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1920·30년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 ⑸

5.한중합작(韓中合作)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

 

●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편성.



1930년 7월에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와 생육사(生育社)를 모체(母體)로 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었다. 당시 북만주 교민들의 자치기관이던 한족자치연합회를 옹호하고 지도 육성하는 것이 이 단체의 성격이었다. 이 정당은 중앙당부에 6개의 위원회를 두고 지방에는 지당부(支黨部)와 구당부(區黨部)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에는 홍진(洪震), 총무위원장에는 신숙(申肅), 조직위원장에는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에는 안훈(安勳), 군사위원장에는 이청천(李靑天), 경리위원장에는 최호(崔灝), 감찰위원장에는 이장녕(李章寧) 등이 각각 취임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소속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였는데, 1931년까지 북만주 중동철도를 중심으로 26개의 군구(軍區)를 설치하고 일제(日帝)와 대적하였다.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부사령관 남대관(南大觀)

참모장 신숙(申肅)

재무담당 겸 외교관 안지산(安地山)

훈련대장 안광운(安光雲)

의용군 중대장 오광선(吳光鮮)

의용군 소대장 이춘정(李春正)

암살대장 이출정(李出正)

별동대장 한광빈(韓光彬)

헌병대장 배성운(裵成雲)

통신부대장 겸 검사역 신원균(申元均)

구국후원회장 권수정(權秀貞)

서기장 홍진(洪震)



이와 같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이 결성되었을 때에 만주를 향한 일본군의 침략은 더욱 가열되었고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공동 연합하여 북만주까지 침공하여 왔다. 이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1931년 11월 오상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당내의 일체 공작활동은 군사방면에 집중할 것과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을 중국 당국과 협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편성.



조선혁명군은 처음에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독립군이었는데, 1929년 9월 국민부 중앙의회에서 독립군을 당시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 소속으로 이관키로 결정함에 따라 지휘처가 변경되었다. 그 해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발전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되자 독립군은 동당(同黨)의 소속 군대가 되었는데 이때 조선혁명당은 산하 독립군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라 부르며 독립시켰던 것이다.



조선혁명군의 모체는 정의부(正義府) 소속 의용군 6개 부대였으며 여기에 새로이 20개 부대를 증가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10개 중대로 편성되어 각 지방에 주둔시켰는데 그 후 조선혁명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10개 중대를 7개 중대로 개편하였다. 12월에 조선혁명군으로 정비, 독립되었을 때에 혁명군의 지도기관으로서 각 대대에서 대표자를 선출하여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군사위원회에서는 총사령관에 이진탁(李振卓), 부사령관에 양세봉(梁世鳳), 참모장에 이웅(李雄)을 선임하였고 종래의 10개 중대를 7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이 때에 제1중대장은 김보안(金輔安), 제2중대장은 양세봉, 제3중대장은 이윤환(李允煥), 제4중대장은 김문거(金文渠), 제5중대장은 이종락(李鍾洛)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런데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내부에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것은 내부에 사회주의자가 많이 침투하여 있었으므로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회의 때에 이들이 조선혁명당을 탈퇴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혁명군의 제5중대장 이종락도 이들과 동조하여 혁명군을 이탈하여 길림과 흑룡강 지역을 근거로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吉江指揮部)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혁명군은 문학빈(文學彬)을 대장으로 삼은 흑길별동대(黑吉別動隊)를 편성하여 당지에 파견하였다.



●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 결성과 대일항전(對日抗戰)



⑴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한중연합항일전(韓中聯合抗日戰)



① 연합군의 초전(初戰) 패배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야기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인 만주국(滿州國)을 수립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만주국군과 합동하여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 군사조직에 대한 토벌작전을 본격화하였다. 이 때 만주방면에는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의 기치를 든 수많은 중국 의용군이 편성되어 일본군과 만주국군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들 군대는 예전의 장학량(張學良) 부대 일부와 보위단(保衛團) 또는 마적의 일부도 참가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군대로서 통화 지방에 왕덕림(王德林), 풍점해(馮占海) 부대가, 흑룡강 지방에는 마점산(馬占山) 부대가, 합니하(哈泥河)에는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 사령관 정초(丁超)가 여단장 고봉림(考鳳林)과 함께 일만연합군(日滿聯合軍)과 싸우고 있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이들 중국군의 항전을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볼 때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성립이 박두하였음을 직감케 하는 것이었다.



