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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尾茂「私が朝鮮半島でしたこと」 草思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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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が朝鮮半島でしたこと1928年‐1946年

松尾 茂 (著)

昭和初期、著者は朝鮮で土木事業に携わる。水利、鉄道工事に取り組み農地開発に着手するが2年後に終戦。
日本人が朝鮮半島で行った事の当事者による貴重な証言。



松尾茂(1910〜、佐賀県伊万里生まれ)
 昭和初年、著者が見た朝鮮半島の山河はいまだ荒れ果てていた。この地を豊かな水田に改良して米の増収をはかるため、著者は朝鮮の人たちとともに各地を渡り歩いて水利工事に取り組む。貯水池を設け、水路やトンネルを掘り、道をつくり、橋を架ける。戦時色の強まるなか、鉄道工事にも手をそめる。そして、鴨緑江に橋をかけ、平安南道安州の大規模な農地開発に着手して二年後、突然の終戦。もし、あの水利事業と干拓工事が完成していたなら、現在の北朝鮮の食糧不足はかなり防ぐことができたのではなかったか・・日本が朝鮮半島でおこなった土木事業の実態を当事者が回顧した極めて貴重な記録。

 不況に見舞われていた1928年、18歳の時、著者は朝鮮半島の親戚に養子に出され朝鮮半島に渡り、中村組という小さな土木会社に就職。この地を豊かな水田に改良して米の増収をはかるため、著者は朝鮮の人たちとともに各地を渡り歩いて水利工事に取り組む。

 忠清南道公州での潅漑工事が初仕事で、その平野は雨が降ると一面水溜まりになり、稲が水没する被害を受けていた。そのため堤防を築き、雨水が堤防の外側を流れるようにする工事だった。排水口や水の取り入れ口を設けて、道路の整備もする。時には橋を架けなくてはならない。まだ当時は電気もなく、暗くなるとロウソクをつけて伝票を切る仕事をして宿舎で晩飯を食べてから、その日の数百人の作業員の伝票を整理して次の日の給料の支払いに間に合うよう準備をしなくてはならない。忙しいときは夜中の12時までかかったという。作業員は、20代の若者は少なく、主に30代から50代までの人が多かった。来ても仕事のあまりできない人には「あんたは、だめだよ」と言わねばならないこともあった。家庭的に恵まれず、かわいそうな年寄りを近所の人に頼まれて道具番や倉庫の番人に雇うこともあった。

 その後、発注に応じて朝鮮半島のあちこちで水利事業にあたる。最初は仕事の割り振りや会計を担当していたが、夜学で京城の工科学校を卒業すると、松尾氏は架橋工事の現場代人(現場責任者)を任された。金をかけずに、安全に、いろいろな職人さんとのチームワークを第一にして仕事を進めていった。

 それが人々の生活に利益をもたらすことは明らかだったため、工事が住民の反対に合うことはまず無く、橋にしても、貯水池にしても歓迎された。
 厳寒の地で、当時は珍しいコンクリート工法を行う苦労などが、結婚や子供の誕生という個人史と織りまぜて、職人らしい淡々とした語り口で描かれていく。

 工事に携わる人夫達は、養父を含めて日本人は2-3人しかいなく、あとはみな朝鮮の現地の人だった。彼らは貧しい人もいたが、白い米の弁当をもってきた人もいた。忠清南道や京畿道のような南の方は早くから日本が稲作の方法や水田の整備を指導したので、たくさん米の収穫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しかし、北の方は開発が遅れていた。平安南・北道や黄海道のとくに奥地の方では米が獲れず雑穀を食べていた。

 著者は朝鮮語を覚え、作業員が仕事をさぼっていると注意したりきちんとした仕事をしないと「それをちゃんとやらないと伝票をださないぞ」と言うようになる。しかし、あまり厳しいと感情的になって暴力を振るわれることもあるから厳しくしたり優しくしたりの体験を積んで逞しくなっていく。

 そして江原道の伊川水利組合の工事に取り組んだ時のこと。山には樹木が全く見られなかったという。どうやら朝鮮-人は木を切り倒して薪にして片っ端からオンドルに焚いてしまうらしい。当時も日本が指導して植林をしていたが、大きくなるのを待たずにオンドルに焚くものがなくて目を離すとすぐ伐採してしまうらしい。(植林と伐採のいたちごっこ。今の韓国や北朝鮮はどうなのだろうか)

 山に木がないものだから、雨が降ると一気に川が増水して水田も水没し道路も壊れてしまう。だから、水田のために水路をきちんと作り道路や橋梁を整備することはとても大切なことだと朝鮮-人に教えた。そして山間部には貯水池も作った。

