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金忠善(1571年‾1642年)は

 

壬辰の乱当時朝鮮に 帰化一日本の 将首で, 帰化した後には 自を 善之, 号は 慕夏堂で作った.
日本の歴史書にはこのサヤがが正確にどんな人だったか詳しい記録がない.
韓国側でも [朝鮮王朝実録]に二度言及されるだけだ. 彼に対して 少しでも言及されたことはその自分が使った [慕夏堂文集]だ.


金忠善(沙也可)の実体

 

金忠善(沙也可)は朝鮮で帰化した後, 朝鮮に日本式弔銃及び火薬製法と “鉄砲隊”(日本で弔銃部隊を称えた名前) 戦術を伝授したという記録がある. この点を根拠で日本側 沙也可 研究者たちは日本全国時代時 和山県の “サイカ”だと呼ばれたチォルポ部隊の 鈴木孫一が “沙也可”と主張したりする. 和山県で昔の 銃を研究する古代式 銃 研究会の顧問でもあった日本小説家 小板 次郎もそんな人々のひとりだ.


実際に 鈴木 孫一は朝鮮に出征したし, 出征後直ちにすべての記録で消えた. 名古屋城(現 Saga ken karachu shi)まで 100人を導いて行ったが, 鈴木孫一 一人だけ消えたのだ.

 


これに対して sainan 学園大学の 丸山 教授は 沙也可が 鈴木孫一ではなく, 原田信種と主張する. 鈴木孫一は 反秀吉 勢力の一人だったから 加藤 急先ぽうにな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のだ. ところが 加藤が出兵の前に作成した隷下部隊及び 将首 名簿に 沙也可と言う(のは)名前はいないが, チォルポデを保有していた 原田信種はあり, 原田, やっぱり出兵後記録で消えたと言って彼が 沙也可と主張する.
戦死したが確認にならなかったとか投降したとかふたつの中で一つという意味だ. 可能性はあるが, 確かなことではない.

 


壬辰の乱と 抗倭 金忠善

 

1592年(先祖 25年) 壬辰の乱の時の 加藤清正の 右 急先ぽうで軍事 3,000人を率いて韓半島に攻め寄せてから朝鮮の水準の高い文物を見て欽慕して, 慶尚道 兵馬節度使 朴鎭に降伏した後 帰附して何回 戦功を立てた.


東来城で上陸してから翌日だった. この時 沙也可は 朴鎭に次のような内容の強化書で
“が国の 礼儀文物と 依冠 風俗を美しく思って礼儀の国で 聖堰の民になろうとするだけです.”と書いた.

 


以後 沙也可は慶尚道の義兵たちとともに力を合して倭軍と戦闘をしたし, 郭在宇とも連合したりした. 義兵及び朝鮮軍 将首として皆 78回の戦闘をしたし, 1597年 沙也可は蔚山城 戦闘に慶尚道ウビョングサ 金応瑞 旗下で蔚山城に座り込みの中だった 加藤の 1群を殲滅する功を立てたし, 無関 正3品である架線貸し付け(?)を下賜受けたりした.


朝鮮は倭乱の中に 鳥銃を自体開発して 鳥銃 部隊を作った. 学界では李舜臣将軍が普及した
ので見ているものの, 実際 鳥銃を開発した人は本来日本でも 鉄砲隊だと言って 鳥すべて部隊を指揮した経験がある 金忠善(沙也可)で見ている. 実際 金忠善(沙也可)が帰化した直後 鳥すべて開発を建議する書信を 節度使に提出したし, 李舜臣と分けた 書信では “もう 鳥鉄砲を開発して訓練している”という内容が出る.



壬辰の乱以後行績

 

1597年(宣祖 30年) 壬辰の乱と 1636年(仁祖 4年) 丙子胡乱 の時専攻を立てて 三品 堂上に上がったし,
都元帥 権慄, 御史 韓浚謙の 奏請で 姓名が下賜されて 資憲大夫に昇進した.
以後 10年の間北方変更守備を一功労で 正憲大夫李〓に上がった. 李〓の 乱が起きた時 副将 徐牙之を 捕斬一 功で 賜牌地を受けたが遠慮して, 守禦庁に返って 屯田を作った. 丙子胡乱の時 召命を受けないで 広州, 双嶺に出て争って清兵士 500余人を刀で切ったが 和議が成立されたという話を聞いて 大声慟哭して 大邱の 鹿里に帰った.


