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1904~1910년 한국 국권 침탈 조약들의 절차상 불법성 ⓑ

3.관련 조약들의 결격, 결함 실태

 

◆ 초기 조약들의 형식과 절차 준수

한국과 일본 간에는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한 이후 통상장정(通商章程), 속약(續約), 세칙(稅則) 등을 차례호 후속시켰다. 그리고 1882년과 1885년에 특별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공사관이 방화, 파손되는 피해를 입어 이의 사후처리를 위한 두 개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뿐만 아니라 그 후의 5개 조약들도 위임장 발부 및 협상 결과에 대한 비준이 모두 이루어진 사실이다. 조선이 배상금을 지불하는 입장에서 비준서까지 발급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견해에 대해 일본 측이 양해하여 조선 국왕이 일본 황제에게 특사를 파견해 온 데 대해 이를 치사하는 국서(國書)를 발급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비준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1880년대까지도 일본은 청국(淸國)에 비해 한국에 대한 연고권과 영향력이 적었다. 그러면서 서양세력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세력보다 먼저 한반도를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한론(征韓論)이란 이름으로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 속에서 확보되는 새로운 근거는 어떤 것이든 법적으로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 일본 측 대표들은 협상 벽두에 조선 측 대표가 위임장을 소지(所持)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상례로 삼다시피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원칙 준수의 자세는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때 달라진다. 일본 정부는 이때 그 사이 배양한 군사력으로 청국과 일전(一戰)을 벌일 것을 각오하면서 조선의 보호국화(保護國化)를 목표로 세웠다. 이 목적 아래 청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일본 육군은 한반도 내륙을 통과하거나 그 안에서 작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 일본은 구미 각국 정부가 이를 국제공법 위반사항으로 문제삼을 것을 우려하여, 이에 대한 대책으로 조선 조정에 군사동맹조약(軍事同盟條約)을 강요하였다. 이 맹약도 사안으로 보아 전권위원(全權委員) 위임과 비준서(批准書)의 발급이 필요한 것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피하여 약식(略式)으로 처리하였다. 한성조약(漢城條約)까지 그토록 규칙의 준수를 강조하던 일본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침략(侵略)목적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는 10년 뒤 러일전쟁[露日戰爭] 이후로는 더 강화되어 새로운 협정을 체결할 때마다 요건을 무시하거나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강압하는 양상을 보였다.

1900년대 일본이 한국에 대해 국권침탈을 목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조약들은 절차와 형식에서 여러 가지 결함과 하자를 남겼다. 이 조약들은 모두가 무력 위협 아래 강제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그런 결함과 하자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 결함과 하자 가운데 국내법,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항목별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 약식(略式) 처리와 비준(批准) 결여 상태

러일전쟁 개전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강요한 5개 조약들은 최종 병합조약(倂合條約)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식조약(略式條約)의 형식을 취했다.{16} 병합조약 외의 다른 4개 조약들도 합의사항이 모두 국권(國權)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조약의 형식을 취했어야 했다. 1880년대까지의 일본 측의 형식준수 자세, 곧 규범주의(規範主義)에 비추어 보더라도 마땅히 그랬어야 했다.

{16}▶註; 정식, 약식 조약의 구분 문제는 세카이[世界] 일한대화(日韓對話)의 주요 논쟁점이었다. 이에 대해 운노 후쿠주[海野福壽], 사카모토 시게키[坂本茂樹] 두 교육자는 이의 엄밀한 구분에 대해 반대하고,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는 규범주의와 실증주의의 변천에 대한 검토를 통해 1900년대 상황에서는 규범주의에서 격식을 준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아라이 교수는 특히 1905년 9월에 일본의 국제법 학자들, 일반국민들이 러시아, 일본 강화조약이 배상금을 규정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으로 일본 황제에게 비준 거부를 촉구하는 시위운동을 벌였던 사실로 볼 때, 제2차 일한협약과 같이 외교권 이양을 다룬 조약은 비준조약(정식조약)이 되었어야 했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1904년 2월 23일자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의 내용이 가장 가벼운 것 같지만, 이것도 주권(主權)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므로 국제관례상 전권위원(全權委員) 위임장과 비준서(批准書)가 발급되는 정식조약의 형식을 취해야 할 대상이다. 나머지 1904년 8월 22일자 제1차 일한협약(日韓協約), 1905년 11월 17일자 제2차 일한협약, 1907년 7월 24일자 제3차 일한협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이것들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절차를 밟을 경우 성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형식이 간략한 방식을 택하여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이를 강제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8월 22일자 병합조약의 형식은 제대로 갖추었지만, 한국 측의 저항으로 비준절차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조약 추진자들은 이전의 것들이 절차와 형식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 병합조약위원회(倂合條約委員會)를 구성해 정식조약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위원회가 한국 측의 전권위원 위임장 문안까지 만들어 한국 정부 총리대신에게 건네주고 한국 황제가 이를 서명 날인토록 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양국 황제의 비준서에 해당하는 병합을 알리는 조칙(詔勅) 발급에서 한국 황제는 서명 날인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의 국권을 차례로 빼앗은 5개 조약 가운데 한국 황제의 비준을 거친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로 남았다. 그 가운데 한국의 국내법이 정하는 조약체결의 절차를 밟은 것도 하나도 없었다. 한국병합이 합법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 영역(英易) 과정에서의 조약의 등급 변개(變改)

