米ハーバード大教授「慰安婦は売春婦」とする論文を発表。査読済
https://special.sankei.com/a/politics/article/20210128/0001.html産経新聞 2021年1月28日
「慰安婦=性奴隷」説を否定。米ハーバード大J・マーク・ラムザイヤー教授が学術論文発表
ドイツのベルリンに設置された正義連の慰安婦像。
慰安婦問題をめぐっては、日本軍が戦前、朝鮮出身の女性を「性奴隷」にしていたというイメージが世界に広まっている。最近、ドイツでもこうした主張に基づく慰安婦像が新たに設置された。
こうしたなか、米ハーバード大のJ・マーク・ラムザイヤー教授が、慰安婦が当時政府規制下で認められていた国内売春婦の延長線上の存在であることを理論的実証的に示した学術論文が、3月刊行予定の「インターナショナル・レビュー・オブ・ロー・アンド・エコノミクス」誌65巻に掲載される(雑誌ホームページですでに閲覧可能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144818820301848 =こちらをクリック)。
米国の高名な法学者の大家でもあるラムザイヤー教授が、他の専門研究者の査読を経た学術論文で、「慰安婦=性奴隷」説に異を唱える議論を展開した意義は大きい。
■問題は朝鮮の募集業者にあった
教授は、いかなる対象であれ、人間は与えられた条件の下で、自らの利益を追求するという経済学の手法を用いて分析する。慰安婦もその例外ではない。
本論文では、他の研究者の業績や当時の日本・朝鮮の史料に基づき、朝鮮員慰安婦も日本人慰安婦も公認の売春婦であり、日本軍に拉致され、売春を強いられた「性奴隷」ではないこと、慰安婦をめぐる問題点は、朝鮮における募集業者にあったことが指摘されている。
以下、教授ご本人の了承を得て、論文要約を掲載する。
(解説・要約 青山学院大教授 福井義高)
「太平洋戦争における性サービスの契約」
(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要旨
日本軍が東アジアに進軍し退却した1930年代から40年代にかけて、軍は兵士が現地で性病に感染し、病気が蔓延することを恐れ、リスクをコントロールしようとした。そのため、軍は海外軍事拠点近くに民間業者が半公式の売春宿(semi-official brothel)を設置することを促し、売春婦(prostitute)の定期的な検診をはじめ、厳格な衛生管理を業者に求める代償として、兵士が他の売春宿を利用することを禁止した。売春婦は業者によって主に日本と朝鮮から集められ、軍に協力する売春宿は「慰安所」(comfort station)、売春婦は「慰安婦」(comfort woman)と呼ばれた。
慰安所は当時の日本や朝鮮にあった公認の売春宿の海外軍隊バージョン(overseas military analogue)であった。
当時の日本における売春ビジネスの実態は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か。売春は許可制であり、毎週の健診を義務付けられ、1924年には、5万100人の許可された売春婦が1万1500ある公認売春宿で働いていた。公認の売春婦の職を求める女性は多く、1920年から27年の間、東京では求職者の62パーセントしか職を得られないほどだった。その結果、確実なデータはないものの、非合法の売春婦が公認のそれと同じくらいいたとされる。
■女性と売春宿の思惑が一致していた契約
公認の売春婦は以下のような年季奉公(indenture)契約のもとで働いていた。前借金が本人または親に支払われ、全額返すか、契約期間満了のどちらか早い時点まで働く。1920年代半ばの前借金の水準は1000~1200円で無利子、最も一般的な契約期間は6年で、部屋と食事は売春宿が無料で提供する。売り上げの3分の2から4分の3は売春宿が取り、残った額の6割は前借金返済に、4割は本人に渡された。1925年の東京の売春婦の場合、返済相当分が393円、本人受取分が262円で合わせて年655円[ちなみに、ラムザイヤー教授の別の論文によると、1926年の女性工員の年平均賃金は312円である]。
売春宿が売春婦をだまして借金漬けにしたと主張する歴史研究者がいるけれども、少なくともそのようなことは大規模には行われなかった。実際、売春婦の平均労働期間は3年程度、つまり標準的な契約期間6年の半分で返済を終えている。
