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の新聞の歴史〜【第5回 庶民派新聞の登場】
明治4〜5年頃までの新聞は難しい漢文調の文章で書かれ、旧士族を中心としたインテリ向けに政治を論じたもので、ふつうの庶民には遠い存在でした。彼らは江戸時代を通じて政治に口出しすることを厳しく禁じられてきたので、お上のすることにあれこれ言うことには慣れておらず、またその多くは漢字だらけの新聞を読む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す。
そこで、かつてのかわら版のように、市井の出来事を誰にでも読めるひらがなで書き、挿絵を入れた庶民向けの新聞が作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このような新聞は“小新聞(こしんぶん)”と呼ばれ、政治を論じる“大新聞”と区別されました。
“大新聞”と“小新聞”の違いとは?
大新聞と小新聞は、部数の多い少ないではなく紙面の大きさで区別されていました。サイズは若干異なりますが、現代の新聞のサイズで標準あるブランケット版と、夕刊紙などで使われるタブロイド版のようなサイズの違いでしょうか。また、庶民向けの新聞らしく値段も安かったようです。下記にそれぞれの特徴を表¥で比較してみます。
時代の政論をリードした大新聞と違い、小新聞はいわゆる勧善懲悪主義的に書かれた三面記事や「つづきもの」と呼ばれた小説で庶民を惹きつけ、“読み物”として人気を得て成長していきました。
“読み売り”と“ひらがな”で庶民にヒット
明治7年11月に創刊した『読売新聞』の第一号には、「この新聞紙は、女童(おんなこども)のおしえにとて、為になる事柄を、誰にでもわかるように書いてだすつもりでござります」と書かれています。ひらがなを多くし、漢字にはふりがなを打つことで誰にでも読める新聞をめざしました。新聞の名前となった“読売”は、まさにかわら版の時代に行われた“読み売り”にちなんだものです。
実際に、小新聞はかわら版と同じように読み売り(呼び売り)をしました。売り子は新聞の名前を朱書きした竹編み籠を背負い、棒の先につけた鈴をチリンチリン鳴らしながら得意先に新聞を届けて歩き、またその途中に道行く人たちにも売って歩いたようです。
しかし、売り子のなかには、新聞に載った事件の当時者の家近所で読み売りをして迷惑をかけたり、商売の邪魔をする内容の新聞を持ち込んで「この新聞を売られたくなかったら金を払え」などと恐喝まがいのことをする者が現れたので、政府によって新聞の読み売りは禁止されてしまいました。
当時の代表¥的な小新聞は、『読売新聞』『平仮名絵入新聞』『仮名読新聞』の3紙で、「『読売』は真面目にして親切、『絵入』は派手にして愛嬌あり。而して『仮名読』は洒落にして軽妙」と評されています。記者もまた、戯作者や俳人などのいわゆる文人が多かったせいか、小新聞の編集局には商人や芸人、花柳界の人たちがにぎやかに出入りし、活気あふれる庶民のサロンになっていたようです。記者たちも客の相手をしながら原稿を書いたり、一緒に酒を飲んだりしてその雰囲気を楽しんでい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新聞はどんな風に読まれていたのか
明治5年、各種の新聞をそろえて無料で読ませる“新聞縦覧所(じゅうらんしょ)”が横浜に開設されました。これ以降、新聞縦覧所は全国各地に作られて、人々は集まって新聞を読み、時にはその内容について語り合うようになりました。また、“新聞茶屋”という茶代と新聞見料をとる、現代のマンガ喫茶のような商売もあったようです。明治9年には『仮名読新聞』を作った仮名垣魯文が『諸新聞縦覧茶店 窟螻蟻(くつろぎ)』を開いています。諸新聞が『窟螻蟻』のオープンを取り上げたことにより、新聞縦覧所は“新時代の文化的休憩所”としてますます繁盛しました。
