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我が民族の歴史が始まった以来幾多の外的の侵犯があったがその時ごとにうちの先祖たちは熱い救国(救国)の意志とすごい闘志で国難(国難)を乗り越えて来た. 国難にあう度に卓越なリーダーシップを発揮して民族的気象を高くふるった救国の英雄はいちいち数え切れないだけ多いが, 李舜臣こそその多い英雄, 豪傑, 忠臣, 烈士の中にもきっての偉人という事実にはその誰も異意を申し立てることができないだろう.

李舜臣(李舜臣)は韓国歴史上最高の戦争英雄で壬辰の乱(壬辰倭乱), 丁酉災乱(丁酉再乱)という未曽有の災いにあって国と同胞の滅亡が目の前に至った時朝鮮水軍を総指揮していろいろの不利な与件の中でも必勝の信念とすごい戦略で勝ちっ放し(連戦連勝)をあげた不世出の名将だった. 彼は貧しい士の息子に生まれて 54年の長くない一生を送る間あらゆる苦難の中でもひたすら忠孝(忠孝), 仁義(仁義)と愛国愛族精神(愛国愛族精神)に一貫した民族の大きい師匠だった.

イギリス海軍兵学校校長を勤めたビルラド(G.A.Billard) 所長(少将)は ¥”朝鮮の李舜臣という海軍提督がネルソン(Horatio Nelson)に劣らないすぐれた指揮官という事実をイギリス人たちは認めにくいが李舜臣が東洋最高の海軍提督という点は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事実だ.¥”と李舜臣を評価した. 中国係アメリカ人歴史学者でアメリカワシントン州立大学校教授であるレイ硫黄(Ray Hwang) 博士は東洋史 3台戦争英雄で朝鮮の李舜臣(李舜臣), ベトナム多異美瑛王朝のチェンフンダオ[千訓道], 中国明のワンスングファン(袁崇煥)を持ちながらその中でも李舜臣が一番偉い手柄を残した英雄だとほめたたえた.

今日国内外の情勢, 特に再び抜けた政治的, 経済的危機に照らして見る時李舜臣は今まで知られて来た節税の名将, 救国の英雄という面貌に加えてすごいリーダーシップを取り揃えた最高経営者だったという事実を今更節減するようになる. 21世紀という新しい激変の時代, 激動の時代を迎えて強大国たちとの無限競争で生き残るためにしても私たちは東西古今(東西古今)のどんな偉人よりも偉かった聖雄(聖雄) 李舜臣のリーダーシップを通じて国難克服の知恵を捜さ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 日本軍の本陣が設置された釜山浦を攻撃する.

3回目にかけた出征で 8回の海上戦闘を支払って勝ちっ放し(連戦連勝)をおさめて災害圏をほとんど掌握した李舜臣は敵軍の動態を察する一方軍船を建造して火薬武器を量産するなど軍費拡充にも心血を傾けた. そうして 8月 1日旅愁で全裸左図数だね(全羅左道水軍)と全裸牛島数だね(全羅右道水軍)が合流した時軍船数価閑山島大勝(閑山島大捷) 当時 52尺より 22尺がもっと増えた 74尺にのぼったのだ.

四番目出征を 20日や控えて全裸左水営(全羅左水営)と全裸右水営(全羅右水営)の揚水だね(両水軍)が合流したことは連合船団の機動訓練のためだった. 慶尚道巡察使(慶尚道巡察使) 金数(金粹)が公文書を送って ¥”倭軍が梁山と金海等地に下るのに逃げようとするようだ.¥”と伝えて来ると李舜臣は 8月 24日にまた出場命令を下げた.

板屋船(板屋船) 74尺と協では(挟船) 92尺で成り立った朝鮮三道数だね連合船団(朝鮮三道水軍連合船団)はその日南海グァンウムポで徹夜して, 明くる日統営市原量面シャラン島に至って元均と合流した後その晩は唐布で送った. 26日には風雨が激しくて夕方頃には巨済島に至ったし, 27日には昌原市熊川面園圃で夜を過ごした.

28日までこんなに東進しながら敵軍を捜し回った朝鮮水軍は 8月 29日洛東江同族から海に出た敵軍を見つけて追い討ちを開始してアダケフだね[安宅船] 4尺と関部だね[関船] 2尺を燃やしてしまった. 9月 1日洛東江河口を通って釜山の方で進撃する途中にムルウンデを経ってファズングミでアダケフだね[安宅船] 5尺, 多大浦で 8尺, ソピョングポで 9尺, 絶影島で 2尺など総 24尺の賊船を撃沈させた.

