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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차별어가 아닌

문 재인전대통령은 「조선 민족의 통일」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어

북한과의 융화를 진행시켰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윤 주석열 신대통령은 「북쪽을 달래는 시대는 끝났다」라고 발언해, 전 정권의 민족 융화 정책과는 구별을 분명히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람들이나 북한의 사람들을 총칭할 때에는, 「한국인」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고 하는 말투는 차별적이어서 사용하지 않고 받고 싶으면

나는 있다 잡지의 편집부로부터 원고 교정을 넣을 수 있었던 것이 있어요.

「한국인」이라고 하고, 뭐라고 말하는지 그 편집부에게 물었는데, 「한국인」이라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


1948년 이전에 한국등이라고 하는 나라는 없었는데 ,

어째서, 그것을 「한국인」이라고 쓸 수 있는지 물으면,

현재는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다이니까, 현재나 과거에 한정하지 않고, 그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청되었습니다.

필자는 그 잡지의 기사 게재를 거절했습니다.


다른 잡지의 편집부로부터도 같은 지적을 받았던 적이 있어,

이 편집부와는 한국형 `앵쟁네 후의 이야기로는 「한국인」을 사용해,

그 이전으로는 「한국인」을 사용해도 좋다고 하는 것으로 타협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부의 미디어에서는, 「한국인」이라고 하는 말은 금기 워드로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차별어라고 파악하는 사람은 「한국인」의 말에 부의 이미지를 마음대로 연상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한국인」에 부의 의미는 없고, 그것은 민족의 이름을 순수하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을 차별어로 하는 「폴리 코레 의식」개소화역차별입니다.


「한국인」외에, 「반도인」이라고 하는 말투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모두가 차별이라고는 말하지 않아도, 무엇인가의 은어와 같은 영향이 있다일지도 모릅니다.

「조선」이라고 하는 지역명이 있다의에, 그것을 일부러 「반도」라고 해 나타내려고 하는 작위를 느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인 자신, 역사적으로 「조선」의 호칭을 자랑으로 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이씨 왕조는 「조선」을 「자오양의 선명한 곳」, 즉 「동방의 지역」이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인은 동방의 중동 지역을 「오리엔트(일이 오르는 분)」라고 불렀습니다만, 이것과 잘 닮아?`「.


한국인 자신이 이와 같이 해석을 하고, 「조선」을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조선」이나 「한국인」이 차별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국호에 「조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세멘시나」를 사용하지 말아라 라고 요청했습니다만, 북한이나 한국이 「조선」을 사용하지 말아라 라고 요청했던 적은 없습니다.


「조선」은 원래 국호는 아니었던

결코 「자오양의 선명한 곳」은 아니었다

「조선」을 최초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인으로,

그들은 실은 「조선」을 「자오양의 선명한 곳」이라고 하는 의미로 이용한 것은 아닙니다.

락랑군 부근을 흐르는 강(어느 강인가 불명하지만,

대동강의 가능성 있어)은 「습수」, 「산수」, 혹은 「조산」이라고 불리고 있어

이러한 강의 읽기음이 「조선」으로 변했다고 여겨집니다.

「자오양의 선명한 곳」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마음대로 그처럼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인이, 「공물이 적은 나라」라고 하는 의미로,

「조공선소」라고 한 것으로부터, 「조선」이 되었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만,

유석에?`아는 부록의 도리지요.

「조선」이 언제부터 사용되게 되었는지,

분명히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기원 전 1 세기 초두, 사마천에 의해서 쓰여진 「사기」에는,

「조선」이라고 하는 기술을 볼 수 있어 요즘에는, 중국에서는 「조선」의 호칭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이나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보급한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이 낡은 호칭에 눈을 붙인 것이, 14 세기말의 정도전(정·드젼)이라고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이 왕조의 건국자 이성계(이·손게)의 참모였습니다.

쿠데타에 의해서, 실권을 잡은 이성계는 고려 왕가를 도로부터 추방해, 1392년에 스스로 왕위에 듭니다.

이성계는 고려에 대신하는 새로운 왕조명을 정하기 위해, 상국으로 우러러보는 중국의 명에 사자를 보내, 왕조명을 하사해 주었으면 한다고 의뢰했습니다.

그 때, 「조선」과「화녕」의 두 개의 안을 명에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미 잊어 떠나지고 있던 「조선」의 호칭을 안으로서 꺼낸 것이 정도전이었습니다.