1931년 11월 2일 한국독립당은 긴급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일제의 만주 점령에 대처하여  새로운 활동목표를 설정했다. 이 회의에서 한국독립당은 모든 역량을 항일전(抗日戰)에 집중키로 하고 다음과 같은 3개항을 결의했다.



1.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하달하고 집중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2. 당내의 일체 공작은 군사활동에 집중한다.

3. 길림성 반일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한다.



이상과 같이 결의한 후 한국독립당은 동월 10일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소집과 징모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2일에 당 대표 신숙과 남대관을 중국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및 호로군 총사령부에 파견하여 사령관 정초 및 제2군단장 양문휘(楊文揮), 제3군단장 고봉림 등과 한중연합작전을 협의하게 하였다. 이 결과 동년 12월 11일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 등이 중국군 수뇌부와 협의하여 다음과 같은 구체안을 마련하여 상호 협정을 체결하였다.



1. 한중 양군은 어떤 불리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상호 장기항전을 맹세한다.

2. 중동철도(中東鐵道)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담당하고 동부전선은 한국군이 담당한다.

3.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시 후방교란은 한국군 장교가 담당하고 한국군에 수요되는 일체 물자는 중국군이 담당한다.



이로써 만주에서 한중연합군에 의한 대일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독립군은 앞서 발령된 총동원령에 의하여 소집된 병사의 훈련과 부대편성을 서두르던 중에 1932년 2월 12일에 일만군(日滿軍)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아직 부대를 재정비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비도 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일만군은 2월 5일 하얼빈 방면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공군 편대의 엄호를 받으며 중동철도를 따라 진공하고 있었다.



한중연합군은 일면파(一面陂), 오길밀(烏吉密), 밀로점(密路岾), 동빈방정(東賓方正) 등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참패를 당하고 사산되고 말았다. 이때에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은 참모장 신숙과 더불어 의란(依蘭)에서 1개 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통하현(通河縣)으로 퇴각, 부대를 수습하였다.



한편 별동대장 안종선(安鍾宣)은 중국호로군 제3군단장 고봉림(考鳳林)과 함께 3월 3일 하성(河城)을 일시 탈환하였으나 만주국군의 반격으로 패퇴하였고, 지상기(池上奇) 전북빈(全北賓) 등이 인솔하는 한국독립군 제4대대와 제5대대는 유지광(劉志光)이 이끄는 중국호로군 제4여단과 함께 한 달 남짓 교전하다가 일면파 이북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첫번째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이 이렇게 참담한 패배로 끝난 뒤 잠시동안 상호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은 쌍성현(雙城縣)에서 비상회의를 개최하고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한편 중국군 고봉림 부대에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통고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독립당의 수습책은 성공하여 1개월 미만에 독립군이 재집결하였으며 김창환(金昌煥)을 총사령관 대리로 임명, 부대를 재편성하여 훈련에 임하였다. 전력을 재정비한 한중연합군은 1932년 8월부터 본격적인 연합작전에 돌입하였다.



