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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不滅)의 상승장군(常勝將軍)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

 

1907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퇴시킨 쓰시마 해전의 주인공 도고 헤이하치로 중장. 그는 평생을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군문(軍門)에 헌신한 인물로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영국 해군협회가 넬슨 상을 제정한 이래 그 상을 받은 인물은 역사상 단 두명뿐이다. 그리스의 히피키스토 제독과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중장이 그들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 군사학회에서 도고가 쓰시마 해전 때에 구사했던 정(丁)자 진법이 이순신의 학익진을 모방한 작품이라고 발표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도고를 그림자처럼 따랐던 인물인 후시이 다카오가 지은 "이순신 각서"에는 도고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씌여있다.

도고 헤이하치로 "이 도고를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좋으나 조선의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도고가 다시 태어난다해도 이순신과는 견줄 수가 없다. 내가 만일 이순신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후시이 다카오는 러일전쟁 때에 일본해군의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인물, 그는 도고가 한국인 실업가 이영계에게 "당신의 나라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은 이 도고 헤이하치로의 스승이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해마다 7월이면 통영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념관인 제승당을 찾아 진혼제를 올렸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렇다면 왜 도고 헤이하치로는 조선의 명장 이순신을 자신의 우상이라 여겼던 것일까.

와키쟈카 야쓰하루 회고록 "이것은 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싸움이었다. 나는 이곳 한산도에서 생애 최대의 패배를 당했다. 나의 함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적의 화포는 우리의 조총을 능가했다. 이 싸움에서 나는 76척의 전함 중 69 척을 잃었다. 적은 우리를 반달 모양으로 둘러싼 후 공격 해왔다. 완벽한 패배였다. 조선의 장수 이순신. 그는 놀랍게도 한번도 패배하지 않는 해전의 신화를 창출해냈다."

와키쟈카 야쓰하루, 그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심복이었던 "칠인의 창"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일본 방위청에서 보관중인 임진왜란 관련 기록에는 일본 전사가 있다. 바로 이 일본 전사에서 와키쟈카 야쓰하루에 대한 기록을 볼수 있다. "와키쟈카가 용인에서 적을 패주시키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1592년 6월 6일, 한양이 함락된 후 벌어진 용인 전투는 광교산 자락에서 펼쳐졌다. 전라도관찰사 이광과 충청도관찰사 곽영이 지휘하는 조선 관군 6만여명은 왜군 기마병 3천여명의 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이 싸움에서 왜군의 선봉장으로 참전했던 와키쟈카는 조선 군사 8천여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용인에서 대승을 거둔 와키자카를 칭찬하고 남해로 내려가 조선 수군을 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와키쟈카 야쓰하루 회고록 "나는 그때까지 적장 이순신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만난 조선의 장수들은 모두 나약했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채 나 와키자카 야스하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순신 역시 일개 조선 장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비록 그가 몇몇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방심했던 결과였을 뿐..., 나는 승리를 장담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임명된다.

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전쟁을 예견하고 대비해 나갔다. 성을 보수하고 병력을 충원했으며 전함을 확보했다. 특히 전라좌수영에서는 일본의 전투 방법을 감안, 대비할 수 있는 거북선을 복원 건조했다.

1592년 4월, 일본은 조선 침략을 단행했다. 일본전사에는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군행동요도에는 전쟁 초기 왜군이 석달만에 함경도와 평안도까지 진격한 것을 알수가 있다.

해전에 관한 기록도 자세히 남아 있다. 해전경과일람요도를 보면 왜군이 육전과는 달리 해전에서 졸전을 펼쳤음을 알수 있다. 전투는 주로 경상도쪽 바다에서 벌어졌는데 이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효과적으로 막았다는 뜻이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초기 이순신은 어떻게 일본 수군을 무찔렀던 것일까?

임원빈 해군사관학교 교수 "전쟁은 과학이지 신화가 아니다. 모든 전쟁에는 승리할수 있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다. 특히 충무공이 위대한 이유는 열세의 병력으로 우세의 적을 이겼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우세를 조장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은 일대 고비를 맞는다. 왜군이 정예부대를 해전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왜군은 해전에서의 열세를 만회해야 했다.

그렇게 한산도 해전은 다가오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지 3개월째인 1592년 7월 6일,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이억기의 전라우수군과 함께 여수를 출발하여 한산도로 향했다.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군도 합세했다. 이순신이 총지휘하는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의 총 전함 수는 56척. 이순신은 우세한 세력을 유지한 채 흩어져 있는 적을 기습공격하는 전법을 주로 구사해왔다. 한산도 해전에서도 우세한 전력을 위해 연합선단을 편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와키쟈카의 일본 수군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원래 일본도 와키쟈카 야쓰하루와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다카 세 장수가 연합작전을 구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함대의 규모가 가장 컸던 와키자카는 단독으로 출전했다.

기타지마 만지 일본여자공립대학교 교수 "와키쟈카 야쓰하루는 가토 기요마사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던 장수였다. 그는 연합선단이 구성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지나친 공명심과 초조감 때문에 혼자 함대를 이끌고 출전한 것이다."

