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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日帝)의 한반도(韓半島) 침략(侵略) 식민지(植民地) 지배(支配)에 대한 보상(補償)은 마무리되었는가?

● 끊임없이 제기되는 과거사(科擧史) 피해 보상 요구


일본 군국주의 침략 세력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는 외형상 1945년 일본 군부의 무조건 항복을 통하여 종료되었으며, 한국과 일본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를 통하여 과거의 상처를 씻고 새로운 협력관계를 개척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30여년을 지내면서 한,일 양국은 상호 포기할 수 없는 교역상대로 발전하였으며, 양국 국민은 상대 국가에 대한 최대의 방문집단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양국관계의 표면적인 활성화와는 달리 그 저변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강제 징병 입대 피해자, 강제 동원 노동력 착취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 집단 强姦 피해자 등 상당수의 과거사(科擧史) 희생자들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피해의 원인 제공자였던 일본은 이들에 대하여 별다른 대책이나 배상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한국 측으로부터 과거사에 대한 보상 요구가 제기될 때마다 일본 정부는 완강히 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부인하여 왔다. 과거사 보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해결된 것으로, 이미 합의된 내용이므로 일본으로서는 더 이상 책임질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 여론의 일각에서는 1965년에 해결된 것으로 합의된 사항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한국내 여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왔으며, 이로 인한 혐한사고(嫌韓思考)가 증폭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일본 측의 태도는 한국내 반일감정(反日感情)을 더욱 고취시켰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말 일본군위안부(日本軍慰安婦), 이른바 정신대(挺身隊) 문제가 여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게 된 것을 계기로 1990년대 들어 민간 차원의 과거사(科擧史) 피해 보상 요구가 분수처럼 다시 치솟았다. 그 중 상당수는 단순한 요구 차원을 넘어 일본 국가 또는 해당기업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현재 약 30여건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대일요구(對日要求)가 국내에서의 감정적 성토의 차원을 넘어 일본에서의 법정 투쟁으로 변모한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사안별로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내용은 자신들의 피해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 내지 일본의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전쟁에 동원될 인력자원 충당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가지 일본이 피해자들을 방치한 사실에 대하여 사죄하고 적절한 위자료 내지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논의의 초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의 배상 책임이 이미 해결되었는가라는 점이 된다. 그렇다면 청구권협정(請求權協定)이란 어떠한 내용의 조약이었는가?


● 1965년 청구권협정(請求權協定)의 문제점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이 서명되고 조만간 일본의 주권회복이 예정되자 국교 수립과 과거사(科擧史) 청산 문제가 한,일 양국간의 중요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일본 모두의 후원자를 자처하던 미국의 세계 전략상으로도 양국의 국교정상화는 긴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이에 샌프란시스코 조약 서명 직후인 1951년 10월 20일부터 미군정청 측 옵서버의 참석하에 한,일 예비회담이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신속히 타결되기를 바랬지만 한일회담은 그 후 14년이나 끌게 되었다. 청구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회담 초기 일본의 대한청구권(對韓請求權) 주장, 구보타망언사건[久保田妄言事件], 재일교포 북송, 5.16 군사 쿠데타 등 숱한 사건이 협상의 걸림돌 역할을 하였다. 난산 끝에 1962년 10월 20일과 11월 12일 김종필(金鐘泌),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회담에서 청구권협상에 대한 기본원칙이 합의되었다.


청구권 문제의 해결명목에 있어서 당초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에 다른 보상임을 명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본 측의 완강한 반대로 인하여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생략한 채 협정의 제목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합의되었다. 그 내용은 한,일 양국 및 국민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일체의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조건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는 동시에 정부간 차관으로 2억 달러를 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으로 10년 동안 제공하며, 마침내 1965년 6월 22일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기본관계조약 등과 함께 청구권협정도 타결되었다.


청구권협정(請求權協定)의 타결에 따라 국내 민간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가 바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박정희 행정부는 청구권 자금을 민간 피해자에게 분배하기보다는 가급적 경제개발을 위한 공공목적에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개인에 대한 보상은 천천히 그리고 매우 제한적으로만 실시되었다. 민간청구권의 배상에 관하여는 먼저 1971년 1월 19일자로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1971년 5월 21일부터 1972년 3월 20일까지 국내 민간인 소유의 대일청구권(對日請求權)을 신고, 등록하도록 하였다. 그 신고대상 범위는 1947년 8월 15일부터 1965년 6월 22일까지 일본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법인 포함)이 원칙적으로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일본국 및 일본 국민(법인포함)에 대하여 가졌던 청구권으로 이 법 제2조 1항에 열거된 권리로 한정되었다.


이에 따라 총 10만 9천 540건의 신고가 접수되었다. 신고분에 대한 실제 보상을 집행하기 위하여 1974년 12월 21일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이 추가로 제정되었다. 이 법은 청구권 보상금으로 신고된 일본 통화 1엔을 한화 30원으로 환산하고, 피징용 사망자에 대하여는 1인당 3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규정하였다. 그 결과 총 8만 3천 519건에 대하여 91억 8천 769여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92억원에도 못미치는 금액으로 일제강점기 피해자의 고통이 치유될 리는 없었다, 특히 인명 피해 보상 대상자가 8522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누락된 피해자가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사망자 확인은 주로 일본 정부가 재ㅔ공한 부분적 명단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실제 사망자가 징병, 징용 피해자인을 확인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망 피해자에게만 보상금을 지불하였다는 점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부상자의 피해보상까지 요구하였던 사실과도 모순되었다.


