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韓国軍のベトナム戦争参戦

有志ブログの多くがあつかわれて来た事柄と思う。

真実に取り組み、英邁な論及を尽くす諸氏に敬意を捧げ、

小ブログからも小稿を呈する。

読者からお知らせいただいたこともあり、

小稿では、ベトナム戦争における韓国軍の行為について触れる。

好き嫌いの感情次元の問題ではなく。

特定国の侵蝕を許せば許すほど、

日本社会は秩序と国益を喪失し、国民生活も危うくなる。

その教訓の一端を、ベトナム戦争、

およびその戦後の事例に観ることができる。

韓国軍のベトナム戦争参戦は昭和39年(1964年)に始まっていた。

当初は、医療支援団や教官等、約270名をサイゴンの南のプンタウに派遣。

翌1965年2月に、米軍が北爆を開始、

次いで米海兵隊が3月にダナンに上陸。

それに続き、10月から、

韓国軍は1万数千名を派兵して本格的に参戦した。

以後、1965年から73年までの間、

韓国軍の戦闘部隊約30万名がベトナム戦争に参戦。

この過程で、韓国軍は戦死者4960余名、負傷者10余万名を記録。

一方、韓国軍が殺傷したベトナム人は4万1450名(公式統計のみ)に上る、

と表¥題記事は伝えている。

韓国軍の派兵は、米軍に次いで多かった

その理由は、「派兵規模」に応じた

「補助金と対米移民枠」を得られたからであった。

いわば、韓国にとっては、あからさまな国益を兼ねた参戦であり、

しかし、その残虐ぶりは、後に自国のジャーナリズムが報じるようになり、

「住民虐殺」と「韓越混血児(ライタイハン)」

問題として問われることになった。
————— 

女性たちを強姦した後、殺害

あくまで韓国メディア(ハンギョレ21 1999年 05月 06日 第256)の記事であり、

同メディアの性質を考慮すれば鵜呑みにはできない。

だが、その後の多数の韓国人による現地混血児の存在が確認されている。

その要因として考え得る「強姦」について、

当時の情報が少ない中で、

しかし、参考にして差し支えない記事と判断し小稿に紹介する。

記事には、『韓国軍は残酷な大量虐殺を行ったため、

南ベトナム民族解放戦線(NLF)さえ、

できるだけ直接的な交戦は避けようとした程だったと伝えられる』と、

特に、掃討作戦の様子を記しており、

韓国軍の残虐行為を次のように概略している。

(以下、引用)


このような捜索掃討作戦は、一次的にじゅうたん爆撃等で作戦地域を公開して、

韓国軍等の地上軍が現場に投入されて村に残っている住民たちを即決処分した後、

家を燃やしてブルドーザー等で村全体を押し潰す方式で展開した。

生存者の韓国軍に関する証言で共通な点は、

無差別機関銃乱射、 大量殺戮、 妊産婦、 女性に対する強姦殺害、 家屋への放火などだ。

生存者の証言を土台に韓国軍の良民虐殺方式を整理してみると、

いくつかの共通した類型が現れる。

-住民たち(大部分が女性と老人、 子供たち)を一ケ所に集めた後、

あるいはいくつのグループにまとめて、機関銃を乱射して抹殺する。

-住民たちを一戸に追い詰めて銃を乱射した後、家と一緒に死亡者も生存者も全部燃やす。

-子供の頭を割ったり首をはね、 脚を切ったり四肢を切断して火にほうり込む。

-女性を強姦した後、殺害して、 妊産婦の腹を胎児が破れ出るまで軍靴で踏み潰す。

-住民たちを村のトンネルに追い詰めて毒ガスを浴びせて窒息死させる。

韓国軍の大量虐殺が強行された所では、

子供たちの口にキャンディやケーキが含まされていた。

老人たちの口にはタバコが咥えられていた場合が多かった。

恐らく、村人を安心させながら一ケ所に集めるための手段だったようだ.

(以上、引用)

以上、ごく一端ではあるが、韓国の雑誌「ハンギョレ21」誌の記者が

「自ら取材し、掲載した」とされる和訳記事から一部を紹介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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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の謝罪も補償も無し!