일본의 한국 국권 침탈은 일본 각의(閣議)가 결정하여 일본 황제의 재가를 받고 필요한 문서를 사전에 준비하여 군사력을 동원, 이를 한국 측에 강요하는 형태로 추진되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준수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일한협약(日韓協約) 때 일시 조약의 형식을 사안에 맞게 정식조약[韓國外交委託條約]으로 처리할 것을 고려한 때도 있었지만, 한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곧 이를 포기하고 약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런 형식과 절차상의 문제점이 그대로 외부세계에 노출되는 것은 국제적으로 의구심을 살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이를 숨기려는 기만행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협정을 강제로 처리한 뒤 그 결과를 영국, 미국 정부에 통고하기 위해 조약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그런 기만행위가 저질러졌다. 1904년 8월 22일자의 제1차 일한협약과 1905년 11월 17일자 제2차 일한협약이 대표적 예이다.

제1차 일한협약은 당초 한국 정부에 각서[memorandum]의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첫째,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재정고문(財政顧問)을 초빙, 고용할 것. 둘째,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을 외교고문(外交顧問)으로 초빙, 고용할 것. 셋째, 외국과 조약 또는 중요한 계약을 할 경우 일본 정부의 대표와 미리 상의할 것 등을 요구하는 내용의 각서였다. 그래서 이 문서에는 약식조약이 일반적으로 갖추는 대표의 자격에 관한 전문[前文, preamble]이나 후기(後記)도 없다. 게다가 문서의 명칭조차 없었다. 오간 전문(電文)에서는 이를 각서(覺書)라고 했다. 이 각서는 한국 황제가 3개 요구사항 중 셋째의 사항을 용인하지 않아 첫째와 둘째만 미리 채택한 후 "일본 정부의 대표"란 문구에서 "대표"를 삭제한 후 3개 조항 모두를 담은 문서를 새로 작성했다. 이때 기명 날인한 관직자도 앞 문서의 기명 날인자인 외부대신, 탁지부대신을 "외부대신서리"로 바꾸었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새로 작성된 것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제목을 "Agreement"라고 붙여 영국과 미국 정부에 보냈다. 이는 명백한 문서변조 행위였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외교문서로 둔갑하게 되면 셋째 내용이 제3국들에게 한국 정부가 이미 외교권을 포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각서일 때는 합의된 내용이 양국 간의 문제로 한정되지만, 협정[Agreement]으로 둔갑하면 그 파장이 제3국에도 미치게 되는 변화가 생긴다. 이 일이 있은 수개월 후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를 용인하는 두 개의 비밀협약, 1905년 7월 27일자 가쓰라-데프트 밀약과 8월 12일자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일본이 이 변조문서를 악용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영국이 1904년 1월 22일 한국의 국외중립국(局外中立國) 선언을 승인한 입장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이런 특별한 사연 없이 일본과 비밀협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는 1905년 11월 제2차 일한협약을 승인하지 말아달라는 한국 황제의 특별한 요청에 접해 일본 정부로부터 제1차 일한협약의 통보를 받고 한국 정부가 이미 외교권을 포기한 것으로 이해했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를 직시하면, "제1차 일한협약"의 문서변조 행위는 국제적 사기행각(詐欺行脚)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일한협약문에도 제목이 붙지 않았다. 제목이 들어갈 첫 줄이 빈 상태이다. 한국어문, 일본어문 양쪽이 모두 그렇다. "제2차 일한협약",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이란 명칭은 나중에 이러한 결함을 호도하기 위해 새로 지어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수일 후에 이루어진 영어 번역본에는 "Convention"이란 것이 붙었다. 이 단어는 "Treaty"와 함께 보호조약에 자주 쓰이던 것이다.{17} 그러나 이 조약은 본래 전권 위원 위임장과 비준서 발급을 생략한 약식협약, 곧 "Agreement"로 강제된 것이었다. 영어본은 일본 측이 일방적으로 만든 것이다. 거기에 굳이 명칭을 넣는다면 "Agreement"로 했어야 했다. 보호조약으로서의 "Convention"이 전권위원 위임장을 발급하고 합의된 협정문에 대한 국가원수의 비준서가 발급되는 요건을 갖추는 것이 관례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18} 그러나 제2차 일한협약 영어본의 경우 명칭은 "Convention"라고 했으나 이런 필수문건은 수반되지 않았다. 이것은 외교권을 이양하면서 정식조약보다는 낮은 등급인 "Agreement"로 명칭을 붙였을 때 구미열강으로부터 사게 될 의심을 피하고자 한 기만행위였다.