売春婦の年季奉公契約はゲーム理論でいう「信頼できるコミットメント」のロジックに従っている。若い女性は売春が危険で過酷な仕事であり、たとえ短期間従事しただけでも自らの評判を損なうものであることを理解しているので、十分な報酬が得られるという信頼できる保証を求める。一方、売春宿は売春婦が顧客を満足させるよう動機付ける必要がある。期間に上限を設けたうえで、最初に売春婦に大金を支払い、顧客を満足させればさせるほど返済が進み、早くやめ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年季奉公契約は、両者の思惑が一致したものとなる。
当時、日本では改革論者が売春禁止を主張していたけれども、募集業者によって女性が売春宿に拉致されているという批判は絶無に近かった。売春婦自身による、募集業者や売春宿に売春を強いられているという訴えもまれであった。改革論者の批判の対象は、娘を売春宿に売る親であった。
日本統治下にあった朝鮮でも日本と同様のシステムが導入されていた。朝鮮では相対的に非合法の売春婦が多く、そもそも慰安所ができる数十年前から、朝鮮員女性は海外で売春婦として働いていた。
■リスクの代償に高報酬を得ていた慰安婦
海外の戦地に慰安所を設けるに際し、日本政府は政治的リスクがあることを認識していた。日本国内の改革論者が数十年にわたり売春禁止を訴えているなか、純朴な若い女性たちが悪徳業者に騙(だま)されて働かされるという事態は、是が非でも避けねばならなかった。
内務省はすでに売春婦として働いている女性のみ慰安婦として雇うことを募集業者に求め、所轄警察には、女性が自らの意思で応募していることを本人に直接確認するとともに、契約満了後ただちに帰国するよう女性たちに伝えることを指示した。
ただし、朝鮮には日本とは異なる固有の問題があった。それは専門の労働者募集業者が大量に存在し、欺瞞的行為を用いていたことである。売春婦だけでなく工員も募集の対象となっていたけれども、当時の新聞で報道された募集における不正は、女性を騙して海外の売春宿に送り込むなど、性産業に関するものだった。
日本の本国政府や朝鮮総督府が女性に売春を強制したのではないし、日本軍が不正な募集業者に協力したのでもない。業者がもっぱら慰安婦募集を行っていたのですらない。問題は、数十年にわたり女性を売春宿で働くようたぶらかしてきた朝鮮内の募集業者にあった。
慰安婦は日本国内の公認の売春婦と同様の契約で慰安所に雇われたけれども、重要な違いがあった。遠く離れた戦地で働くゆえリスクが高まることを反映し、契約期間が短縮され2年が通例となり、もっと短い場合もあった。慰安婦は大きなリスクの代償として、他の仕事よりも多く稼いでいた朝鮮や日本の売春婦より、さらに高い報酬を得ていたのである。
一部の研究者は戦争末期に慰安婦募集がさらに進められたとするけれども、事実は逆である。戦局が悪化するにつれ、戦場に赴く男性に代わって女性が軍需工場に動員され、売春婦も売春宿から工場に移された。
女性たちは慰安所と1~2年の年季奉公契約を結び、多額の前借金を受け取って戦地に赴き、契約期間を勤め上げるか、期限前に前借金を全額返済して、故郷に帰っていったのである。
J・マーク・ラムザイヤー氏
米ハーバード大ロースクール教授。同校修了後、UCLA、シカゴ大教授等を経て、現職。幼少年期に日本在住。著作に『法と経済学-日本法の経済分析』、『経済学の使い方』、『産業政策論の誤解』など。
J・マーク・ラムザイヤー教授
미 하버드대교수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하는 논문을 발표.사독제
https://special.sankei.com/a/politics/article/20210128/0001.html산케이신문 2021년 1월 28일
「위안부=성 노예」설을 부정.미 하버드대J·마크·램더 이어 교수가 학술 논문 발표
독일의 베를린에 설치된 정의련의 위안부상.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군이 전쟁 전, 조선 출신의 여성을 「성 노예」로 하고 있었다고 하는 이미지가 세계에 퍼지고 있다.최근, 독일에서도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는 위안부상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런 가운데, 미 하버드대의 J·마크·램더 이어 교수가, 위안부가 당시 정부 규제하에서 인정되고 있던 국내 매춘부의 연장선상의 존재인 것을 이론적 실증적으로 나타낸 학술 논문이, 3 월간행 예정의 「인터내셔널·리뷰·오브·로·앤드·경제학」잡지 65권에 게재된다(잡지 홈 페이지에서 벌써 열람 가능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144818820301848 =이쪽을 클릭).