②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3천여명과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2만 5천여명으로 편성된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합장선(哈長線) 철도의 요지이며 북만주 중요 물산의 집산지인 쌍성보를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9월 3일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장군이 흑룡강 지방에서 부대를 인솔하고 오자 독립군을 다시 편성하고 김창환(金昌煥)이 다시 부사령관이 되어 19일 쌍성보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진군 도중 만주국군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3일 동안에 2백여리를 진격하여 쌍성보 남쪽 5리 지점에 있는 소성자(小城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고봉림(考鳳林)이 이끄는 길림자위군과 합세하여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국군은 동문과 남문을 공격하고 한국군은 서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후 공성전(攻城戰)을 개시하였다. 성내에는 만주국군 3개 여단 병력이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한국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퇴로로 남겨두었던 북문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문 밖에는 미리 이와 같은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매복시켜 둔 연합군 병력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3만 병력이 3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한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나 일본군 대병력의 반격이 있을 것을 고려하여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쌍성보 5리밖에 있는 우가둔(牛家屯)으로 옮기게 하고 쌍성에는 소수의 부대를 잔류시켰다. 잠시 후 예상하였던 대로 일본군 대병력이 쌍성보를 공격하여 왔다. 연합군은 이를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불행히도 중국군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 쌍성보를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쌍성보에서의 격전으로 일시 흩어졌던 연합군은 다시 부대를 재정비한 후 11월 7일 재차 쌍성보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한국군과 중국군은 부대를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쌍성보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한국군은 2백명을 단위로 부대를 15개로 편성한 후 선두에 서서 돌격하였으며 중국군은 탄환과 식량을 담당하였다. 오후 6시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1개 부대는 정면으로, 1개 부대는 왼쪽으로, 1개 부대는 뒤편으로, 기관총대는 중앙으로 각각 진격하였다. 적군은 박격포(迫擊砲)를 쏘고 수류탄(手榴彈)을 던지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수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성안으로 침입한 한국독립군은 적진을 교란시켰으며 쌍성보 뒷산을 점령한 한국독립군 포병대가 시가의 주요 건물에 포격을 가하자 만주국군은 전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전원 항복하면서 성문을 열어 연합군의 입성을 환영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전멸되고 만주국군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두번째로 쌍성보를 탈환한 연합군은 입성 즉시 전리품을 정리하고 전장을 정돈한 후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적군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11월 20일 일본군은 어김없이 보복전(報復戰)을 전개하였다. 하얼빈과 장춘(長春)에 주둔하고 있던 일만연합군(日萬聯合軍) 2만여명이 공군 편대의 엄호를 받으며 반격하여 온 것이었다. 이에 맞서 아군은 전병력을 7개 부대로 나누어 각 요충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반격에 대응하였다. 1주야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이 벌어졌는데 피아에 사상자가 속출하여 성 내외에는 전사자의 시체가 누적되면서 피바다를 이루었다. 21일 밤에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어 아군의 방어선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항공기를 이용한 일본군의 폭격으로 인하여 마침내 방어선이 적군에게 돌파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독립군은 22일 새벽까지 무너져 가는 전선을 독려하며 온갖 방법으로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중국군의 사기가 점차 떨어짐으로써 부득이 성을 적군에게 내주고 5백여리를 후퇴하여 충하진(沖河鎭)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의 피해도 막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패전에 낙담한 고봉림의 중국군이 적군과 단독으로 휴전회담을 개최하였다. 이에 이청천 장군을 비롯한 한국군 지휘관들이 이를 극력 만류하였으나 본래 신념이 약하고 형세에 끌리기 쉬운 중국인 집단인지라 고봉림의 중국군은 이익을 쫓아 이념과 의리를 버리고 일본군을 상대로 강화(講和) 협의를 계속하였다. 이에 한국군은 동월 7일 패전의 상처와 우군에게 배반당한 쓰라린 분노를 되씹으며 결연히 중국군과 갈라져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1월 29일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활동방침을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군사활동 지점을 개정하여 동만주 지역에 한정하고 먼저 구국군(救國軍) 수뇌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함.

2. 각 군구에 수훈장정(受訓壯丁)을 다시 징집할 것.

3. 황학수(黃學秀)를 당군(黨軍) 부사령관으로 선정한다.  



이와 같은 결정에 의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3명의 대표를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총사령관 왕덕림(王德林)에게 파견하였으며 또한 남경(南京)에도 대표를 보내어 중국 정부와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을 협의하였다. 12월 25일 한국독립군은 중국구국군과 합세하여 경박호(鏡泊湖)에 진입하던 만주국군 유격대를 매복전(埋伏戰)으로 섬멸하였다.



