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한국의 역사 인물 6.최영(崔瑩)

최영(崔瑩)은 원,명 교체기(元明交替期)와 고려 말기라는 어지러운 국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홍건적과 일본인를 물리친 영웅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받으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옛 고구려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요동(遼東) 정벌을 꿈꾸다 이에 반대하는 이성계(李成桂) 일파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최영이 태어날 당시 고려(高麗)는 끊임없이 시달려온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인해 왕조의 운명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거란(契丹)과 여진(女眞)의 침략을 견뎌낸 고려는 외척의 발호와 100여년에 걸친 무신집권기(武臣執權期)를 거쳐 또다시 몽골의 침략을 받아 마침내 그들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무능한 국왕들은 사사건건 몽골의 간섭을 바등면서도 독립의 의지마저 상실한 채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그러자 무력한 고려 조정을 업신여긴 일본인들이 서남해를 수시로 침략하며 방화와 약탈을 일삼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 등장한 공민왕(恭愍王)은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개혁을 통해 나라의 중흥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곧 한계에 부딪쳤다. 안으로는 원나라에 줄을 댄 권문세족들이 끊임없이 공민왕의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으며, 밖으로는 홍건적과 일본인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국력이 쇠퇴해졌기 때문이다. 이때 최영은 홍건적과 일본인의 침입을 막아내며 혼란을 극복하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명나라가 고려를 지배하려 하자 이제 맞서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꿈을 접은 채 세상을 달리하고 말았다. ◆ 난세의 영웅 최영(崔瑩)은 1316년 의종(毅宗)과 명종(明宗)대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 후손으로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셌다. 처음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일본인와의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임금을 호위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우달치(于達赤)에 임명된 그는 1352년에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첨수(金添壽), 최원(崔源) 등과 함께 조일신의 세력을 제압하고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이어 1354년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했다. 이때 원나라에서 장사성(張士誠)이 이끄는 홍건적(紅巾賊)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에 구원병을 요청해 왔다. 최영은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등 40여명의 장수들과 더불어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갔다. 최영은 원나라의 승상 탈탈(脫脫)을 도와 홍건적과 맞서 싸웠으나, 탈탈이 참소(讒訴)를 입어 관직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군사들을 해산시켜야만 했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소집하여 반란군 토벌에 나선 최영은 회안로와 팔리장에서 전투를 벌여 용맹을 떨쳤다. 또한 홍건적 8천여명이 회안성을 포위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운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적군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공격해 왔다. 이때 최영은 여러 번 창에 찔리는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군 사이로 돌파하여 용전분투(勇戰奮鬪)하였다. 몸을 아끼지 않는 최영의 저돌성은 적군을 두려움에 덜게 했고, 이후 일본인를 토벌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최영이 원나라에서 용맹을 떨치고 귀국한 이듬해인 1356년, 공민왕(恭愍王)은 마침내 원나라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공민왕은 먼저 부원파(附元派)인 기철(奇轍), 권겸(權謙) 등 권신(權臣)들을 제거하고,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이문소를 폐지했다. 그 후 공민왕은 원나라에 속해 있던 압록강 서쪽 8참과 원(元)이 동북면을 관할하기 위해 그 지역에 설치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때 최영은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인당(印撞), 신순(申順) 등과 함께 8참을 공격하여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1358년 동북면체복사(東北面體覆使)를 거쳐 이듬해 양광도(楊廣道) 전라도(全羅道) 일본인체복사(倭寇體覆使)에 임명된 최영은 군선 4백여척으로 오예포에 쳐들어온 일본인를 격퇴시키는 등 서남해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인를 섬멸하였고, 이때부터 백성들 사이에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 연전연승(連戰連勝)의 명장. 1359년 최영은 일본인를 물리친 전공(戰功)으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올랐다. 이때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홍건적의 4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에 침범하여 서경(西京)을 함락시킨 전란(戰亂)이 일어났다. 최영은 이방실(李芳實), 안우(安祐), 김어진(金於珍) 등과 함께 생양(生陽), 철화(鐵和), 서경(西京), 함종(咸從) 등지에서 홍건적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서경을 탈환하는 싸움에서는 홍건적의 선봉대장인 한임아(韓林兒)와 마상검투(馬上劍鬪)를 벌여 적장을 패퇴(敗退)시키고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기도 했다. 