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고구려(高句麗)에는 독자적 연호와 천하관이 있었다.

한 나라의 성격을 규명할 때는 대체로 자국의 기록(문헌)에 의존하는 것이 통념이다. 한 국가의 성격을 타국의 기록에 의존할 때 거기에는 커다란 모순과 왜곡이 따르게 마련이다. 역사의 기술은 자기 나라 중심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 문헌(日本書紀)에 나타난 한국상을 일본식으로 설명할 때나 우리나라 고대 삼국을 중국의 입장에서 볼대는 역사의 진실성과 객관성을 찾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고구려사도 한국 측의 기록에 따라 설명할때 진실한 고구려상을 찾을수 있다.

고구려(또는 구려)가 중국 문헌에 나타난 것은 상서(相書)와 일주서(逸周書) 왕회편(王會篇), 위략(魏略) 등에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중국 북동쪽에 있는 나라로 여겨졌고, 한(漢)나라나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정도로 중원 왕조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다만, 이러한 초기 고구려에 대한 한국 측 기록은 동명성제(東明聖帝) 이후부터이고 그 이전 사실은 빠지고 없다. 따라서 산해경(山海經)을 통해 초기 고구려의 성격을 살펴볼 수밖에 없고,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통해 고구려사(高句麗史)의 복원에 대해 북한은 구려국으로, 남한은 원시 고구려 또는 고구려 종족 사회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상서"등 중국 문헌, 고구려 소개.

고구려사에 대한 한국 측 최초의 사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이 책에서 "고구려는 주몽(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유화를 부모로 둔)이 부여에서 남하(烏伊,摩儷, 挾父와 함께)해 졸본(현재 중국 환인현의 오녀산)에서 나라를 세웠다.(기원전 37년)"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구려는 28대 보장태왕(寶藏太王)까지 705년 동안 존속된 왕조로서 제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25년 정도였다.

고구려는 만주 벌판에서 자란 나라였으므로, 항상 중원 왕조의 침략에 직면했다. 유리명왕(琉璃明王) 재위 31년 이후, 3세기의 위(魏)와 전연(前燕)의 침입 그리고 4세기의 모용황(慕容黃), 모용농(慕容壟)의 침입을 저지하면서 국토를 요동(遼東) 지방까지 확대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자연히 중원 국가들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고구려는 멸망할 때까지 철 생산의 고장인 요동을 확보해 중원 국가의 동진을 저지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정치적, 군사적 충돌을 완화하기 위해 고구려는 중국과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무신왕(大武神왕) 재위 15년에 후한(後韓) 광무제(光武帝)에게 조공(朝貢)을 바친 이래 역대 중원 왕조와 교섭을 유지했다. 중국 측은 이러한 조공 속에서 보이는 책봉관계(冊封關係)를 신속관계(臣屬關係)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공은 한국 뿐 아니라, 일본은 물론 중국의 주변 국가들도 거의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교 관계는 중국으로 볼때 천하의 중심임을 스스로 자처한 행위이지만, 한국 측에서는 그러한 표면적 접근 속에서도 국가의 자주권과 정체성을 잃은 적은 결코 없었다. 그것은 중국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그들과의 공존을 통해 영토 확장을 꾀하려는 적극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중국 측은 그들에게 유리한 기록들, 특히 "상서", "좌전", "자치통감", "책부원귀", "당서" 등을 근거로 내세우며 고구려를 중원 왕조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의 기록만으로 전체의 국가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과연 언제, 어디에 고구려가 중원 국가의 속국이었다는 공식적인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遼東本中國之地隨氏四出師而不能得今東征慾爲中國報子弟之讐"라는 기록으로 볼때도 고구려가 끝까지 요동을 차지하고 있어 당황(唐皇) 태종(太宗)이 이곳을 되찾으려고 고구려를 침략한 것이다. 속국을 정벌하려고 1백만 대군을 동원했다면 이미 그 나라(唐)와 고구려의 정치적, 군사적 관계를 짐작할수 있다. 수(隨)나라와 당(唐)나라가 자신의 속국을 정벌하려고 1백만 대군을 동원했다면 중국 측 표현대로 어떻게 신속관계(臣屬關係)가 성립될수 있겠는가.

중국의 고대 문헌에도 고구려는 그 종족과 법속이 중국과 많이 다르다고 했다. 특히 언어, 복식(服飾)이나 혼인과 예의 범절이 중국과 달라 중국인들의 눈에 특이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수나라나 당나라에 당당히 맞서 민족의 긍지나 정통성을 지킨 나라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태종이 보낸 사절인 장엄(藏儼)을 토굴에 가두었다. 안시성 전투(安市城戰鬪)에서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성이 함락되는 날 고구려의 남자를 모두 다 죽이자."라고 태종에게 건의했지만,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들은 패전하고 퇴각하는 적군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였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과 힘을 나타내 준 것이다.