미국의 고명한 법학자 주인이기도 한 램더 이어 교수가, 다른 전문 연구자의 사독을 거친 학술 논문으로, 「위안부=성 노예」설에 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논의를 전개한 의의는 크다.
■문제는 조선의 모집 업자를 만났다
교수는, 어떠한 대상이든, 인간은 주어진 조건아래에서,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하는 경제학의 수법을 이용해 분석한다.위안부도 그 예외는 아니다.
본론문에서는, 다른 연구자의 실적이나 당시의 일본·조선의 사료에 근거해, 조선원 위안부도 일본인 위안부도 공인의 매춘부이며, 일본군에 납치되고 매춘을 강요당한 「성 노예」가 아닌 것, 위안부를 둘러싼 문제점은, 조선에 있어서의 모집 업자를 만났던 것이 지적되고 있다.
이하, 교수 본인의 승낙을 얻고, 논문 요약을 게재한다.
(해설·요약 아오야마학원대교수 후쿠이의고)
「태평양전쟁에 있어서의 성 서비스의 계약」
(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War) 요지
일본군이 동아시아에 진군 해 퇴각한 1930년대부터 40년대에 걸치고, 군은 병사가 현지에서 성병에 감염해, 병이 만연하는 것을 무서워해 리스크를 컨트롤 하려고 했다.그 때문에, 군은 해외 군사거점 근처에 민간 업자가 반공식의 매춘숙(semi-official brothel)를 설치하는 것을 재촉해, 매춘부(prostitute)의 정기적인 검진을 시작해 엄격한 위생 관리를 업자에게 요구하는 대상으로서 병사가 다른 매춘숙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매춘부는 업자에 의해서 주로 일본과 조선에서 모아져 군에 협력하는 매춘숙은 「위안소」(comfort station), 매춘부는 「위안부」(comfort woman)로 불렸다.
위안소는 당시의 일본이나 조선에 있던 공인의 매춘숙의 해외 군대 버젼(overseas military analogue)에서 만났다.
당시의 일본에 있어서의 매춘 비즈니스의 실태는 어떠한 것이었는가.매춘은 허가제이며, 매주의 건강 진단을 의무지워져 1924년에는, 5만 100명의 허가된 매춘부가 1만 1500있다 공인 매춘숙에서 일하고 있었다.공인의 매춘부의 일자리를 요구하는 여성은 대부분, 1920년부터 27년간, 도쿄에서는 구직자의 62퍼센트 밖에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을 정도였다.그 결과, 확실한 데이터는 없는 물건의, 비합법의 매춘부가 공인의 그것과 같은 정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여성과 매춘숙의 기대가 일치하고 있던 계약
공인의 매춘부는 이하와 같은 고용살이(indenture) 계약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전차금이 본인 또는 부모에게 지불되어 전액 돌려주는지, 계약기간 만료의 어느 쪽인지 빠른 시점까지 일한다.1920년대 중반의 전차금의 수준은1000~1200엔으로 무이자, 가장 일반적인 계약기간은 6년으로, 방과 식사는 매춘숙이 무료로 제공한다.매상의 3분의 2에서 4분의 3은 매춘숙이 잡아, 남은 액수의 6할은 전차금 반제에, 4할은 본인에게 건네졌다.1925년의 도쿄의 매춘부의 경우, 반제 상당분이 393엔, 본인 수취분이 262엔으로 합해 연 655엔[덧붙여서, 램더 이어 교수의 다른 논문에 의하면, 1926년의 여성 공원의 연평균 임금은 312엔이다].
매춘숙이 매춘부를 속여 빚 담그어로 했다고 주장하는 역사 연구자가 있지만, 적어도 그러한 일은 대규모로 하행 깨지지 않았다.실제, 매춘부의 평균 노동 기간은 3년 정도, 즉 표준적인 계약기간 6년의 반으로 반제를 끝내고 있다.