그는 이 전공(戰功)으로 이듬해에 평양윤(平壤尹) 겸 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에 제수되었다. 이 전쟁으로 백성들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여야만 했다. 최영은 구휼소(救恤邵)를 설치하고 백성들에게 종자를 나누어 주며 파종을 권하는 한편, 전투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묻어 주었다. 그러나 외침(外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최영이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에 오른 1361년 반성(潘誠),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홍건적이 10만 대군으로 또다시 고려에 쳐들어와 수도인 개경(開京)마저 함락시켰다. 복주(福州)로 피난을 떠난 공민왕은 이듬해 다시 군사를 재정비하여 개경을 탈환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최영은 정세운(鄭世雲), 안우, 이방실, 김득배(金得培), 한방신(韓方信)과 함께 군사 10만명을 모아 홍건적을 격퇴시키고 개경을 탈환하였다. 이 전공(戰功)으로 그는 일등공신에 책봉되어 공민왕으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1363년 3월,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에서 공민왕을 살해하려고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은 우제, 안우경(安遇慶), 김장수(金長壽)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흥왕사로 달려가 반란군을 진압하고 공민왕을 무사히 구출하여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공으로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이 되었고, 뒤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평리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그동안 공민왕의 반원정책(反元政策)에 반기를 들어온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원나라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포위하자 최영은 도순위사(道巡尉使)가 되어 정예군을 이끌고 최유의 군대를 맞아 악전고투(惡戰苦鬪)를 하고 있는 안우경(安遇慶)을 도와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달천(達川)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전투에서 패배한 최유는 진영을 불사른 뒤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리하여 최영은 다시 한 번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 신돈의 참소로 시련을 겪다.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최영은 참소(讒訴)를 입어 죄천된 뒤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것은 당시 공민왕의 신임을 받고 국정(國政)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신돈(辛旽)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지난날 신돈이 밀직부사(密直副使) 김란(金蘭)의 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 김란은 두 딸로 하여금 신돈의 잠자리를 돌보게 했다. 그러자 이를 본 최영이 김란을 크게 꾸짖었고, 이때부터 신돈은 최영에게 앙심을 품고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최영이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고봉현에서 사냥으로 소일하자 신돈은 그것을 구실 삼아 공민왕에게 참소했다. 공민왕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순(李珣)을 보내 "경은 동서강도지휘사(東西康道指揮使)이면서 일본인가 창릉에 들어와 세조(世祖)의 초상화를 가져갔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김속명(金續命)으로 하여금 경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음에도 경은 속히 군사를 김속명에게 넘겨주지 않고 시도 대도 없이 사냥만 하고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비록 과인이 그것을 탓하지 않는다 해도 대간들이 경을 용서하겠는가? 지금 경을 계림윤(鷄林尹)에 제수하니 하루 빨리 임지로 떠나도록 하라"며 최영을 꾸짖었다. 최영은 "오늘날 죄 지은 자로서 몸을 보전하는 이가 적은데 나는 계림윤이 되어 가니 이것 역시 전하(殿下)의 은혜로다."라며 즉시 임지로 떠났다. 최영에 대한 신돈의 참소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최영이 이구수, 양백익(梁伯益), 석문성, 박춘(朴春)과 함께 내신(內臣) 김수만(金壽萬)과 결탁하여 상하를 이간하고, 어진 관리를 배척하고 내쫓는 큰 불충을 저질렀다며 거짓으로 고했다. 이때에도 공민왕은 신돈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잃고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나랏일을 신돈 일파에게 맡겨버린 공민왕에게서는 즉위 초 적극적으로 개혁 정치를 펼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신돈은 이득림을 보내 최영을 국문(鞠問)하게 했다. 촤영은 거짓으로 자백하며 "빨리 형을 집행하라."고 오히려 이득림을 다그쳤다. 이때 최영은 3품 이상의 관직을 삭탈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한 채 귀양을 가야 했다. 