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下は日本有名学者たちの主張が土台です. 打つかもと掲示板で検索すれば日本人学者の動画も見られます.

 

 日本 打つかも(七支刀) 操作 


                           

  打つかもと言う(のは)絵と同じく長さ 74.9 cmのカルモム(刀身)の左右に各 3個の枝(支刀)が行き違うように配列された皆 7個の刃を持っている前代未聞の立派な鉄製(鉄製)刀だが実用的なのではない. 韓半島ではこれに似ている 打つかもが 1962年慶北漆谷郡忍冬面皇上洞 1号古墳で 24cm, 1971年釜山東莱区五倫台遺跡で 21cm, そして慶南涵養サングバックリ古墳群でも出土されたがこれらは議長用(儀仗用)に推定される.  打つかも 体つきの両面には金で象眼(象嵌)になった 61字(前 34字 裏 27字)の名門(銘文)が刻まれているし, 1953年日本国宝に指定されて奈良県(奈良県) 天理(天理)時フルマチ(布留町)に素材する李ソノ加美神宮(石上神宮)に現在保管されている.

 


  京都大学UedaMasaaki(上田正昭)教授は彼の著書(倭王の世界, 1976)で 打つかもは本国すなわち百済の近肖古王と鬼手王世子(貴須世子)がなぜの来て来るは日王(日本最初の百済係王)と彼の後世を祝福しながら下賜したことだと次のように詳細に明らかにしている. “打つかもに刻まれた 60余字の中に判読(判読)が困難な個所(個所)があって, 専門(全文)を完璧に読むことはできない. 今まで苦心して解読(解読)日明かされたことによれば刀の名門そのどこにも百済王が倭王に献上したと証明することができる文句はないと言っても良いだろう. それでも問題がある ‘日本書紀’の神工皇后 52ニョンゾ記事をかこつけて ‘献上説’があまり疑心も受けないまま今まで主張されて来た. 名門解釈はまず名門そのものに基づかなければならない. ‘日本書紀’は貴重な古典(古典)ではあるが, 7世紀後半から 8世紀初に完成された ‘日本書紀’に基づいて 打つかもの名門を解読するということは先後が当たらない途方もない事だと思う.” その外 藤間生大, 坂元義種もくだされ物だと主張した. 分明 打つかもの 61字文具を全般的な流れと判断すればくだされ物で 打つかもは日本が操作したことを現わしている.

 

  日本学者たちも指摘したように鼎韓論精神病にかかった 3類さむらいたちは 打つかもの日付を神工期 52年で合わせるためにひどく操作したから 打つかも 製作年度に焦点を合わせることは大きい意味がなくなった. だから全体的な流れと判断すればなぜは百済のフグックだったし確かにくだされ物だ. 逆になぜに献上したという単語は全然見えない. 日本の主張する献上品になろうとすれば水が上から下で流れて文物が先進国で後進国に流れるように百済王 → 倭王または百済王 → 倭王字間の取り引き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 しかし 打つかもの名門には確かに百済の王子が倭王を称したし, 百済王を極尊称と称したし, 日王の名前を推挙しただけでなく名門末尾に後世に道が伝えなさいという下待の文具がすぐ証明だ. そして驚くべきな事実は ‘倭王をフワング’と称した. これはなぜが百済のフグックだったのを現わす決定的な手がかりになる.           

 

  4世紀後半百済は歴史の黎明期であるなぜにアジックギと王仁博士を送って文字と漢学を教えるなど多くの文物が日本列島に流れて行ったし 打つかものような名物を作るほどに優秀な文化国家だった. ナダングヨンハブグックに基づいて百済が滅亡すると百済流民たちは大挙なぜに渡った. なぜではこれら流民たちに 671年大規模官爵を授与したし人々はなぜの支配層を形成した. このような事実たちは確かになぜは百済のフグックだった百済が倭に 打つかもを献上するほどに属国ではないことを証明している. このような影響で今日まで日本では ‘百済のは最高だ’, ‘百済品物ではなければ役に立たない’と言う意味で ‘百済年(百済無り)’ という言葉が伝えて下っている. 日本は真実を隠蔽して力の論理による強者的歴史を作ろうとしたことであり, 歴史を操作した人々精神病者たちは彼らばかりの祭りを今まで楽しんでいる.

