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무인지경을 가듯 북상한 일본군

이처럼 개전 초에 수군이 자멸해 버리고, 부산과 동래성이 차례로 무너져 버리자 일본군은 고리를 물고 상륙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에 이어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 19일에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이 교두보인 부산과 김해로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5만 2천 5백명의 대군이 겨우 6일 만에 상륙작전을 완수했던 것이다.

변변한 상륙 장비도 없던 16세기에 하루 1만 명씩이나 무기와 식량 등 필수적인 군수품을 대동한 채 상륙을 감행한다는 것은 웬만큼 치밀한 작전계획과 훈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이는 오로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침공을 머리에 두고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큐슈에서 기동훈련을 실시한 결과였다.

4월 19일에는 제4~7군의 선봉부대가 부산에 상륙했고, 후속부대가 계속 상륙했다. 부산과 쓰시마 사이의 대한해협은 일본 침략군의 전용 항로처럼 되어 일본군의 병력과 장비를 실어 나르는 수송선의 왕래가 끊임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4월 17일에는 양산을 점령하고, 잇달아 울산을 침공했다. 울산에 군영이 있던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은 첩과 베 1천필을 먼저 실어 보내고 도주한 뒤였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은 죄 없는 백성이었다.

일본군은 언양, 김해, 광주, 창원 등지를 휩쓸면서 계속 북상했다.

한편 늙고 병든 조대곤(趙大坤) 대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를 맡은 김성일(金誠一)은 부임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허위보고를 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선은 400척에 불과하고, 한 배에 수십 명씩 타고 있으니 병력도 불과 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위보고를 올렸다.

조선왕조 개국 200년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외적의 침범을 당했는데 변방 장수로 임명된 사람의 자질이 이 정도로 한심했던 것이다.

상륙작전에 성공한 일본군은 3로로 나누어 북진을 개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중로를 택해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 선산,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로 향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은 좌로를 택해 울산, 경주, 영천, 군위를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류하기로 했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우로를 맡아 동래에서 김해를 거쳐 성주, 추풍령으로 북상했다.

그 사이에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일본 수군은 해상을 경비하는 한편 조선 수군의 전력을 무력화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조선 조정이 일본군의 침략 보고를 받은 것은 사흘이 지난 4월 17일,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이 보낸 장계를 통해서였다. 이어서 경상우병사에서 초유사(招諭使)로 직책이 바귄 김성일과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粹)의 장계가 올라왔다.

그제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정에서는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개전 직후 김수는 진주의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에서 보고를 받았다. 그는 즉시 동래로 달려갔으나 성이 이미 함락된 뒤라 다시 진주로 돌아와 조정에 장계를 보내고, 18일에는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에게 휘하 전함과 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원균은 적군의 세력이 매우 큰데 놀라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70여척의 군선을 자침(自沈)시켰으며, 화포와 탄환을 모두 바다에 버리고 1만여명의 군사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겨우 6척의 군선만 이끌고 달아나 버렸다. 이처럼 개전 초에 경상우도수군(慶尙右道水軍)의 막대한 전력을 그대로 수장시키고 이웃한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을 구원하기는커녕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원균이 가덕도(加德島) 인근에서 일본군 소수 함대와 교전하여 적선 10여척을 격파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원균용장론(元均勇將論)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며 조작된 가설(假說)에 불과하다.

김수는 다른 고을에도 통첩을 보내 수령들에게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라 군사들을 예정된 집결지로 모이도록 했다. 또한 인근 군사령관들에게도 일본군 침공 사실을 통첩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이순신에게는 이 통첩이 4월 19일에 전달되었다.

◆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한 조선 조정

조정은 전에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의 침범이 없을 것이라고 한 허위보고를 문제 삼아 그를 처벌하려고 했다. 김성일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부임했다가 서울에서 내려온 금부도사(禁莩使)에게 체포되었고, 후임에는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임명되었다.

