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1919年国内で 3・1反日デモ運動(三一反日示威運動)が起きると, その影響で満洲(満州)と老令(露領) 地域でも反日デモが活発に展開された. しかし国内外での示威運動では韓半島で日帝(日帝)の勢力を追い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なぜかすれば非暴力(非暴力) 平和的(平和的) 抵抗運動(抵抗運動)だけでは日本帝国主義侵略者たちの韓半島植民地支配に大きい打撃を 与え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だった.

 

ここに国内の民族リーダーたちは平和的な示威運動の限界性を認識して, 武装闘争をするために満洲と老令地域で亡命した. そして 1910年代からこの地域で推進されていた独立戦争では(独立戦争論)はもっと活気をたたえるようになったし, 再だけ韓人社会(在満韓人社会)の絶対的な支持を受けるようになった.

 

その結果満洲と老令の韓国人集団を基盤として五十あまりの所に達する無力独立運動(武力独立運動) 団体たちが結成されるのに至った. 本文ではその頃活動した独立運動団体全部を列挙していちいち敍述するには無理がよるので, その中一番活発な武将抗日闘い(武装抗日闘争)を展開した西路軍政署(西路軍政署), 北路軍政署(北路軍政署), 大韓独立軍(大韓独立軍) など 3個団体のみを概略的に説明するようにする.

 


1920년대 초반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군사단체(軍事團體) ⑴

1919년 국내에서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만주(滿州)와 노령(露領) 지역에서도 반일시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의 시위운동으로는 한반도에서 일제(日帝)의 세력을 몰아낼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비폭력(非暴力) 평화적(平和的) 저항운동(抵抗運動)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국내의 민족 지도자들은 평화적인 시위운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하여 만주와 노령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던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으며, 재만한인사회(在滿韓人社會)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만주와 노령의 한국인 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오십여군데에 달하는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단체들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본문에서는 그 당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 전부를 열거하여 일일이 서술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했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 3개 단체만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1919년 3월 1일에 국내에서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전개되었고, 그 영향은 곧 만주지방에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초순에는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을 실천에 옮길 군정부(軍政府)가 이상룡(李相龍), 이회영(李會榮), 김동삼(金東三) 등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군정부에서는 군대를 편성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수행할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조직 체계를 완비하였다. 그리하여 이상룡이 최고 책임자인 총재에 임명되고, 여준(呂準)이 부총재, 그리고 이탁(李拓)이 참모장을 각각 담당하게 되었다. 아울러 군정부에서는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효과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받기 위해서였다.

 

군정부가 수립될 무렵에 상해(上海)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서간도 지역에 또 다른 정부가 수립된 것을 알고 여운형(呂運亨)을 군정부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에 통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군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상룡이 "하나의 민족이 어찌 두 정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고 설득한 다음에야 비로소 군정부라는 명칭을 버리고 1919년 11월 17일 임시정부 산하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되었다.

 

서로군정서는 최고 지휘부인 독판부(督瓣部) 아래 무장투쟁을 지도하는 사령부(司令部), 참모부(參謀部), 참모처(參謀處) 등을 두었으며 이를 보조해 주는 기관으로 정무청(政務廳), 내무사(內務司), 법무사(法務司), 재무사(財務司), 학무사(學務司), 군무사(軍務司) 등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입법 및 주요 안건의 결정기관으로서 서의회(署議會)를 두었으며, 지방조직으로서는 영서(令署)를 두어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의 효율성을 꾀하고자 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는 대부분 신민회(新民會) 출신의 독립전쟁론자들이 몸담고 있었으며, 지방의 양반 신분으로서 중소지주층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고, 대종교 신자들이 많았으며, 한학과 신학문을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인사가 많았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11월에 성립되었으나, 실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이중에서도 군자금이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그러므로 서로군정서에서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서 부심하였으며 관할지역에 살고 있는 재만한인(在滿韓人)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로부터 군자금을 얻고자 하였다. 한족회의 관할구역은 유하현(柳河縣), 통화현(通化縣), 해룡현(海龍縣), 흥경현(興京縣), 집안현(輯安縣), 관전현(寬甸縣), 임강현(臨江縣), 환인현(歡仁縣) 등이었다. 서로군정서는 이 관할 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군자금을 각출하고자 하였는데, 액수는 호(戶)당 일원오각(壹元五角)이었으며 1만여호가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한족회의 이러한 군자금 모금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 하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서로군정서는 국내에 특파원을 밀파하여 군자금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군자금 모금 활동은 주로 1919년과 1920년의 양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실제 모금액도 이 기간 동안에 상당히 모아졌다. 그러나 1921년 이후에는 거의 모금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모금 활동에 변화가 있는 까닭을 설명하면, 전자는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애국지사들의 민족 의식의 고취와 관련이 있을 것이고, 후자는 뒤에서도 언급할 예정이지만 1920년 말기부터 일본군의 간도출병(間島出兵)으로 서로군정서의 병사들이 밀산(密山)을 거쳐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는 것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아울러 본부도 역시 일제의 침공을 피하려 북만주의 액목현(額穆縣)으로 이동하였고 세력 역시 약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군자금이 가장 많이 모금된 곳과 관련해서 우선 주목되는 지역은 평안도이다. 즉 이곳에서 모금 활동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평안도와 서간도간의 지리적인 밀접성에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는 경상북도 지역이 주목된다. 이는 서로군정서의 간부들 대다수가 경상북도 출신인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평안도 지역은 대개 평안도 출신이, 경상도 지역은 경상도 출신이 각각 파견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모금 활동자들이 자신의 출신지역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취해진 정책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들의 연고지였기 때문이다.

