국 자기의 수출이 재개된 이후에는 이마리의 인기에 힘입어 중국에서 이마리를 모방하기도 했다.

 

히젠 요시다 - 에도초기 (1624-1644) 사가 지방영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조선도공을 요시다 산에 보내 자기를 굽게 한 것이 히젠 요시다 가마의 기원. 1880년에는 정성사라는 도자기 회사가 설립되어 중국과 조선 방면에 생활 식기를 수출. 타이쇼期(1912~1926) 동안에는 한반도의 도자기시장을 석권했다.

 

카라쓰 지역 도자기


가라쓰 지역에서는 적어도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도자기를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현존하는 고도의 도자기 제작 기술은 한반도로부터 온 도공 집단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진왜란은 (1592-1598)은 일반적으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듯 서일본의 諸영주들은 서로 경쟁하듯 조선 각지의 도공을 강제 연행해, 자기영지에서 도자기 제작에 종사시켰다. 현재의 가라쓰 지역 도자기의 직접적인 기원도 조선 도공의 연행에서 시작한다.

 

마츠우라계 古카라쓰 - 다도에 능한 무장 사와 시마 마모루는 마츠우라 지방일대에 가마를 쌓아 올리고 게이쵸 연간(1596-1615)에는 이마리 일대에 가마를 쌓아 올리고, 겐나 연간(1615-1624)에는 고려신제가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타케오계 古카라츠 - 조선 출병 때 나베시마를 따라 종군 한 타케오 영주는 종전하면서 데려온 조선 도공들에게 영내에서 도자기를 제작하게 한 것이 시초

 

佐嘉 카라츠 - 확실한 문헌으로 증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의 이마리시 오오코우치산에 남아 있는 수개의 가마터가 초기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강제 연행된 조선도공들이 쌓아 올린 가마로 추정되고 있다.

 

타쿠계 古카라츠 - 나베시마의 시중을 든 타쿠 영주 타쿠야스요리가 조선에서 데려온 이삼평이 연 가마가 최초 기원이 된다.

 

히라도계 古카라츠 - 히라도 지방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가 조선에서 데려간 김인 외 백수십명의 도공이 쌓아 올린 가마가 기원이 된다. 

 

이사하야 카라츠 - 나베시마번의 지번인 이사하야 영주 상총계 도안(道安)에 의해 연행? 된 조선 도공 도진이 개요(開窯)하였다.

 

타케오 古카라츠 도자기

 

쇼와63년(1988)부터 타케오시 지역에서 구워지는 도자기.
연원은 조선 김해의 도공 심해氏(新太郞宗傳)가 타케우치 땅에서 시작.

타케오 北系 古카라츠 -현재의 타케오시의 타케우치쵸, 와카키쵸, 아사히쵸 등에 분포하고 있는 기술과 그 제품..

타케오 南系 古카라츠 - 현재의 키시마군 야마우치쵸판의 카와치구, 타케오시 히가시카와노보리쵸와 니시카와노보리쵸의 고요후지츠군 시오타쵸 대초 흙막이(sheathing)분에게 분포한 기술과 그 제품.

 

쿠로무타 - 타케오 북부계 코(古)카라츠 계열의 가마. 조선 도공 심해氏를 비롯 조선계 도공에 의해 타케우치의 쿠로무타에 세워진 가마. 주로 생활 잡기가 구워졌고, 그림 도안과 귀얄로 바른 자국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타타라 - 타케오 북부계 코카라츠에 속하며 임진왜란 때 도래한 조선 도공들이 세웠다. "타타라" 라나는 이름은 마츠우라系 코카라츠의 가마가 있던 산의 봉우리에 上타타라, 中타타라, 下타타라 라고 하는 유적이 있어, 타타라의 神이라고 칭해, 고려神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케우치의 우치다나 아사히무라의 한죠, 나가사키현 미카와치의 장 하야마 등에도 타타라 혹은 타타라 가마의 지명이 있어, "타타라 신"과 관계가 있는 명사로서 추정되고 있다.