③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1933년 3월까지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사도하자(四道河子)에 주둔하여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날로 증강되어 갔는데 이와 같은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한국독립군을 일거에 섬멸하려고 만구국군과 합세하여 공세를 취하였다. 4월 14일에 일만연합군(日滿聯合軍) 대부대가 진격하여 온다는 것을 전해들은 한국독립군은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과 더불어 적군을 포위, 섬멸하기로 하고 전부대를 4개로 나누어 제1로군은 소부대로 적군을 유인하게 하고 제2로군과 제3로군은 삼도하(三道河) 뒤에 있는 분수령과 좌우 계곡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으며 제4로군은 이도하(二道河) 입구에 매복하였다가 적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적군의 수송차량을 빼앗도록 하였다.



15일 새벽 적군의 약 1개사단 병력이 황가둔(黃家屯)에서 이도하 방면을 거쳐 사도하자에 진입하여 왔다. 이것은 적군이 아군의 유인작전에 빠져들어 온 것이었다. 때를 기다리던 아군이 일제히 박격포(迫擊砲)와 연발소총(連發小銃)을 쏘며 급습하니 적군은 미처 응전하지도 못한 채 무너져 갔다. 순식간에 적군 과반수가 쓰러졌으며 혼란에 빠진 적군 패잔병들은 어둠을 뚫고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손실은 극히 미약했으며 연도에는 적군이 버리고 달아난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이 부지기수였다.



18일 저녁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부대를 정돈하는 동시에 전리품을 수습하여 당당히 본영으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5월 2일에 연합군은 유격대를 각지에 파견하여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기습공격하였는데 대소 20여회의 전투에서 적병 1백여명을 사살하였다.



④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승세를 몰아 이번에는 영안성(寧安城)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먼저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부대를 3개대로 편성하여 시행되었는데, 제1로군은 기병대로 편성하고 동목단강(東牧丹江) 연안의 골짜기에 진출하게 하여 적군의 후원부대를 공격하게 하였고 제2로군은 1개 여단의 병력으로 영안성과 동경성의 중간지점에 배치하여 먼저 교량과 전선을 끊어 적군의 후원부대를 저지하게 했으며 제3로군은 좌우익으로 나누어 직접 동경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6월 3일 밤에 작전계획대로 동경성을 공격하였다. 3시간에 걸친 총격전(銃擊戰) 끝에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문으로 도주하다가 우군의 복병에게 습격을 받고 전멸되었으며 만주국군은 여단장 운세재(蕓世材)만이 호위병 수명을 데리고 도주하였을뿐 모든 병력이 항복하였다. 이때 영안성에 있던 일본군은 한중연합군이 두려워 감히 구원병을 보내지 못하고 공포(空砲)만 쏘아댈 뿐이었다. 승전(勝戰)한 한중연합군은 성내로 들어가 주민들을 선무하여 안심시키는 한편 전리품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연합군 수뇌부는 영안성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동경성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고 일본군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영안성을 당장 공격하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부득이 주력부대를 왕청(旺淸)과 동녕 사이의 산간지대로 이동하여 주둔시켰다.



이와 같이 한중연합군은 전투에 이기고도 점령지를 오랫동안 확보할 실력이 없어 곤란한 경우에 놓여져 있었다.



⑤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동년(同年) 6월 28일에 한중연합군 전부대는 노송령(老松嶺)을 거쳐 진군했는데, 이때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연합군을 토벌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행동은 연합군에게 즉각 탐지되었다. 연합군은 곧 일본군을 맞아 교전하여 섬멸하기로 하고 대전자에서 5리 지점에 있는 노모제하(老母諸河)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7월 3일 대전자령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2일 오후 6시까지 대전자령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 완료하였다.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Z"자로 된 험준한 고개인데 길이가 약 20리나 되는 골짜기가 있으며 그 양편에는 높이가 수백미터에 이르는 절벽이 솟아 있는 심산의 밀림지대이다. 이곳에 배치된 우군 병력은 이청천(李靑天)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2천 5백여명, 시세영(蔡世榮)이 이끄는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6천여명인데, 한국군 전원과 중국군 2천명이 전위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공격의 주동은 역시 한국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연합군이 매복하고 있는 지점으로 들어왔다.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大佐)가 인솔하는 일본군은 연합군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자연을 즐기며 소풍이라도 온 것 같이 꽃을 꺾어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 넘어 행렬의 끝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중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일본군은 미처 응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지(死地)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져갔다. 4시간의 총격전으로 일본군은 전사자 1천 7백여명의 시체를 남겨두고 흩어졌다.



