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国歴史書のいうところによると、朝鮮半島南部の沿岸部と島嶼部一帯には、紀元前のかなり早期から倭人が住みついていようである。3世紀に現地調査した記録による『三国志』韓伝によれば、倭人は辰韓で産出する鉄を韓人やワイ人に混じって採掘していたという。また、朝鮮半島の倭人居住地帯に近いところでは、辰韓人の男女は倭人と同じ文身をしており、馬韓人にも文身をする者がいたという。
※『倭人の来た道』でも触れているが、これらの倭人については、九州から半島へ進出した倭人と、長江河口から九州を目指して海へ乗り出した中で、五島列島をすり抜けて朝鮮半島に漂着した人たちが混じっていたことを想定する。両者は半島に渡った時期もルートも違うが、文身をする習俗と長江流域民族の言語は共通する。同族と分かることから、比較的簡単に融合したものと思われる。
実は、朝鮮半島南部域は、縄文晩期から「倭人」の影響が及んでいたことが判明している。それを証明することになったのが、中国浙南の石棚墓群である。
●浙南の石棚墓群(浙江省温州地市瑞安)
1993年に浙江省温州地市30を超える石棚墓が発掘され、春秋時代の器物が多数出土した。石棚墓とは日本でいう支石墓のことである。これは、紀元前1700年~紀元前256年頃にかけて江南地方で営まれた墓制で、石棚墓の下には甕棺も埋葬されている。その形状や葬送様式などから、九州北部や朝鮮半島南部に展開する支石墓のルーツかとも考えられる。
紀元前1500年頃になると遼東半島から吉林省南部地域にも出現するが、これは、支石を箱形に並べた上に高くびえる形で天井石を載せたもので、テーブル式と呼ばれる。一方、朝鮮半島南部に支石墓が出現するのは紀元前500年頃からで、数個の支石の上に長方形に近い天井石を載せたもので、碁盤式と呼ばれている。韓国では、高くそびえるテーブル式を北方式、低い碁盤式を南方式と分類しており、両形式のおおよその境界は全羅北道付近とされる。
浙南の石棚墓は後者の南方式と呼ばれる碁盤式である。日本では、碁盤式と呼ばれる南方式の支石墓が縄文時代晩期末の九州北部に出現している。唐津市の葉山尻支石墓群が最古とされ、縄文時代晩期末(弥生時代前期)~弥生時代中期の支石墓と甕棺墓がある。(wikpedia)
中国側の資料にみるかぎり、遼東半島から吉林省南部地域の石棚墓は、箕子朝鮮の墓制と関係があると見ているようである。箕子は、紀元前1100年ごろ、殷の紂王の暴政を見限り、5000名の遺民を連れて朝鮮に移住して箕子朝鮮を興した。のちに、周の武王は箕子をそのまま朝鮮の地に封じた。紀元前2世紀に衛満によって箕子朝鮮は滅ぼされた。衛満は燕からの亡命者で箕子の末裔の箕準に仕えていたのだが、漢の恵帝のときに箕準を滅ぼして王となった。(衛氏朝鮮は紀元前190年代~紀元前108年)。この地域のものは高くそびえるテーブル状をしていることから、北方から陸伝いで伝来したものと思われる。
考えさせられるのは、九州北部と朝鮮半島南部に展開する碁盤式支石墓である。浙江省温州地市といえば、出身者には海外で活躍する華僑が多い土地柄である。しかも、『倭人伝』が倭人の文身のルーツではないかとした会稽・東冶(江南地域)の真ん中ほどにあたる。この碁盤式支石墓のルーツが浙江省温州地一帯にあるとすれば、長江流域や河口部の民族だけではなく、さらに南方の大陸沿岸部の海人たちもやってきていたことになる。それほどに多様な民族が、日本列島に早くからやってきていたということだろう。
これまで支石墓は朝鮮半島南の影響が強いとされてきたが、九州北部の碁盤式支石墓が朝鮮半島南部に展開し始める紀元前500年よりも遡るとすれば、支石墓の渡来も朝鮮半島より日本の方が早かったことになる。
そうなると、稲作や「半島倭人」の流れと同じようにこの支石墓もまた、温州人たちが九州を経由地として朝鮮半島にもたらした場合と、稀に五島列島をすり抜けて朝鮮半島へ到着した場合とが考えられる朝鮮半島が、箕子朝鮮、衛氏朝鮮、秦・漢などなど、支配勢力が目まぐるしく入れ替わる中で、半島南部の倭人は常にその棲息領域を保っていたようである。