ベトナム戦争の「混血児問題」として知られている事実の中に、

上述の「韓越混血児」がある。ベトナム戦争に参戦時に、

韓国軍兵士や軍属の韓国民間人が

「強姦」「非管理売春」「現地妻の保有」などにより、

多くの混血児が生まれ、戦後に放置された問題である。

『現地妻との間に生まれた混血児の数は、

2004年9月18日付の釜山日報の記事によれば、

5千〜3万人と推定されている』(Wikipedia) 。

また。『現時点では、韓国政府から被害者や混血児に対する

謝罪や補償は行われていないが、

最近、韓国人(父親)が認知しない場合でも、

写真など客観的に関係を立証する資料があれば

国籍を付与する法案を積極的に検討する事にした』と()ある。

実施ではなく「検討」である。

「謝罪と補償」。

その見方にもよるが、

速やかにそれらを実行する日本政府の対応とは雲泥の差がある。

また、金大中氏(当時・大統領)が訪越(1998年)した折に、

戦争当時に、ベトナム人に苦痛を与えたことに対して謝罪した、

と伝えられ、その折に、

『ベトナムのチャン・ドク・ルオン大統領は、

両国は未来志向的に関係を構¥築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

と述べ過去には関心を示さなかった』(同)とあるが、

韓国は、直後に謝罪を撤回している。


韓国にとっては、日本に対する“加害責任”を問い続ける立場から、

金大中氏の「謝罪」は外交カード維持のためのポーズではないか、

と認識されている。

ゆえに、混血児を産んたベトナム女性は、

韓国からは補償をまったく受けていない。

自国民が犯した罪の謝罪と補償を果たさない韓国。

このような国家が、日本に対して“従軍”慰安婦の難題を、

しかも虚構¥をもとに延々と突きつけ、

補償せよという資格は無いのである。
————-

韓国軍の従軍慰安婦

韓国軍には従軍慰安婦が存在していた。

その多くの資料を読者からご指摘いただいているので、紹介する。

先ず、韓国語で書かれた「韓国軍の特殊慰安婦は事実上の公娼 」(仮訳)

と題する記事は、論旨が混沌としているが、

韓国独自の従軍慰安婦が存在していたことを記している。

朝鮮戦争当時(1951〜54年)、

云く、『韓国軍が 1951年頃から 1954年まで 「特殊慰安婦」という名前で、

固定式あるいは移動式の慰安婦制度を取り入れて運用したのは、

否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歴史的事実である』と。

また云く、『特殊慰安婦実績統計表¥は、

1952年度に 4ヶ所で編成された慰安婦 89人が

年間 20万4560人の兵士を 慰安したと記録している。

 慰安婦 1人が一日平均 6〜7人の将兵を慰安した。

 またチェ名臣・チァギュホン・ギムフィオなど

予¥備役将軍たちも朝鮮戦争期間に経験した慰安婦制度に対して

「言いたくない軍部の恥部だが事実だと証言している』とある。

何故、事細かに記録が残っているかといえば、

韓国が「公娼」と認めていたからである。

この点が、「日本軍を真似た」と記述しているが、

実質的に、日本軍兵士が相手にした、高給を貰う「私娼」とは異なる。

つまり、韓国の「特殊慰安婦」こそが真の「従軍慰安婦」であった。

同記事の写真をご覧いただきたい。

20070326002
捕らえられた北朝鮮の看護婦2名(OhMyNews 2002年2月26日)

写真のキャプチャには、

「朝鮮戦争期間に韓国軍と米軍が逮捕した人民軍看護婦 2人。

当時逮捕した北朝鮮の婦女子がレイプされるなど、

強制で 慰安婦になった」と。

なるほど、「強制性」「性奴隷」の淵源は韓国にこそあったのである。
—————

自国の「恥」を日本に転嫁する韓国!
同記事には、さらに、

『1950年当時医科大学生だった李何某(73) さん

(2002年の記事当時の年齢)は、

拉致、または強要によって軍隊慰安婦になる所だった。

また、他の事で、6月25日当時、ソ¥ウルに残り、

(北朝鮮の)人民軍に協力したかどで、

(韓)国軍に逮捕されたこの李さんは

他の女医大生 3人と一緒に引き渡され、

部隊の将校 4人の「割当」になった。

 この李さんは幸い、

自分を可愛想に思ってくれた一将校の助けで釈放されたが、

他の 3人はあの時以後二度と(姿が)見られなかった』と。

北朝鮮(人民軍)の中から捕らえた婦女子のみならず、

自国民の中からも女性を強制的に拉致、

逮捕して娼婦にしていたのである。

確かに「言いたくない軍部の恥部」であろう。

言いたくない代わりに、自国の「行為」と「恥」を日本に転嫁し、

「罪」の言い逃れを図っているのである。

恥知らずといえば、韓国は実に恥知らずである。

学者の端くれであるから、「真実」か「虚構¥」かで筆者は物事を判別する。

そして、自らの声で小稿を報告している。

かの中国共産党と侮日策動のクラスタを形成し、

編み出したかの「虚構¥」の数々は、

たとえ一時的には隆盛を見せても、

ここで、「真実」をもとにした日本の良識の反撃に遭えば

崩壊する運命にある。

先人英霊に汚名を着せたまま、

子々孫々にこの日本国を渡すわけにはいかない。


【재게】한국군의 베트남에서의 만행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

유시 브로그의 대부분이 다루어져 온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실하게 임해, 영매인 논급을 다하는 여러분에게 경의를 바쳐

소브로그로부터도 소고를 나타낸다.