 たまに朝鮮-人の中にも仕事をよくおぼえ態度の良い朝鮮-人もいて、だんだん朝鮮-人幹部も育ってきた。松尾氏は常に日本人の人夫と公平に扱い、朝鮮-人の人夫との間に摩擦がほとんど無く、優秀な若い朝鮮-人には、将来を考え自分の母校の京城昭和工科学校に4人入学させるなどしていたという。終戦になって帰国した著者は、彼らが今どうしているだろうか気になっている。

 鴨緑江に清城大橋を架けた。この橋は水豊ダムから10キロメートル下流にあった。この橋は現在も残っているだろうか。中国との国境の橋になる。

 最後の大仕事は平安北道の大干拓工事。しかし、戦争の進行とともに物資は不足し、結局干拓工事は全体の3割しか進まない時点で、日本は敗戦を迎えた。終戦になって、38度線の北の安州に残された日本人たちは、ここで建設工事を続けるように説得されるが、資金も資材もないこの国での将来の不安を感じて、日本への帰国を決意し深夜に逃亡する。10日間で300キロメートル、よくみんな歩いたものである。途中でロシア人や朝鮮-人に、金品を奪われたが、高齢の朝鮮-人は同情の目でみてくれ親切だった。迫害を加えたのは若者の朝鮮-人たちだった。そして命からがら1946年11月に博多に上陸した。


松尾 茂「三十余年かかって半島に金と手を加えてきた成果が、ようやく実を結びはじめていた。……これからいよいよ花開くというときに、終戦になってしまった。もしあのまま工事がつづいていたら、北朝鮮の食糧事情はずいぶん違うものになっていたのではなかろうか。これからというときに残念なことをした、そういう思いが私のなかにある」「彼らは飢えることなく、飯をちゃんと食べているのだろうか。鴨緑江のほうでも食べるものがないという話を聞くと、やはり心が波立つ」



토목공사는 일제 잔재

마츠오 시게루 「내가 한반도에서 한 것」소우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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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반도에서 한 것 1928년­1946년

마츠오 시게루 (저)

쇼와 초기, 저자는 조선에서 토목 사업에 종사한다.수리, 철도 공사에 임해 농지 개발에 착수하지만 2년 후에 종전.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실시한 일의 당사자에 의한 귀중한 증언.



마츠오 시게루(1910~, 사가현 이마리 태어나)
 쇼와 초년, 저자가 본 한반도의 산하는 아직도 몹시 황폐해지고 있었다.이 땅을 풍부한 논으로 개량해 미의 증수를 도모하기 위해, 저자는 조선의 사람들과 함께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수리 공사에 임한다.저수지를 마련해 수로나 터널을 파, 길을 만들어, 다리를 걸쳐 놓는다.전시색이 강해지는 가운데, 철도 공사에도 손을 붉힌다.그리고, 압록강에 다리를 걸어 평안 남도 안슈의 대규모 농지 개발에 착수해 2년 후, 갑작스런 종전.만약, 그 수리 사업과 간척 공사가 완성하고 있었다면, 현재의 북한의 식량부족은 꽤 막을 수 있지 않았었나··일본이 한반도에서 행한 토목 사업의 실태를 당사자가 회고 한 지극히 귀중한 기록.

 불황에 휩쓸리고 있던 1928년, 18세 때, 저자는 한반도의 친척에게 양자에게 나와 한반도에 건너, 나카무라야구미라고 하는 작은 토목 회사에 취직.이 땅을 풍부한 논으로 개량해 미의 증수를 도모하기 위해, 저자는 조선의 사람들과 함께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수리 공사에 임한다.

 충청남도 공주에서의 관개 공사가 첫일로, 그 평야는 비가 내리면 일면 웅덩이가 되어, 벼가 수몰 한 피해를 받고 있었다.그 때문에 제방을 쌓아 올려, 빗물?`제방의 외측을 흐르도록(듯이) 하는 공사였다.배수구나 물의 취수구를 마련하고, 도로의 정비도 한다.시간에는 다리를 걸쳐 놓지 않으면 안 된다.아직 당시는 전기도 없고, 어두워지면 로우소크를 붙이고 전표를 자르는 일을 해 숙소에서 저녁 밥을 먹고 나서, 그 날의 수백명의 작업원의 전표를 정리해 다음날의 급료의 지불에 시간이 맞도록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바쁠 때는 한밤중의 12때까지 걸렸다고 한다.작업원은, 20대의 젊은이는 적고, 주로 30대에서 50대까지의 사람이 많았다.와도 일한 별로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너는, 안돼」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었다.가정적을 타고 나지 않고, 불쌍한 노인을 근처의 사람에게 부탁받아 도구차례나 창고의 지키는 사람 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그 후, 발주에 따라 한반도의 여기저기에서 수리 사업에 해당한다.처음은 일의 할당이나 회계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야학으로 경성의 공과 학교를 졸업하면, 마츠오씨는 가교 공사의 현장 대리인(현장 책임자)을 맡았다.돈을 들이지 않고 , 안전하게, 여러가지 직공씨와의 팀워크를 제일로 하고 일을 진행시키고 갔다.