와키쟈카 야쓰하루 회고록 "나는 먼저 이순신을 찾아나섰다. 다른 장군들과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하였으나 나는 혼자 출전했다. 나의 병사들은 왜군 최정예 부대였고 나의 함대는 왜군 최대규모였다. 76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나의 함대는 견내량을 가득 메운 채 공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승전고를 울리는 일 뿐이었다."

일본 수군 정예 함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수군의 본고장인 시코쿠 지방, 이곳에서는 일본 수군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해마다 일본 수군의 후예들은 이곳에서 축제를 벌인다. 대회 요령은 간단하다. 서로의 배를 묶고 노를 저어 당기는 배 줄다리기인 것이다. 노젓는 능력으로 각 수군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의 복장과 문양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수군을 만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이순신의 함대와 전투를 벌인 수군의 후예들이다.

대회 참가팀 중에는 구루시마 형제가 이끌던 구루시마 수군의 후예들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구루지마 형제는 함께 참전, 구루시마 수군을 이끌었다.

아우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명량 해전 때에 왜 수군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전투 도중 이순신의 궁시(弓矢)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다. 그의 시체는 거제현감 안위에 의해 갑판으로 끌어올려져 목이 잘려 돛대에 매달렸다. 형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그보다 앞선 6년전 당항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부하장수인 순천부사 권준의 궁시(弓矢)를 맞고 전사했다.

조선에서 비극적으로 전사한 두 장수, 후손으로서 그 죽음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구루시마 마치노리 "전쟁이 끝난 후 도요토미로부터 감사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화살을 맞고도 곧바로 쓰러지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일본 수군의 본고장 시코구에는 왜군 함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의 돌격선이 복원되어 있다.

작고 빠른 배라는 고바야, 배의 크기에 비해 노의 숫자가 많다. 임진왜란 당시 노는 모두 12개였다. 일본의 돌격선인 것이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12명의 병력은 최대한 빨리 노를 저어 적의 전함에 접근한다. 그리고는 적선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데 이것이 대표적인 일본 수군의 전술이다.


세키부네는 일본 함대의 주력 전선이다. 선체는 폭이 좁고 긴 구조이다. 그래서 역시 빠르다. 4, 50개의 노가 있고 전투요원은 3, 40명이다.

아다케, 즉 안택선은 일본 함대에서 가장 큰 배다. 갑판 위에 집 모양의 지휘소가 있어 안택선이라 불린다. 배의 높이는 3층 건물 정도이다. 전체 길이는 약30여 미터, 조선의 판옥선 보다 약간 긴 길이다. 갑판 위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하층 갑판에는 노를 젓는 격군이 들어가며 상층 갑판에는 전투요원이 탑승했다. 안택선에는 90여 명의 격군과 전투요원 200여명을 포함해서 약 300여 명이 승선했다. 맨 꼭대기의 지휘소는 사방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수 십척 함대의 지휘부인 것이다.

와키쟈카의 함대는 진해, 웅천을 지나 거제로 향했다. 와키자카는 자신의 정예 함대로 조선 수군을 단숨에 밀어부칠 생각이었다. 1592년 7월 7일 와키자카의 함대는 거제 견내량에 도착했다. 모두 76척의 일본군 최대의 함대였다.

거제 견내량에는 와키자카의 일본 수군, 통영 당포에는 이순신이 총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정박했다. 한산도 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 수군과 조선 수군이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두 함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한산도 대첩을 보고한 장계에 따르면 이순신은 거제 현지민을 통해 적의 규모와 움직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추가 정탐으로 적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으로 구성된 함대라는 것을 파악했다. 이순신은 모든 전투에서 정보를 적극 활용했다. 적의 세력, 지형, 조류 등에 따라서 작전을 다르게 했다.


때와 장소와 조건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보전은 이순신 병법의 주요한 요소였다. 그는 결코 불리한 전투와 무모한 싸움을 하지 않았다.

임원빈 대령 "어떤 방식으로 일본 수군을 공략해서 전투의 효과를 극대화할수 있을까 고민하고 밤을 세워 작전계획을 세웠다. 반면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바로 눈앞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공격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미 조선수군은 싸우기도 전에 승리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그렇다면 한산도 해전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와키자카기에도 한산 해전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의 장계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와키자카기에는 번선, 즉 조선 수군 전함 사 오척이 철포등으로 반 시간 가량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산도 해전은 이렇게 조선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순신은 전투 장소로 견내량을 피하고 싶었다.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4, 5척의 기습은 유인작전이었던 것이다.