그 후 1371년, 신돈이 공민왕의 총애를 잃고 반역을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후에야 최영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어 1373년 육도순찰사(六道巡察使)에 임명된 최영은 장수와 수령의 승진과 퇴직은 물론 군적을 작성하고 전함을 건조하며 죄인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때 최영은 70세 이상된 사람에게 품계에 따라 쌀을 거두어 군수에 보충하게 했는데, 이에 백성들의 원망이 크게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이듬해 최영이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에 임명되자 사헌부(司憲府)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최영은 "소신이 성심을 다해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왔는데, 이제 이와 같이 비방을 듣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소신의 관직을 파면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며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공민왕은 최영을 정직하게 여겼으나 대간과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최영을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어 최영을 논박한 대사헌 김속명을 파면시키고 지평 최원유를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좌천시켰으며, 최영에게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최영이 경상도, 전라도, 양광도 도통사가 되어 탐라(耽羅) 목호(牧胡)의 반란을 진압하고 10월에 돌아왔을 때는 공민왕은 이미 최만생(崔萬生)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한때 반원정책(反元政策)과 개혁 정치를 표방하며 고려를 중흥의 길로 이끌었던 공민왕(恭愍王)은 재위 23년 만인 1374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우왕(禑王)이다. ◆ 홍산전투(鴻山戰鬪) 우왕이 즉위한 뒤에도 일본인의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부여에 침입한 일본인들이 공주에 이르자, 공주목사(公州牧使) 김사혁(金斯革)이 정현으로 나가 일본인와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 원수(元首) 박인계(朴仁桂)가 석성에 침입한 일본인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최영은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일본인를 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이 전쟁터에 나가기에는 너무 늙었다며 최영을 만류했다. 하지만 최영은 "지금 시기를 잃고 막지 못한다면 뒷날 그들을 물리치기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장수로 삼아 왜적(倭敵)을 막는 것은 승산이 적을 뿐 아니라 충분히 훈련을 한 군사들이 아니어서 쓸 수가 없습니다. 소신이 비록 몸은 늙었지만 뜻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직(社稷)을 보전하고 왕실을 지키고자 할 따름입니다. 원컨대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가 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청했다. 이에 우왕은 "장군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하오. 장군이 없는 고려는 생각하기도 싫소."라며 마지못해 그의 출전을 허락했다. 최영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홍산에 이르러 보니 먼저 도착해 높은 고지를 선점한 일본인들은 험하고 좁은 곳을 의지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삼면이 모두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직 한 길을 통해서만 그곳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여 더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자 최영은 몸소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말을 달렸다. 이때 일본인의 화살이 최영의 입술에 맞아 피가 흘렀지만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적병을 쏘아 거꾸러뜨린 후에 화살을 빼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르며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이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적병들을 무수히 참살하니 최영의 분전에 사기가 오른 군사들은 그 기세를 몰아 일본인를 완전히 섬멸하였다. 승전보(勝戰報)를 전해들은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최영에게 술과 안장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 최영의 상처를 정성껏 치료하게 했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최영을 "백발장군(百髮將軍) 최만호(崔萬戶)"라 부르며 크게 두려워했고, 고려군 진영에 최영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곧바로 물러갔다고 한다. 우왕은 최영을 시중(侍中)에 임명하려 했으나, 최영은 "중책을 맡게 되면 전투에 임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기가 어려우니 일본인가 평정되기를 기다린 후에 그리하십시오."라며 완강히 사양했다. 그러자 우왕은 대신 최영을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했다. 이듬해 일본인가 다시 밤을 틈타 착량에 들어와 전함 50여척을 불태우고 군민(軍民) 1천여명을 죽였다. 그리고 강화(江華)까지 침범하여 개경(開京)을 위협하고 있었다. 우왕은 일본인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손광유(孫光裕), 김지서, 곽언룡(郭彦龍) 등을 옥에 가두고, 최영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승천부에 주둔하며 일본인를 막게 했다. 그러자 강화(江華)에서 도망친 일본인들은 수안(遂安), 통진(通津), 동성(桐城) 등의 현(縣)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때 경상도 원수 우인렬(禹仁烈)이 "왜선의 돛과 돛대가 서로 맞닿아 바다를 덮을 정도이므로 군사를 보내 요새를 나누어 지키도록 했으나, 적의 군세가 워낙 커서 한 도의 군사로는 막아내기가 어렵습니다. 하루빨리 지원군을 보내주십시오."라는 상소를 올렸다. 강화에 머물고 있는 일본인가 개경과 가까이 있어 이를 방비하기도 힘든 상황에 올라온 이 상소로 고려 조정은 또 한 번 걱정에 휩사였다. 그러자 최영이 나서서 우왕에게 "강화는 적을 막는 요새인데, 권신들이 앞다투어 그 지역의 전답(田畓)을 차지함으로써 군량을 제대로 충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강화에 있는 개인 소유의 논밭을 나라에 귀속시켜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로써 군량을 충당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우왕의 허락을 얻은 최영은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을 육지로 옮기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했다. 