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가? Ⅰ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는 일본의 희비야 공원. 이곳은 국민들의 휴식처와 각종 행사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이 공원처럼 이토 히로부미는 아직도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로 일본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희비야 공원이 90여년전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이 치뤄진 장소였다는 것을 아는 일본인은 그리 많지 않다. 1909년 11월 사망한 후 본국으로 운구된 이토의 시신이 정치인으로는 최초로 성대한 국장으로 치뤄졌다. 메이지 시대의 영웅이며, 수상을 네차례나 지낸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이등박문)]. 메이지 시대의 군주였던 무츠히토왕[睦仁王]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장례식에 엄청난 비용을 절감했다. 당시 일본의 언론들은 국민적 영웅인 이토의 죽음을 대서특필, 최고 실력자의 죽음에 전 일본 열도가 들끓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은 당연히 무지한 테러리스트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안자이 아타미 와세다대학 교수 "이토가 죽고 난 뒤 일본인들은 한국인 청년 안중근이 일본의 위대한 정치인을 암살했다고 하면서 그를 사악한 살인자로 몰고갔다. 지금 우리는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고 그 시대의 정세를 자세히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서 막연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대륙진출의 전진기지이자 이토 히로부미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모지 항. 이곳은 예부터 대륙을 오가던 여객선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집필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키 류조. 댜큐멘터리 소설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는 지난 1992년에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그의 책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안중근은 아직 예민한 화두다.

사키 류조 다큐멘터리 소설 작가 "일본인들은 안중근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그래서 일본의 방송이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해도 사실상 힌든 것이다. 왜냐하면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그릴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애국자로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하고 또 일본 내의 반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기가 힘든 것이다."

안중근에 대한 일본의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있다. 그에 반해 뛰어난 정치인이자 실력있는 외교관으로 추앙을 받아왔던 이토 히로부미.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사키 류조 "일본에서는 정치인을 매파와 비둘기파로 나누어 말하는데, 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둘기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토도 일본의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밀어붙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때문에 매파 정치인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해도 해서는 안될 식민지 정책을 했다는 점에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추모 움직임이 일고 있다.

고치현은 당시 안중근이 수감되어 있던 여순감옥에 파견된 관료들 중에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아 일찍부터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안중근 연구가 한창인데 지금도 한 가정집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열띤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강사도 강의를 듣는 학생도 모두 일본인. 이들에게 안중근은 더이상 자신들의 영웅을 죽인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쿠몽 사라데 전 고치현 의원 "안중근의 행동을 단순한 테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민족 체결권을 침해하고 이웃나라의 독립을 유린하는 것은 국제법상 용서받을수 없는 일이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수 있겠다."

안중근 연구 모임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중견기업인 야기씨. 그가 안중근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여순경찰관이었던 그의 조부가 소장하고 있던 안중근의 유묵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4월 이를 한국정부에 기증하고 추모식에도 참석했다. 그 유묵은 얼마전 국가보물로 지정되었다. 일본인인 그가 안중근을 추앙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야기 마사즈미 (주)태평산업 회장 "제가 안중근에 대해서 감명을 받은 것은 비록 그가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여겨졌지만, 당시 그가 수감되었던 형무소의 형무소장과 그를 감시했던 경찰관, 그리고 헌병들도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와서까지 안중근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역시 안중근 연구모임의 고마츠씨. 평소에는 선반 위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가 한국에서 손님이 찾아올 때만 보여준다는 그의 소중한 보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안중근이 이토를 암살한 죄로 여순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 썼던 유묵이었다.

"志士仁人殺身成仁"

당시 여순에서 기자로 활동앴던 그의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그의 조부는 안중근의 공판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했었다고 한다.

한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렇게 안중근은 일본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20세기 초 팽창주의로 치달았던 일본 제국의 침략의 역사와 그로 인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눈물과 한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여순 항.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되어 있는 이곳에는 허얼빈 의거 직전 안중근이 읊은 장부가와 수감되어 있던 방 등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안중근. 그는 왜 이토를 저격해야만 했을까.

1차 검찰심문 당시 그는 검찰관에게 이토의 죄목 15가지를 열거했다.

1. 일본 무사를 시켜 대한제국의 황후를 살해한 죄.
2. 대한 황제를 무력 위협하여 5조약과 7조약을 맺은 죄.
3. 대한 황제를 폐위시킨 죄.
4. 무고한 대한의 국민들을 학살한 죄.
5.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농림, 산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7. 일본 제일 은행의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10. 대한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
12. 대한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대한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쉬지않고 계속되고 있는데, 대한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국왕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국왕의 아버지를 죽인 죄.