ともあれ、『三国志』韓伝の 記録から、朝鮮半島に倭人の居住する「倭」と呼ばれた領域があったことから確認していこう。
「韓は帯方の南にあり。東西は海をもって限りをなし、南は倭と接す」。
「東西は海が韓の地の境界となり、南は倭と接している」というのだから、南は海が韓の境界になっているのではなく、倭の尽きたところが海になる。つまり、「南は倭と接す」という表現でもって、半島の南部に倭があったことを告げている。
世の中は広いもので、「南は倭と接すは対馬と接すという意味である」という意見もある
この点については現実問題で容易に説明がつく。 魏の調査官たちは半島から海を渡って日本列島の倭国に来ている。したがって、彼らが報告書を書いた時点では「半島の南も海をもって限りとなす」という明確な現実を知っていた。もちろん、1000余里も海を隔てた対馬をして「倭と接す」とは書かない。
どうしても朝鮮半島と対馬(倭)が接していると書きたければ、地理的に1000余里もある海峡を挟んで位置する関係なのだから、「南も海をもって限りとなし、その南は倭と接す」と書かれ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そうするのが地理学的調査記録としても妥当だといえる。
仮に「韓の南は対馬と接す」という意味で書いているとすれば、朝鮮半島南沿岸の東西約270kmに及ぶ領域が、小さな対馬と接すると書いたことになる。ところが現実は、馬韓の南は対馬の約3倍もある州胡(済洲島)とも接している。だが韓伝は「南は州胡と接す」とは書いておらず、「州胡という島が馬韓の西にある」と書いている。州胡だけではなく、西は山東半島とも接しているのだが、「西は山東と接す」とは書かず「東西は海をもって限りをなす」としている。
つまり、韓伝がその冒頭で「東西は海をもって限りとなす」と書いた視野には、山東半島や州胡は入ってはいない。同じく南も対馬までは視野を広げておらず、あくまでも半島内の地理に限定した視野で書いている。
海に面したところで版図が途切れるとの認識で書いたのは、東沃沮伝、ユウ婁伝の「大海に濱(ひん)す」と濊伝の「東は大海を窮(きわ)む」で、表現を変えつつ海に面していると書いている。
●辰韓伝の「倭に近い」という記録
馬韓伝に続く辰韓伝には、「辰韓は鉄を産出し、韓人、ワイ人、倭人はみな従にこれ取る。倭に近いところの男女は(倭人と同じように)文身する」とある。辰韓人は、そもそも楽浪郡から流入した漢人系によって構成されている。 言語・婚姻制・葬制・風習・体格的形質に至るまで違いがある。どれを取り上げても、倭人との民族的な違いは明白である。
それでいて、「倭に近いところの男女は、倭と同じように文身する」というのだから、距離的・空間的に近接しているエリアの、共通の習俗に触れていると判断しなければならない。すなわち辰韓伝のいう「倭に近い」は、辰韓の一部と倭人居住区の近接関係を述べていることが分かる。
(辰韓の鉄を入手する倭人がいたというが、列島から日帰りで取りに行くことはできないから、半島での活動基盤となる倭人の居住区があったことは明白である)。
また馬韓伝でも、「馬韓人にも時々文身する者がいる」という。これらもまさに、馬韓と辰韓の南部に倭人の水人文化が浸透していたことを物語る。こうしたことは、たまに倭人が海を超えてやってくるだけでは浸透しない。半島に倭人が定着して、互いに混住していたからこそ倭人の習俗が浸透したのである。しかも、現地の韓族に浸透するほどの影響力があったことを示唆している。半島南部にはやはり、九州から渡った倭人と、長江河口から九州をめざして朝鮮半島に漂着した倭人が混じっていたようである。『三国志』東夷伝をみても、半島南部の韓人が航海に長けていた形跡がないことからも、縄文から弥生時代にかけてみられる半島との往来は、こうした水人たちが担っていたものと私はみている。