打つかも(七支刀)

百済王(百済王)が倭王(倭王)に下賜した身体検査(神剣)


칠지도에 관한 소박한 의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

 

아래는 일본 유명 학자들의 주장이 바탕 입니다. 칠지도 라고 게시판에서 검색하면 일본인 학자의 동영상도 볼수 있습니다.

 

 일본 칠지도(七支刀) 조작 


                           

  칠지도란 그림과 같이 길이 74.9 cm의 칼몸(刀身)의 좌우에 각 3개의 가지(支刀)가 엇갈리게 배열된 모두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전대미문의 훌륭한 철제(鐵製)칼이지만 실용적인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서는 이와 비슷한 칠지도가 1962년 경북 칠곡군 인동면 황상동 1호 고분에서 24cm, 1971년 부산 동래구 오륜대 유적에서 21cm, 그리고 경남 함양 상백리 고분군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의장용(儀仗用)으로 추정된다.  칠지도 몸체의 양면에는 금으로 상감(象嵌)된 61자(앞면 34字 뒷면 27字)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1953년 일본국보로 지정되어 나라현(奈良縣) 덴리(天理)시 후루마치(布留町)에 소재하는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현재 보관되어 있다.


  교토대학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교수는 그의 저서(倭王の世界, 1976)에서 칠지도는 본국 즉 백제의 근초고왕과 귀수세자(貴須世子)가 왜의 오오진 일왕(일본 최초의 백제계 왕)과 그의 후세를 축복하며 하사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칠지도에 새겨진 60여 글자 중에 판독(判讀)이 곤란한 개소(個所)가 있어서, 전문(全文)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심해서 해독(解讀)해 밝혀진 것에 따르면 칼의 명문 그 어디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글귀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52년조 기사를 빙자하여 ‘헌상설’이 별로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주장돼왔다. 명문 해석은 우선 명문 그 자체에 의거해야만 한다. ‘일본서기’는 귀중한 고전(古典)이기는 하되,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완성된 ‘일본서기’에 의거해 칠지도의 명문을 해독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외 藤間生大, 坂元義種도 하사품이라고 주장했다. 분명 칠지도의 61자 문구를 전반적인 흐름으로 판단하면 하사품이며 칠지도는 일본이 조작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학자들도 지적했듯이 정한론 정신병에 걸린 3류 사무라이들은 칠지도의 날짜를 신공기 52년으로 짜 맞추기 위하여 심하게 조작하였기 때문에 칠지도 제작년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흐름으로 판단하면 왜는 백제의 후국이었으며 분명 하사품이다. 거꾸로 왜에 헌상했다는 단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 주장하는 헌상품이 되려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문물이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흐르듯이 백제왕 → 왜왕 또는 백제왕 → 왜왕자간의 거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칠지도의 명문에는 분명 백제의 왕자가 왜왕을 칭하였고, 백제왕을 극존칭으로 칭하였으며, 일왕의 이름을 거명했을 뿐만 아니라 명문 말미에 후세에 길이 전하라는 하대의 문구가 바로 증명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왜왕을 후왕’이라 칭하였다. 이는 왜가 백제의 후국이었음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4세기 후반 백제는 역사의 여명기인 왜에 아직기와 왕인박사를 보내 문자와 한학을 가르치는 등 많은 문물이 일본열도로 흘러 들어갔고 칠지도와 같은 명물을 만들 정도로 우수한 문화국가였다. 나당연합국에 의거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유민들은 대거 왜로 건너갔다. 왜에서는 이들 유민들에게 671년 대규모 관작을 수여했으며 이들은 왜의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분명 왜는 백제의 후국이었지 백제가 왜에 칠지도를 헌상할 정도로 속국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는 ‘백제 것은 최고다’, ‘백제 물건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는 뜻으로 ‘구다라나이(百濟無り)’ 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본은 진실을 은폐하고 힘의 논리에 의한 강자적 역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며, 역사를 조작한 이들 정신병자들은 그들만의 축제를 지금까지 즐기고 있다.

칠지도(七支刀)

백제왕(百濟王)이 왜왕(倭王)에게 하사한 신검(神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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