김성일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충청도 직산에 이르렀을 때 상황이 반전되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의 영수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와 좌의정(左議政) 유성룡(柳成龍)이 선조(宣祖)를 설득하여 그의 죄를 사면해주고, 경상우도 초유사를 삼아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아 적과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조정은 매일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당시 영의정은 이산해, 좌의정은 유성룡, 우의정(右議政)은 이양원(李陽元), 병조판서(兵曹判書)는 홍여순(洪汝諄)이었다. 유성룡은 이조판서(吏曹判書)도 겸하고 있었다.

선조는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사를 모르는 홍여순 대신 김응남(金應南)으로 병조판서를 삼고, 심충겸(沈忠謙)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삼았다. 또 대간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김응남을 부체찰사(副體察使)로 각각 임명하여 전쟁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가장 급한 일은 뭐니 뭐니 해도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파죽지세로 북진해오는 일본군을 막는 것이었다.

우선적인 방어 전략은 일본군이 천험의 요새인 문경 새재와 추풍령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요충지를 타넘는다면 일본군이 일사천리로 도성인 서울로 육박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선조는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가 일본군을 상주에서 물리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경악스러운 일은 전쟁터로 이끌고 갈 군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일은 일단 3백명의 군사를 모아 출전하려고 했지만 사흘 동안이나 모아도 쓸만한 군사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아 뒤따라오도록 한 뒤 자신이 먼저 떠났다.

조정에서는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 경주, 영천, 안동, 영주, 죽령으로 이어지는 좌로를 타고 북상하는 일본군을 죽령에서 치도록 하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김해, 함안, 창녕, 금산, 추풍령으로 이어지는 우로를 타고 북상하는 적군을 추풍령에서 무찌르도록 했다. 또 문경 새재에는 변기(邊璣)를, 추풍령에서는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임명해 수비하도록 했다.

이어서 선조는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유명했던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임명하여 좌로와 중로가 만나는 충주를 지키게 했다. 만일 조령과 추풍령이 모두 뚫리면 충주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라는 전략이었다.

물론 이대로만 된다면 더없이 훌륭한 전략이었다. 신립은 김여물(金汝物)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군사 80명을 거느리고 떠났다.

그 동안 일본군 제1군은 4월 19일에 밀양을 함락시키고, 23일에는 안동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고, 24일에는 선산을 거쳐, 25일에는 상주 외곽까지 진출해 있었다. 제2군은 19일 언양을 지나 21일 경주, 22일 영천을 지났으며, 제3군은 20일 김해, 21일 창원에 이어 영산, 창녕, 현풍 등지를 휩쓸고 27일에는 성주를 짓밟았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적군과 싸워 백성과 강토를 지켜야 할 책임 있는 수령 방백들은 거의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모두 제주껏 알아서 도망치라는 소리밖엔 없었다. 그러니 일본군의 칼부림에 죽어나는 사람은 죄 없는 백성뿐이었고, 이들의 비참한 비명이 천지를 진동했다.

◆ 탄금대전투(彈琴臺戰鬪) 패전(敗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새재를 넘어 문경에 도착했지만 성이 텅 비어 잇었다.

4월 23일에 상주에 들어가 보니 목사 김해(金邂)는 순변사를 맞으러 나간 뒤 소식이 없다면서 판관 권길(權吉) 혼자 지키고 있다가 군사라면서 8백여명을 모아왔는데 대부분이 군사훈련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농민이었다.

그 이튿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모[宗義智]가 이끄는 제1군 선봉부대가 상주 남쪽 20리 지점 장천까지 진출하여 진을 쳤다.

개령에 사는 백성 하나가 달려와 이 사실을 알리자 이일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가 그 다음날 민심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목을 베고 백성들을 북천으로 데리고 나가 훈련을 시켰다.