독자로부터 소식 받은 적도 있어,

소고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의 한국군의 행위에 대해 다룬다.

좋고 싫음의 감정 차원의 문제는 아니고.

특정국의 침식을 허락하면 허락할수록,

일본 사회는 질서와 국익을 상실해, 국민 생활도 위험해진다.

그 교훈의 일단을, 베트남 전쟁,

및 그 전후의 사례에 볼 수 있다.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쇼와 39년(1964년)에 시작하고 있었다.

당초는, 의료 지원단이나 교관등 , 약 270명을 사이공의 남쪽의 푼타우에 파견.

다음 1965년 2월에, 미군이 베트남에 가한 폭격을 개시,

그 다음에 미 해병대가 3월에 다낭에 상륙.

거기에 계속 되어, 10월부터,

한국군은 1만 수천명을 파병해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이후, 1965년부터 73년까지의 사이,

한국군의 전투부대 약 30만명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전사자 4960여명, 부상자 10여만명을 기록.

한편, 한국군이 살상한 베트남인은 4만 1450명(공식 통계만)에 달하는,

과 표제기사는 전하고 있다.

한국군의 파병은, 미군에 이어 많았던
.

그 이유는, 「파병 규모」에 응했다

「보조금과 대미 이민범위」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서 만났다.

말하자면, 한국에 있어서는, 명백한 국익을 겸한 참전이며,

그러나, 그 잔학상은, 후에 자국의 저널리즘이 알리게 되어,

「주민 학살」과「한월혼혈아(라이타이한)」

문제로서 추궁 당하게 되었다.
---------- 

여성들을 강간한 후, 살해

어디까지나 한국 미디어(한겨레 21 1999년 05월 06일 제 256)의 기사이며,

동미디어의 성질을 고려하면 통째로 삼킴에는 할 수 없다.

이지만, 그 후의 다수의 한국인에 의한 현지 혼혈아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그 요인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강간」에 대해서,

당시의 정보가 적은 가운데 ,

그러나, 참고로 해 지장없는 기사라고 판단해 소고에 소개한다.

기사에는,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 학살을 실시했기 때문에,

남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NLF)마저,

가능한 한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라고,

특히, 소탕 작전의 모습을 적고 있어

한국군의 잔학행위를 다음과 같이 개략하고 있다.

(이하, 인용)


이러한 수색 소탕 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 폭격등으로 작전 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등의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고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 처분한 후,

가를 태워 불도저등으로 마을 전체를 눌러 부수는 방식으로 전개했다.

생존자의 한국군에 관한 증언으로 공통된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 살륙, 임산부, 여성에 대한 강간 살해, 가옥에의 방화 등이다.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의 양민(백성) 학살 방식을 정리해 보면,

몇개의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아이들)을 1개소에 모은 후,

혹은 몇의 그룹에 정리하고, 기관총을 난사해 말살한다.

-주민들을 이치노헤에 추적해 총을 난사한 후, 집과 함께 사망자나 생존자도 전부 태운다.

-아이의 머리를 나누거나 목을 치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 해 불 에게 던진다.

-여성을 강간한 후,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깨져 나올 때까지 군화로 밟아 잡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터널에 추적하고 독가스를 퍼부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 학살이 강행된 곳에서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함 뛰어날 수 있고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질 얻어지고 있었을 경우가 많았다.

아마, 마을사람을 안심시키면서 1개소에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이상, 인용)

이상, 극히 일단이지만, 한국의 잡지 「한겨레 21」잡지의 기자가

「스스로 취재해, 게재했다」라고 되는 일역 기사로부터 일부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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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죄도 보상도 없음!

베트남 전쟁의 「혼혈아 문제」로서 알려져 있는 사실안에,

상술의 「한월혼혈아」가 있다.베트남 전쟁에 참전시에,

한국군 병사나 군속의 한국민 간인이

「강간」 「비관리 매춘」 「현지처의 보유」등에 의해,

많은 혼혈아가 태어나 전후에 방치된 문제이다.

「현지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의 수는,

2004년 9월 18 일자의 부산 일보의 기사에 의하면,

5천~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Wikipedia) .