なので釜山津東丘下に 470余隻にのぼる日本軍船が停泊していることを見つける. 朝鮮水軍を見ると日本水軍のアダケフだね[安宅船] 4尺が先頭から突撃して来た. 落雁軍需(楽安郡守) 信号(申浩), ノックドマンホ(鹿島万戸) ゾングウン(鄭運)の板屋船(板屋船)が彼らを塞いで砲撃してあっという間に撃沈させた.

グキヨシダカ[九鬼嘉隆], ドドダカー島だと[藤堂高虎] など日本水軍の指揮官たちは朝鮮水軍との正面対決を避けて丘と海岸で砲兵たちを配置させて朝鮮水軍を向けて砲弾をうって飛ばすようにした. 李舜臣は朝鮮水軍の私は軍船を蛇の組もうぞ模様で陣を張るようにして釜山の潟と海辺の布陣(砲陳)を向けて砲撃戦(砲撃戦)を展開した. 長蛇の列(長蛇陣)を打って敵軍砲撃の射程距離を避けてできるだけ多い敵意軍船を破壊しようとする意図の作戦だった.

敵兵たちはほとんど軍船を捨てて山で逃げたし六箇所で分けられて乱れているように弔銃をソアデッダ. しかし朝鮮水軍はもう何回の海戦を通じて火砲の照準と運用能力が相当な水準に至っていた. 潟に停泊させた日本の軍船だけでなく丘と海岸の日本軍事たちにも砲弾が正確に落ちた. しかし釜山浦海戦(釜山浦海戦)は我軍にも非常に手に負えないけんかだった.

釜山の日本軍はもう朝鮮水軍の進撃事実が分かってそれなりに万般の準備を取り揃えていたが朝鮮水軍の軍船を一尺度撃沈させることができずにむしろ自軍(自軍)の軍船 120余隻が破壊されて燃やされたし兵力も 3800人余りが爆殺される打撃を受けた. しかし朝鮮水軍も戦死者 6人, 負傷者 25人の被害を被ったからすべて四度の出征の中一番熾烈な戦闘がすぐ釜山浦海戦(釜山浦海戦)と言えた.

李舜臣旗下の全裸左水営(全羅左水営) 長寿たちの中一番すぐれた勇猛を発揮したノックドマンホ(鹿島万戸) ゾングウン(鄭運)が今度釜山浦海戦(釜山浦海戦)で戦死したことは朝鮮水軍において非常に大きい損失だった.

海戦が終わった後旅愁本営に帰って来た李舜臣は次のような長計をあげた.

¥”その間君の番出場をしてスシブボン合戦をポルチョすべて勝捷したが, もし長寿と士卒たちの功労を論じたら今度釜山けんかより加えたのがないです.

前日の戦争の時は賊船の数が多くても 70余隻だったが, 今度は大きい時の巣窟に停泊した時では 4百余隻の中に軍事の威勢を取り揃えて勝利した勢いで突進して少しも恐ろしくて折れることがなしに一日中攻撃して賊船 100余隻を破って敵軍にとって胸が崩れて頭をすくめて恐れて震えるようにしたから, たとえ時の需給(首級)を切ったことはなかったが勢いよく争った功労は先に番(回)よりずっと加えるのに前例によって功労を斟酌して等級を用意して別記に記録します.

(中略) ノックドマンホ(鹿島万戸) ゾングウン(鄭運)は変乱が生じた以後忠義心を頑張って敵と一緒に死ぬことに誓って三度けんかで常に先に立ったし, 釜山の合戦の時も死をかえりみず突進している途中時の大きい鉄丸を額にそう戦死したら極めて悲しくて胸が痛いです.¥”


李舜臣が指揮した朝鮮水軍はかくして 4次の出征で 10余回の海戦をしたし賊船総 193尺を撃破して敵軍 2万 9千名余を殺傷したことで現われた. こんなに李舜臣が海上戦闘で勝ちっ放し(連戦連勝)することで戦争の様相は大きく変わるようになった.

◆ もし壬辰の乱(壬辰倭乱) 時に李舜臣がいなかったら.....?