덧붙여서 「화녕」은 이성계의 천으로, 현재의 북한 토호쿠부의 함경남도의 콘노군에서 일찌기 료고군으로 불리고 있던 것을 가리킵니다.

「화녕」은 본명안의 「조선」에 대한 대항마 후보의 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명의 코 타케시제는 「조선」을 사용하도록, 소식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내려진 「조선」은 국호가 아닙니다.

이 왕조는 명에 번 속하고 있어 조선왕은 명의 1 제후왕에게 지나지 않고,

그 영토도 명의 제국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주권을 가진 나라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어디까지나 지역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서 명이 하사 한 것입니다.


「조선」의 시작

사서에 등장하는 조선의 시작은 미자 조선으로 여겨집니다.

기원 전 12 세기무렵, 중국인의 미자가 건국해, 도는 왕험성(현재의 평양)에 놓여졌습니다.

「사기」나 「한서」에는, 미자가 중국의 은나라 왕조의 왕족으로,

은나라의 멸망 후, 은나라의 유민을 인솔하고, 조선에 망명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미자는 중국의 문화나 기술을 조선에 반입해, 선정을 깔아, 조선을 자주(잘) 통치한 것 같습니다.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기원 전 11 세기무렵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중국 님 식의 출토물이 많이 나오고 있어

이 시대에, 중국으로부터의 대규모 이민이 있던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로부터, 오늘의 학계에서는, 미자조초`N가 실재한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지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도 그것을 증명하는 사적이 부족하고, 실재가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 이후, 중국 문화를 우러러보는 조선 왕조는 미자를 성인화해,

조선의 시조로 하는 것으로, 중국과 일체화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문명」의 일원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미자능등이 활발히 건설되어 미자가 각지에 모셔졌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이나 북한은 일전하고, 미자 조선을 중국측의 「만들어낸 이야기」로서 부정하고 있습니다.

민족 의식을 고양시키는 관점으로부터, 중국인 기원의 미자 조선은 사정이 좋지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산들, 그것까지 미자를 들어 올려 두면서, 실로 넉살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대신에, 단군 조선이 정식적 조선의 기원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단군은 천신의 아이이며, 기원 전 2333년, 평양성에서 조선을 건국했다고 여겨집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술되고 있습니다만, 「삼국유사」는 마사시의 「삼국사기」(1145년 완성)로부터 넘쳐 흐름 떨어진 설화집입니다.

한국인의 시조로 여겨지는 단군은 민간으로 신앙되어 온 전설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한국의 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역사전`I사실」이라고 가르칠 수 있어 미자 조선이 「전설」이라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또, 「조선」의 호칭을 최초로 이용한 것은 단군이며,

한국인은 이 시대부터 스스로를 「조선」이라고 부르고 있어 단군 이래의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해,

민족의 자랑으로 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미자 조선에 이어, 기원 전 195년경, 위씨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도는 미자 조선과 같이, 왕험성(현재의 평양)에 놓여졌습니다.

역시, 이 위씨도 또, 중국인입니다.

이와 같이 중국인의 지배자가 계속 되는 것은 한국인에,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이나 노하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씨 조선은 제비의 출신의 무장 위만에 의해서 건국됩니다.

제비는 현재의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동북부의 지역입니다.

유방의 전한왕조의 성립에 수반해, 전한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제비의 사람들을,

위만이 인솔해 조선에 망명해, 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위만의 군대는 철제의 무기로 무장해, 뛰어난 기능과 통제를 겸비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인은 거의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고도의 붐메이를 껴안고 있던 중국인에게 있어서, 한국인을 굴복 시키는 것은 용이한 일이었습니다.

미자 조선의 실재가 아직도 확정 되어 있지 않은데 대해, 위씨 조선의 실재는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현재의 한국은 중국인 기원의 미자 조선을 부정해도, 같은 중국인 기원의 위씨 조선을 부정하지 못하고,

중국인이 고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는 실태를 결국, 덮어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찌기, 위만이 한국인이다고 하는 무리하게인 도리를 꾸며내고 있었습니다.

위만이 조선에 들어갔을 때, 곡을 두레, 조선의 옷을 입고 있던 것으로부터, 위만을 한국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어

한국인인 위만이 중국의 제비에게 체재해, 조선에 돌아오고 나라를 만들었다고 설명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학교에서도, 1990년대까지 그처럼 배우고 있었습니다.


식민지로 할 정도의 가치는 없었던

위씨 조선은 기원 전 108년, 전한의 무제에 의해서 멸해집니다.