이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승리는 한국인들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에서 특기할 만한 승전(勝戰)이었으며 한중연합대일항전(韓中聯合對日抗戰) 최고의 대승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나 연합군은 전투 이후 군복 3천벌과 담요 3백장, 총포류(銃砲類) 1천 8백여정 등 많은 군수물자를 얻었지만 이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양군 사이에 감정을 해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약 2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정비 보강한 한국독립군은 9월 1일에 동녕현성(東寧縣城)에 주둔하고 있는 만주국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만주국군은 적절한 시간대에 지원을 해온 일본군 덕택에 한국독립군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었고, 한국독립군은 후속부대를 파견해 주기로 한 중국군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3일간의 전투 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녕현전투(東寧縣戰鬪)에서 패배한 이후 한중 양군의 불화는 더욱 심각해졌고 끝내는 중국구국군 제1사단장 오의성(吳義成)이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한국독립군 병영을 습격하여 무장해제를 시키고 이청천(李靑天), 조경한(趙擎韓) 등 한국군 간부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후에 양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구속된 한국군 간부들이 석방되었으나 한중연합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⑵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한중연합항일전(韓中聯合抗日戰)



① 신빈사변(新賓事變)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이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등과 연합전선(聯合戰線)을 형성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소속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 별도로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을 결성하여 항일전(抗日戰)을 펼쳤다. 즉 1931년 일제(日帝)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를 침공하자 조선혁명당은 이 난국을 타개할 방안으로 한중연합전선구축(韓中聯合戰線構築)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학규(金學奎), 김이대(金履大)를 당 대표로 선출하여 중국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협의하게 하였다.



이들 양인은 번양(藩瀁)으로 가서 그곳의 중국국민외교협회(中國國民外交協會) 및 중국의 민간지도자들과 접촉하여 협의하였다. 이 양측회담에서 주로 논의된 사항은 재만한인(在滿韓人)의 국적문제와 더불어 한·중 양민족의 연합항일전(聯合抗日戰) 문제였다.



그 후 이 회담에서 논의된 것을 기초로 하여 조선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인 현익철(玄益哲)이 구체화시켜 동성한교정세(東省韓僑情勢)와 중한양민족합작의견서(中韓兩民族合作意멕?를 만들어 중국당국에 보냈는데, 그 내용에 대하여 중국인들은 열렬히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작전의 구축이 구체화되기 전에 현익철이 일경(日警)에게 체포됨으로써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간부들이 신빈현(新賓縣)에서 참모회의를 개최할 때 일본 헌병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회의장에 있던 30여명의 간부중 이호원(李浩源)·이동산(李東山)·김보안(金輔安)·이규성(李奎星)·차용륙(車用陸)·전운학(田雲學)·장세명(張世明)·김관웅(金寬雄)·박치화(朴致化)·이종건(李鍾建) 등 10여명이 피체되는 비운을 맞이함으로써 치명적 타격을 받아 연합작전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신빈사변(新賓事變)에서 일제(日帝)의 독아(毒牙)를 피할 수 있었던 고이허(高而虛)·양기하(梁基瑕)·양세봉(梁世奉) 등 중견간부들은 이러한 불행에도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대원들을 규합하여 결전태세를 더욱 추진해 나갔다.



1932년 2월에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관전현(寬甸縣)에 주둔하고 있던 양기하가 국내에서 북진한 평북 초산(楚山)의 일본 경찰대와 만주국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하자 조선혁명군은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하여 총사령관에 양세봉, 참모장에 김학규를 각각 선임하여 새롭게 대오를 가다듬고 본격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진행하였다.