 

한편 서로군정서에서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통하여 많은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는 모집한 군자금과 양성된 독립군을 바탕으로 국내 및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부일배(附日輩)를 제거하는 일면 국내로 들어가 일본 헌병대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 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일배 제거 활동은 서간도와 평북 지역에서 1919년부터 1922년까지 4년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대상은 국내의 친일 한국인 관료, 일본군 밀정 및 서간도 지역의 조일(助日) 단체인 보민회(保民會), 거류민회(居留民會) 등의 지도부였다.

 

이러한 부일배(附日輩) 제거는 주로 서로군정서의 핵심 전투조직인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 제1중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부대는 1914년 통화현에서 백서농장(白西農場)을 운영하던 채찬(蔡燦), 신용관(辛容寬) 등에 의해 조직되었는데, 점차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백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집안현과 통화현 등지에 두었다. 서로군정서의 국내에서의 활동은 대체로 군자금 모금과 마찬가지로 평안북도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 점은 서로군정서가 위치하고 있는 서간도 지역과 평북 지역의 지리적인 인접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서로군정서의 활동이 평안북도 지역에서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20년 5월에 문상식(文相植), 김찬규(金燦圭)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 특공대원들이 경북 지역에서 관공서를 폭파한 사건은 그 단적인 예이다. 또한 동년 8월에 미국 상원의원들이 서울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서로군정서의 특공대원 김동순(金東純), 한우석(韓愚錫) 등은 서로군정서 집법과장 최우송(崔友松)의 지시를 받아 서울로 밀파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조선총독부 건물 공격, 조선총독 살해 등이었으나 계획을 실현하기 전에 일본 경찰에 피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군정서에서는 국내에 병력을 침투시켜 무력(武力)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당초의 계획처럼 대규모적인 항전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단지 소규모 게릴라 작전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로군정서의 무장투쟁은 북간도 지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등이 수행한 대규모 전투와는 비교되는 것이었다.

 

한편, 일제는 서로군정서의 지속적인 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정예군을 서간도 지역에 파견하고자 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는 천연수림이 가득한 백두산(白頭山) 기슭에 두번째 군사기지를 정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북로군정서와 연계를 맺고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즉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는 군사상 일체의 주요 안건, 사관생도 양성, 무기 구입 등에 관하여 서로 협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 합의에 의하여 서로군정서 산하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에 교관으로 파견되어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20년 10월 23일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작림(張作霖)의 양해를 구해 철령(鐵領) 주둔 보병 제19연대 및 공주령(公主領) 주둔 기병 제12연대를 출동시켜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한편 한국인 부락을 초토화시켰다. 이에 서로군정서에서는 본부를 북만주 지역 액목현으로 이동시켰으며, 안도현(安圖縣) 지역에 있던 독립군 병력은 소련, 만주 국경 지역인 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다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 적군(赤軍)의 포위 공격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로군정서 대원들이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시참변이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로 구성된 무장조직과 만주에서 이동한 독립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와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갈라져서 벌인 군권쟁탈전의 소산이었다. 그 결과 대한의용군에 속해 있었던 서로군정서 대원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 병사들에 의하여 무장해제를 당하였던 것이다. 이에 서로군정서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북만주의 영안(零安)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액목현으로 본부를 옮긴 서로군정서는 임시정부 군무부의 군무국장인 황학수(黃學秀)를 영입하여 1921년 5월에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위원제를 택하여 위원장에 이탁, 경리위원장에 이진산(李震山), 학무위원장에 이상룡의 아우인 이척서, 법무위원장에 김동삼, 참모장에 황학수, 총사령관에 박용만(朴容萬)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영안에 있던 서로군정서의 잔여 병력 역시 액목현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로군정서의 이러한 재기의 움직임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의 희망에 부풀었던 재만 교포들의 열기가 점차 식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920년 일본군의 만주 침공은 한국인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요원한 것으로 느끼게 하였던 것이다. 즉 서로군정서의 대중적 기반이 그만큼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새로이 서로군정서 총사령관이 된 박용만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역시 재만한인(在滿韓人)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은 당연하다.