 그것이 사람들의 생활에 이익을 가져오는 것은 분명했던 모아 두어 공사가 주민의 반대로 맞는 것은 우선 없고, 다리로 해도/`A저수지로 해도 환영되었다.
 엄한의 땅에서, 당시는 드문 콘크리트 공법을 실시하는 고생등이, 결혼이나 아이의 탄생이라고 하는 개인사와 짜 섞고, 직공다운 담담한 실마리로 그려져 있어 구.

 공사에 종사하는 인부들은, 양부를 포함해 일본인은2-3사람 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의 현지의 사람이었다.그들은 궁핍한 사람도 있었지만, 흰 미의 도시락을 가져 온 사람도 있었다.충청남도나 경기도와 같은 남쪽은 일찍부터 일본이 벼농사의 방법이나 논의 정비를 지도했으므로, 많이 미의 수확을 할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북쪽은 개발이 뒤떨어지고 있었다.평안남·북도나 황해도의 특별히 두메 산골쪽에서는 미가 잡히지 않고 잡곡을 먹고 있었다.

 저자는 조선어를 기억해 작업원이 일을 게을리 하고 있으면 주의하거나 제대로 한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전표를 내지 않아」라고 하게 된다.그러나, 너무 어려우면 감정적으로 되어 폭행당하는 일도 있다로부터 어렵게 하거나 상냥하게 하거나의 체험을 쌓아 씩씩하게 되어 간다.

 그리고 강원도의 이카와 수리조합의 공사에 임했을 때의 일.산에는 수목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한다.아무래도 조선-사람은 나무를 베어 쓰러뜨려 신으로 해 닥치는 대로 온돌에 분?`「(이)라고 끝내는 것 같다.당시도 일본이 지도하고 식림을 하고 있었지만, 커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온돌에 피우는 것이 없어서 한 눈을 팔자마자 벌채해 버리는 것 같다.(식림과 벌채의 다람쥐 쳇바퀴 돌기.지금의 한국이나 북한은 어떻게인 것일까)

 산에 나무가 없는 것이니까, 비가 내리면 단번에 강이 증수해 논도 수몰 해 도로도 망가져 버린다.그러니까, 논을 위해서 수로를 제대로 만들어 도로나 교량을 정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면 조선-사람에게 가르쳤다.그리고 산간부에는 저수지도 만들었다.

 이따금 조선-사람중에도 일을 자주(잘) 기억력 태도가 좋은 조선-사람도 있고, 점점 조선-사람 간부도 자라 왔다.마츠오씨는 항상 일본인의 인부와 공평하게 취급해, 조선-사람의 인부와의 사이에 마찰이 거의 없고, 우수한 젊은 조선-사람에게는, 장래를 생각 자신의 모교의 경성 쇼와 공과 학교에 4명 입학시키는 등 있었다고 한다.종전이 되어 귀국한 저자는,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음이 생기고 있다.

 압록강에 세이시로 오오하시를 걸쳐 놓았다.이 다리는 수풍댐으로부터 10킬로미터 하류에 있었다.이 다리는 현재도 남아 있을까.중국과의 국경의 다리가 된다.

 마지막 큰일은 평안 북도의 대간척 공사.그러나, 전쟁의 진행과 함께 물자 (은)는 부족해, 결국 간척 공사는 전체의 3할 밖에 진행되지 않는 시점에서, 일본은 패전을 맞이했다.종전이 되고, 38 도선의 북쪽의 안슈에 남겨진 일본인들은, 여기서 건설공사를 계속하도록(듯이) 설득되지만, 자금도 자재도 없는 이 나라에서의 장래의 불안을 느끼고, 일본에의 귀국을 결의해 심야에 도망한다.10일간으로 300킬로미터, 자주(잘) 모두 걸은 것이다.도중에 러시아인이나 조선-사람에게, 금품을 빼앗겼지만, 고령의 조선-사람은 동정의 눈으로 봐 주어 친절했다.박해를 준 것은 젊은이의 조선-사람들이었다.그리고 간신히 1946년 11월에 하카타에 상륙했다.


마츠오 시게루 「30여 년 걸려 반도에 돈과 손봐 온 성과가, 간신히 결실을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지금부터 드디어 꽃 핀다고 할 때, 종전이 되어 버렸다.만약 아인 채 공사가 계속되고 있으면, 북한의 식량 사정은 대단히 다른 것이 되어 있던 것은 아닌가.지금부터라고 할 때 유감스러운 일을 한, 그러한 생각이 나 속에 있다」 「그들은 굶는 일 없이, 밥을 제대로 먹고 있는 것일까.압록강 쪽에서도 먹을 것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역시 마음이 물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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