전후(戰後)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약 2만 100여명분의 한인(韓人) 영령을 안치시킨 바 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확인된 한인(韓人) 희생자의 명단으로 제공한 것은 바로 이들의 명단이었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한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자신의 애국선열을 기리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일본군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다 죽은 사람 가운데 확인된 명단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원래 일본군이 징병된 사람 중에도 탈주자, 독립운동 관련자 등 기타 일본군의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 한인(韓人) 희생자는 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 과정에서 실제 희생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데도 야스쿠니 신사 안치분 명단만을 근거로 청구권협정(請求權協定)에 따른 국내보상을 실시하였다는 것은 한국 측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올바른 조치가 아니었다.


청구권협정 타결 이후 일본 정부는 피해자에 대한 모든 책임은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며, 피해자의 개별적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일본 법원에서의 소송도 아직가지 피해자인 원고가 승소한 사건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일본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크게 부각된 몇몇 사안에 대하여만 법적 의무가 전제되지 않은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 정부는 1987년 이해 사할린 억류 한인(韓人)들의 가족상봉 경비와 한국 내 거주시설 마련을 위한 자금을 일부 지원하였다. 1981년부터 1986년 사이 약 350명의 원폭 피해자에 대한 도일치료를 실시하였고, 40억엔의 피폭자 지원금을 적십자사를 통하여 기부하였다. 현재는 정신대(挺身隊) 피해자에 대하여 많은 국민기금을 통한 지원을 제의하고 있으나 일본 국내의 여론이 반발하고 있다.


● 일본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이다.


한일회담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의 과거사(科擧史) 피해 보상요구에 대하여 구체적 증거를 제시해야만 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의 혼란과 한국전쟁 등으로 인하여 이에 관한 증거를 제대로 구비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청구권협정(請求權協定)은 정치의지가 우세한 상황 속에서 대상항목도 구체화시키지 못한 채 백지위임장에 서명하여 일괄 타결되었다. 이렇듯 1965년 청구권협정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기에 이행과정에서 수많은 과거사(科擧史) 피해자의 고통이 외면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도 부분적 책임을 면할 수 없겠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거 침략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려는 일본 정부 측에 있다고 하겠다.


이같은 일본의 그릇된 자세는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잘못된 전후처리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19세기 말 이래 일본은 제국주의적 대외침략을 계속하였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 침략주의의 절정이었다. 한국은 이러한 일본 침략주의의 최대 피해 국가다. 그러나 전후 국제질서를 주도한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를 자국의 세계전략 속에서만 취급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한 단죄보다는 아시아에서의 대공방벽 구축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 침략 아시아 피해 국가에 대한 일본의 배상보다도 일본의 경제부흥과 재군비를 더욱 강조하였고, 동남아 각국을 일본을 중심으로 한 경제 협력의 틀 속에 묶으려 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세력이 전후의 집권세력으로 재등장하였으며, 죄의식이 없는 이들은 전후 처리과정에서 진정한 과거사 피해자들을 외면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진행된 일본의 전후처리 태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부각되었다.


첫째, 일본의 가해자 의식의 부재이다. 수억의 아시아 사람들이 일본의 팽창정책에 따른 침략으로 인하여 막대한 고통을 당한 사실은 외면되었고,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 국가라는 점만이 강조되었다. 이같은 가해자 의식의 부재는 1982년부터 아시아 각지에서 표면화된 교과서 파동의 원인이기도 했다.


둘재, 가해자 의식의 부재는 책임의식의 부재로 연결되었다. 일본인 스스로가 피해자의 대열에 섬으로써 과거 침략행위의 진상이나 피해 파악을 외면하고 역사에 대하여 특별히 책임질 일이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것이 호소카와 전 수상의 비교적 구체적인 과거사 사죄발언에 대한 일본내 극우세력의 반발이나, 종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국회 차원의 사죄결의가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셋째,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의 부재는 자연히 대외적 배상 의무 회피를 조장하였다. 일본의 전후보상은 군국주의 정책 수행 과정에 참여하였다가 피해를 당한 자국 국민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일본 침략주의에 희생당하였던 각국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 과정에서 외면당하였다.


넷째, 대외배상도 잘못된 과거에 대한 사죄의 징표로 제공된 것이 아니라, 아시아 개발도상국에 대한 일본의 상품시장 확보 전략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전쟁이 종료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군위안부(日本軍慰安婦) 강제 동원이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제도를 창안하고 집행한 자에 대한 책임 추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피해자의 고통도 보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위와 같이 일본에 대한 잘못된 전후처리 과정에서 야기된 비극의 일부이다.


군국주의적 침략정책의 모든 희생자에 대한 완벽한 보상은 사실 가능하지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폴란드에 상당한 지원을 하였지만 이것 역시 폴란드가 실제 입은 인명피해의 10분의 1에 대한 보상도 되지 못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 역시 한국과 한국 국민이 당한 고통의 극히 일부에 대한 보상이었을 뿐이다. 과거사(科擧史) 피해에 대한 진정한 보상은 일본이 겸허한 자세로 과거사를 반성하고, 아직도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공개하며, 과거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후세를 교육하는 길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피해자들의 보상요구에 대하여 청구권협정(請求權協定)만으로 방패를 삼을 것이 아니라, 현 시점에서 일본이 과거사 극복과 한,일 양국 우호관계 구축을 위하여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이들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청구권협정 해석상으로도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고령의 사할린 교포 문제 등에 대하여 즉각적인 대책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출처; 자작나무 版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1998년)


해설; 정인섭(鄭仁燮) 서울대학교 교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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