이것에 의해, 한반도의 대부분이 중국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무제는 정복한 땅을 4개로 나누어 락랑군등의 한사군을 설치해, 조선을 중국의 일부에 짜넣습니다.

이것이 중국 왕조의 조선 지배의 시작이 됩니다.

락랑군은 평양에 놓여져 있었다고 보는 설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습니다만,

다른 3군에 무심코 (이)라고의 사서의 기술이 부족하고,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

그 상세를 분명히 알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학자의 일부는, 한사군이 랴오둥(현재의 중국 랴오닝성)에 설치된 것으로,

한반도에 설치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중국의 조선 지배를 부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한왕조는 한사군을 두어, 조선을 영토의 일부에 짜넣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실질적인 지배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의문입니다.

이 시대, 조선은 중국의 변경의 끝의 땅에서, 인구도 적고, 빈약한 생산력 밖에 없었습니다.

전한이 이러한 황량한 지역을 감히 예산을 투자하고, 통치할 필요같은 건 없었었지요.

전한의 무제는 북방의 흉노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북쪽의 변경에, 강대한 이민족이 존재했던 것에 부수 하고,

각방면의 변경에, 이민족의 위협이 존재할지라고 하는 안전보장상의 관심이 많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관심 위에, 락랑군등의 한사군이 놓여져

그것들이 통치 기능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정찰 기능을 일하게 해 변경의 정세를 중앙에 가져오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조선은 전한에  (이)라고, 식민지로 할 정도의 가치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실정이지요.

후의 중국 왕조, 당·원·아키라·키요시가 조선을 예속 시키고, 철저하게 착취합니다만,

전한시대의 조선은 원시적으로 늦어 착취해야할 것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무제의 사후 이미, 기원 전 82년에,

진번군과 림둔군을 중지해, 기원 전 75년에, 현토군을 서쪽으로 옮겨, 조선에 락랑군만을 남깁니다.

즉, 당시의 조선이 통치 할 만하는 토지는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학자가 필사적으로, 중국의 조선 지배를 부정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朝鮮」はもともと国号ではなかった

「朝鮮人」は差別語ではない

文在寅前大統領は「朝鮮民族の統一」を政策の最優先課題に掲げ、

北朝鮮との融和を進めましたが、失敗しました。

尹錫悦新大統領は「北をなだめる時代は終わった」と発言し、前政権の民族融和政策とは一線を画すとしています。


韓国の人々や北朝鮮の人々を総称する時には、「朝鮮人」を使います。

しかし、「朝鮮人」という言い方は差別的なので使わないで頂きたいと、

私はある雑誌の編集部から原稿校正を入れられたことがあります。

「朝鮮人」と言わずして、何と言うのかとその編集部に尋ねたところ、「韓国人」と言うべきだというのです。


1948年以前に韓国などという国は無かったのに、

どうして、それを「韓国人」と書くことができるのかと問うと、

現在は韓国という国があるのだから、現在や過去に限らず、その名称を使うべきだと強く要請されました。

筆者はその雑誌の記事掲載を断りました。


別の雑誌の編集部からも同じ指摘を受けたことがあり、

この編集部とは韓国建国以後の話では「韓国人」を使い、

それ以前では「朝鮮人」を使ってよいということで折り合いがつきました。

どうやら、一部のメディアでは、「朝鮮人」という言葉は禁忌ワードとして認識されているようです。


これを差別語と捉える人は「朝鮮人」の言葉に負のイメージを勝手に連想させているだけのことです。

「朝鮮人」に負の意味はなく、それは民族の名を純粋に表す言葉です。

これを差別語とする「ポリコレ意識」こそが逆差別です。


「朝鮮人」の他に、「半島人」という言い方もありますが、

これは全てが差別とは言わないまでも、何かの隠語のような響き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