 

코타지 - 모모야마 시대 말기(덴쇼 연간)으로부터 약 400여년의 역사가 있는 타케오 남부계 코카라츠다. 조선도공 심해氏가 연 가마가 최초 기원으로서 최초는 우치다산, 쿠로무타산, 히라코장 등을 중심으로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남부계 코카라츠는 송회로 대표되는 채색화도 볼 수 있고, 비교적 화려한 물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나가사키 현

 

하사미 - 게이쵸 4년(1599) 오오무라 지방 영주가 조선에서 데려 온 도공 이우경(李祐慶) 형제와 박정의(朴正意) 등이 개요한 것이 기원이 되어 에도시대 말기에는 세계 최대라고도 하는 나카오 가마(전체 길이 160 m이상)를 시작해 100 m이상의 거대한 오름가마가 수기 구워졌다. 현재 일용품 자기를 중심으로 생산하며 일본 국내 일식 그릇의 약 18%를 생산.

 

미카와 우치 - 게이쵸 3년(1598). 히라도 지방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가 임진왜란으로 데려 온 조선 도공 약 100명을 동원해 가마를 쌓아 올리게 한 것이 기원.


카고시마현

 

- 임진왜란으로 사츠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가 데려 온약 80명의 조선 도공들의 개요가 기원,조선 도자기 도래의 연대에 대해서는 문록 4년 1595년설과 게이쵸 3년 1598년설이 있는데, 현재는 후자가 더 신빙성 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1598년 3년 8월 히데요시가 죽고, 요시히로는 군을 정리해 11월에 귀환한다. 한국인 도공들이 일본에 상륙했던 것도 바로 이때라고 추정되는데 상륙지점은 쿠시키노시의 시마 히로시와 히가시치키쵸의 카미노카와, 그리고 카고시마항의 삼개소이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요시히로는 은거했고, 조선도공들은 상륙 후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느끼고, 주민들의 박해를 받으며 궁핍한 생활을 하는 상태였지만, 수년후 히가시이치키의 나에시로(현재의 미야마)의 땅에 가마를 쌓아 올려 생활잡기를 구워 주변의 주민들에게 제공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후 사쿠라지마의 칩거에서 풀린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공 집단의 장이었던 김해(金海: 星山仲次)에게 명해 다기를 굽게 하였다.

 

나에시로가와계(苗代川系) 가마 : 사츠마 반도 서해안 일대의 諸 가마를 말한다. 게이쵸 3년에 도래한 조선 도공 집단에 의해 최초로 개요. 도공 박평의를 대표로 들 수 있다.

 

다테노계(堅野系) 가마 : 시마즈 요시히로가 김해(金海:星山仲次)에 명해 만들게 한 조사의 우츠 가마가 기원이 된다.

 

류몬지계(龍門司系) 가마  : 게이쵸 연간 말 무렵 조선 도공 변방중(卞芳仲)에 의해 시작.

 

니시모치다계(西?田系) 가마  : 간분 연간 초기에 조선 도공 가마 계열에 속하지 않는 가마가 조사의 니시모치다에 일으켜졌다.카고시마현의 4대 도자기 가마로서 예외적으로 이것은 일본인 오노겐류(小野元立)가 도조(陶祖)이다.


오키나와 현

 

츠보야 - 14-16c 무렵 류큐 왕국은 중국이나 동남아 방면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지만, 류큐의 자체적인 도자기 제조기술은 술이나 물을 저장하기 위한 옹이나 단지를 만드는 아주 초보적인 기술밖에는 없었다. 1609년 시마즈 이에히사가 류큐를 침공해 와 류큐 왕국은 사츠마 점령시대에 들어간다. 무역면에서 다양한 제약을 받게 되는데, 이 때문에 왕부는 역내 산업 진흥책을 취했다. 류큐의 쇼네이왕(?寧王)은 조선식 도자기 제작법을 배우기 위해 사츠마에 조선 도공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 결과 3명의 조선 도공이 와 도자기 기법(來流)을 전했고, 이후 상소(上素)로 불리는 제품이 구워지게 되었다. 조선 도공 장일육(張一六:仲地麗伸)은 류큐에 머물며 류큐의 도자기 기술 발전에 온정성을 다했다. 17 세기 초 류큐에는 고아지, 키나, 치바나, 타카라구, 용전 등에 가마가 있었다. 1671년에는, 류큐는 도공 히라타를 중국에 파견해 붉은 그림 도자기의 기법을 배우게 했다.