※半島南部の韓人は基本的に海洋民ではなかったことと、黒潮の支流になる対馬海流の流れが速いこともあって、韓人が積極的に海船で出かけた様子はない。そうしたことから、九州からもたらされた物や文化が多かったろうことも無視できない。また、朝鮮半島からの物や文化のほとんどは、倭人と呼ばれた水人の手で運ばれたものと思われる。縄文から弥生時代にかけて日本列島にもたらされた稲作を含む大陸文化の多くは、これまで考えられてきた朝鮮半島経由ではなく、図で示した通り長江河口からの直接渡来だったと私は考えている。
●決定的な証言
さらに、弁辰伝が決定的な証言をしている。
「その(弁辰の)涜盧国は倭と界を接す」。
ご覧の通り「界(境界)を接す」といっている。これも、距離的・空間的に近接してることを証言している。これを、弁辰の涜盧国と対馬が海を隔てて境界を接していると解釈するようでは、文献研究以前の問題だろう。同じ東夷伝の中で、陸続きの位置関係説明はどう説明しているかをみてみよう。これは誰しも境界を接している意味だとわかる。
「夫余は長城の北にあり、玄菟を去る(離れる)こと1000里、南は高句麗と、東はユウ婁と 、西は鮮卑と接す」。
「高句麗は遼東の東1000里にあり、南は朝鮮、ワイ貊と、東は沃沮と、 北は夫余と接す」。
一方、領域の境が海に面している場合や、領域の境が大海に接している場合は、東夷伝もきちんと書いている。
「東沃沮は高句麗・蓋馬大山の東にあり、大海に濱して居る。北はユウ婁、夫余と、南はワイ貊と接す」。
「ユウ婁は夫餘東北1000余里にあり、大海に濱す。南は北沃沮と接し、その北の極まる所を知らず」。
「ワイは南を辰韓と、北は高句麗、沃沮と接し、東は大海を窮む」。
「大海に濱す」は大海の水ぎわで、「大海に接す」と同じ意味。「東は大海を窮む」も大海の水ぎわで、「大海に接す」と同じ意味になる。韓の場合は「南は海をもって限りとす」 「南は大海の窮み」「南は大海に濱す」と書いていないのだが、こうした比較の点からも、韓人領域の南の境界には海ではなく倭があったことが分かる。
●半島の倭の重大機能
朝鮮半島において、南を海をもって限りとする領域(南部の沿岸域と島嶼地帯)は、倭人の定着した倭だった。半島南沿岸部の韓人領域と広大な海との間には、島嶼部を含めたベルト状に展開した倭があったのである。
その半島の倭人拠点の存在を、倭国経営者の立場から考えてみよう。
半島の倭は、防衛・安全保証・通交・交易の拠点として、進出基盤として情報基地として、そして、知的労働力・肉体労働力誘致の実行窓口として、出入り管理と規制で大きな任務を果たしていた。とくに、武器・武人・武装集団などの渡海には神経を注ぐ必要がある。恐らくは、小規模ながら紀元前からの設置以来、その機能と役割りは、壱岐や博多湾岸とは違った意味で重要だったはずで、「列島倭国の進歩と繁栄は朝鮮半島の倭が握っていた」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
古くからの楽浪郡との交易の事実や倭奴国の外交で見た通り、倭国の外交と通交の対象は一貫して先進の中原王朝だったことが分かる。だが、通り道となる朝鮮半島との関係が円滑かつ友好的に運ばないと中国との通交も不可能になる。
通交とひと口にいっても、敵対する半島勢力がいては中国との通交は不可能になる。通り道をうまく使うには、半島勢力と友好的共存策を維持しなければならない。 半島の倭は、そのためにも多大な動きを必要とする。中原への通路となる半島南部から半島西側に至る諸国と倭国とが敵対的だった歴史はないが、まさにそうした歴史こそが倭国のとった戦略の一端を証明している。半島の倭の存在そのものが、倭国の政治・経済・軍事的戦略の一環だったのである。
時代は異なるが、通交と交流には半島に出先拠点が必要だったことを示す実例がある。
江戸時代、徳川幕府の最初の外交課題は朝鮮との国交回復にあった。また、地形的に作物を育てる環境に不向きで穀物の自給ができない対馬は、朝鮮との交易ができないと死活問題につながる。