조선 수군의 화포 공격에 일본 수군은 조총과 활로 즉각 반격해왔다. 잠시 후, 조선수군이 의도적으로 후퇴를 하자 왜 수군은 곧장 추격을 시작했다. 와키자카기에는 약 12킬로미터를 추격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넓은 바다로 나서자 조선수군의 전함들이 갑자기 방향을 돌렸다. 순간 조선 수군의 주력함대가 나타나 키 모양으로 에워싸고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은 먼저 적의 대장선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순식간에 진이 무너진 왜군은 변변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의 조총은 조선수군의 화포를 당하지 못했다. 왜 수군은 눈에 띄게 무너져 갔다. 십사일생(十死一生), 와키자카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날 와키자카는 76척의 전선 중에서 69척을 잃었다. 반면 조선수군은 단한척의 피해도 없었다.

유인과 포위로 와키자카의 정예군을 완전히 괴멸시킨 이순신 병법, 그것은 유명한 학익진이었다.

와키쟈카 야쓰하루 회고록 "그것은 나의 완패였다. 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적장 이순신에게 완패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성급했고 그는 침착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했고 그의 전술은 치밀했으며 나의 함대는 허둥댔고 그의 함대는 노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펼친 거대한 진법 안에서 나의 함대는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조선의 대첩으로 남은 한산도 전투, 그것은 나 와키자카 야쓰하루에게는 죽음보다 더 한 치욕이었다."

한산도 해전의 영향은 컸다.

와키자카가 참패하자 토요토미는 왜군 전체에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라는 해전 금지령을 내렸다. 토요토미등 일본 수뇌부는 전략 변경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근세일본국민사는 한산도 해전의 영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 한산도 해전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한산도 해전의 패전으로 와키자카 야쓰하루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가장 화나게 한 측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와키자카는 정유재란 때 거제, 남원등에서 전공을 세우지만 명량해전에서 왜군 후군장으로 참가했다가 다시 이순신에게 패한다. 전쟁 후, 일본으로 돌아온 와키자카는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와키자카는 다른 장수들과 달리 자신의 큰 패배를 솔직하고 사실적인 기록으로 남겼다.

임진왜란의 전황을 뒤집은 한산도 해전의 이순신, 이러한 이순신에 대한 일본의 당대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본조삼국지라는 인형극 대본에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 대해 두려움이 컸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

본조 삼국지는 일본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리우는 치카마스몬자에몬에 의해 쓰여졌다.

본조삼국지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여 년 후의 작품이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인형극으로, 1712년 오사카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인형극 대본에서 우리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서, 즉 고니시 장군인 것이다.

인형극의 주인공은 고니시 유키나가, 그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공의 제1 선봉장이었다.

작품에 나오는 고니시의 적은 복카이센, 즉 바다에 잠긴 괴물이란 뜻이다. 학자들은 이 복카이센을 이순신 장군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작품 속의 복카이센은 샤치호코라는 상상 속의 동물과 닮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샤치호코는 어떤 모습일까?

의외의 장소에서 샤치호코를 만날 수 있다. 일본 오사카 성의 천수각, 그곳에는 다른 일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동물을 수호신으로 그려놓고 있다. 오사카 성 용마루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꼬리를 치켜든 물고기 모양, 이것이 바로 복카이센과 닮은 샤치호코인 것이다. 해전에 능한 괴물, 복카이센. 그렇다면 당시 일본 수군에 위협이 될 정도로 해전에 능한 괴물은 누구였을까? 이순신과 거북선이 아니었을까...


인형극의 이야기는 임진왜란과 달리 고니시의 승리로 묘사되어 있다. 괴물 모양을 한 조선의 복카이센을 고니시가 쉽게 목을 잘라 죽인 것으로 끝맺고 있다. 결국 이순신과 거북선은 일본인의 의식속에 깊은 이미지로 남았던 것이다.

한산도 해전이 남긴 영향은 최근에도 되살아나고 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 잡지는 최근 도고 헤이아치로 제독의 쓰시마 해전을 특집으로 다뤘다. 그러면서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을 승리로 이끈 도고 전술의 비밀을 풀어 나갔다. 당시 세계 최강이던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도고의 승리 비밀은 바로 정(丁)자 진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정자 진법은 학익진의 응용이라고 밝혔다. 즉 러시아 해군을 격퇴시킨 도고의 정자진법은 이순신이 와키자카를 패주시킨 바로 그 학익진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한국역사 기행문에서 이순신과 일본 해군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19세기 메이지시대 창설된 일본해군은 창설 초기, 이순신을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해군은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해군의 전통이 되었다.

일본의 근대 해군, 그들은 임진왜란과 조선 수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순신이 있었다.

이 시기, 이순신의 이름은 일본의 전사에 비로소 등장한다. 메이지참모본부 장교들이 이순신의 해전을 제대로 기록했던 것이다. 거북선도 괴물 복카이센이 아닌 제모습을 되찾았다.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아치로 제독, 그는 이순신을 평가하고 기록한 많은 일본 해군들 중 한사람일 것이다.

"이순신 각서"는 또하나의 사실을 남기고 있다.

이순신 진혼제. 일본 해군은 통영까지 나가서 해마다 이순신에게 진혼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진해에서 가까운 마산등 여러 전장을 두고 먼 통영까지 나갔을까?

그것은 한산도 해전에 대한 일본해군과 와키자카의 평가와 박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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