 

이에 더하여 서로군정서 지도부 내에서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 참가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서로군정서 지도부에서는 남만주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운동에 대하여 참가 의사를 표시하지 않자 서로군정서의 핵심 세력인 의용군이 1922년 6월 2일 이에 반발하여 사실상 서로군정서를 탈퇴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서로군정서는 점차 와해되었으며, 1924년 11월 25일에 정의부(正義府)에 흡수됨으로써 발전적 해체를 도모하였다.

 

②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의 전신(前身)은 1911년에 북간도 지역에서 조직된 중광단(重光團)이다. 이것이 3·1운동 후에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1919년 가을부터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라는 이름의 군사단체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후 이 단체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되었다.

 

즉 대한군정서가 창립 직후 상해의 임시정부를 지지할 뜻을 표방하자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북로군정서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창립 당시 북로군정서의 주요 간부 명단을 살펴보면 총재에 서일(徐一), 총사령관에 김좌진(金佐鎭),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에 최해(崔海),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 경리에 계화(桂和), 길림분서고문에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에 양현(楊賢) 등이었다.

 

북로군정서는 본부를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 일대에 설치했으며 병력의 증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봄에는 백초구(百草溝) 기타 각 지역에서 장정 3백여명을 모집하였으며 이성규(李成奎)를 국내에 파견하여 대한제국 육군 장교 출신인 김규식(金奎植), 홍충희(洪忠喜), 박형식(朴亨植) 등을 초빙하였다.

 

병력의 증강과 아울러 북로군정서의 당면한 과제는 무기 구입이었다. 이를 위해 북로군정서는 서일과 계화를 직접 노령으로 보내 무기 구입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북로군정서에서는 1920년 12월경에 이르러 군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북로군정서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운영하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과 장교 박영희(朴寧熙), 백종렬(白鍾烈), 오상세(吳祥世) 등을 비롯한 다수의 훈련 장교 및 각종의 교재를 공급받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서대파 십리평으로부터 약 12킬로미터 떨어진 삼림지대에 8동의 병영을 짓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다.

 

독립군 병력 확보를 위해 북로군정서에서는 간도 일대의 장정을 모집하여 독립군으로 편성함과 동시에 이들을 정예군사로 만들기 위하여 18세~30세의 청년들을 뽑아 사관연성소에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사관연성소의 교육은 6개월 과정의 속성과였으며 과목은 정신교육, 세계 각국의 독립운동사 및 한일관계사, 군사학, 총기(銃器)의 사용법, 부대의 지휘운용법, 체조 및 구령법 등이었다. 군사훈련 방법은 대한제국의 교육 방법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리고 1정보 넓이의 연병장을 2개나 만들어 이 곳에서 날마다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술과(術科)는 일본 군인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실탄 사격연습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북로군정서에서는 1920년 9월 9일에 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식을 개최하여 298명의 졸업생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교성대(敎成隊)를 조직하였는데, 대장에 나중소(羅仲昭), 부관에 최준형(崔俊亨), 중대장에 이범석, 소대장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한편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편제는 소대, 중대, 대대로 나뉘어 1소대 인원을 50명으로 하고 2개 소대를 1중대로 했으며, 4개 중대를 1대대로 편제함과 동시에 초병(哨兵)과 첨병(尖兵) 제도를 실시하여 본대와의 연락을 긴밀하게 하였다. 또한 북로군정서는 독립군 무장투쟁의 보위를 위하여 각 지방에 초소로서의 경신(警信)조직을 설치하였는데, 촌락 1백호마다 경신분과를 두고 20~30호의 촌락에는 경신분소를 두었다. 각 경신분과에는 과장 1명, 서기 1명, 통신원 5명 이상, 탐사원 2명 이상, 경호원 5명 이상을 두었다. 통신원은 통신사무를 담당하고, 탐사원은 일반 민정을 시찰하며, 경호원은 주야교대로 경계를 담당하여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 경신국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1920년 8월경에는 북로군정서의 수뇌부가 일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총재인 서일 아래에 부총재로 현천묵(玄天默)이 등용되었고, 총재부 비서장에 김성(金成), 사령관 부관에 박영희, 참모부장에 나중소 등이 각각 취임했다. 7월 1일에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약 1천여명으로 늘어났고, 그 중에서 완전무장되고 잘 훈련된 정예군은 6백여명이었으며 나머지 5백여명은 경호병력이었다. 이때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무기는 기관총(機關銃)을 포함한 총기(銃器)가 8백여정, 박격포(迫擊砲) 2문, 수류탄(手榴彈) 2천여개 등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이 시기에 만주에서 존재했던 독립군 가운데 단위부대로서는 가장 잘 훈련되고 전투력이 막강한 부대였다.