もし李舜臣が壬辰の乱(壬辰倭乱) 時に登場しなかったら, いや壬辰の乱(壬辰倭乱) 時に朝鮮数だね最高指揮官の職責が李舜臣に任せられなかったら戦争は 7年も続かないでずっと早く終わったかも知れない. 言い替えれば朝鮮王朝が戦争勃発 1‾2ヶ月ぶりに日本によって滅亡するようになったはずであり, 明も安全な数はなかったはずだ.

日本軍は 1592年 4月 14日釜山浦に上陸した以後破竹の勢いに北上して 20日後の 5月 3日にはソウルを占領した. 国王先祖(宣祖)はわずか 3日前の 4月 30日にほとんど無防備状態であるソウルから脱出した. したがって日本軍が荒しい勢いに乗ってそのまま追撃したら先祖は個性を経って平壌まで戦乱を避けて住まいを移す前につかまったはずだ. いや, 臨津江をひったくって渡る前に捕らわれたかも知れない事だ.

ところで日本軍は 16日間やソウルに泊まってブンタングジルを打っている途中 5月 19日にはまた北上した. 李舜臣が玉浦海戦(玉浦海戦)で総 42尺の日本軍伝えることを撃沈させたことは 5月 2日だった. この敵軍艦隊は西海に北上して兵力を補って兵站品を普及しようとしていたお腹たちだったろう.

待った海上普及が水軍の惨敗に無産されるとソウルの日本軍たちはそのまま進撃するしかなかった. 5月 19日にソウルを発った小西ユキナがの第1群は 6月 15日に平壌を占領して, 加藤紀要マーサの第2群も咸境道に攻めこんで豆満江までのぼる.

しかしこれらは再び足が縛られてしまってしまう. これは 5月 29日から 6月 7一家だ起った四天海戦(泗川海戦), 唐布海戦(唐浦海戦), 第1次タンハン布海戦(唐項浦海戦), 栗浦海戦(栗浦海戦)で 72尺の日本軍軍船が李舜臣が指揮する朝鮮水軍によって海の中に沈んでしまったからだ. 今度にも西海をさかのぼって大同江に入って来るのを首を長くして待ったサポート兵力と普及軍需物資が皆首長されてしまったのだ.

日本軍には泣き面に蜂で南側では敗戦補で(敗戦報告)だけ引き継ぐ上って来た. 閑散海戦(閑山海戦)とアンゴ−ルポヘゾン(安骨浦海戦)に引き続き釜山浦海戦(釜山浦海戦)でも大敗したからこれからは戦争の勝利ではなく帰国する道さえ渋滞してしまう具合になったのだ.

その上に豊臣秀吉まで朝鮮に渡って来て毒箭するつもりだったが朝鮮水軍の活躍のため海を渡って来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のだった. それで秀吉は朝鮮に渡って来る思いを捨てて ¥”朝鮮水軍に会えば争わずに撤収しなさい.¥”は命令を下した. こういうわけで南海岸東一部を除いた 80% 以上の災害圏を朝鮮水軍が掌握するのに至った.

これは南海を通じて穀倉である全羅道を掌握して, ひいては西海に北上して中部以北を攻略しようとする日本軍の水陸ロ進(水陸竝進) 祈祷をきれいに無産させた戦略的勝利でもあった.

以後日本軍は六典でも朝鮮官軍と義兵たちに敗れるようになって和平交渉に応じるようになる. そして戦況は数年間小康状態で入るようになった.

李舜臣の戦略戦術は作戦海域の事情と敵軍の動向を正確に把握して敵軍を自分が願う所で誘引して徹底的な攻撃で殲滅するのにあった. 彼は専攻(戦功)を認められるために敵兵の需給(首級)を切ることに気を使うよりは敵軍の兵力と軍需物資を調逹する日本の軍船を一尺でももっとこなごなに壊すために砲撃戦(砲撃戦) 主の戦闘を敢行したし, 相対的に堅固な朝鮮の板屋船で突撃して賊船を突き飛ばして破壊する戦法を使った. そして戦闘には総指揮官である自分が常に先に立って危険を冒して軍事を指揮する代わりに後に退こうとする将兵たちはすんごうも許さないで厳格な軍律で治めた.

それが抜群な最高経営者李舜臣の卓越な指揮方針だった.