②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



1932년 3월 11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은 참모장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조화선(趙化善)·최윤구(崔允龜)·정봉길(鄭鳳吉) 휘하 3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이춘윤(李春潤)이 이끄는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 및 왕동헌(王潼軒)·양석복(梁錫福)이 인솔하는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합세하여 신빈현(新濱縣) 왕청문(旺淸門)에서 무순(撫順) 천금자(千金藉)를 향하여 진군하다가 12일 신빈 남쪽의 두령지(兜嶺地)에 도착하여 야영하였다. 이때 이 정보를 탐지한 신빈현성(新賓縣城)에 주둔중인 일본군이 중화기(重火器)를 이용하여 공격해왔다. 그러나 주변지리에 능숙한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효과적인 반격을 전개하였고, 교전 1시간만에 일본군을 격퇴하면서 돌격전(突擊戰)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일시적으로 선점하였던 주변고지를 빼앗기고 퇴각을 거듭하였으며, 연합군은 계속 일본군을 추격하면서 신빈 서쪽에 있는 영릉가성(永陵街城)을 함락시키고 다시 일본군을 뒤쫓아 맹공을 가하여 상협하(上夾河)마저 점령하였다. 5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은 2백여명이 넘는 무수한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으며 총기(銃器) 1백여정, 군마(軍馬) 3십여필을 버려둔 채 후퇴하였다.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대적한 이 첫번째 전투에서 조선혁명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보다 더 큰 의의는 한중연합군이 협동작전을 벌여 획득한 이번 승리가 한·중 양민족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높여주게 되었으며 정신적 유대가 공고해졌다는 점이었다.



③ 요령구국회(遼寧救國會)와의 합작(合作)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의 첫번째 승리는 더 본격적인 한중연합전선(韓中聯合戰線)을 구축하는데 실마리가 되었다. 1932년 4월 20일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의 지휘관들인 당취오(唐聚五)·왕육문(王育文)·손수암(孫秀岩)·이춘윤(李春潤)·왕봉각(王鳳閣) 등이 환인성(桓仁城)에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높이 걸고 요령구국회(遼寧救國會)를 결성하여 항일전(抗日戰)을 계획하였다. 요령구국회는 정치·군사 양위원회를 두고 상무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육문이, 군사위원회 위원장 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총사령관에는 당취오가 각각 선임되었다.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 무장 단체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은 총사령부 아래 52개로 사령부를 두어 환인(桓仁), 통화(通化), 신빈(新賓), 집안(輯安), 해룡(海龍) 등을 비롯한 20여현을 관장하며 20만 대병력을 통솔하는 만주 최고의 항일군(抗日軍)이었다.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서는 이들과 연합전선구축(聯合戰線構築)을 계획하고 당·군 대표에 김학규(金學奎)를 선임하여 요령구국회에 파견하였다. 김학규는 환인성으로 가서 왕육문·당취오와 협상하여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軍民)은 절실히 연합하여 일치항전하고, 인력과 물력은 서로 통용하며 합작(合作)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반일공작(反日工作)를 나누어 맡는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완성하였다.



이상의 결의안에 의하여 요령민중자위군 안에서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특무대사령부와 선전임무를 담당하는 선전대대를 설치하고 이 두 가지를 조선혁명군 측에서 일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무대사령부를 통화성(通化城)에 두고 양세봉(梁世奉)이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김광옥(金光玉)이 선전대대장이 되었다. 또한 요령구국회 선전부내에 한국인선전과를 두어 이곳에서 한글간행물과 합작(合作)이라는 이름의 신문을 발간하였다.



특무대사령부는 8개 특무대를 두고 만주 각지와 국내에 특무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전투에 임하여서는 선봉부대로 맹활약을 펼쳤다. 이어 계속 대원의 충원을 위하여 통화의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요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要城軍官學校)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2천명의 인원이 교육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각 특무대 소관 지역내에 병농강습소(兵農講習所)를 개설하여 한국인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약 5만명이 수강한 강습소생은 조선혁명군의 후비병력(後備兵力)이었으며 2천명의 군관학교 수료생은 혁명군의 후보군관이 있다.