류큐 - 전통적인 호옥(?屋) 가마를 제외하고는 오키나와현의 모든 가마를 총칭해 류큐 가마라고 부르고 있다. 오키나와의 도자기의 발상은15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겐나3년(1617)에 사츠마로부터 초빙 된 조선 도공 일육(一六)、일관(一官)、삼관(三官)에 의해서 조선의 기법이 전래되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간분10년 (1670)에는 도공 히라타가 중국에 건너가 중국식 제도를 배워 기술의 폭을 더욱 넓혔다.


야마구치 현

 

하기 - 임진왜란(1592-1598) 때 모리 데루모토가 데려 간 조선 도공 이작광, 이경 형제가 개요한 것이 기원이 된다. 히데요시의 죽음이후 발발한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패배한 모리 데루모토는 하기로 도망? 가게 되는데 이때 李형제도 모리 데루모토를 따라 히로시마에서 하기(萩)로 옮기게 된다. 이경은 마츠모토 나카노쿠라(하기이치 친토우)에 개요 하는데 그 계통은 마츠모토 하기로 불리고 있고, 이작광은 후카가와 산지레(나가토시)에 개요 해, 이 계통은 후카가와 하기로 불린다. 어느쪽이든 번의 용무가마였지만, 3대째가마까지의 작품을 古하기라고 부르고 있다. 대표적 작풍은 조선계의 영향이 강하고 돌금이 들어가는 금전유의 밥공기가 하기소의 특징이 되고 있다.


도쿄부

라꾸 - 덴쇼 6,7년경 (1577,8) 도래인 아미야(阿米夜)가 창시했다고 전승되고 있다. 고문서에 의하면 초대 쵸지로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중국인 아미야(阿米也)라는 인물이 기재되어 있다. 비록 작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인물이 중국으로부터 삼채도의 기법을 전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교토를 중심으로 중국 카난 지방의 삼채유를 이용하는 도자기가 제작되고 있었지만 초대 쵸지로도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들 중국 삼채유의 영향을 받은 구이와 쵸지로의 요소는 크게 차이가 난다. 기본적인 소성유기술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조형, 유조에 이르는 미의식은 중국 카난 지방의 삼채와는 크게 다르다. 라꾸 도자기의 시초는 어디까지나 쵸지로가 다도의 대성자 센리큐우를 만나 토시야스를 위해 다도에 이용하는 공기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에이로쿠 12년에 쿄토 니죠성이 완성될 때 그 기와를 한국인 일관이 구웠다고 여겨지고 있어, 초대 쵸지로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고, 가토 도우쿠로씨의 설에 의하면, 초대 쵸지로가 구웟다고 현재 확인되어 있는 유일한 것인 사자류개 기와는 하야후네 밥공기와 흙이 같고, 적유도 동일하다. 또 둘 다 천정이 없는 라꾸 가마로 구웠다고 하는 전승으로부터 기와 가마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밖에 발견되는 여러 밥공기가 고려밥공기의 영향이 강하여 초대 초지로가 조선 도래인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주목할 만하다.

미야기현

절입 - 토호쿠 최고의 자기로 불리고 있지만, 창시 시기나 창시자 등은 모두 수수께끼에 싸이고 있다. 에도 초기에 지방 영주 다테 마사무네가, 이마리로부터 조선 도공을 리쿠젠 절입에 불러 개요 한 자기가마라고 하고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에도 말기에 개요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테번의 용무가마로서 돋보였다. 최성기는 요시나가 안정 연간(1848-1860)으로, 찻그릇, 꽃병, 접시, 차분히등이 구워졌다.절입소는,  도석의 고갈이나세토방면에서의 염가의 자기의 유입에 의해서 쇠약해져 메이지 12년경에는 끊어져 버렸다.타이쇼 9년이 되고 부흥이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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