「朝鮮」という地域名があるのに、それをわざわざ「半島」と言い表そうとする作為を感ぜずにはいられないからです。


朝鮮人自身、歴史的に「朝鮮」の呼称を誇りにしていたようです。

李氏王朝は「朝鮮」を「朝陽の鮮やかなるところ」、つまり「東方の地域」という意味で解釈していました。

ヨーロッパ人は東方の中東地域を「オリエント(日が昇る方)」と呼びましたが、これとよく似ています。


朝鮮人自身がこのように解釈をして、「朝鮮」を用いていたのですから、

「朝鮮」や「朝鮮人」が差別語ということはないのです。

現に、北朝鮮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と、国号に「朝鮮」を使っています。


中国は「シナ」を使うなと要請しましたが、北朝鮮や韓国が「朝鮮」を使うなと要請したことはありません。


「朝鮮」はもともと国号ではなかった

決して「朝陽の鮮やかなるところ」ではなかった

「朝鮮」を最初に言いはじめたのは中国人で、

彼らは実は「朝鮮」を「朝陽の鮮やかなるところ」という意味で用いたのではありません。

楽浪郡付近を流れる川(どの川か不明だが、

大同江の可能性あり)は「湿水」、「汕水」、或いは「潮汕」と呼ばれており、

これらの川の読み音が「朝鮮」に転じたとされます。

「朝陽の鮮やかなるところ」というのは朝鮮人が勝手にそのように解釈したに過ぎないのです。

中国人が、「貢物が少ない国」という意味で、

「朝貢鮮少」としたことから、「朝鮮」となったという解釈もありますが、

流石にこれは後付けの理屈でしょう。

「朝鮮」がいつから使われるようになったのか、

はっきりとしていませんが、紀元前1世紀初頭、司馬遷によって書かれた『史記』には、

「朝鮮」という記述が見られ、この頃には、中国では「朝鮮」の呼称が既に使われていたのです。

しかし、「朝鮮」は中国や朝鮮で一般的に普及した呼称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この古い呼称に目を付けたのが、14世紀末の鄭道伝(チョン・ドジョン)という人物でした。

鄭道伝は李王朝の建国者の李成桂(イ・ソンゲ)の参謀でした。

クーデターによって、実権を握った李成桂は高麗王家を都から追放し、1392年に自ら王位に就きます。

李成桂は高麗に代わる新たな王朝名を定めるため、上国と崇める中国の明に使者を送り、王朝名を下賜して欲しいと依頼しました。

その際、「朝鮮」と「和寧」の二つの案を明に提案しています。

既に忘れ去られていた「朝鮮」の呼称を案として持ち出したのが鄭道伝でした。

因みに「和寧」は李成桂の生地で、現在の北朝鮮東北部の咸鏡南道の金野郡でかつて永興郡と呼ばれていたところを指します。

「和寧」は本命案の「朝鮮」に対する当て馬候補の案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

結局、明の洪武帝は「朝鮮」を使うよう、沙汰を下しました。

しかし、この時に下された「朝鮮」は国号ではありません。

李王朝は明に藩属しており、朝鮮王は明の一諸侯王に過ぎず、

その領土も明の帝国の一部に過ぎず、主権を持った国ではなかったからです。

「朝鮮」はあくまでも地域を表す名として、明が下賜したものなのです。


「朝鮮」のはじまり

史書に登場する朝鮮のはじまりは箕子朝鮮とされます。

紀元前12世紀頃、中国人の箕子が建国し、都は王険城(現在の平壌)に置かれました。

『史記』や『漢書』には、箕子が中国の殷王朝の王族で、

殷の滅亡後、殷の遺民を率いて、朝鮮に亡命したと記されています。

箕子は中国の文化や技術を朝鮮に持ち込み、善政を敷き、朝鮮をよく統治したようです。

朝鮮半島西北部を中心に、紀元前11世紀頃のものと思われる中国様式の出土物が多く出ており、

この時代に、中国からの大規模な移民があったことを示しています。

こうしたことから、今日の学界では、箕子朝鮮が実在した可能性が高いと見られています。

ただし、未だそれを裏付ける史跡が乏しく、実在が確定され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中世以降、中国文化を崇める朝鮮王朝は箕子を聖人化し、