또한 각각의 원수들로부터 종복 10명과 말을 징발하고 궁궐과 창고를 지키는 사람들을 강화로 보내 변방을 지키게 함으로써 일본인의 침입에 대비햇다. 1378년 또다시 착량을 거쳐 승천부에 올라온 일본인들이 장차 개경을 공격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크게 놀란 고려 조정은 계엄령을 내리는 한편 군사를 나누어 동서강에 나가 주둔하게 하고, 호위병들을 궐문에 세워 적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했다. 이때 최영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해풍(海豊)에 진을 치고 찬성사 양백연(楊伯淵)을 부원수로 삼았다. 이 사실을 안 일본인들은 "최영의 군대만 깨뜨리면 개경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면서, 다른 진영은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해풍으로 진격해 왔다. 최영은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으로 결정된다."며 양백연과 함께 나가 싸웠는데, 일본인들은 오직 최영을 목표로 공격해 왔다. 이때 이성계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합세하여 적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최영은 도망치는 일본인들을 끝까지 쫓아가 적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피난 준비를 하고 있던 우왕은 사자가 와서 승전보(勝戰報)를 전하자 안심하고 계엄령을 해제했다. ◆ 비록 국왕의 뜻이라 해도... 최영은 잘못된 일은 언제나 바로잡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정지(鄭地)가 순천(順川), 조양(朝陽) 등지에서 일본인와의 전투에 패배하자 경복흥, 우인렬 등이 최영을 찾아가 정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최영은 "일본인의 침략이 이토로 심한데 재상들은 어찌하여 근심하지 않는가? 일본인가 마구 날뛰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지가 아무리 용맹한들 혼자서 그 많은 적을 어찌 당하겠는가?"라며 정지를 옹호했고, 경복흥 등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또 한번은 허완(許完)과 윤방안(尹放岸)이라는 관리가 우왕의 유모 장씨를 이용해 임견미(林堅味)와 도길부를 밀어내기 위해 참소한 일이 있었다. 우왕은 장씨의 말만 듣고 임견미 등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궁중 출입을 금지시켜 버렸다. 이에 임견미 등이 최영(崔瑩), 경복흥(慶復興), 이인임(李仁任)에게 달려와 "허완 등이 우리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 공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허완 등이 거짓 왕명으로 최영을 불렀다. 최영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복흥, 이인임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병사들을 주위에 배치하고, 관료들을 불러모은 후 우왕에게 장씨를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이에 우왕이 부르자 최영은 "전하(殿下)께서 저희들의 청을 허락하신 다면 신이 들어가 뵙겠습니다."라며 궁궐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재상들이 "간신이 궁궐 안에 있으니 경솔하게 들어가서는 안 되오. 공이 가면 군사들이 반드시 소란을 피울 것이고, 그리하면 나라 또한 편안하지 못할 것이오."라며 최영을 말렸다. 최영은 재상들의 말에 따라 입궐하지 않고. 대신 대간들이 궁궐에 들어가 장씨를 하옥하고 심문하기를 청했다.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최영 등은 장씨의 족당인 강유(姜劉), 권원순(權原順), 권원보(權原普) 등을 가둔 뒤 심문했다. 그러자 우왕은 그 일을 누설한 환관 정난봉(丁爛奉)을 가두고 경복흥과 목인길(木仁吉)을 불러 "과인이 임금으로써 어찌 유모를 구하지 못하겠는가. 어서 그들을 석방하고 죄를 묻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최영 등이 지지 않고 계속해서 장씨의 죄를 묻기를 청하자. 우왕은 허완과 윤방안을 하옥하고, 최영에게 "경은 도대체 어떤 도적을 막으려고 계속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과인이 부르는데도 오지 않고 있는 것인가? 경은 지난날 스스로 말하기를 여러 대의 충신이라 하더니 그 충심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이오?"라며 군사를 해산시킬 것을 명했다. 이에 최영은 "소신이 만일 부름에 응하여 들어간다면 군사들이 반드시 소신을 다를 것입니다.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간다면 그 죄는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소신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마는 주상(主上)의 뜻이 아닌 것 같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신의 몸이 비록 작사오나 관계되는 바는 심히 크오니 만일 간신의 손에 죽는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최영이 계속해서 장씨를 내치기를 청하자 우왕은 장씨를 이인임의 집으로 보내면서 죽이지는 말고 국대부인의 작위만 삭탈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장씨를 귀양보내고, 허완과 운방안을 죽인 후, 이 일에 관계된 사람들도 모두 죽이거나 매를 쳐 귀양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씨마저 죽였다. 이처럼 최영은 옳은 일에는 비록 국왕 앞이라 해도 끝까지 맞서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388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른 최영은 우왕의 밀령을 받아 부정부패(不淨腐敗)를 일삼던 염흥방(廉興邦)과 임견미(林堅味) 일당을 숙청했다. 이때 우왕이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오자, 최영은 "소신의 딸이 품성이 바르지 못하고 또한 본처의 소생이 아니니 마땅히 측실에 둘 것이지 지존의 배필로 삼지는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들이라 하시면 소신은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갈 것입니다."라며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우왕이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설득하자 마지못해 허락했다. ◆ 실패한 요동 정벌의 꿈 1388년에 접어들면서 고려 조정은 명나라와의 외교적 마찰로 큰 위기에 빠졌다. 