안중근은 무엇보다 이토를 동양 평화를 교란시킨 인물로 지목했는데, 이때에 미조부치 검찰관은 이토가 동양 평화를 주창했던 인물이라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안중근은 일본 국왕과 이토가 주장한 동양 평화는 대한제국과 다른 나라를 속이기 위한 헛된 구호일 뿐이라고 답했다.

안중근에 대한 공판은 여순의 관동도독부가 담당,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공판을 자신의 뜻을 외부에 알릴 기회로 여겼던 안중근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그는 판사들에게 자신을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중근 "나는 이번 거사를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 독립의군의 참모장으로서 국가와 동양 평화를 위해 감행했다. 따라서 사사로운 원한으로 저지른 개인 범죄가 아니므로 나를 전쟁포로로 대우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1910년 2월 14일 공판 시작 일주일만에 그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다. 일본 정부가 그의 행동이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될 것을 우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갈림길, 그는 기꺼이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한살. 죽음을 앞둔 안중근은 감방 안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필에 몰두했다.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한 젊은이의 소회를 남기고 싶어서였을까. 그가 옥중에서 남긴 한권의 책은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였다. 이어 동양 평화에 대한 그의 구상을 담은 "동양 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문과 목차를 썼을때 예상보다 빨리 사형이 집행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1910년 10월 3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 왜 안중근은 이토의 동양 평화를 믿지 않았을까?


한국 통감직을 마치고 돌아와 오이소 저택에 머물렀던 이토 히로부미. 그는 조선 병합이 가까워진 1909년 10월 68세의 고령으로 만주 시찰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정작 이토는 그것이 정치적 목적이 아닌 개인적 여행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그랬을까.

당시 서양의 여론들은 이토의 만주 방문 목적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사카모토 국학원 교수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는데 있어 가장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로서 러시아를 꼽고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이러한 경계심은 시베리아 철도가 뻗어나오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당시 만주는 영국과 러시아 등 서구 열강과 청나라와 일본 등이 그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곳이었다. 그것은 곧 철도를 둘러싼 이권다툼이었는데 일본 역시 세력확장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토가 만주에 온 목적도 바로 러시아와 만주철도에 대한 분할지배를 못박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교통의 요충지인 허얼빈 방문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허얼빈은 당시 영사관이 36군데나 있었고 인구 30만명 중 6만명이 외국인일 만큼 국제적인 도시로 명성을 쌓고 있었다. 일본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문은 러시아와의 철도 협상 외에 또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조선 병합을 앞두고 러시아의 의중을 떠보는 것이었다.

오노 순이치 조사이 국제대학 교수 "당시 일본의 외교는 만주지역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에 대해 목적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일본의 한국 병합에 대해 러시아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에 진짜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토는 마지막 만주시찰 길에도 동양 평화를 운운했다. 겉과 속이 다른 이토의 동양 평화는 당시 언론의 풍자 속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시다 다케시 전 도쿄대학 교수 "이토가 생각한 동양 평화는 일본의 세력확장과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그레서 동양 평화를 주장하면서도 동양 평화의 주체는 일본이라는 생각에서 탈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키 류조 "이토의 평화론이란 결국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이다. 때문에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 발상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토 역시 일본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강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기본적으로 일본이 동양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결국 이토의 만주 방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받기 위한 노정객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이토는 양반가 출신인 안중근과는 달리 비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낀 무사들에 의해 쇼유쿠 학교에서 요시다 쇼인에 의해 교육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줄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야마가타 등 메이지 유신 주역들과의 만남이었다.

19세기 중엽, 일본은 서구열강의 개항 여부로 한차례 격변을 겪게 된다. 당시 일본은 각 지역의 번주들이 전국을 분할 통치하던 막부시대였다. 그런데 막부정치가 동요하면서 이토를 비롯한 죠수번과 사스만의 무사들이 정변을 일으켜 국왕을 옹립하며 권력의 주체로 등장한다. 이것이 1868년의 명치유신으로 메이지 국왕 시대의 개막은 이토 시대의 화려한 서곡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급무사에 불과했던 이토 히로부미, 명치유신을 기점으로 이토는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승승장구, 초대 총리대신에 오르면서 마침내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된다.

사카모토 교수 "당시에 이토는 인간적으로도 아주 인기가 높았다. 왜냐하면 그는 굉장히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결국엔 총리대신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는 신분제도를 폐지해서 누구나 새로운 인생에 대한 선택의 가능성을 열게 했다고 할수 있다. 그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이토였던 것이다."

이토는 무엇보다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서구문물 도입에 박차를 가했다. 유럽식 거리를 조성하고 자신은 물론 관료들까지도 서양식 복장을 하도록 강요했다. 심지어 서양식 무도회를 즐겨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이토는 서구열강을 동경하고 있었다.