{17}▶註; 예컨대 1847년 8월 5일 소시에테 군도의 여왕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보호조약은 "Convention conclue a Papeete Le 5 Adut 1847. Entre La France et La Reine Des Iles De La Societe. pour Regler Lexercice Du Protectorat"라고 하였다.

{18}▶註; 예컨대, 당시 일본 국제법학계의 저명한 저서인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의『보호국론(保護國論)』(1907) 부록에 소개된 11개 보호조약 사례 가운데 3개가 "Convention"로 되어 있는데, 그 3개는(1847년 8월 5일 프랑스와 소시에테 군도 왕국, 1883년 6월 8일 프랑스와 튀니지, 1884년 7월 17일 프랑스와 캄보디아) 모두 비준을 거치는 정식조약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 관련 공문서(公文書) 위조행위

일본 측은 비단 조약문 변조행위 외에도 강제된 조약을 실행하는 과정에 관련 공문서를 위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서 위조행위는 제3차 일한협약(日韓協約)의 실행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범해졌다.

첫째,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1907년 7월 31일자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대한제국 황제의 조칙문안을 작성해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공포케 하였다. 1907년 7월 24일 이토 통감은 제3차 일한협약을 강제한 뒤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첫째로 일본인이 참가하는 재판소 및 감옥제도의 신설, 둘째로 군포(軍浦) 정리, 셋째로 한국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 고문의 해고, 일본인 관리 임명과 직책의 설정 등을 요구하고 그 이행 각서를 받아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둘째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착수되었다. 이렇게 비밀리에 한국 군대 해산을 추진하던 이토 통감은 그 해산을 알리는 황제의 조칙을 자신이 일본어문으로 기초하고 이를 한국어로 번역해 공포하게 하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관한 한국 황제의 조칙문은 이와 같이 이토 통감이 직접 일본어로 초안을 잡은 것을 거의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토 통감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월권행위인 동시에 범죄행위였다.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는 후술하듯이 1907년 7월 22일 황제 고종(高宗) 강제퇴위시 황제의 어새(御璽)를 탈취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칙(詔勅) 위조행위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조선통감부가 제3차 일한협약에 근거해 1907년 10월 18일부터 이듬해 1월 18일까지 한국 정부 조직개편, 재판소 구성, 재정개편 등에 관한 60개 법령 제정에서 통감부 문서와 직원들이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위조한 사실이 밝혀졌다. 제3차 일한협약 제2조는 "한국 정부의 법령의 재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으로 규정하였다. 조선통감부가 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국 황제의 결재용 어새[勅命之寶]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는 통감부가 7월 22일 황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킬 때 이미 실현하엿다. 이 결재용 어새를 확보하고, 이어서 같은 해 11월 18일에 처음으로 신황제(新皇帝; 純宗)의 이름자 서며을 확보한 뒤, 통감부 문서와 직원들이 중앙, 지방의 관제, 재판소 구성법 등 사법제도 개정, 예산, 봉급체계, 회계법 등 국가운영의 중심에 해당하는 것들에 관한 법령 개정 등 60건에 대한 황제 서명을 위조하였다. 60건에 대한 서명은 5~6개의 서로 다른 필체로 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한 필체(22건 사용)는 통감부 문서과 과장을 지낸 마에마 교우사쿠[前問恭作)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1905년 11월 제2차 일한협약 강제시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한국 외부대신의 직인을 가져와 날인할 정도로 이토의 측근으로서 맹활약한 인물이었다.

출처; 서울대학교 출판부 編 "한국 병합의 불법성 연구" (2003년)

해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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