3世紀に、対馬は自前の産物だけでは食料が充分ではないので、船を使って南北と交易していたというが、江戸時代になっても半島との交易なしでは存続が困難だった。
そんな、朝鮮貿易を命綱とする対馬藩のギリギリの交渉努力が実って、日朝国交回復にこぎつけた。だが、秀吉の侵略の記憶が残る朝鮮側は、日本の使者を釜山より奥には入れなかった。 そこで対馬藩は、半島における通交拠点として交渉窓口として、朝鮮王朝の許可を得て、釜山に長崎出島の25倍といわれる10万坪の倭館を経営した。 日本からの使者はこの倭館を使用し、倭館には通交と貿易のために大勢の対馬藩士が常駐していた。この釜山の倭館設置の事実は、半島との通行・交流・交易には、どうしても半島に拠点が必要だったことを物語る。
半島の倭は、倭国の進歩と繁栄の鍵を握っていた。防衛戦略・安全保証・通交・交易の拠点として進出基盤として、人・もの・情報・技術の出入り管理窓口として、さまざまな目的と機能を果たしてきた。これが根を張って半島南部に倭人文化を展開することになり、のちには、倭国と敵対的接触を続けた高句麗・広開土王碑文が証言する通り、半島進出の出先基地として機能す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
중국 역사서가 말하는데 밤과 한반도 남부의 연안부와 크고 작은 섬들부 일대에는, 기원 전의 꽤 조기부터 왜인이 자리잡고 사 이상하다.3 세기에 현지조사한 기록에 의한 「삼국지」한전에 의하면, 왜인은 진한에서 산출하는 철을 한인이나 와이인에 섞여 채굴하고 있었다고 한다.또, 한반도의 왜인 거주지대에 가까운 곳에서는, 진한인의 남녀는 왜인과 같은 문신을 하고 있어, 마한인에도 문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왜인이 온 길」에서도 접하고 있지만, 이러한 왜인에 대해서는, 큐슈로부터 반도에 진출한 왜인과 장강 하구로부터 큐슈를 목표로 하고 바다에 나선 가운데, 오도 열도를 빠져나가 한반도에 표착한 사람들이 섞이고 있던 것을 상정한다.양자는 반도에 건넜던 시기도 루트도 다르지만, 문신을 하는 습속과 장강 유역 민족의 언어는 공통된다.동족이라고 아는 것부터, 비교적 간단하게 융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은, 한반도 남부역은, 죠몽 만기부터 「왜인」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어 있다.그것을 증명하게 된 것이, 중국절남의 석붕묘군이다.
●절남의 석붕묘군(절강성 온주지시서안)
1993년에 절강성 온주지시 30을 넘는 석붕묘가 발굴되어 춘추시대의 기물이 다수 출토했다.석붕묘와는 일본에서 말하는 지석묘로 있다.이것은, 기원 전 1700년~기원 전 256년경에 걸쳐 강남 지방에서 영위된 묘제로, 석붕묘아래에는 도기로 된 독을 사용한 관도 매장되고 있다.그 형상이나 장송 님 식등에서, 큐슈 북부나 한반도 남부에 전개하는 지석묘의 루트일까하고도 생각할 수 있다.
기원 전 1500년경이 되면 요동 반도에서 지린성 남부 지역에도 출현하지만, 이것은, 지석을 상형에 늘어놓은 후에 고목 있는 형태로 천정돌을 실은 것으로, 테이블식으로 불린다.한편, 한반도 남부에 지석묘가 출현하는 것은 기원 전 500년경부터로, 몇 개의 지석 위에 장방형에 가까운 천정돌을 실은 것으로, 기판식으로 불리고 있다.한국에서는, 높게 우뚝 솟는 테이블식을 북방식, 낮은 기판식을 남방식과 분류하고 있어, 양형식의 대체로의 경계는 전라북도 부근으로 여겨진다.