박광석 릿쿄대학 교수 "단순한 정치제도, 사회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문화, 풍속까지 전반적으로 서양화를 꾀한다. 70년대 중반쯤에 서양식 복장을 하기 시작해서 1880년대 후반쯤에 가면 국왕이나 왕후까지도 서양식 복장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강력히 추진했던 사람이 이등박문이었다."

이어서 이토는 곧바로 근대국가의 근간이 될 헌법제정에 나섰다. 그리하여 1889년 마침내 일본 국왕 중심의 새 헌법을 선포하게 된다. 당시 이토는 왜 국왕 중심의 근대국가를 꿈꾸었을까?

오노 교수 "유럽에는 1천년 이상 되는 헌법정치, 의회정치가 있다. 또 크리스트교가 있어서 종교가 국가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에는 의회정치나 헌법정치의 역사가 없는 데다가 종교에 있어서도 불교신자들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의 정신적 지주가 될수 있는 것은 국왕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토가 직접 가필하고 수정한 헌법초안을 보면 그가 철저하게 국왕 중심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안자이 교수 "근대국가 체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또 왕실을 통해 일본의 정신적인 통합을 확립해야 한다. 이토는 이런 생각을 절대적인 전제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에도 교육칙언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왕(日王)을 위해 기꺼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국민들을 만들려는 교육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만이 부국강병을 실현, 일본이 서구열강에 합류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었고 이후 군사력 증강에 몰두했다.

오노 교수 "군사력은 헌법의 제약없이 강화할수 있었다. 이토는 그것을 하나의 큰 목표로 삼고 명치 10년부터 군사력 강화를 추진해왔다. 그 덕분에 일본은 타국을 침략할 정도의 강대국이 될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는 반대세력의 결집과 민중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것은 부국강병을 실현하려는 이토에게는 큰 걸림돌이었고 그는 인권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당시 이토를 비롯한 집권세력은 이러한 국내의 혼란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 시대 초기에 대두되었던 정한론이 힘을 얻게 되는데, 게다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당대의 지식인이자 석학이었던 후키쟈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주장한 탈아시아론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서구열강의 세력확장으로 일본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당시 일본이 미개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열강들이 하는대로 중국과 한국을 접수하자는 탈아시아론은 큰 반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안자이 교수 "후쿠쟈와 유키치의 탈아시아론의 영향력은 컸다. 사실 그 무렵 일본의 여론은 내셔널리즘, 국권의식, 그리고 일본이 개화되었다는 의식을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현양사와 흑룡회 등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우익 낭인들 역시 대중연설을 통해 이러한 내셔널리즘을 부추겼다. 당시 설립된 현양사는 아직도 일본 우익의 뿌리로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만주사변 때에는 직접 의용군을 조직,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우익 낭인의 수뇌부들은 침략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하급회원들은 기꺼이 일본 제국주의 건설의 총탄받이로 나섰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직접 관여된 것으로 알려진 우익 낭인들, 이들은 일본의 한국 병합 과정에서도 배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실과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골자로 하는 이 현양사의 철칙은 오늘날까지 일본 우익의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강창일 배재대학 교수 "군국주의 일본의 아시아 대륙 침략을 10년 20년 먼저 선취해서 제시했고 근대 침략국가 일본은 그들이 제시한 스케줄에 의해서 쫓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일본 내부에 침략론이 팽배한 가운데 수상직에 오른 이토 히로부미, 그는 혼란한 국내정세 타파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위한 전초전으로 마침내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시모노세기에는 이토와 청나라 대신 이홍장이 담판을 벌였던 춘범루가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이토는 이 회담에서 청나라로부터의 배상과 함께 청의 조선 지배권을 파기하는등 커다란 성과를 얻어냈다. 이때부터 그는 뛰어난 외교관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중국 청나라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한편에서는 러시아가 사태를 관망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결국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 일본은 1904년 러시아를 상대로 다시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그때마다 일본 국왕이 내세운 명분은 한국을 독립시켜 궁극적으로 동양 평화를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운노 후쿠주 메이지대학 교수 "전쟁을 한다는 것은 국민들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고 자국 국민들을 국경을 넘어 전장으로 보내는 일이기 때문에 정당성이 요구된다. 일본 국왕의 수칙은 단지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이시다 교수 "일본 정치인의 한국 독립에 대한 입장은 처음에는 청나라가 개입해선 곤란하다는 것이었고 그게 해결되고 나니까 이번에는 러시아가 개입하는 것도 용납할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제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패배로 손을 떼게 되니까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존중해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일본이 한국을 지키고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반도를 일본의 세력팽창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때까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이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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