しかし、明治30年代に入ると新聞縦覧所は怪しげな女性が客を引く場所へと変貌してしまい、代わりにミルクホールで新聞を読むことが流行しました。ミルクホールは温めた牛乳を飲ませる今の喫茶店のルーツのような場所でした。牛乳を頼めば新聞を無料で読めたので、牛乳よりも新聞を目当てに通う人も多かったようです。
明治8年、東京都王子に『抄紙会社(現・王子製紙株式会社)』が開業すると、ようやく日本国内での洋紙の製造が始まりました。それまで輸入に頼っていた新聞用紙が国内で供給できるようになり、やっと新聞印刷のインフラが整いました。しかし、新聞が大きく発展していこうとしていた矢先に、政府は『新聞紙条例』および「讒謗律』を公布し、新聞の自由を弾圧しはじめたのです。これは、その後何十¥年もの間続いた新聞の苦難の歴史の幕開けとなりました。
【参考文献】
興津要『新聞雑誌発生事情:角川選書、1983年
春原昭彦『四訂版 日本新聞通史』新泉社、2003年
秋山勇造『明治のジャーナリズム精神』五月書房、2002年
近盛晴嘉『人物 日本新聞史』新人物往来社 1970年
森永卓郎・監修『明治・大正・昭和・平成 物価の文化史事典』展望社、2008年
■新たに聞く〜日本の新聞の歴史〜
東京産業新聞社創立記念連載『新たに聞く〜日本の新聞の歴史〜』【序章】
新たに聞く〜日本の新聞の歴史〜【第1回 かわら版と飛脚】
新たに聞く〜日本の新聞の歴史〜【第2回 新聞あらわる!】
新たに聞く〜日本の新聞の歴史〜【第3回 創刊するもすぐ発禁】
新たに聞く〜日本の新聞の歴史〜【第4回 明治時代のベンチャー】
일본의 신문의 역사~【제5회 서민파 신문의 등장】
메이지 4~5년경까지의 신문은 어려운 한문조의 문장으로 쓰여져 구사족을 중심으로 한 인텔리 전용으로 정치를 논한 것으로, 보통의 서민에게는 먼 존재였습니다.그들은 에도시대를 통해서 정치에 말참견하는 것을 어렵게 금지되었기 때문에, 여주인이 하는 것에 이것저것 말하는 것에는 익숙해지지 않고, 또 그 많게는 한자 투성이의 신문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한 때의 강가의 모래밭판과 같이, 이치이의 사건을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히라가나로 써, 삽화를 넣은 서민 전용의 신문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이러한 신문은“소신문(호심 만큼)”로 불리고 정치를 논하는“오신문”과 구별되었습니다.
“오신문”이라고“소신문”의 차이란?
오신문과 소신문은, 부수가 많은 적지 않게 지면의 크기로 구별되고 있었습니다.사이즈는 약간 다릅니다만, 현대의 신문의 사이즈로 표준 있는 블랭킷판과 석간지등에서 사용되는 타블로이드판과 같은 사이즈의 차이입니까.또, 서민 전용의 신문인것 같게 가격도 쌌던 것 같습니다.아래와 같이에 각각의 특징을 겉(표)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시대의 정론을 리드한 오신문과 달라, 소신문은 이른바 권선 징악 주의적으로 쓰여진 삼면 기사나 「기모노」라고 불린 소설로 서민을 끌어당겨“읽을 거리”로서 인기를 얻어 성장해서 갔습니다.
“읽어 매도”라고“히라가나”로 서민에게 히트
메이지 7년 11월에 창간 한 「요미우리 신문」의 제일호에는, 「이 신문지는, 녀동(여자 어린이)의 가르침에라고, 도움이 되는 일을, 누구라도 알도록(듯이) 써 낼 생각입니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히라가나를 많이 해, 한자에는 일본식 가나읽기를 치는 것으로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신문을 목표로 했습니다.신문의 이름이 된“요미우리”는, 확실히 강가의 모래밭판의 시대에 행해진“읽어 매도”에 연관된 것입니다.