 

1920년 10월경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당시 개편된 북로군정서의 조직을 보면 아래와 같다.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장 나중소(羅仲昭)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중군장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백종렬(白鍾烈) 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홍충희(洪忠熙)

제1중대장 강화린(姜華麟)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熙)

제3중대장 김인수(金仁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기관총소대장 최인걸(崔仁傑)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독립군은 함경도 지역의 의병대장 홍범도(洪範圖)가 3·1운동 후에 북간도 지역에서 조직한 무장 단체이다. 대한독립군의 핵심 인물인 홍범도는 1907년 가을에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라는 이름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갑산(甲山), 삼수(三水), 혜산(惠山), 북청(北靑) 등지에서 활발한 유격전(遊擊戰)으로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혔던 맹장(猛將)으로 국내에서 3·1운동이 벌어지자 포수와 청년들을 모아 이 단체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홍범도가 총사령관, 주건(朱建)이 부사령관, 박경철(朴景哲)이 참모장으로서 부대를 지휘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산하 무장 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독립군이었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부터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감행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과 혜산진 등으로 진격,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으며 9월에는 갑산군의 경찰 주재소와 헌병대 분견소 등을 습격하였다. 동년 10월에는 평안북도 방면으로 진격하여 강계(江界)의 요지인 만포진(滿浦鎭)을 점령하고 자성군(慈城郡)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하였다. 

 

이러한 대한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크게 당황한 일본군은 이에 대비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처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큰 전과를 올린데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는 오동진(吳東振), 김응식(金應植) 등을 파견하여 전투 결과를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군은 최진동(崔振東), 박영(朴英)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의용군과 합세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로 새롭게 편성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사령관은 최진동, 부관은 안무, 연대장은 홍범도, 중대장은 이천오(李千五), 강상모(姜尙模), 조권식(曺權植)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이러한 조직 아래 대한독립군은 국내진공작전을 위하여 종성(鐘城), 온성(穩城), 무산(茂山) 등지에 있는 일본 헌병대와 기타 행정기관 등을 습격하여 적군을 사살하고 군수장비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대한독립군이 무장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독립군을 빙자하여 재만한인(在滿韓人)들로부터 금품을 갈취하는 무리도 많았는데, 홍범도는 유고문(喩告文)을 각지의 교포들에게 배포하여 이러한 반민족적(反民族的) 행위를 근절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일제(日帝)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방해하던 순사 보조원과 일본군 밀정 등에게도 경고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1920년 봄에 홍범도의 부대는 최진동과 양하청(梁河淸)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과 함께 두만강 연안의 회령, 종성, 온성 지방으로 연속적인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전개하였다. 특히 동년 2월에는 길림성(吉林省) 지역의 독립군 병사 2천여명이 회령 부근으로 접근, 일본군 진영을 공격하여 적군 3백여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이 승전보(勝戰譜)는 외전(外電)을 통하여 널리 내외로 알려져 독립군의 사기양양에 큰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

 

동년 6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이후 7월에 북간도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되자 대한독립군은 동도독립군서(東道獨立軍署)에 편입되었으며, 10월에는 일본군의 간도출병(間島出兵)에 대응하기 위해 북간도의 독립군이 재편되자 총병력은 3천 5백여명이 되었고 1대대를 3중대로, 1중대를 3소대로 나누어 27개의 소대를 두었다.

 

출처; 박영석 著「만주, 노령 지역의 독립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編(1999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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