壬辰の乱(壬辰倭乱)が日本という国家と李舜臣個人の戦争だったと一部学者たちが主張することは一見妥当性が高い. 当時朝鮮の調整や官軍, そして支援軍で来た明軍隊はこの戦争で寄与した功労があまりなかった. 決定的に日本軍が朝鮮征服をあきらめて退却をするようになったことは李舜臣, この段ひとりによってからだった.

参照書籍; ファングワンガブ(黄源甲) 著述 ¥”復活する李舜臣¥” エコービーズニス(EcoBusiness) 2004, キム・ジョンデ(金宗代) 著述 ¥”神さま(臣)にはまだヨルドチォックの軍船があります.¥” ブックポス(BookFors) 2001, ツェドソック(崔頭錫) 著述 ¥”壬辰の乱(壬辰倭乱)と李舜臣(李舜臣)¥” 一刻 1999, 金蛍光(金炯光) 著述 ¥”人物に見る朝鮮社(朝鮮史)¥” シアツルパンサ 2003.

{引き続き}


「불패의 명장 이순신(李舜臣)」8.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과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 (1)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일본군의 본진이 설치된 부산포를 공격하다.

세차례에 걸친 출정에서 8회의 해상전투를 치르며 연전연승(聯戰聯勝)을 거두고 재해권을 거의 장악한 이순신은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군선을 건조하고 화약무기를 양산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하여 8월 1일 여수에서 전라좌도수군(全羅左道水軍)과 전라우도수군(全羅右道水軍)이 합류했을 때 군선 수가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당시 52척보다 22척이 더 늘어난 74척에 이르렀던 것이다.

네번째 출정을 20일이나 앞두고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의 양수군(兩水軍)이 합류한 것은 연합선단의 기동훈련을 위해서였다.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粹)가 공문을 보내 "왜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라고 전해오자 이순신은 8월 24일에 다시 출전명령을 내렸다.

판옥선(板屋船) 74척과 협선(挾船) 92척으로 이루어진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朝鮮三道水軍聯合船團)은 그날 남해 관음포에서 밤을 세우고, 이튿날 통영시 원량면 사량도에 이르러 원균과 합류한 뒤 그날 밤은 당포에서 보냈다. 26일에는 풍우가 세차 저녁 무렵에야 거제도에 이르렀고, 27일에는 창원시 웅천면 원포에서 밤을 보냈다.

28일까지 이렇게 동진하면서 적군을 찾아다니던 조선 수군은 8월 29일 낙동강 동족으로부터 바다로 나오던 적군을 발견하고 추격을 개시하여 아다케후네[安宅船] 4척과 세키부네[關船] 2척을 불태워 버렸다. 9월 1일 낙동강 하구를 지나 부산 쪽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물운대를 지나 화준구미에서 아다케후네[安宅船]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에서 9척, 절영도에서 2척 등 총 24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다.

이어서 부산진 동쪽 언덕 밑에 470여척에 이르는 일본 군선이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조선 수군을 보자 일본 수군의 아다케후네[安宅船] 4척이 선두에서 돌격해왔다. 낙안군수(樂安郡守) 신호(申浩),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판옥선(板屋船)이 그들을 가로막고 포격하여 순식간에 격침시켰다.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 일본 수군의 지휘관들은 조선 수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언덕과 해안가에서 포병들을 배치시켜 조선 수군을 향해 포탄을 쏘아 날리도록 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 군선을 뱀의 꼬리 모양으로 진을 치게 하여 부산의 포구와 바닷가의 포진(砲陳)을 향해 포격전(砲擊戰)을 전개하였다. 장사진(長蛇陣)을 쳐서 적군 포격의 사정거리를 피하고 되도록 많은 적의 군선을 파괴하려는 의도의 작전이었다.

적병들은 거의 다 군선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으며 여섯 군데로 나뉘어서 어지럽게 조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이미 여러차례의 해전을 통해 화포의 조준과 운용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포구에 정박시킨 일본의 군선 뿐만 아니라 언덕과 해안가의 일본 군사들에게도 포탄이 정확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은 아군에게도 매우 힘겨운 싸움이었다.

부산의 일본군은 이미 조선 수군의 진격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조선 수군의 군선을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군(自軍)의 군선 120여척이 파괴되고 불태워졌으며 병력도 3800여명이 폭살당하는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 수군도 전사자 6명, 부상자 25명의 피해를 입었으니 총 네차례의 출정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투가 바로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장수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용맹을 발휘했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이 이번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 전사한 것은 조선 수군에게 있어서 매우 큰 손실이었다.