朝鮮の始祖とすることで、中国と一体化し、中国を中心とする「中華文明」の一員になろうとしました。

そのため、箕子陵などが盛んに建設され、箕子が各地に祀られました。

しかし、現在の韓国や北朝鮮は一転して、箕子朝鮮を中国側の「作り話」として否定しています。

民族意識を高揚させる観点から、中国人起源の箕子朝鮮は都合の悪い存在になったのです。

散々、それまで箕子を持ち上げておきながら、実に虫のいい話です。

彼らは代わりに、檀君朝鮮が正式な朝鮮の起源であると主張しています。

檀君は天神の子であり、紀元前2333年、平壌城で朝鮮を建国したとされます。

この話は『三国遺事』に記述されていますが、『三国遺事』は正史の『三国史記』(1145年完成)からこぼれ落ちた説話集です。

朝鮮人の始祖とされる檀君は民間で信仰されてきた伝説に過ぎませんが、

韓国の学校の歴史教科書では、「歴史的事実」と教えられ、箕子朝鮮が「伝説」と教えられます。

また、「朝鮮」の呼称を最初に用いたのは壇君であり、

朝鮮人はこの時代から自らを「朝鮮」と呼んでおり、壇君以来の古朝鮮の伝統を受け継ぎ、

民族の誇り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ったことが教えられます。

箕子朝鮮に続き、紀元前195年頃、衛氏朝鮮が建国されました。

都は箕子朝鮮と同じく、王険城(現在の平壌)に置かれました。

やはり、この衛氏もまた、中国人です。

このように中国人の支配者が続くのは朝鮮人に、国を運営する能力やノウハウがなかったからです。

衛氏朝鮮は燕の出身の武将の衛満によって建国されます。

燕は現在の北京を中心とする中国東北部の地域です。

劉邦の前漢王朝の成立に伴い、前漢勢力と対立していた燕の人々を、

衛満が率いて朝鮮に亡命し、国を建国したのです。

衛満の軍隊は鉄製の武器で武装し、優れた機能と統制を兼ね備えていたので、朝鮮人はほとんど抵抗できませんでした。

高度な文明を擁していた中国人にとって、朝鮮人を屈服させるのは容易なことでした。

箕子朝鮮の実在が未だ確定されていないのに対し、衛氏朝鮮の実在は確定されています。

そのため、現在の韓国は中国人起源の箕子朝鮮を否定しても、同じく中国人起源の衛氏朝鮮を否定できず、

中国人が古朝鮮を支配していたという実態を結局、覆い隠すことができません。

それでも、かつて、衛満が朝鮮人であるという無理矢理な理屈をでっち上げていました。

衛満が朝鮮に入った時、髷を結い、朝鮮の服を着ていたことから、衛満を朝鮮人と推定でき、

朝鮮人である衛満が中国の燕に滞在し、朝鮮に帰って来て国をつくったと説明されていました。

韓国の学校でも、1990年代までそのように教えられていました。


植民地にするほどの価値はなかった

衛氏朝鮮は紀元前108年、前漢の武帝によって滅ぼされます。

これにより、朝鮮半島の大部分が中国王朝の支配下に入ることになります。

武帝は征服した地を4つに分け、楽浪郡などの漢四郡を設置し、朝鮮を中国の一部に組み込みます。

これが中国王朝の朝鮮支配のはじまりとなります。

楽浪郡は平壌に置かれていたと見る説がほぼ確実視されていますが、

他の三郡についての史書の記述が乏しく、具体的にどこを指すのか、

その詳細がはっきりとわかっていません。

韓国の学者の一部は、漢四郡が遼東(現在の中国遼寧省)に設置されたもので、

朝鮮半島に設置されたものではないと主張しています。

あくまで、中国の朝鮮支配を否定し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

前漢王朝は漢四郡を置き、朝鮮を領土の一部に組み込みました。

ただし、それが実質的な支配と言えるかどうかは疑問です。

この時代、朝鮮は中国の辺境の果ての地で、人口も少なく、貧弱な生産力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

前漢がこのような荒涼とした地域を敢えて予算を投じて、統治する必要などなかったでしょう。

前漢の武帝は北方の匈奴と戦っていました。

北の辺境に、強大な異民族が存在したことに付随して、

各方面の辺境に、異民族の脅威が存在するかどうかという安全保障上の関心が大いにあったと思われます。

この関心の上に、楽浪郡などの漢四郡が置かれ、

それらが統治機能というよりはむしろ、偵察機能を働かせ、辺境の情勢を中央にもたらしていたと考えられます。

当時の朝鮮は前漢にとって、植民地にするほどの価値もなかったというのが実情でしょう。

後の中国王朝、唐・元・明・清が朝鮮を隷属させて、徹底的に搾取しますが、

前漢時代の朝鮮は原始的で遅れており、搾取すべきものさえなかったのです。

その証拠に、武帝の死後早くも、紀元前82年に、

真番郡と臨屯郡を廃し、紀元前75年に、玄菟郡を西に移し、朝鮮に楽浪郡だけを残します。

つまり、当時の朝鮮が統治するに足りる土地ではなかった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ます。

韓国の学者が必死になって、中国の朝鮮支配を否定するまでもない話であったと言え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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