이일은 진지 주위에 초병을 배치하지도 않았는데, 얼마 뒤에 일본군 척후병이 나타나 동정을 살피고 간 직후 곧 적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고 훈련도 되지 않은 군사들이었다. 정규군이라고 할 수도 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이일의 부대는 금새 흩어져 버리고 일본군은 달아나는 조선의 군민(軍民)들을 뒤좇으며 총격을 가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달아난 이일은 문경에서 패전했다는 장계를 올린 뒤 조령을 넘어 충주로 도망쳤다. 그리고 일본군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문경까지 진격하여 성을 점령했다. 이때가 4월 26일이었다.

같은 날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은 충주에 도착해 있었다. 그때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이 충청도 각지의 군사 8천명을 모아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엇는데, 그들 대부분이 기마병이었다.

신립은 충주에서 가까운 새재를 정찰했다.

종사관 김여물을 비롯한 참모들이 새재를 사수할 것을 건의했지만 신립은 이를 묵살하고 듣지 않았다.

새재는 장부 1인이 막으면 능히 적군 1천명을 저지할 수 있는 천험의 요새였다. 새재와 같은 요처를 지키지 않고 버려둔 채 굳이 적군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타넘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런 황당무계한 전술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참으로 “당대의 명장”답지 않은 용병술이었다.

척후병을 보내 새재를 자세히 살피고 오도록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재에 복병이 없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듣고 처음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아둔한 장수로구나.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이 저와 같다면 다른 조선 장수들의 수준도 알 만 하겠군.”

아니아 다를까, 4월 28일에 신립은 충주성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남한강 상류, 충주성 북쪽 10리 지점인 달천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쳣다. 옛날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기마전(騎馬戰)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던 그 회심의 야전을 재현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탄금대는 기마병이 말달리기 좋은 메마른 벌판이 아니었다. 강변의 저습지였으니 말이 달리기는커녕 보병도 마음대로 달릴 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전투는 창과 칼을 들고 1대1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총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립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런 전법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유성룡(柳成龍)의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때는 임진년 초 조정에서 신립과 이일을 보내 국방 태세를 점검하게 한 직후였다.

”이일은 본시부터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신의 위엄만 세우려고 하니 수령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이들은 4월 1일 서울로 돌아와 복명했다. 이때 신립이 사저로 나를 찾아왔기에 나는 그를 보고 물었다.

”아마도 머지않아 우리나라에 전란이 있을 것 같소. 그때에는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넉넉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까짓 것쯤 걱정할 게 없소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지요. 전에는 왜병이 다만 짧은 병기만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만만히 볼 수 있단 말이오?”

그러나 신립은 종시 태연한 말투였다.

”왜병들이 조총이 있다지만 그게 어디 쏠 적마다 맞는답디까?” “


신립은 이런 사람이었다.

그날 4월 28일 정오쯤 고니시 유키나가가 거느린 일본군 병사 1만 5천명이 신립의 군대를 3면으로 에워싸고 공격을 개시했다.

조선 관군은 8천여명 대부분이 기마병이었고 뒤는 시퍼런 강물이 흘렀으며 두배나 넘는 적군이 삼면을 포위하고 있으니, 조선 관군으로서는 당연히 돌격전(突擊戰)을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주무기는 창과 칼이 아니라 조총이었다. 조총수들의 계속되는 일제사격에 말도 사람도 속절없이 나가 자 빠졌다. 게다가 말발굽이 늪지대에 빠져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런 사이에 일본군 병사들이 악귀처럼 달려들어 조선 관군을 마구 찌르고 베고 쳐서 넘어뜨렸다.

신립(申砬)은 환도(環刀)을 빼어 들고 적병들을 베어 넘기면서 분전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뒤늦게 깨닫고 얼굴을 감싸며 남한강으로 투신하여 익사하였다. 종사관 김여물(金汝物)도,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도, 조방장 변기(邊璣)도 신립의 뒤를 따라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의 이 전투에서 조선 관군 8천여명은 처참하게 전멸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임진왜란이 벌어진 뒤 겨우 보름밖에 안 되어 경상도 전역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불패의 명장 이순신(李舜臣)」4.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 (2)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무인지경을 가듯 북상한 일본군

이처럼 개전 초에 수군이 자멸해 버리고, 부산과 동래성이 차례로 무너져 버리자 일본군은 고리를 물고 상륙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에 이어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 19일에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이 교두보인 부산과 김해로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5만 2천 5백명의 대군이 겨우 6일 만에 상륙작전을 완수했던 것이다.