해전이 끝난 뒤 여수 본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그 동안 네 차례 출전을 하고 수십번 접전을 펄쳐 모두 다 승첩했으나, 만약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한 것이 없겠습니다.

전일의 전쟁 때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여척이었는데, 이번은 큰 적의 소굴에 정박한 적선 4백여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갖추고 승리한 기세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 꺾임이 없이 종일토록 공격하여 적선 100여척을 깨뜨려 적군으로 하여금 가슴이 무너지고 머리를 움츠려 겁내어 떨게 하였으니, 비록 적의 수급(首級)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저 번보다 훨씬 더하기에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고 별기에 기록합니다.

(중략)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은 변란이 생긴 이후 충의심을 분발하여 적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여 세번 싸움에서 늘 앞장섰고, 부산의 접전 때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의 큰 철환을 이마에 맞아 전사하니 지극히 슬프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이리하여 4차의 출정에서 10여차례의 해전을 벌였으며 적선 총 193척을 격파하고 적군 2만 9천여명을 살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이순신이 해상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 만약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이순신이 없었다면.....?

만일 이순신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조선 수군 최고 지휘관의 직책이 이순신에게 맡겨지지 않았다면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지 않고 훨씬 일찍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조선왕조가 전쟁 발발 1~2개월만에 일본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을 것이며, 명나라도 안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이후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일 뒤인 5월 3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국왕 선조(宣祖)는 불과 3일 전인 4월 30일에 거의 무방비상태인 서울에서 탈출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사나운 기세를 타고 그대로 추격했다면 선조는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피난가기 전에 붙잡혔을 것이다. 아니, 임진강을 채 건너기도 전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16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물러 분탕질을 치다가 5월 19일에야 다시 북상했다. 이순신이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총 42척의 일본군 전함을 격침시킨 것은 5월 2일이었다. 이 적군 함대는 서해로 북상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군수품을 보급하려던 배들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던 해상보급이 수군의 참패로 무산되자 서울의 일본군들은 그대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5월 19일에 서울을 떠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도 함경도로 쳐들어가 두만강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또다시 발이 묶여버리고 만다. 이는 5월 29일부터 6월 7일가지 벌어진 사천해전(泗川海戰), 당포해전(唐浦海戰), 제1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율포해전(栗浦海戰)에서 72척의 일본군 군선이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서해를 거슬러 올라 대동강으로 들어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지원 병력과 보급 군수물자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군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쪽에서는 패전보고(敗戰報告)만 잇다라 올라왔다. 한산해전(閑山海戰)과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 이어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도 대패했으니 이제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귀국할 길조차 막혀버릴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조선으로 건너와 독전할 작정이었는데 조선 수군의 활약 때문에 바다를 건너올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건너올 생각을 버리고 "조선 수군을 만나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남해안 동쪽 일부를 제외한 80% 이상의 재해권을 조선 수군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남해를 통해 곡창인 전라도를 장악하고, 나아가 서해로 북상하여 중부 이북을 공략하려는 일본군의 수륙병진(水陸竝進) 기도를 깨끗이 무산시킨 전략적 승리이기도 했다.

이후 일본군은 육전에서도 조선 관군과 의병들에게 패하게 되어 화평교섭에 응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황은 수년간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순신의 전략전술은 작전해역의 사정과 적군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군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유인하여 철저한 공격으로 섬멸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전공(戰功)을 인정받기 위해 적병의 수급(首級)을 베는 데에 신경쓰기보다는 적군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일본의 군선을 한 척이라도 더 박살내기 위해 포격전(砲擊戰) 위주의 전투를 감행했으며, 상대적으로 견고한 조선의 판옥선으로 돌격하여 적선을 들이받아 파괴하는 전법을 썼다. 그리고 전투에는 총지휘관인 자신이 늘 앞장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를 지휘하는 대신 뒤로 물러서려는 장병들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엄격한 군율로 다스렸다.

그것이 출중한 최고 경영자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방침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본이라는 국가와 이순신 개인의 전쟁이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높다. 당시 조선의 조정이나 관군, 그리고 지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군대는 이 전쟁에서 기여한 공로가 별로 없었다. 결정적으로 일본군이 조선 정복을 포기하고 퇴각을 하게 된 것은 이순신, 이 단 한사람에 의해서였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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