원나라를 물리치고 새롭게 중원대륙의 주인으로 들어선 명나라는 이사경(李士經) 등을 보내 압록강 건너 철령(鐵嶺) 이북과 이동(伊東) 및 이서(伊西)는 본래 원나라에 속해 있었으니 그 지역 안의 군인은 한인(漢人), 여진(女眞), 타타르, 고려인을 막론하고 모두 명나라에 속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할지역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하기에 이르렀다. 최영은 철령 이북의 영토를 결코 명나라에 내줄 수가 없다는 입장을 갖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요동 정벌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때 명나라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를 세웠다고 통보했다. 최영은 이 사실을 우왕에게 알리고 나서 방문을 가지고 온 명나라 군사 21명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이사경 등 5명은 그대로 머물게 한 후 군사를 배치시켜 거처를 감시하게 했다. 요동 정벌에 앞서 우왕은 사냥을 한다며 영비(英妃) 및 최영과 함께 해주(海州)로 떠났다. 그러는 한편 우현보(禹玄寶)에게 도성을 지키게 하고 장정들을 징발하여 함께 데리고 갔으니, 명목은 사냥이었지만 실은 요동 정벌을 위한 군사훈련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니 경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그러자 이성계(李成桂)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고, 여름철에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며, 정벌을 떠난 틈을 타서 일본인가 기승을 부릴 것이고, 장마철을 맞아 활의 아교가 녹고 군사들이 질병에 걸릴 것이 염려되니 요동 정벌은 불가합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우왕은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물러서지 않고 "반드시 그 계책을 이루고자 하시면 지금은 일단 서경에 머물러 가을을 기다렸다가 그 후에 군사를 낸다면 들판에 곡식이 널려 있어 군량을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때가 아닌 대에 군사를 움직인다면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고 물이 불어서 더 이상 군사를 진격시킬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군사가 태만해지고 양식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큰 화만 초래할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우왕과 최영은 계속해서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4만여명의 정벌군을 출정시켰다. 최영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요동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우왕이 "선왕께서 해를 당한 것은 경이 곁에 없었기 때문인데 과인이 어찌 하루라도 경과 떨어져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최영을 서경에 남아있게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요동 정벌에 극구 반대했던 이성계 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조민수와 더불어 위화도(威化島)에 군대를 주둔시킨 이성계는 상소를 올려 군사를 돌릴 것을 청했다. 그러자 최영은 "두 도통사가 직접 와서 주상(主上)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 군사를 물리치자는 말을 나는 결코 하지 못하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우왕 역시 이를 듣지 않고 군사들을 독촉하여 계속 진격하게 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다시 사람을 보내 최영에게 속히 군사를 돌리기를 청했지만 최영은 전혀 듣지 않았다. 결국 조민수를 비롯한 장졸들의 호응을 얻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림으로써 최영과 우왕이 이루고자 한 요동 정벌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왕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온 최영은 군사를 모아 이성계의 군대를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결국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성계는 부하인 곽충보(郭忠輔)를 보내 최영을 체포하도록 하고 그를 고봉현으로 귀양보냈다. 이것은 고려 말기, 고려 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과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신흥군벌의 대립에서 구파 군벌이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고려는 이성계가 이끄는 신흥군벌에게 몰락하고 만다. 최영은 다시 합포로 옮겨졌다가 창왕(昌王)이 즉위한 뒤 개경으로 압송되었다.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과 이제(李制) 등이 상소를 올려 최영을 문책할 것을 청했다. "최영이 공민왕을 섬겨 흥왕사의 난리를 평정하고 승려들을 북쪽 변방으로 내몰았으며, 우왕을 섬길 때에는 일본인를 승천부에서 물리쳐 사직을 보존했고 여러 흉도들을 소탕하여 백성들을 구제했으니 그 공이 큽니다. 그허나 형세에 어두워 중론을 무시하고 요동 정벌을 결행하여 천자(天子)에게 죄를 얻어 나라가 멸망할 지경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뜻을 생각하여 그 죄를 다스림으로써 역대의 임금들께 고하고 천자의 화를 풀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여소서." 창왕이 이를 좇아 그해 12월 드디어 최영에 대한 처형을 명하니,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최영은 수많은 전쟁터를 누빈 용장답게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얼굴색과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죽을 때, "내 무덤에는 결코 풀이 돋지 않으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개풍군 덕물산에 있는 적분(赤墳)이 바로 그의 무덤으로, 조선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풀이 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뒷날 조선 왕조를 개국하고 태조(太祖)가 된 이성계는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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