중국측의 자료에 보는 한, 요동 반도에서 지린성 남부 지역의 석붕묘는, 미자 조선의 묘제와 관계가 있다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미자는, 기원 전 1100년즈음, 은나라의 주왕의 폭정을 단념해, 5000명의 유민을 동반해 조선에 이주해 미자 조선을 일으켰다.후에, 주의 무왕은 미자를 그대로 조선의 땅에 봉했다.기원 전 2 세기에 위만에 의해서 미자 조선은 멸해졌다.위만은 제비로부터의 망명자로 미자의 후예의 미 준을 시중들고 있었지만, 한의 혜제 때에 미 준을 멸해 왕이 되었다.(위씨 조선은 기원 전 190년대~기원 전 108년).이 지역의 것은 높게 우뚝 솟는 테이블장을 하고 있는 것부터, 북방에서 륙전 있어로 전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생각하게 되는 것은, 큐슈 북부와 한반도 남부에 전개하는 기판식 지석묘이다.절강성 온주지시라고 하면, 출신자에게는 해외에서 활약하는 화교가 많은 지방 풍습이다.게다가, 「왜인전」이 왜인의 문신의 루트는 아닐까 한 회 계·동야(강남 지역)의 한가운데정도로 맞는다.이 기판식 지석묘의 루트가 절강성 온주지 일대에 있다고 하면, 장강 유역이나 카와구치부의 민족 만이 아니고, 한층 더 남방의 대륙 연안부의 어부들도 오고 있던 것이 된다.그만큼에 다양한 민족이, 일본 열도에 일찍부터 오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지석묘는 한반도남의 영향이 강하다고 여겨져 왔지만, 큐슈 북부의 기판식 지석묘가 한반도 남부에 전개하기 시작하는 기원 전 500년보다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면, 지석묘의 도래도 한반도보다 일본 분이 빨랐던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벼농사나 「반도 왜인」의 흐름과 같이 이 지석묘도 또, 온주 사람들이 큐슈를 경유지로서 한반도에 가져왔을 경우와 드물게 오도 열도를 빠져나가고 한반도에 도착했을 경우가 생각할 수 있는 한반도가, 미자 조선, 위씨 조선, 진·한등 등, 지배 세력이 어지럽게 바뀌는 가운데, 반도 남부의 왜인은 항상 그 서식 영역을 유지해 있던 것 듯한다.
여하튼, 「삼국지」한전의 기록으로부터, 한반도에 왜인의 거주하는 「야마토」라고 불린 영역이 있던 것으로부터 확인해 나가자.
「한국은 대 방의 남쪽에 있어.동서는 바다를 가지고 한계를 이루어, 남쪽은 야마토와 접」.
「동서는 바다가 한국의 땅의 경계가 되어, 남쪽은 야마토와 접하고 있다」라고 하니까, 남쪽은 바다가 한국의 경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야마토가 다한 곳(점)이 바다가 된다.즉, 「남쪽은 야마토와 접」(이)라고 하는 표현에서도는, 반도의 남부에 야마토가 있던 것을 고하고 있다.
세상은 넓은 것으로, 「남쪽은 야마토와 접는 대마도와 접라고 하는 의미이다」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현실 문제로 용이하게 설명이 대한다.위의 조사관들은 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의 야마토국에 와있다.따라서, 그들이 보고서를 쓴 시점에서는 「반도의 남쪽도 바다를 가지고 한계가 이룬다」라고 하는 명확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물론, 1000 요리나 바다를 멀리한 대마도를 해 「야마토와 접」(이)라고는 쓰지 않는다.
아무래도 한반도와 대마도(야마토)가 접하고 있다고 쓰고 싶다면, 지리적으로 1000 요리도 있는 해협을 사이에 두어 위치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남쪽도 바다를 가지고 한계가 이루어, 그 남쪽은 야마토와 접」(이)라고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그렇게 하는 것이 지리 학문적 조사 기록이라고 해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한국의 남쪽은 대마도와 접」(이)라고 하는 의미로 쓰고 있다고 하면, 한반도남 연안의 동서 약 270 km에 이르는 영역이, 작은 대마도와 접한다고 쓴 것이 된다.그런데 현실은, 마한의 남쪽은 대마도의 약 3배나 있는 주 호(제스노시마)와도 접하고 있다.하지만 한전은 「남쪽은 주 호와 접」(이)라고는 쓰지 않고,「주 호라고 하는 섬이 마한의 서쪽에 있다」라고 쓰고 있다.주 호 만이 아니고, 서쪽은 산동 반도와도 접하고 있지만, 「서쪽은 산토우와 접」(이)라고는 쓰지 않고 「동서는 바다를 가지고 한계를 이룬다」라고 하고 있다.
즉, 한전이 그 첫머리에서 「동서는 바다를 가지고 한계가 이룬다」라고 쓴 시야에는, 산동 반도나 주 호는 들어가지는 않았다.같은 남쪽도 대마도까지는 시야를 넓히지 않고, 어디까지나 반도내의 지리로 한정한 시야에서 쓰고 있다.
바다에 접했더니 판도가 중단된다라는 인식으로 쓴 것은, 동옥저전, 유우루전의 「대해에 빈(히응) 」(이)라고?전의 「동쪽은 대해를 궁(가장자리) 」로, 표현을 바꾸면서 바다에 접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진한전의 「야마토에 가깝다」라고 하는 기록
마한전에 계속 되는 진한전에는, 「진한은 철을 낳아, 한인, 와이인, 왜인은 모두종에 이것 취한다.야마토에 가까운 곳의 남녀는(왜인과 같이) 문신 한다」라고 있다.진한인은, 원래 락랑군으로부터 유입한 한인계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언어·혼인제·장제·풍습·체격 마토가타질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있다.어떤 것을 채택해도, 왜인과의 민족적인 차이는 명백하다.