또.「현시점에서는, 한국 정부로부터 피해자나 혼혈아에 대한다

사죄나 보상은 행해지지 않지만,

최근, 한국인(부친)이 인지하지 않는 경우에서도,

사진등 객관적으로 관계를 입증하는 자료가 있으면

국적을 부여하는 법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일로 했다」라고() 있다.

실시는 아니고 「검토」이다.

「사죄와 보상」.

그 견해에도 밤이,

신속하게 그것들을 실행하는 일본 정부의 대응과는 운니지차가 있다.

또, 김대중씨(당시 ·대통령)가 방월(1998년) 한 때에,

전쟁 당시에, 베트남인에 고통을 주었던 것에 대해 사죄한,

과 전해져 그 때,

「베트남의 장·드크·르온 대통령은,

양국은 미래 지향적으로 관계를 구축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라고 말해 과거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동) 어떤이,

한국은, 직후에 사죄를 철회하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는, 일본에 대한“가해 책임”을 계속 묻는 입장으로부터,

김대중씨의 「사죄」는 외교 카드 유지를 위한 포즈가 아닌지,

(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혼혈아를 출산베트남 여성은,

한국에서는 보상을 전혀 받지 않았다.

자국민이 범한 죄의 사죄와 보상을 완수하지 않는 한국.

이러한 국가가, 일본에 대해서“종군”위안부의 난제를,

게다가 허구를 기초로 끝없이 들이대어

보상하라라고 하는 자격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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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종군위안부

한국군에게는 종군위안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많은 자료를 독자로부터 지적해 주시고 있으므로, 소개한다.

먼저, 한국어로 쓰여진 「한국군의 특수 위안부는 사실상의 공창」(가(뜻)이유)

(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기사는, 논지가 혼돈되고 있지만,

한국 독자적인 종군위안부가 존재하고 있던 것을 적고 있다.

한국 전쟁 당시 (1951~54년),

운구, 「한국군이 1951년경부터 1954년까지 「특수 위안부」라고 하는 이름으로,

고정식 혹은 이동식의 위안부 제도를 도입해 운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또 운구, 「특수 위안부 실적 통계표는,

1952년도에 4개소에서 편성된 위안부 89명이

연간 20만 4560명의 병사를 위안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6~7명의 장병을 위안 했다.

 또 최 명신·치규혼·김피오 등

예비역장군들도 한국 전쟁 기간에 경험한 위안부 제도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이지만 사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라고 있다.

왜, 자세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가 하면,

한국이 「공창」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이다.

이 점이, 「일본군을 흉내냈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 군병사가 상대로 한, 고급을 받는 「사창」이란 다르다.

즉, 한국의 「특수 위안부」개소화 진정한 「종군위안부」에서 만났다.

동기사의 사진을 보시고 싶다.

20070326002
잡힌 북한의 간호사 2명(OhMyNews 2002년 2월 26일)

사진의 capther에는,

「한국 전쟁 기간에 한국군과 미군이 체포한 인민군간호사 2명.

당시 체포한 북한의 부녀자가 강간되는 등,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라고.

과연, 「강제성」 「성 노예」의 구렁원은 한국에야말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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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의 「수치」를 일본에 전가하는 한국!
동기사에는, 게다가

「1950년 당시 의과 대학생이었던 이 아무개(73)씨

(2002년의 기사 당시의 연령)은,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서 군대 위안부가 되는 곳이었다.

또, 다른 일로, 6월 25 일당시, 소울에 남아,

(북한의) 인민군에 협력 혀출발,

(한) 국군에 체포된 이 이씨는

다른 여의 대생 3명과 함께 인도해져

부대의 장교 4명의 「할당」이 되었다.

 이 이씨는 다행히,

자신을 카아이구상으로 생각해 준 한 명의 장군교 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다른 3명은 그 때 이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볼 수 없었다」와.

북한(인민군)중에서 잡은 부녀자 뿐만 아니라,

자국민중에서도 여성을 강제적으로 납치,

체포해 창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말하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일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대신에, 자국의 「행위」와「수치」를 일본에 전가해,

「죄」의 발뺌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철면피라고 하면, 한국은 실로 철면피이다.

학자의 토막이기 때문에, 「진실」인가 「허구」인가로 필자는 사물을 판별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소리로 소고를 보고하고 있다.

인가의 중국 공산당과 모일 책동의 클러스터를 형성해,

짜냈는지의 「허구」의 여러 가지는,

비록 일시적으로는 융성을 보여도,

여기서, 「진실」을 기초로 한 일본의 양식의 반격을 당하면

붕괴하는 운명에 있다.

선인 영령에 오명을 씌운 채로,

자자손손에 이 일본을 건네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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