변변한 상륙 장비도 없던 16세기에 하루 1만 명씩이나 무기와 식량 등 필수적인 군수품을 대동한 채 상륙을 감행한다는 것은 웬만큼 치밀한 작전계획과 훈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이는 오로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침공을 머리에 두고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큐슈에서 기동훈련을 실시한 결과였다.

4월 19일에는 제4~7군의 선봉부대가 부산에 상륙했고, 후속부대가 계속 상륙했다. 부산과 쓰시마 사이의 대한해협은 일본 침략군의 전용 항로처럼 되어 일본군의 병력과 장비를 실어 나르는 수송선의 왕래가 끊임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4월 17일에는 양산을 점령하고, 잇달아 울산을 침공했다. 울산에 군영이 있던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은 첩과 베 1천필을 먼저 실어 보내고 도주한 뒤였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은 죄 없는 백성이었다.

일본군은 언양, 김해, 광주, 창원 등지를 휩쓸면서 계속 북상했다.

한편 늙고 병든 조대곤(趙大坤) 대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를 맡은 김성일(金誠一)은 부임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허위보고를 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선은 400척에 불과하고, 한 배에 수십 명씩 타고 있으니 병력도 불과 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위보고를 올렸다.

조선왕조 개국 200년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외적의 침범을 당했는데 변방 장수로 임명된 사람의 자질이 이 정도로 한심했던 것이다.

상륙작전에 성공한 일본군은 3로로 나누어 북진을 개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중로를 택해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 선산,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로 향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은 좌로를 택해 울산, 경주, 영천, 군위를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류하기로 했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우로를 맡아 동래에서 김해를 거쳐 성주, 추풍령으로 북상했다.

그 사이에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일본 수군은 해상을 경비하는 한편 조선 수군의 전력을 무력화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조선 조정이 일본군의 침략 보고를 받은 것은 사흘이 지난 4월 17일,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이 보낸 장계를 통해서였다. 이어서 경상우병사에서 초유사(招諭使)로 직책이 바귄 김성일과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粹)의 장계가 올라왔다.

그제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정에서는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개전 직후 김수는 진주의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에서 보고를 받았다. 그는 즉시 동래로 달려갔으나 성이 이미 함락된 뒤라 다시 진주로 돌아와 조정에 장계를 보내고, 18일에는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에게 휘하 전함과 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원균은 적군의 세력이 매우 큰데 놀라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70여척의 군선을 자침(自沈)시켰으며, 화포와 탄환을 모두 바다에 버리고 1만여명의 군사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겨우 6척의 군선만 이끌고 달아나 버렸다. 이처럼 개전 초에 경상우도수군(慶尙右道水軍)의 막대한 전력을 그대로 수장시키고 이웃한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을 구원하기는커녕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원균이 가덕도(加德島) 인근에서 일본군 소수 함대와 교전하여 적선 10여척을 격파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원균용장론(元均勇將論)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며 조작된 가설(假說)에 불과하다.

김수는 다른 고을에도 통첩을 보내 수령들에게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라 군사들을 예정된 집결지로 모이도록 했다. 또한 인근 군사령관들에게도 일본군 침공 사실을 통첩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이순신에게는 이 통첩이 4월 19일에 전달되었다.

◆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한 조선 조정

조정은 전에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의 침범이 없을 것이라고 한 허위보고를 문제 삼아 그를 처벌하려고 했다. 김성일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부임했다가 서울에서 내려온 금부도사(禁莩使)에게 체포되었고, 후임에는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임명되었다.