매춘부의 고용살이 계약은 게임 이론으로 말하는 「신뢰할 수 있는 코미트먼트(commitment)」의 논리에 따라서 있다.젊은 여성은 매춘이 위험하고 가혹한 일이며, 비록 단기간 종사한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평판을 해치는 것인 것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충분한 보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을 요구한다.한편, 매춘숙은 매춘부가 고객을 만족시키도록(듯이) 동기마련필요가 있다.기간에 상한을 마련한 데다가, 최초로 매춘부에 큰 돈을 지불해, 고객을 만족시키면 시킬수록 반제가 진행되어, 빨리 그만둘 수 있다고 하는 고용살이 계약은, 양자의 기대가 일치한 것이 된다.
당시 , 일본에서는 개혁 논자가 매춘 금지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모집 업자에 의해서 여성이 매춘숙에 납치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은 절무에 가까웠다.매춘부 자신에 의한, 모집 업자나 매춘숙에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하는 호소 휩쓸려에서 만났다.개혁 논자의 비판의 대상은, 딸(아가씨)를 매춘숙에 파는 부모였다.
일본 통치하에 있던 조선에서도 일본과 같은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었다.조선에서는 상대적으로 비합법의 매춘부가 많아, 원래 위안소가 생기는 수십 년 전부터, 조선원 여성은 해외에서 매춘부로서 일하고 있었다.
■리스크의 대상에 고보수를 얻고 있던 위안부
해외의 전지에 위안소를 마련함에 즈음해, 일본 정부는 정치적 리스크가 있다 일을 인식하고 있었다.일본내의 개혁록`_사람이 수십년에 걸쳐 매춘 금지를 호소하고 있는 가운데, 순박인 젊은 여성들이 악덕업자에게 편() 되어서 일하게된다고 하는 사태는, 시가 비에서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무성은 벌써 매춘부로서 일하고 있는 여성만 위안부로서 고용하는 것을 모집 업자에게 요구해 관할 경찰에게는, 여성이 스스로의 의사로 응모하고 있는 것을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계약 만료 후 즉시 귀국하도록(듯이) 여성들에게 전하는 것을 지시했다.
다만, 조선에는 일본과는 다른 고유의 문제가 있었다.그것은 전문의 노동자 모집 업자가 대량으로 존재해, 기만적 행위를 이용하고 있던 것이다.매춘부 뿐만이 아니라 공원도 모집의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당시의 신문에서 보도된 모집에 있어서의 부정은, 여성을 속여 해외의 매춘숙에 보내는 등, 성 산업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의 본국 정부나 조선 총독부가 여성에게 매춘을 강제한 것은 아니고, 일본군이 부정한 모집 업자에게 협력했으므로도 없다.업자가 전혀 위안부 모집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들 없다.문제는, 수십년에 걸쳐 여성을 매춘숙에서 일하도록(듯이) 속여 온 조선내의 모집 업자를 만났다.
위안부는 일본내의 공인의 매춘부와 같은 계약으로 위안소 로 고용해진?`들,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멀게 멀어진 전지에서 일하는 이유 리스크가 높아지는 것을 반영해, 계약기간이 단축되어 2년이 통례가 되어, 더 짧은 경우도 있었다.위안부는 큰 리스크의 대상으로서 다른 일보다 많이 벌고 있던 조선이나 일본의 매춘부보다, 한층 더 비싼 보수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의 연구자는 전쟁 말기에 위안부 모집이 한층 더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역이다.전국이 악화되는 것에 따라, 전장으로 향해 가는 남성에 대신해 여성이 군수 공장에 동원되어 매춘부도 매춘숙으로부터 공장에 옮겨졌다.
여성들은 위안소와1~2해의 고용살이 계약을 맺어, 고액의 전차금을 받아 전지로 향해 가, 계약기간을 무사히 끝내는지, 기한전에 전차금을 전액 반제하고, 고향에 돌아갔던 것이다.
J·마크·램더 이어씨
미 하버드대미국법학대학원 교수.동교 수료 후, UCLA, 시카고대교수등을 거치고, 현직.유소 연기에 일본 거주.저작에 「법과 경제학-일본법의 경제 분석」, 「경제학의 사용법」, 「산업 정책론의 오해」 등.
J·마크·램더 이어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