③ 조선혁명군의 쇠락(衰落)



1933년 5월 8일 일본군 2개 중대 병력과 만주국군 1천 5백명이 다시 영릉가성을 공격해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교전 끝에 적군을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관계로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임강, 환인, 신빈, 유하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또 중국군의 본거지인 통화로 진격하여 왔다. 중국군은 탄약(彈藥)의 부족과 훈련 미숙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할 수 없어 교전 수일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의기양양하여 6월 15일에 대병력을 동원하여 양대령(陽臺嶺)을 넘어서 흥경·청원 등지로 진격하여 왔다. 이에 대하여 조선혁명군 1천여명은 총사령관 양세봉의 지휘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의용군은 1만의 병력으로 흥경을 사수하도록 대비책을 세웠다. 조선혁명군은 기습적인 돌격전(突擊戰)으로 일본군 보병 1백여명을 쓰러뜨리는 전과를 올렸으나 일본군 항공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 데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해천(李海天)·김일룡(金一龍)·박석원(朴錫源) 등 30여명의 대원이 전사했으며 수백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퇴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분루를 삼키고 남산성(南山城)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7월 7일에 일본군은 또 다시 영릉가에 있는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은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 장군의 용감한 독전(督戰)과 조화선(趙化善)이 이끄는 제3로군의 지원으로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輕機關銃) 3정, 소총(小銃) 80정, 중포(中砲) 1문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7월 중순에는 한중연합군이 무순현의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 1개 연대를 공격하여 2일간에 걸친 격전 끝에 일본군 2백여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히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일본군 1개 대대가 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는 최윤구(崔允龜)의 제4로군을 공격하자 제4로군은 제3로군의 지원을 받아 적병 80여명을 사살하며 격퇴시켰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끊임없이 연합군을 공격하였으며 더욱이 항공기의 폭격은 아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중연합군의 전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훌륭한 전투 능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와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점으로 적군을 완전히 제압하기 어려웠다.



특히 사방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며 집요한 공격을 전개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이와 비례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기만 했다. 따라서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어떤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조선혁명군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큰 불행이 찾아왔다. 일본군의 밀정으로 활동하는 박창해(朴昌海)라는 부일한인(附日韓人)이 한중연합군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하고 있던 중국인 지주를 매수하여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을 암살한 것이다. 항일투쟁(抗日鬪爭)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던 조선혁명군에게 양세봉 장군 피살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김호석(金浩石)이 양세봉의 후임으로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다시 군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때 조선혁명군은 개편되어 조선혁명군사정부(朝鮮革命軍事政府)로 바뀌었다. 조선혁명군사정부는 법무부, 민사부, 재무부, 외교부, 교양부, 특무부, 군사부 등 7개 부서를 두었으며 관할지방을 9개 군구로 나누었다.



이 당시 병력은 양세봉이 총사령관으로 있었을 당시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1935년에는 일본군이 만주국군과 합동으로 추계대토벌작전(秋溪大討伐作戰)을 전개하자 조선혁명군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못 되어 다른 무장부대와 합세하여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9월에는 조선혁명군 제1사단장 한검추(韓劍秋)가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사령관 왕봉각(王鳳閣)과 집안현에서 회담을 갖고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를 조직한 목적은 한국과 중국의 민족지도자들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치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싸우자는 데 있었으며 한·중 양국인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항일동맹회의 조직 구성은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고이허를,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왕봉각이, 군사부총사령관에는 한검추가 각각 임명되었다.



이 조선혁명군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1936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는데 일부는 1938년까지 만주에 잔류하면서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 독립군의 관내(關內) 이동과 군사활동