김성일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충청도 직산에 이르렀을 때 상황이 반전되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의 영수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와 좌의정(左議政) 유성룡(柳成龍)이 선조(宣祖)를 설득하여 그의 죄를 사면해주고, 경상우도 초유사를 삼아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아 적과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조정은 매일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당시 영의정은 이산해, 좌의정은 유성룡, 우의정(右議政)은 이양원(李陽元), 병조판서(兵曹判書)는 홍여순(洪汝諄)이었다. 유성룡은 이조판서(吏曹判書)도 겸하고 있었다.

선조는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사를 모르는 홍여순 대신 김응남(金應南)으로 병조판서를 삼고, 심충겸(沈忠謙)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삼았다. 또 대간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김응남을 부체찰사(副體察使)로 각각 임명하여 전쟁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가장 급한 일은 뭐니 뭐니 해도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파죽지세로 북진해오는 일본군을 막는 것이었다.

우선적인 방어 전략은 일본군이 천험의 요새인 문경 새재와 추풍령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두 요충지를 타넘는다면 일본군이 일사천리로 도성인 서울로 육박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선조는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가 일본군을 상주에서 물리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경악스러운 일은 전쟁터로 이끌고 갈 군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일은 일단 3백명의 군사를 모아 출전하려고 했지만 사흘 동안이나 모아도 쓸만한 군사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아 뒤따라오도록 한 뒤 자신이 먼저 떠났다.

조정에서는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 경주, 영천, 안동, 영주, 죽령으로 이어지는 좌로를 타고 북상하는 일본군을 죽령에서 치도록 하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김해, 함안, 창녕, 금산, 추풍령으로 이어지는 우로를 타고 북상하는 적군을 추풍령에서 무찌르도록 했다. 또 문경 새재에는 변기(邊璣)를, 추풍령에서는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임명해 수비하도록 했다.

이어서 선조는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유명했던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임명하여 좌로와 중로가 만나는 충주를 지키게 했다. 만일 조령과 추풍령이 모두 뚫리면 충주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라는 전략이었다.

물론 이대로만 된다면 더없이 훌륭한 전략이었다. 신립은 김여물(金汝物)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군사 80명을 거느리고 떠났다.

그 동안 일본군 제1군은 4월 19일에 밀양을 함락시키고, 23일에는 안동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고, 24일에는 선산을 거쳐, 25일에는 상주 외곽까지 진출해 있었다. 제2군은 19일 언양을 지나 21일 경주, 22일 영천을 지났으며, 제3군은 20일 김해, 21일 창원에 이어 영산, 창녕, 현풍 등지를 휩쓸고 27일에는 성주를 짓밟았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적군과 싸워 백성과 강토를 지켜야 할 책임 있는 수령 방백들은 거의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모두 제주껏 알아서 도망치라는 소리밖엔 없었다. 그러니 일본군의 칼부림에 죽어나는 사람은 죄 없는 백성뿐이었고, 이들의 비참한 비명이 천지를 진동했다.

◆ 탄금대전투(彈琴臺戰鬪) 패전(敗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새재를 넘어 문경에 도착했지만 성이 텅 비어 잇었다.

4월 23일에 상주에 들어가 보니 목사 김해(金邂)는 순변사를 맞으러 나간 뒤 소식이 없다면서 판관 권길(權吉) 혼자 지키고 있다가 군사라면서 8백여명을 모아왔는데 대부분이 군사훈련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농민이었다.

그 이튿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모[宗義智]가 이끄는 제1군 선봉부대가 상주 남쪽 20리 지점 장천까지 진출하여 진을 쳤다.

개령에 사는 백성 하나가 달려와 이 사실을 알리자 이일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가 그 다음날 민심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목을 베고 백성들을 북천으로 데리고 나가 훈련을 시켰다.

