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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수레의 이동을 위해 대동강 등에 남교(南橋), 사천(蛇川)다리를 비롯한 상설 다리를 만들었다. 평양에서 발견된 유적 가운데는 대동강에 설치된 길이 375m, 폭 9m가 되는 나무다리 유적도 있다. 안학궁성에서 남쪽으로 똑바른 길을 따라 대동강을 건너 동명왕릉 등이 있는 강 남쪽을 향해 놓인 다리에는 난간시설도 되어 있으며, 동시에 4대의 수레가 지나갈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한강에 상설 다리가 하나도 없던 것과 크게 비교된다. 고구려 왕궁인 장안성 내성의 모란봉 문터 유적에서는 넓이 28㎝의 수레가 다녔던 홈이 발견되기도 했다. 홈과 홈 사이의 거리가 145㎝로, 이를 지나간 수레의 크기는 폭만 145㎝〜200㎝ 정도였다.
고구려의 수레바퀴는 차츰 커지다가, 바퀴 테두리가 두꺼워지고, 또 쇠로 바퀴 테를 만드는 등 기술적인 발전도 계속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한 번에 1,080대의 수레가 이동한 기록도 있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경우는 수레를 담당하는 승부(乘府)라는 관청이 있었다. 아울러 한 번에 2,000대의 수레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수도인 금성(경주시)뿐 아니라 대구, 경산, 울산 등지에도 수레가 다녔던 흔적이 남아있는 도로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라가 수레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증거다.
백제의 경우도 수도인 사비성(부여)을 직선 도로로 설계하고, 일부 도로를 포장한 것으로 미루어 수레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부여 궁남지 유적, 능산리 유적에서도 수레바퀴편이 출토된 바 있다. 가야의 경우에도 수레바퀴 모양을 한 토기가 만들어졌을 만큼, 삼국시대 각국은 수레를 활발히 사용했었다.
수레를 이용한 덕분에, 고구려는 대릉하 중류에 위치한 조양(朝陽) 지역에 한번에 2만 명의 상인단이 방문하는 거대한 국제시장을 운영할 수도 있었다. 거대한 성과 사찰 등이 건설될 때에는 짐수레가 활발히 사용되었다. 수레는 귀족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유목민들은 수레 위에 이동식 집인 게르(Ger)를 올려놓고 이동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힘겹게 가마를 드는 가마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수레를 만드는 수레바퀴 신을 그린 그림이 있다. 삼국시대는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가 대우받았던 시대였다.
8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수레 활용
로마가 제국을 유지한 비결은 도로와 그에 따른 수레의 활용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의 힘 역시 수레를 이용한 경제적 힘과 기동력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 몽골의 침입, 일본인의 약탈 등으로 인한 국가 경제의 붕괴와 원, 명으로부터 수레의 동력원인 소와 말을 빼앗기면서 우리 역사에서 수레 사용은 크게 줄었다.
게다가 상업을 억제하고 도로 건설에 소극적이며, 경제적, 군사적 성장을 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던 조선에서 수레는 활발히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수레 사용이 활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전 시대에 수레 사용 또한 활발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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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수레의 이동을 위해 대동강 등에 남교(南橋), 사천(蛇川)다리를 비롯한 상설 다리를 만들었다. 평양에서 발견된 유적 가운데는 대동강에 설치된 길이 375m, 폭 9m가 되는 나무다리 유적도 있다. 안학궁성에서 남쪽으로 똑바른 길을 따라 대동강을 건너 동명왕릉 등이 있는 강 남쪽을 향해 놓인 다리에는 난간시설도 되어 있으며, 동시에 4대의 수레가 지나갈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한강에 상설 다리가 하나도 없던 것과 크게 비교된다. 고구려 왕궁인 장안성 내성의 모란봉 문터 유적에서는 넓이 28㎝의 수레가 다녔던 홈이 발견되기도 했다. 홈과 홈 사이의 거리가 145㎝로, 이를 지나간 수레의 크기는 폭만 145㎝〜200㎝ 정도였다.
고구려의 수레바퀴는 차츰 커지다가, 바퀴 테두리가 두꺼워지고, 또 쇠로 바퀴 테를 만드는 등 기술적인 발전도 계속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한 번에 1,080대의 수레가 이동한 기록도 있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경우는 수레를 담당하는 승부(乘府)라는 관청이 있었다. 아울러 한 번에 2,000대의 수레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수도인 금성(경주시)뿐 아니라 대구, 경산, 울산 등지에도 수레가 다녔던 흔적이 남아있는 도로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라가 수레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증거다.
백제의 경우도 수도인 사비성(부여)을 직선 도로로 설계하고, 일부 도로를 포장한 것으로 미루어 수레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부여 궁남지 유적, 능산리 유적에서도 수레바퀴편이 출토된 바 있다. 가야의 경우에도 수레바퀴 모양을 한 토기가 만들어졌을 만큼, 삼국시대 각국은 수레를 활발히 사용했었다.
수레를 이용한 덕분에, 고구려는 대릉하 중류에 위치한 조양(朝陽) 지역에 한번에 2만 명의 상인단이 방문하는 거대한 국제시장을 운영할 수도 있었다. 거대한 성과 사찰 등이 건설될 때에는 짐수레가 활발히 사용되었다. 수레는 귀족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유목민들은 수레 위에 이동식 집인 게르(Ger)를 올려놓고 이동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힘겹게 가마를 드는 가마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수레를 만드는 수레바퀴 신을 그린 그림이 있다. 삼국시대는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가 대우받았던 시대였다.
8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수레 활용
로마가 제국을 유지한 비결은 도로와 그에 따른 수레의 활용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의 힘 역시 수레를 이용한 경제적 힘과 기동력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 몽골의 침입, 일본인의 약탈 등으로 인한 국가 경제의 붕괴와 원, 명으로부터 수레의 동력원인 소와 말을 빼앗기면서 우리 역사에서 수레 사용은 크게 줄었다.
게다가 상업을 억제하고 도로 건설에 소극적이며, 경제적, 군사적 성장을 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던 조선에서 수레는 활발히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수레 사용이 활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전 시대에 수레 사용 또한 활발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