한중연합군이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에서 승리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한중 양군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여 간교한 이간질이 행하여지기 시작함으로써 양군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고, 결국 적색분자들의 이간질과 장병들 사이에 생긴 사소한 감정대립으로 중국군 지휘관 오의성(吳義成)·시세영(柴世榮) 등은 한국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행하고 이청천(李靑天)·조경한(趙擎韓)·최명록(崔明錄) 등 수십명의 간부를 구속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군 간부들의 항쟁과 한국독립당의 항의로 중국군도 차츰 오해가 풀려 간부들은 석방되고 독립군의 무기도 돌려주었다. 하지만 한국독립군은 그동안 중국군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너무나 극심하였으며 중국군에 대한 불신감을 씻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재만(在滿) 독립군이 극한적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독립군 간부들을 중국의 정규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청천을 군사양성의 책임자로 할 것을 결정하고 독립군의 관내 이동을 지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독립군 간부들은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진로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 회의 결과 중국군과의 합동작전은 믿을 수가 없고 정부의 지시가 있으나 부득이 부대를 관내 즉 중국 본토로 옮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독립군을 일시에 이동시키기는 어려우며 또 10여년간 대일전투장인 만주지역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우선 간부 중 일부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군관양성사업에 주력하고 독립군 중에 군관학교 입학지원자를 선출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만주에 그대로 잔류하여 최후까지 일본군을 향한 유격전(遊擊戰)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33년 10월 20일경 이청천(李靑天)·오광선(吳光鮮)·최관용(崔寬用) 등 32명의 간부가 정부의 소환으로 중국 본토로 들어가고 잔여 부대는 최악(崔岳)·안태진(安泰振)의 지휘하에 목릉, 영안, 밀산(密山) 등 산림지대로 옮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혁명군은 이미 1932년부터 간부진이 남경방면을 왕래하면서 중국 정부에 지원교섭을 벌였으며 남경(南京), 광주(廣州) 방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와 연락하다가 그대로 관내에 머물러 새로운 항일독립전쟁 준비에 헌신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한국독립군 간부들이 중국 본토로 들어오자 우선 우수한 청년들을 선벌하여 중국군관학교의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시켰다. 이때는 1934년 봄으로 한국인 훈련생 90명만으로 1개반이 특설되어 독립전쟁을 담당할 지휘관으로서의 훈련을 중국군 장교들과 같이 받게 되었다.



한국인 훈련생들은 모두 중국군관학교의 교과과정에 의하여 훈련을 받았는데 교과는 정치훈련과 전술에 치중되었다. 그리고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전했던 이범석(李範奭)이 특별훈련반의 학생대장으로, 오광선으 학생반장이 되었다.



이 한국인 특설반은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1년 후 제1기 졸업생을 내고는 끝나고 말았다. 원래 중국의 군관학교에서 한국 청년들을 교육한다는 것이 국제문제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하고 훈련생들도 본명을 감추고 가명으로 학적부를 작성하여 훈련을 시켰던 것인데 끝내 이것이 일본측에 탐지되어 버렸고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게 되니 중국 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특설반 훈련은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제1기 졸업생들은 임시정부의 사정으로 아직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편성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던 만큼 우선 중국군 장교로 임관되어 중국군 각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의 개전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후일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었을 때는 광복군의 중견간부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7일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군은 중국과 전면전(全面戰)을 전개하여 중국 영토를 잠식할 계획을 갖고 이날 북평(北平) 부근 노구교(老溝橋)에서 야간훈련을 전개하던 중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는 구실로 느닷없이 부근에 있던 중국군을 향한 총격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중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관동군(關東軍) 소속부대와 한반도에 주둔해 있던 제20사단을 파견하여 7·8월중에 북평(北平)·천진(天津) 지방은 물론 장가구(張家口)·석가장(石家莊)을 점령하였고 해군 병력을 출동시켜 상해(上海)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되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중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패전(敗戰)을 거듭하여 1937년 7월에서 1938년 12월까지 중국군 사상자가 110여만명에 이르렀고 이에 반하여 일본군 사상자는 70여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중일전쟁이 개전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대일항전책(對日抗戰策)을 강구하였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중국 정부와 협력하여 전쟁에 참가한다면 전쟁에 승리하였을 때 한국의 독립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하여 적극적으로 참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우선 군무부 내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계획과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으며 유동열(柳東說), 이청천(李靑天), 현익철(玄益哲), 김학규(金學奎), 이복원(李復源), 안공근(安恭根) 6명을 군사위원으로 선임했다. 이와 아울러 임시정부는 많은 독립군을 전쟁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군인 및 군사간부 양성이 시급하여 특별예산을 마련하고 1개 연대 규모의 군대 편성과 군사간부 200명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또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단합회(團合會) 등의 단체들을 통합시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을 결성하고 임시정부의 대일항전 계획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였다.

해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위원 신재홍(申載洪) 박사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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