그래서 있고, 「야마토에 가까운 곳의 남녀는, 야마토와 같이 문신 한다」라고 하니까, 거리적·공간적으로 근접하고 있는 에리어의, 공통의 습속에 접하고 있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즉 진한전이 말하는 「야마토에 가깝다」는, 진한의 일부와 왜인 이스미구의 근접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안다.
(진한의 철을 입수하는 왜인이 있었다고 하지만, 열도로부터 당일치기로 취하러 갈 수 없기 때문에, 반도에서의 활동 기반이 되는 왜인의 이스미구가 있던 것은 명백하다).
또 마한전에서도, 「마한인에도 가끔 문신 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한다.이것들도 확실히, 마한과 진한의 남부에 왜인의 물인문화가 침투하고 있던 것을 이야기한다.이러한 일은, 이따금 왜인이 바다를 넘어 오는 것 만으로는 침투하지 않는다.반도에 왜인이 정착하고, 서로 혼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인의 습속이 침투했던 것이다.게다가, 현지의 한족에 침투할 정도의 영향력이 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반도 남부에는 역시, 큐슈로부터 건넌 왜인과 장강 하구로부터 큐슈를 목표로 해 한반도에 표착한 왜인이 섞여 있던 것 듯한다.「삼국지」동부지역 무사전을 봐도, 반도 남부의 한인이 항해에 뛰어나고 있던 형적이 없는 것으로부터도, 죠몽으로부터 야요이 시대에 걸쳐 볼 수 있는 반도와의 왕래는, 이러한 물사람들이 담당하고 있던 것과 나는 보고 있다.
※반도 남부의 한인은 기본적으로 해양민은 아니었던 것과 쿠로시오의 지류가 되는 쓰시마해류의 흐름이 빠른 일도 있고, 한인이 적극적으로 해선으로 나간 님 아이는 없다.그러한 일로부터, 큐슈로부터도 늘어뜨려진 것이나 문화가 많았을 것이다 일도 무시할 수 없다.또, 한반도로부터의 물건이나 문화의 대부분은, 왜인으로 불린 수인의 손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생각된다.죠몽으로부터 야요이 시대에 걸쳐 일본 열도에 가져와진 벼농사를 포함한 대륙 문화의 상당수는, 지금까지 생각할 수 있어 온 한반도 경유가 아니고, 그림으로 나타내 보인 대로 장강 하구로부터의 직접 도래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결정적인 증언
게다가 변진전이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그(변진의) 독노국은 야마토와 계를 접」.
보시는 바와 같이 「계(경계)를 접」(이)라고 하고 있다.이것도, 거리적·공간적으로 근접하고 있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이것을, 변진의 독노국과 대마도가 바다를 멀리하고 경계를 접하고 있다고 해석해서는 문헌 연구 이전의 문제일 것이다.같은 동부지역 무사전 중(안)에서, 육지가 연속되어 있음의 위치 관계 설명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를 보자.이것은 누구든지 경계를 접하고 있는 의미라고 안다.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어, 현토를 떠나는(떨어진다) 일 1000리,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유우루와 , 서쪽은 선비와 접」.
「고구려는 랴오둥의 동쪽 1000리에 있어, 남쪽은 조선, 와이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접」.
한편, 영역의 경계가 바다에 접하고 있는 경우나, 영역의 경계가 대해에 접하고 있는 경우는, 동부지역 무사전도 제대로 쓰고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개마 오오야마의 동쪽에 있어, 대해에 빈 해 있다.북쪽은 유우루, 부여와 남쪽은 와이맥과 접」.
「유우루는 부여토호쿠 1000 요리에 있어, 대해에 빈.남쪽은 북옥저와 접해, 그 북쪽의 극히 만소를 알지 못하고」.
「와이는 남쪽을 진한과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접해, 동쪽은 대해를 궁」.