실제로, 소신문은 강가의 모래밭판과 같이 읽어 매도(불러 매도)를 했습니다.판매원은 신문의 이름을 붉은 글씨나무 한 대나무 짜 롱을 짊어져, 봉의 끝에 붙인 령을 치린치린 울리면서 거래처에 신문을 보내 걸어, 또 그 도중에 도교구사람들에게도 팔아 걸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판매원 속에는, 신문에 실린 사건의 당시 자의 집부근에서 읽어 매도를 해 폐를 끼치거나 장사의 방해를 하는 내용의 신문을 반입해 「이 신문을 팔리고 싶지 않았으면 돈을 지불할 수 있다」 등과 공갈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므로, 정부에 의해서 신문의 읽기 매도는 금지되어 버렸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소신문은, 「요미우리 신문」 「히라가나 그림 신문」 「가명독신문」의 3지로, 「 「요미우리」는 성실하게 해 친절, 「그림 삽입」은 화려하게 해 애교 있어.이 해 「가명독」은 쇄락으로 해 경묘」라고 평 되고 있습니다.기자도 또, 희극 작가나 하이쿠 짓는 사람등의 이른바 문인이 많았던 탓일까, 소신문의 편집국에는 상인이나 연예인, 화류계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출입해, 활기 넘치는 서민의 살롱이 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기자들도 손님의 상대를 하면서 원고를 쓰거나 함께 술을 마시거나 해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것은 아닐까요.
신문은 어떤 바람으로 읽혀지고 있었는가
메이지 5년, 각종의 신문을 갖추고 무료로 읽게 하는“신문 열람소(총등응실마리)”가 요코하마에 개설되었습니다.이 이후, 신문 열람소는 전국 각지에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모이고 신문을 읽어, 가끔 그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또, “신문 찻집”이라고 하는 찻값과 신문 관람료를 받는, 현대의 만화 끽다와 같은 장사도 있던 것 같습니다.메이지 9년에는 「가명독신문」을 만든 가나가키 로분이 「제신문 열람 찻집굴누의(안락함)」를 열고 있습니다.제신문이 「굴누의」의 오픈을 채택한 것에 의해, 신문 열람소는“ 신시대의 문화적 휴식소”로 해 더욱 더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30년대에 들어온다고 신문 열람소는 수상한 여성이 손님을 끌어들인 장소로 변모해 버려, 대신에 밀크홀에서 신문을 읽는 것이 유행했습니다.밀크홀은 따뜻하게 한 우유를 먹이는 지금의 찻집의 루트와 같은 장소였습니다.우유를 부탁하면 신문을 무료로 읽을 수 있었으므로, 우유보다 신문을 목적에 다니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메이지 8년, 도쿄도 왕자에게 「초지 회사(현·오지제지 주식회사)」가 개업하면, 간신히 일본내에서의 양지의 제조가 시작되었습니다.그것까지 수입에 의지하고 있던 신문 용지가 국내에서 공급할 수 있게 되어, 겨우 신문 인쇄의 인프라가 갖추어졌습니다.그러나, 신문이 크게 발전해 나가려 하고 있던 정면에, 정부는 「신문지조례」 및 「메이지8년 제정의 언론취재법」을 공포해, 신문의 자유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이것은, 그 후 몇십년의 사이 계속 된 신문의 고난의 역사의 개막이 되었습니다.
【참고 문헌】
오키쓰 카나메 「신문 잡지 발생 사정:카도가와문고 추천서, 1983년
스노하라 아키히코 「4정판 일본신문통사」신센사, 2003년
아키야마 이사무조 「메이지의 저널리즘 정신」5월 서점, 2002년
근성청가 「인물 일본신문사」신인물 왕래사 1970년
모리나가 타카시낭·감수 「메이지·타이쇼·쇼와·헤세이 물가의 문화사 사전」전망사, 2008년
■새롭게 (듣)묻는~일본의 신문의 역사~
토쿄 산업 신문사 창립기념 연재 「새롭게 (듣)묻는~일본의 신문의 역사~」【서장】
새롭게 (듣)묻는~일본의 신문의 역사~【제1회나 짚판과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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