중원 국가와는 다른 독자적 천하관.

이처럼 한국 문헌에서 보이는 고구려는 민족적 정체성과 아울러 국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는 중원 국가에 대항해 국가 보존의 신념을 보였으며, 백제나 신라에 대해 정치적 우위를 지켜나갔다. 동시에 탄력적인 외교를 통해 국가 보존의 길을 찾았으니 그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대관(事大觀)이다. 곧, "좌전"에 보이는 "대국에 대한 소국의 국가 보존의 길"보다 "맹자"에 나타나 있는 "대외정책에서 소국의 생존을 위한 자위행위"로서 인자(仁者)의 자각적 논리를 잃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시에는 국민의 단결과 협력을 통해 중원 대국과의 일전을 피하지 않는 생존의 길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는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어려운 환경과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3월 3일에는 군민(軍民)이 함께 사냥을 했으며, 정월 보름에는 패수 물놀이를 통해 공동의 장을 마련한 나라였다. 중원 국가의 침략을 막기위해 국민들은 함께 산성을 쌓았으며, 무덤 석 그림을 통해 화려한 내세관을 구가했다. 고구려인들은 이와 같이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함께 즐기고 나라를 위해 싸울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가 중국 역사가 아님을 입증하는 사료들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고구려 때의 기록과 고구려 멸망 이후의 기록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곧, 고구려 당시의 사료에는 고구려의 역사가 어디에 귀속된다는 기록이 없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 모두루 장군 묘지(牟頭婁將軍墓誌),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등의 유적에 의하면 고구려는 하늘의 자손들[天孫]에 의해 통치되며, 중원 국가와는 다른 당당한 독립국가이며 독자적 천하였다. 이는 특히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신형식 이화여대 교수는 "고구려사(高句麗史)"에서 "중국 측 사서에 고구려는 끝까지 중국의 정치 제도와 다른 독특한 체제를 유지했으며, 전통,습관,언어 등 문화에서는 중국과 다르고 신라 및 백제와는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조공(책봉) 기사나 칭신납질(稱臣納質) 기사는 중원 왕조가 자기 위엄을 나타내고 자기 모습을 극복하려는 칭호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는 고구려 멸망 이후부터 대두되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남북극 시대의 신라에는 삼한(三韓)이 합쳐져 지금의 우리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최치원(崔致遠)은 고구려를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남북극 시대의 신라 때부터 고구려사는 한국 역사의 일부라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 때에도 고구려사를 한국 역사의 일부로 보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다수 있다. 먼저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한 것부터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의미이다. 성종(成宗) 재위 12년 요(遼)나라의 첫번째 침입 때 서희(徐熙)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당당하게 주장했고, 그 결과 이를 인정한 요나라로부터 압록강 동쪽 280리의 고구려 고토(故土)를 할양받기까지 했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들도 고구려사를 한국 역사에 포함시켜 서술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현존하지는 않지만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 구삼국사(舊三國史)와 삼한 이래의 사적을 편찬한 홍관(洪灌)의 편년통재속편(編年通載續編)도 고구려를 한국 역사의 일부로 취급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나아가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했고, 제왕운기에서도 고구려를 단군조선의 후예라고 하여 고구려사의 한국 역사 귀속을 확실히 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한국통사에 대한 저술이 관찬, 사찬을 막론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17세기부터 정통론에 대한 논의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이에 따라 삼국시대에 대한 인식에서도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과 고구려, 백제, 신라를 동등하게 보아 무통(無統)의 시대로 보는 입장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다. 나아자 이종휘(李種徽) 같은 학자는 딘군조선-기자조선-마한의 정통이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한국 역사에서 제외시킨 경우는 한번도 없다.

이렇듯 한국의 사료들은 하나같이 고구려를 한국 역사의 일부로 취급했을 뿐 아니라 한국 역사의 주족(主族)으로까지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한,중 수교 이후 만주 땅을 밟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회의 하나가 "우리의 옛 땅에 왔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토의 회복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룩해야 할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을 나쁘다고 할수만은 없지만, 과도한 표현은 중국 측의 경계심만 높일 뿐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범우사 版 "대고구려(大高句麗)의 역사, 중국에는 없다." (2003년)

해설; 서영대 인하대학교 교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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