「대해에 빈」는 대해의 물원으로, 「대해에 접」(와)과 같은 의미.「동쪽은 대해를 궁」도 대해의 물원으로, 「대해에 접」(와)과 같은 의미가 된다.한국의 경우는 「남쪽은 바다를 가지고 한계」 「남쪽은 대해의 극도」 「남쪽은 대해에 빈」(이)라고 쓰지 않지만, 이러한 비교의 점으로부터도, 한인 영역의 남쪽의 경계에는 바다는 아니고 야마토가 있던 것을 안다.
한반도에 있고, 남쪽을 바다를 가지고 한계로 하는 영역(남부의 연안 지역과 크고 작은 섬들 지대)은, 왜인의 정착한 야마토였다.반도남 연안부의 한인 영역과 광대한 바다와의 사이에는, 크고 작은 섬들부를 포함한 벨트장에 전개한 야마토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반도의 왜인 거점의 존재를, 야마토국 경영자의 입장으로부터 생각해 보자.
반도의 야마토는, 방위·안전 보증·통교·교역의 거점으로서 진출 기반으로서 정보 기지로서 그리고, 지적 노동력·육체 노동력 유치의 실행 창구로서 출입 관리와 규제로 큰 임무를 이루어 있었다.특히, 무기·무인·무장 집단등의 항해에는 신경을 따를 필요가 있다.아마는, 소규모의 무늬 기원 전부터의 설치 이래, 그 기능과 역할은, 이키나 하카타만기슭과는 다른 의미로 중요했을 것으로, 「열도야마토국의 진보와 번영은 한반도의 야마토가 잡고 있었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옛부터의 락랑군과의 교역의 사실이나 야마토 나노쿠니의 외교로 본 대로, 야마토국의 외교와 통교의 대상은 일관해서 선진의 중원 왕조였던 것이 밝혀진다.하지만, 가는 길이 되는 한반도와의 관계가 원활하고 우호적으로 옮기지 않으면 중국과의 통교도 불가능하게 된다.
통교와 한 입에 말해도, 적대하는 반도 세력이 있고는 중국과의 통교는 불가능하게 된다.가는 길을 잘 사용하려면 , 반도 세력과 우호적 공존책을 유지해야 한다. 반도의 야마토는, 그 때문에(위해)도 다대한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중원에의 통로가 되는 반도 남부에서 반도 서쪽에 이르는 제국과 야마토국이 적대적이었던 역사는 없지만, 확실히 그러한 역사가 야마토나라가 잡은 전략의 일단을 증명하고 있다.반도의 야마토의 존재 그 자체가, 야마토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전략의 일환이었으므로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통교와 교류에는 반도에 행선지 거점이 필요했던 일을 나타내는 실례가 있다.
에도시대, 토쿠가와막부의 최초의 외교 과제는 조선과의 국교 회복에 있었다.또, 지형적으로 작물을 기르는 환경에 적합하지 않고 곡물의 자급을 할 수 없는 대마도는, 조선과의 교역을 할 수 없으면 사활 문제로 연결된다.
3 세기에, 대마도는 자기 부담의 산물만으로는 식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배를 사용해 남북과 교역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에도시대가 되어도 반도와의 교역없이는 존속이 곤란했다.
그런, 조선 무역을 구명삭으로 하는 쓰시마번의 빠듯한 교섭 노력이 여물고, 일·북 국교 회복에 도달했다.하지만, 히데요시의 침략의 기억이 남는 조선측은, 일본의 사자를 부산에서(보다) 안쪽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거기서 쓰시마번은, 반도에 있어서의 통교거점으로서 교섭 창구로서 조선 왕조의 허가를 얻고, 부산에 나가사키 데지마의 25배라고 하는 10만평의 야마토관을 경영했다.일본으로부터의 사자는 이 야마토관을 사용해, 야마토관에는 통교와 무역을 위해서 많은 쓰시마번사가 상주하고 있었다.이 부산의 야마토관설치의 사실은, 반도와의 통행·교류·교역에는, 아무래도 반도에 거점이 필요했던 것을 이야기한다.
반도의 야마토는, 야마토국의 진보와 번영의 열쇠를 잡고 있었다.방위 전략·안전 보증·통교·교역의 거점으로서 진출 기반으로서 사람· 것·정보·기술의 출입 관리 창구로서 다양한 목적과 기능을 이루어 왔다.이것이 뿌리를 내려 반도 남부에 왜인 문화를 전개하게 되어, 후에는, 야마토국과 적대적 접촉을 계속한 고구려·광개토왕비문이 증언하는 대로, 반도 진출의 행선지 기지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