이일은 진지 주위에 초병을 배치하지도 않았는데, 얼마 뒤에 일본군 척후병이 나타나 동정을 살피고 간 직후 곧 적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고 훈련도 되지 않은 군사들이었다. 정규군이라고 할 수도 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이일의 부대는 금새 흩어져 버리고 일본군은 달아나는 조선의 군민(軍民)들을 뒤좇으며 총격을 가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달아난 이일은 문경에서 패전했다는 장계를 올린 뒤 조령을 넘어 충주로 도망쳤다. 그리고 일본군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문경까지 진격하여 성을 점령했다. 이때가 4월 26일이었다.

같은 날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은 충주에 도착해 있었다. 그때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이 충청도 각지의 군사 8천명을 모아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엇는데, 그들 대부분이 기마병이었다.

신립은 충주에서 가까운 새재를 정찰했다.

종사관 김여물을 비롯한 참모들이 새재를 사수할 것을 건의했지만 신립은 이를 묵살하고 듣지 않았다.

새재는 장부 1인이 막으면 능히 적군 1천명을 저지할 수 있는 천험의 요새였다. 새재와 같은 요처를 지키지 않고 버려둔 채 굳이 적군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타넘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런 황당무계한 전술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참으로 "당대의 명장"답지 않은 용병술이었다.

척후병을 보내 새재를 자세히 살피고 오도록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재에 복병이 없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듣고 처음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아둔한 장수로구나.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이 저와 같다면 다른 조선 장수들의 수준도 알 만 하겠군."

아니아 다를까, 4월 28일에 신립은 충주성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남한강 상류, 충주성 북쪽 10리 지점인 달천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쳣다. 옛날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기마전(騎馬戰)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던 그 회심의 야전을 재현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탄금대는 기마병이 말달리기 좋은 메마른 벌판이 아니었다. 강변의 저습지였으니 말이 달리기는커녕 보병도 마음대로 달릴 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전투는 창과 칼을 들고 1대1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총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립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런 전법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유성룡(柳成龍)의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때는 임진년 초 조정에서 신립과 이일을 보내 국방 태세를 점검하게 한 직후였다.

"이일은 본시부터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신의 위엄만 세우려고 하니 수령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이들은 4월 1일 서울로 돌아와 복명했다. 이때 신립이 사저로 나를 찾아왔기에 나는 그를 보고 물었다.

"아마도 머지않아 우리나라에 전란이 있을 것 같소. 그때에는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넉넉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까짓 것쯤 걱정할 게 없소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지요. 전에는 왜병이 다만 짧은 병기만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만만히 볼 수 있단 말이오?"

그러나 신립은 종시 태연한 말투였다.

"왜병들이 조총이 있다지만 그게 어디 쏠 적마다 맞는답디까?" "


신립은 이런 사람이었다.

그날 4월 28일 정오쯤 고니시 유키나가가 거느린 일본군 병사 1만 5천명이 신립의 군대를 3면으로 에워싸고 공격을 개시했다.

조선 관군은 8천여명 대부분이 기마병이었고 뒤는 시퍼런 강물이 흘렀으며 두배나 넘는 적군이 삼면을 포위하고 있으니, 조선 관군으로서는 당연히 돌격전(突擊戰)을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주무기는 창과 칼이 아니라 조총이었다. 조총수들의 계속되는 일제사격에 말도 사람도 속절없이 나가 자 빠졌다. 게다가 말발굽이 늪지대에 빠져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런 사이에 일본군 병사들이 악귀처럼 달려들어 조선 관군을 마구 찌르고 베고 쳐서 넘어뜨렸다.

신립(申砬)은 환도(環刀)을 빼어 들고 적병들을 베어 넘기면서 분전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뒤늦게 깨닫고 얼굴을 감싸며 남한강으로 투신하여 익사하였다. 종사관 김여물(金汝物)도,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도, 조방장 변기(邊璣)도 신립의 뒤를 따라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의 이 전투에서 조선 관군 8천여명은 처참하게 전멸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임진왜란이 벌어진 뒤 겨우 보름밖에 안 되어 경상도 전역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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