子孫

 

現在 大邱広域市 逹城郡 佳昌面 優緑里が彼の子孫たちである 賜姓 金氏の集成村だ. 賜姓 金氏は系図で 宣祖から 金海 金氏 姓を下賜受けた 金忠善(kim chung sun)が自分たちの 始祖と明らかにしている.


 

壬辰の乱の時 22歳の 金忠善

 


金忠善(沙也可)는 누구인가?

金忠善(1571년~1642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歸化한 일본의 將首로, 귀화한 후에는 自를 善之, 號는 慕夏堂으로 지었다.
일본의 역사서에는 이 사야가가 정확하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한국 측에서도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 언급될 뿐이다. 그에 대해 조금이나마 언급된 것은 그 자신이 쓴 [慕夏堂文集]이다.


金忠善(沙也可)의 실체

 

金忠善(沙也可)은 조선으로 귀화한 후, 조선에 일본식 조총 및 화약 제조법과 “鐵砲隊”(일본에서 조총 부대를 일컫던 이름) 전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점을 근거로 일본 측 沙也可 연구가들은 일본 전국 시대때 和山縣의 “사이카”라 불린 철포 부대의 鈴木孫一가 “沙也可”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和山縣에서 옛 銃을 연구하는 고대식 銃 연구회의 고문이기도 한 일본 소설가 小板 次郞도 그런 사람들의 한사람이다.


실제로 鈴木 孫一는 조선으로 출정했고, 출정 후 즉시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名古屋城(현 Saga ken karachu shi)까지 100명을 이끌고 갔는데, 鈴木孫一 혼자만 사라진 것이다.


이에 대해 sainan 學園대학의 丸山 교수는 沙也可가 鈴木孫一가 아니라, 原田信種라고 주장한다. 鈴木孫一는 反秀吉 세력의 한 명이었기 때문에 加藤 선봉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加藤가 출병 전에 작성한 예하 부대 및 將首 명단에 沙也可란 이름은 없지만, 철포대를 보유하고 있던 原田信種는 있으며, 原田, 역시 출병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고 말하고 그가 沙也可라고 주장한다.
전사했는데 확인이 안되었거나 투항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다. 가능성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과 抗倭 金忠善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加藤淸正의 右 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조선의 수준 높은 문물을 보고 흠모하여, 慶尙道 兵馬節度使 朴鎭에게 항복한 뒤 歸附하여 여러 번 戰功을 세웠다.


東來城으로 상륙한 지 다음 날이었다. 이때 沙也可는 朴鎭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禮儀文物과 依冠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聖堰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이후 沙也可는 경상도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왜군과 전투를 벌였고, 郭在宇와도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將首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했으며, 1597년 沙也可는 울산城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金應瑞 휘하로 울산城에 농성 중이던 加藤의 1群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무관 正3品인 가선대부(?)를 하사받기도 했다.


조선은 왜란 중에 鳥銃을 자체 개발하여 鳥銃 부대를 만들었다. 학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보급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 鳥銃을 개발한 사람은 본래 일본에서도 鐵砲隊라 하여 鳥총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金忠善(沙也可)으로 보고 있다. 실제 金忠善(沙也可)이 귀화한 직후 鳥총 개발을 건의하는 서신을 節度使에게 제출했고, 이순신과 나누었던 書信에서는 “이미 鳥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임진왜란 이후 행적

 

1597년(宣祖 30년) 임진왜란과 1636년(仁祖 4년) 丙子胡亂 때 전공을 세워 三品 堂上에 올랐으며,
都元帥 權慄, 어사 韓浚謙의 奏請으로 姓名이 하사되고 資憲大夫로 승진했다.
이후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正憲大夫李适에 올랐다. 李适의 亂이 일어났을 때 副將 徐牙之를 捕斬한 功으로 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守禦廳에 반납하여 屯田을 만들었다. 丙子胡亂의 때 召命을 받지 않고 廣州, 雙嶺에 나가 싸워 청나라 병사 500여 명을 칼로 베었으나 和議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大聲慟哭하며 大邱의 鹿里로 돌아갔다.


후손

 

현재 大邱廣域市 達城郡 佳昌面 優綠里가 그의 후손들인 賜姓 金氏의 집성촌이다. 賜姓 金氏는 족보에서 宣祖로부터 金海 金氏 姓을 하사받은 金忠善(kim chung sun)이 자신들의 始祖라고 밝히고 있다.


 

임진왜란 때 22세의 金忠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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